브니엘신학교 구원론에서 배운 것들
나는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여 한 해 동안 신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구원론 과목(최덕성 교수 담당)에서 개혁주의 구원론의 기본 구도와 구원의 서정 그리고 여러 가지 신학 용어들의 개념을 정리하는 배움을 얻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지만, 짧은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여러 언설 속에서도 뭔가 부족하고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 이는 바른 교리에 대한 지식의 부재에서 온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정확히 알기를 소망한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1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가르침의 순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나는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지식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하신 조성자로 인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라고 말한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의 해방과 영생의 선물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계획’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순차적인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적용하신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한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사역을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적용시키시며 그 순서를 ‘구원의 서정’이라고 한다. 이에 따른 단계에 따라 질문을 제기하며 답을 찾아보고, 나는 이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알고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기를 소망하며 또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하려 한다.
1. ‘소명’이란 어떤 의미인가?
브니엘신학교에서 자주 듣는 ‘소명’은 일반소명과 특별소명을 하나님이 구원으로 부르시는 한 부르심의 두 측면이라 생각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일반소명은 전해진 말씀을 통한 복음의 차별 없는 제공이며(사 45:22; 요 7:37), 반면, 특별소명은 심령에 미치는 성령의 은밀한 사역으로 일어난다(롬 1:6-7; 고전 1:9, 26; 벧전 2:9). 요컨대 성령의 효력 있는 부르심은 죄인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새로운 소망과 갈급함을 불러일으킨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혼인잔치비유(마 22:1-14)와 루디아가 구원 얻는 믿음의 부르심에 마음을 연 일에 대한 성경의 설명(행 16:14)에서 두 가지 소명에 대한 근거를 찾는다. 특별소명은 일반소명에 바탕을 두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부지런히 복음을 세상 만민에게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성령을 통해 전해진 말씀을 들은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되살아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을 효력 있게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들 속에 믿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일으키신다.
존 칼빈(John Calvin)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영적인 시각 상실 때문에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전 2:9-10, 14, 16; 요 6:44). 또한 그는 혼인잔치비유(마 22:2-14)와 특히 예수님의 말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이 외적인 말씀 전파를 통해 만인을 똑같이 자신에게로 초대하시는 일반소명이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소명은 특별소명인데, 이는 하나님이 주로 신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으로서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그들의 심령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역을 하시는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각 사람의 삶에 따라 다르다.
2. 중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루이스(C. S. Lewis)에 의하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생명-비오스(bios) 곧 산소, 물, 음식으로 유지되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자연적 존재를 넘어 조에(zoe) 곧 영원히 지속되는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갖게 된다고 한다.
거듭남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언약적 관점의 선구자인 존 칼빈은 거듭남, 회개, 성화를 포함한 영적인 소생의 전 과정을 ‘중생’이라고 폭넓게 정의한다. “중생은 세례에서 시작되지만, 한순간이나 하루 혹은 일 년 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생은 계속적이며, 때로는 느리기까지 한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
중생의 은혜 없이는 죄인은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렘 13:23). ‘한번 태어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을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성경은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3. 회개란 무슨 뜻인가?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오늘날의 시대는 반드시 회개하여야만 한다.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선한 생각도 회개가 아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낮아짐’이다(레 26:41). 영적회심이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 자아와 사탄에서 하나님께로 결정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헬라어 에피스트레포(epistrepho, ‘돌아서다’, ‘돌아오다’)는 히브리어 슈브(shub)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방향 전환’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동사는 죄에서 하나님에게로의 영적인 전환이라는 의미로 몇 차례 등장한다. 이 말의 강조점은 사람의 ‘생활방식의 변화’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란 악한 생활방식에서(고후 12:21) 주님께로(고후 3:16) 돌아와 온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적 회개의 가장 중요한 예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이다.
