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에 출간된 성서조선 영인본. (출처: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김교신 유감
희년사회 (페이스북, 2019.3.21.)
나는 김교신을 존경한다. 그러나 김교신에 대해 꼭 할 말이 있다. 1938년말에, 조선총독부가 『성서조선』에 일왕(日王) 히로히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皇?臣民ノ誓詞”와 “戰勝의 新年을 마지면서”를 수록하지 않는 한 『성서조선』을 폐간하겠다고 통지했을 때, 김교신은 차라리 『성서조선』을 폐간할지언정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을 기도하고 고민하고 지인들의 조언을 구한 후에, 『성서조선』을 계속 간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김교신의 고뇌에 연민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교신이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구나 『성서조선』이라는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이름들이 적힌 표지의 안쪽 면 첫 페이지에 감히 어떻게 “皇?臣民ノ誓詞”와 “戰勝의 新年을 마지면서”라는 더러운 글들을 수록할 수 있단 말인가! 아래에 그 부끄러운 기록을 그대로 기재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김교신은 평생토록 성서를 연구하고 글을 써서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쳐온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신앙 양심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고 만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그 오점 때문에 순결했던 『성서조선』은 더러워지고 말았다. 그 살아있던 정신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 대가로 『성서조선』이 폐간을 당했더라면, 『성서조선』은 그 폐간으로 말미암아 더욱 찬연히 빛나게 되었을 것이며, 후세에 그 불굴의 정신을 전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교신의 결정은, 당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자행한 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이 그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자 허락하신 마지막 시험에서 김교신은 낙제하고 말았다.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성서조선』은 그에게 우상이 되고 말았음을 그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평생토록 붙들었던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가 만든 『성서조선』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다.
마지막 순간, 죽임을 당해야 할 때 수치스럽게도 목숨을 구걸하여 연명함으로써 평생의 지조를 더럽히고 마는 일이 어디 『성서조선』뿐이랴. 김교신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차라리 폐간을 당할지언정, 차라리 폐교를 당할지언정,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그 목숨을 구차하게 부지하고자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에 거리끼는 어리석은 선택은 결코 하지 말자. 그것이 영원을 바라보고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실존이리라. - 박창수 희년사회 연구위원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聖書朝鮮』 1939년 1월호
표지 안쪽
상단: 일왕(日王)의 궁성 사진
하단 우측:
皇?臣民ノ
誓詞
一、我等ハ皇國臣民ナリ、忠誠以テ君國ニ報ゼン。
二、我等皇國臣民ハ互ニ信愛協力シ、以テ團結ヲ固クセン。
三、我等皇國臣民ハ忍苦鍛?力ヲ養イ以テ皇道ヲ宣揚セン。
한글 번역:
황국신민서사(황국 신민의 맹세)
하나,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둘,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셋,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하단 좌측:
戰勝의 新年을 마지면서戰勝의 第三年의 新年을 마지하며 世界의 平和와 東亞의 永遠한 安定을 爲하야 第一線에서 奮戰하는 皇軍의 健鬪와 萬福을 謹祝하는 同時에 皇軍의 武運長久와 皇威의 宣揚을 아울너 祈願하며 銃後의 臣民으로서 現下의 時局을 再認識할뿐안이라 傳道報國과 文筆報國으로써 우리의 義務를 다하기를 誓願하는 바이다.
한글:
전승의 신년을 마지면서 전승의 제삼년의 신년을 마지하며 세계의 평화와 동아의 영원한 안정을 위하야 제일선에서 분전하는 황군의 건투와 만복을 근축하는 동시에 황군의 무운장구와 황위의 선양을 아울러 기원하며 총후의 신민으로서 현하의 시국을 재인식할뿐 안이라 전도보국과 문필보국으로써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를 서원하는 바이다.
