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보다 깊은 상처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장애아들의 놀라운 천재적 재능을 소개한 적이 있다. 어느 아이는 악보를 보지 않고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해냈다. 어느 아이는 천재적 화가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떻게 흔히 "저능아"라고 불리는 장애아들이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의학적으로 발달장애나 자폐증 등 뇌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장애와 대조되는 천재성을 나타내는 현상을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이라고 한다. 이것은 장애아들이 좌뇌에 손상을 입어 우뇌를 많이 사용하고, 이로 말미암아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장애아들이 천재적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실에서 오는 결핍을 놀라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것이다.
기술적인 의학만이 존재하던 시기에, 스위스의 내과의사 폴 트루니에는 의사와 환자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인격 의학"을 주장했다. 자신의 저서 『고통보다 깊은 - 고통에 대한 창조적 반응과 온전한 성숙』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고통이나 상실 자체는 우리에게 저주도 축복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다만 그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은 창조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나아간다."
트루니에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제네바의 의사 렌취니크 박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들은 대부분 고아이거나 결손 가정에서 자라났음을 밝히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카이사르, 조지 워싱턴, 링컨, 나폴레옹, 히틀러 등 300여 명에 이르는 거물들이 어린 시절 심각한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겪은 고통에 대한 반대급부로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 앙드레 에이날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상실(deprivat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고아"는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상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정치가, 종교 지도자, 철학자, 과학자, 작가, 예술가들 중에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로 볼 때, 이들은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켰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한다. 에이날의 말대로라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실과 고통은 우리 자신 안에 내재된 창조성을 캐내기 위한 특별한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실과 고통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상실을 수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분노를 분출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분노는 더 완전한 수용으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통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퇴직을 맞게 된 사람은 커다란 상실감에 직면한다. 그리고 퇴직과 함께, 소득, 명예, 지위, 그밖에 수반되는 모든 사회적 관계도 잃게 된다. 배우자를 잃는 것 혹은 그와 비슷한 비참한 사별, 사고나 심각한 질병, 실패나 배신... 그 때부터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련 앞에서 체념하고 있으면 안 된다. 삶의 새로운 단계를 직접 건설해야 한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참여하는 것이자 현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 내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 새로운 영감의 추구를 함축하고 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용기는 용기 있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 되살아난다. 우리는 나보다 더 큰 상실과 고통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용기를 존경한다. 용기는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염되는 것이다.
"우리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운 기쁨을 볼 때 그 기쁨이 전염되는 것을 느낀다. 버스 안에서 목격하는 건강한 사람들의 침울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그 기쁨. 그것은 그들의 삶이 끊임없이 용기를 소모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기쁨을 발산한다. 그것은 운명에 승리한 기쁨이다. 단 하루의 승리가 아니라 매일의 승리이며, 소유한 것에서라기보다는 고통에 맞서 용기 있게 투쟁한 데서 나오는 기쁨이다. 시련의 시기에 왜 용기가 필요한가? 그것은 절망하기보다 용감하게 맞설 때 고통이 훨씬 덜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우연히 접하게 된 한 생물학지에서 자신의 통찰에 영감을 주는 단락을 발견한다. "전화선의 결함으로 잡음이 생기면 의사소통이 방해를 받아 상대방이 말한 내용을 알아듣기 힘든 것처럼, 생명체라는 자동기계 장치에도 DNA 정보 전달 과정에서 다양한 인자들에 의해 오류가 발생하며 이 인자들은 "잡음인자(noise)"로 불린다. 유전자들이 보내는 유전 암호는 주체가 일생 동안 경험하는 어떠한 변화과정에도 영향 받지 않고 그대로 보전되나 잡음은 이러한 불변의 과정에 우발적 변화를 가져온다. 해부학적, 생리학적, 심리학적 분화 과정에서 환상적인 진보를 보여주는 필요충분적인 열쇠는 잡음, 즉 암호 복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일련의 우발적 오류다. 잡음은 정보 전달 과정에 새로운 요소를 끌어들이고 그리하여 정보를 풍성하게 만든다."
정해진 유전 정보에 의한 일상성은 생명의 근원이나, 동시에 그것은 생명체의 독특함을 빼앗아 생명체를 화석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잡음이야말로 두꺼운 일상성의 껍질을 깨고 풍요로운 정보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더욱 다양하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저자는 이 잡음과 상실 사이의 놀라운 유사성을 간파한다. 죽음, 사고, 질병, 실패, 사랑의 슬픔, 신체장애, 노화, 이러한 상실은 잡음이 정보를 파괴할 때처럼 우리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상실의 딜레마, 즉 상실은 파괴인가 창조인가? 결국 창조를 일으키는 것은 잡음 자체가 아니라 잡음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잡음에 대해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유전 암호 전달 과정에서 발생한 잡음으로 인해 장애를 안게 된 아이가 주체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창조적 재능을 발휘하듯이 말이다.
<Early Morning from Boston 글>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출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