4.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령에 사로잡힌바 된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며, 그 확실한 근거를 깨닫고, 응답해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믿는다’라는 말로 번역된 곳은 247군데 있다. 이와 유사한 단어인 ‘믿음’으로는 244회 번역되었다. 반면, 단순히 믿음으로 가득 찬 것을 뜻하는 ‘충성된’ ‘신실한’ ‘충실한’이라는 말은 67회 나온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처음부터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를 고려하는 것과 관련된다.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 아래서든 간에 이러한 ‘믿음’은 필수적이다(막 16:16; 롬 14:23; 히 3:19; 11:6; 계 21:8).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 중의 하나가 자신의 손 안에 있지 않을 때라도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눅 5:18-20, 요 4:46-53; 히 11:11-13; 사 11:2; 26:3).
5.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는 죄 사함과 교제의 회복, 하나님의 자녀 됨과 영생의 선물 등 다른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과도 관계된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다른 구원론 교리들의 구심점이다. 칭의가 놓여 있는 배경은 죄짓고, 정죄 받아 하나님과 멀어진 타락한 상태의 인류이다. 칭의의 근거는 죄인을 대신해 그 죄과를 지고, 죄에 합당한 형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있다. 칭의의 실행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속죄를 택함 받고, 특별히 사랑받는 죄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칭의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이 성화되고, 끝까지 보존되는 것이다. 칭의의 완성은 모든 시대의 의인이 변화된 육체로 부활하여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경험할 때에 완성된다.
존 칼빈은 칭의를 “구원의 전 교리의 원리이자 모든 신앙의 기초”로 간주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을 근거로 “성화에 참예한 자가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고 논하였다. 이는 어떤 죄인도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순종을 입증하며 하늘에 상급을 쌓는 행위인 신자의 행위를 의롭다고 말씀하신다.
6. 양자됨은 어떤 개념인가?
신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기 때문에 양자론에 관한 신학서적이 거의 없다. 양자의 영이신 그분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갈구한다면, 양자에 관한 영광스러운 존엄성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양자결연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로 오신 것은 인간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존엄한 상태로 양자 삼으셨고(사 43:4; 출19:5; 말 3:17; 히 12:23), ‘천사들의 호위’를 받도록 하신다(히 1:4). 또 다른 특권은 ‘악으로부터 보호 받는다’(눅 10:19; 시 91: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에게 고통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죄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양자가 되었기에 정죄함도 없어진다. (롬 8:1).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고통을 짊어진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로 우리들을 깨끗케 하셨으며, ‘아버지’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예’와 ‘존엄성’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가장 큰 특권을 주셨다(요 1:12).
7. 성화란 무엇인가?
칭의와 성화의 긴밀한 관계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들을 단지 의롭다고 선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통해 그들을 실제로 의롭게 만드신다. ‘거듭남’을 통해 죄인들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은(벧전 1:3, 23) 신실하게 그들을 그 아들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이 용서받은 죄인 안에 당신의 원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화’ ‘삶의 거룩’ ‘도덕적 완전함’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참된 신자 안에는 ‘죄악 된 본성’과 ‘성령’이 서로 싸우며, 상대방이 역사하는 것을 서로 방해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는 갈라디아서 5장 17절 말씀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건한 노력’(벧후 1:5-7)과 ‘싸움’(히 12:14)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법과 죄의 법 사이의 이런 긴장(롬 7:23)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살아있는 한 계속 남아있다.
성화는 이 땅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벽히 닮는다는 목표는 재림과 부활 때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살전 3:12-13; 5:23; 요일 3: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요 15:4, 7),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행하며(요일 1:7),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굳게 붙잡고(계 2:25; 3:11), 죄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며(요일 3:3),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수하고(요 14:23; 15:7), 섭리적 연단에 복종함으로써(요 15:2) 점점 더 성화된다.
8. 성도의 견인이란 무엇인가?