이봄, 김교신을 기억하며
류대영(한동대 교수, 역사학) 의 글 (2019. 3. 20.)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는 올해 2월 「성서조선」 영인본을 다시 출간했다. 일본강점기인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발행되었던 「성서조선」이 다시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전집간행위원회가 수집·정리한 「성서조선」을 영인하여 CD에 수록하기도 했고, 김교신의 글만 편집하여 전집 형태로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함석헌이 「성서조선」에 수록했던 자신의 글 일부를 묶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영인본은 「성서조선」 전체를 7권의 책으로 묶었다는 것과, 4,400여 개의 표제어를 수록한 색인집을 따로 펴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색인집은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성서조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가 김교신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성서조선」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한국인 제자 6명이 동인지 형식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동발행이었지만 1930년 5월부터는 김교신이 주필 자격으로 혼자 발행했다. 이때부터 폐간당할 때까지 「성서조선」은 사실상 김교신의 개인잡지였다. 물론 「성서조선」에는 김교신 이외에 여러 필자들의 글이 실렸다. 앞서 언급한 함석헌이 대표적이고, 그 이외에 송두용 등 다른 동인들과 유영모, 조성지, 이찬갑 등 독자들도 글을 게재했다. 그러나 김교신의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노평구가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글을 묶어 7권의 『김교신 전집』으로 펴낸 것을 보면 김교신과 「성서조선」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김교신에게 「성서조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교신 전집』은 한문을 한글로 표기하고 어려운 한자어를 풀어 설명하여, 일반 독자들이 김교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통로가 되고 있다. 『김교신 전집』 이외에도 김교신의 글을 일기, 설교, 수필 등 특정한 주제로 묶은 책들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이처럼 김교신 저술이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김교신은 시간이 갈수록 조명 받는 사람이다. 그동안 김정환, 서정민, 양현혜 등이 쓴 전기가 나왔으며,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다양한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교신 관련 강연회에는 요즘 기독교계 학술 모임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기현상도 나타난다. 2010년대는 가히 ‘김교신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김교신은 많은 연구자와 젊은 기독교인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 주류로부터 배척당했던 김교신이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먼저, 김교신은 일본강점 아래서 끝까지 민족적 지조를 지키다가 수난을 당한 사람이다. 일본강점 말기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부일(附日)의 길을 걸었다. 이에 비해서, 「성서조선」은 시종일관 민족과 성서에 대한 사랑을 결합시키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따라서 「성서조선」은 당국의 감시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글을 싣지 못하거나 아예 결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십자가 신앙을 견지했던 김교신이 국가유공자가 되어 국립현충원에 영면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든 연결해보려는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둘째, 김교신의 삶과 사상이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이다. 김교신은 ‘복음적 유자(儒者)’였다. 그가 철저한 기독교인이되 또한 철저한 유자라는 독특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 공자를 삶의 모범으로 삼고, 유교적 수신을 통해 공자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사람이다. 유교적 수신과 경전공부를 통해 그는 극히 절제된 삶의 태도, 구도자적 자세, 목숨을 바쳐 공부하려는 각오, 옳은 것을 위해서라면 삶을 담보하는 용기 등을 체득했다. 그와 같은 선비적 태도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제자와 지인 등 김교신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술을 통해 그를 뒤늦게 만나는 오늘의 우리도 그의 그런 모습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태도와 가치관은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김교신은 스승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한국(민족)적이고 유교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본적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라는 바탕이 있었지만, 또한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요소가 녹아 있는 독특함이 있었다. 이와 같은 독특함은 ‘한국적 기독교’를 찾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서조선」창간 동인 6인.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1927년 2월 촬영.(출처: <김교신 전집>)
김교신은 봄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다. 「성서조선」 폐간과 그와 지인들이 당한 감옥살이의 단초가 된 그의 권두언 “조와(吊蛙)”가 「성서조선」에 게재된 것이 1942년 3월이었다. 또한 그가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한국인 노무자 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한 것이 1945년 4월이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 이후 일흔네 번째 봄을 맞고 있다.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출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