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형 학자와 글쓰기
최덕성 교수의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을 읽고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는 대한민국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새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인 2000년 2월 발간됐다. 대학과 대학원 학생들이 꼭 통과해야 할 ‘관문’인 논문을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를,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논지를 ‘빛나게’, 논문쓰기를 ‘신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신학을 전공한 교수나 목회자 출신이 이러한 저작을 남긴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김기홍 목사가 쓴 <논문작성 이렇게 해라> 정도만 알고 있다.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로 16년간 재직하다 아름다운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했고, 2013년 조기 은퇴한 후 목회자 교육을 위한 ‘페이스목회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필자가 저자를 10년 가까이 알고 지내면서 관찰한 결과, 저자는 ‘노력형’ 보다는 ‘천재형’ 학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대와 교회의 주요 이슈들에 적극 발언하는 그의 기고문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저자의 관찰력에서 나오는 창의력, 패러독스(역설), 아이러니(반어)로 촘촘히 쌓인 논지구성과 이를 종합하는 ‘섹시한 글 솜씨’에 여러 차례 매료됐다.
저자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내용들을 유쾌 상쾌 통쾌하게 담아내는 달란트을 지니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끊임없는 학문탐구와 노력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함과 학문함에 있어 하늘이 그에게 주신 은사가 무척 커 보인다. 동료들의 시기 질투로 부딪침이 있었던 교수 사역 과정만 봐도 천재형들이 흔히 겪는 과정이지만, 그의 ‘천재성’은 머리말 ‘지각의 장을 넓혀야 관계지움이 가능해진다’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저자는 대학 시절 학교 성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특유의 암기식 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평이 허락되는 강의를 좋아해 대학생들에게 ‘필수’라 할 수 있는 강의를 받아적는 ‘필기’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료 학생들은 이를 말 그대로 ‘괴벽’이라 느낄 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학습 태도는 보통 ‘천재형’에게서 나오는 특성 아닌가.
저자는 강의를 들으면서 필기 대신, 강의를 귀담아 듣고, 핵심을 찾아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핵심 개념들을 상호 관련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 형태의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필자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보도 기사의 성패는 한 사건에서 핵심을 찾아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핵심 개념들을 상호 관련짓는 데서 좌우된다. 필자는 비록 논문을 쓴 적도 없고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지만, 이 책의 머리말을 보며 책 내용에 큰 기대를 갖게 됐다. 필자뿐 아니라, 이 책의 주 타깃인 대학생, 대학원생은 물론, 배움의 과정에 있는 초·중·고교생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의 이러한 ‘괴벽’이 상당히 괜찮은 학문탐구 방법임을 알게 된 것은 저자의 유학 시절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석·박사 과정 교육은 대부분 강의 내용과 필독서에 대한 분석과 비평 활동을 중시했다. 저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예일대학교, 리폼드신학대학원, 에모리대학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을 거쳤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객원교수(1997-1998)도 역임했다.
저자의 학습방법과 유학 시절 학교들의 교수방법이 들어맞았기에, 수업료와 생활비 장학금까지 제공받으며 정규과정 학업을 마무리하고 모교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저자는 적잖이 실망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여전히 받아 적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 문제 중 하나다.
저자는 이 거대해 보이는 벽을 정면 돌파해 나갔다.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무조건 외우려하기보다, 강의를 귀담아 듣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핵심을 파지(把知)하며, 상호 관련지어 한 줄로 꿰어보게 하면서, 비틀거려도 스스로 걷고 몇 마디를 써도 자기의 생각을 또렷이 제시하는 학생을 높이 평가했다. 이미 다가온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 맞는 인재를 양성해 왔다.