구원의 과정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존하심과 인간의 믿음 안에서의 오래 참음과도 관련 있다. 견인의 교리는 신자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원이 완성되기까지의 변화과정을 구성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거듭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도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고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모든 참된 신자를 자발적으로 끝까지 인내하게 하심으로써 성령을 통해 그들의 최종적 구원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요 6:39-40), 하나님의 은혜와 불변성과 능력과 신실하심의 완전성(벧전 1:5; 벧후 1:3),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요 6:37; 10:28-29; 고전 1:8; 빌 1:6), 주님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요 17:9, 11, 15; 롬 8:34; 히 7:25), 이 모두는 참된 신자의 견인을 보증한다.
성도의 최종적인 운명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 과정에서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은 나름대로 ‘믿음’을 유지하고(골 1:23; 히 3:14), 죄를 버리며(갈 5:24), 거룩을 추구하고(히 12:14), 고난을 견디며(히 12:7), 쉬지 않고 기도한다(살전 5:17). 참된 그리스도인이 믿음이 약해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인내와 은혜로 다루신다. 참된 신자의 안전은 하나님께 힘입은 ‘인내’에 달려있다.
9. 영화는 무엇인가?
영화는 구속 적용의 최후 국면이며, 구속과정의 완성이다. 영화는 부르심으로 시작된 그 과정을 종결케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혼과 육체가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구속의 최종완성’을 의미한다. 장래의 ‘영광’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다. ‘영광,’ ‘광채,’ ‘아름다움’은 히브리어 카보드(kabod, ‘무거움’, ‘무게’)의 확장된 의미이다. ‘영광’이란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의 탁월함을 의미한다(사 6:3; 히 1:3; 벧후 1:17).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신자들이 역사가 끝나는 어느 날, 인간이 타락한 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에 온전히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장래에 만물이 새롭게 되는 일을 고대한다(계 21:5). 천성을 향하는 순례자들은 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으로 부르심을 받아 어둠 속에서 나왔다(행 26:18; 벧전 2:9).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하늘의 도성(계 21:23-24)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빚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세에서 인격적인 완성(요일 3:2-3)과 우주적인 만물의 완성(행 3:21)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에는 ‘이미’ 이루어진 측면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리스도는 새 시대를 여셨지만, 새 시대는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다. 창세전에 시작된 구속의 과정은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일과 더불어 시작되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완성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온전히 드러난다.
맺음말
개혁주의 신학은 구원의 서정을 소명(롬 8;30), 중생(요 3:3-5), 회심(요일 3:9), 신앙(롬 1:17), 칭의(롬 8:30), 양자(요 1:12), 성화(롬 8:30), 성도의 견인(딤후 4:18), 영화(롬 8:30)로 요약한다. 그 중의 ‘소명,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는 과거, ‘성화, 성도의 견인’은 현재, 그리고 ‘영화’는 미래에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미리 정하셨고 그들을 부르셨으며 부르신 이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우리의 의와 구원에 대한 완전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라는 좋은 소식인 ‘복음’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믿음’을 두어선 안 된다.
복음이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라고 말하듯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을 말해야 한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삼위의 구원사역으로 성부께서는 뜻을 세우시고, 성자께서는 그 뜻을 실행하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뜻을 적용하신다고 정의하듯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성경적 복음과 바른 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과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 구원의 과정에서 복음의 삶이 없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되돌리려고 애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은혜는 성경의 메시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지금도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화적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다. 이 말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는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까지 포함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자세히 가르쳐준다.
"구원론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최덕성 교수님은 이 질문을 몇 차례 하셨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실체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며 복음전도로 영혼구원 곧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려 함이다.
나는 브니엘신학교에서 구원론의 핵심인 ‘구원의 서정’의 논리적 단계의 내용들을 이처럼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배움을 얻었다. 배움이란 이처럼 놀라운 지적, 영적 학습 과정이다. 구원론 강의는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맘껏 전하고저 하는 갈망을 가지게 되었다. 구원론 지식이 나의 복음전도 활동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 사역의 기초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혜숙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2019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