짧은 동영상이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시대 같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모든 것의 최종 결과물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다못해 요즘엔 동영상도 ‘자막’이 중요하다. 홍수 때 마실 물이 더욱 귀해지듯,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많은 텍스트가 범람하는 이 시대는 오히려 정말 필요한 텍스트, 같은 내용을 맛깔나게 요리한 텍스트를 더욱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폭행’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팩트’를 중시하다 보니, 정확한 용어로 사건들을 배치하여 논리적으로 구성해 표현해 내는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전 준비 과정인 학교에서 이러한 논리와 글쓰기를 충분히 배워야 할 것이다.
저자도 ‘쓰기’가 결국 모든 길의 종착점이라고 말한다. 예술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특히 인문·사회계 대학원의 학습은 시종 논술형 시험과 논문쓰기로 진행되고, 입학시험부터 학위청구논문에 이르기까지 논문쓰기로 시작해 논문쓰기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논문쓰기에 대해 “창의성, 합리성을 포함한 고급인지능력의 총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배양하고 계발시키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진 학문의 ‘종합비타민’”이라고 소개한다.
저자는 자신이 밟은 미국의 대학원들이 ‘논문쓰기 훈련소’라고 한다. 사물을 비평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며 감춰진 가정과 문제점을 찾아 발견하고 추적하도록 가르친다. 특히 세미나로 진행되는 박사과정은 정해진 시간 내에 주제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이 주 과업이다. 논지찾기, 논지설정, 논지진술, 논지확증, 논지입증 곧 논증방법을 배우고 주장의 옳고 그름과 정당성을 따지며 건전 타당한 판단을 내리는 법을 거듭 훈련한다.
이는 비단 학자 지망생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대학교육의 목적은 직업 생산력을 갖도록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려 깊고 탐구적이고 통찰력 있는 원숙한 인간과 유능한 시민을 만드는 데 있으므로, 최선의 대학교육은 학생들에게 백과사전적인 지식전달, 언어훈련,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은 ‘지식in’ 같은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위키피디아’ 같은 개방형 백과사전에 넘치고 넘친다. 저자는 과학도가 예술을 음미할 수 있고, 예술학도가 과학을 이해할 수 있고, 신학도가 학문을 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설파한다. 요즘 말로 하면 이종교배와 통섭의 ‘융합형 인재’를 양성한다.
이러한 인재상을 위해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서울: 지식산업사, 2006, 재판)는 논지 중심의 비평적 사고, 논지 찾기와 논지 설정, 그리고 논지 입증을 위한 논증방법 등에 초점을 두었다. 해석학적 특징을 고려한 독서법과 본문 생산 전략, 문장과 문단, 문체와 수사법 등을 포함시켜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의 ‘인증·참고 문헌목록 보기’는 최신 시카고 스타일(Turabian Manual, 제6판, 1996)을 알려준다. 당시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1960년대 시카고 문형을 따르고 있었지만, 1996년 개정판은 “인터넷 시대와 초고속 정보시대, 그리고 영상시대에 걸 맞는 인증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설명만으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적용 가능하다.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문서, 악보, 녹음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 연극과 그림 등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전해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부터 ‘책이 두꺼워진 이유’를 소개한다. 비평적 사고, 논증 방법, 논문 쓰기도 저자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보물섬>, <괴도 루팡>, <얄개전>, <오성과 한음>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를 자아내는 많은 비유와 예문,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삽화까지 곁들였다.
제1장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암행어사 이몽룡”이다. 한국 전통소설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춘향전>의 클라이맥스인 ‘어사또 출두 장면’을 소개하면서, 이 극적인 대목에서 두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을 제기한다. 첫째는 암행어사가 첫 직무 수행을 고작 자신의 연적(戀敵)을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공직자 이몽룡이 암행어사라는 공직과 공권을 이용해 사적인 원한을 갚았다는 점이다. “비리를 척결해야 할 자가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소설 속 변사또 같은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수탈에 억눌리며 말 못하는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은 논리적 타당성 같은 것을 문제 삼을 마음의 여유가 없고, 이 문학 작품의 초점이 반상(班常)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 계급 타파, 평등사상에 있지만, 우리는 합리성을 추구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자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는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를 통해 ‘비평적 사고’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고 따져보는 정신활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평적 사고’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운전 중에 일단 자동차의 머리부터 집어넣는 무리한 차선변경, 제한속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빵빵 하고 울리는 경적 소리 등이다.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예사롭게 여기는 것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논문은 합리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의사전달 수단이므로, 앞의 예처럼 마구잡이식 논증으로 목표지점 도달은 어림도 없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저자는 분석, 비교, 종합, 유추, 판단, 응용 등의 고급 사고 능력이 ‘진짜 실력’이라고 강조한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보를 분류하고, 습득한 개념의 상호 관계를 따져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상호 관련짓는 관계지움 능력, 그리고 유사한 상황에 그것을 적용하는 문제해결 능력까지에 이른다. 진짜 실력은 일정한 법칙을 발견해 일반화하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며, 예측하고 구상하는 것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문화의 바탕인 유교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기죽이고 토론과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지만, 밤하늘의 별처럼 수시로 반짝이는 창의적인 것들을 논리적이고 체계 있게 풀어내고 표현하고 그것을 다른 정보와 연계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힘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고귀한 능력이다.”
저자는 논문이라면 오로지 독창적이어야 하고, 논문쓰기는 독창적인 발상과 건전하고 타당한 관계지움의 힘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인 동시에, 그 같은 능력을 키우고 극대화하는 최고 수단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머리말과 서두에 해당하는 제1장과 제2장의 비평적 사고, 제3장 논문, 제4장 본문생산 조건, 제5장 논문의 맛과 영양소, 제6장 학문의 알파와 오메가, 제7장 논지찾기, 제8장 논지진술과 논지확증, 제9장 논문감 찾기, 제10장 온라인 컴퓨터 문헌정보, 제11장 정보·문헌관, 제12장 자료의 비평적 분석, 제13장 자료 입력에서 탈고까지, 제14장 삼위일체 구성: 서론 본론 결론, 제15장 요철의 철학: 문장과 문단, 제16장 글의 옷과 날개: 문체, 제17장 글의 음성과 품위, 제18장 수사, 제19장 논리의 지뢰밭: 유사논리, 제20장 논리의 지뢰밭: 오류추리, 제21장 보물섬 지도: 논증, 제22장 논증 진행의 순서, 제23장 방증, 제24장 장정까지 이어진다.
이 책은 글쓰기와 논문쓰기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망라하여 대학 또는 대학원 입시생의 논술 준비나 고등학생부터 장년과 노년의 글쓰기 교재로 손색이 없다. B5 판형에 420쪽 가까운 분량의 이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20년 전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20,000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물론 책의 가치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저자의 결론은 ‘수정같이 맑고 고래 등의 심줄처럼 두드러진 논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아 6:10)”라는 성경 말씀이 연상되는 구절이다. 논문은 사건, 사실, 생각, 통찰, 사고를 종합시킨 지성의 결정체이므로, 논제 선정을 신중하게 하고 분명하고 독창적인 논지를 가진 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이나 책의 서론만 읽어도 주장하는 바를 알아볼 수 있는 글이 우수한 작품이고, 서론이나 결론만 읽어도 벌떼의 여왕벌과 같고, 나무의 원줄기와 같으며, 미식축구 경기의 축구공 같은 논지를 가진 본문을 생산해야 한다. 좋은 논문은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아도, 대포알 같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논문은 구름 잡는 이야기책이나 백과사전, 파노라마식 교과서가 아니라, 분명한 주장이 있고 건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 주장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비평적·지적 작업이다.
바라기는 한국 신학계에도 이러한 우수한 논문이 계속 쏟아져 나옴으로써, 여전히 묻어있는 ‘퇴행성 유교적 면모’들을 일신하고, 수정같이 맑고 고래 등의 심줄처럼 두드러진 성도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대웅 (언론인, 크리스천투데이 기자, 부산대학교 법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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