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총회(1618-1619) 상상도
도르트신조문 (Canons of Dort)
아래는 개혁신학 전통 신조 가운데 중 하나인 도르트신조문 전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거부하고 칼빈주의가 정당함을 천명한다. 튜립(TULIP)으로 언급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담고 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장어귀에서 논의될 수 있는 또는 아무나 조잘댈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성경과 합리성-신학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칼빈주의도, 아니미니우스주의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왜곡되고 또 단순하게 이해하는 과정에서 곡해되어 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해하려면 도르트총회가 채택 선포한 신조문을 읽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신약신학계의 새 관점학파, 풀러신학교의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또는 예약 칭의론, 벡석대학교의 최갑종의 아르뱅주의,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위구원 칭의론, 안식교의 조사심판론이라는 해괴한 이론을 따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교회가 아래의 문서는 신학도와 신도들이 숙독해야 할 귀중한 문서다. <도르트 신조 노트>(서울: 그책의 사람들, 2017)를 출판사가 무료로 공개 배포한 것을 옮겨 게재한다.
가.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항: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정죄 받아 마땅함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 아래에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겪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저주 아래 두시고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불의하게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제2항: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심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이렇게 나타내 보이셨다. 곧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요일 4:9; 요 3:16).
제3항: 복음 전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자비로우시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보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신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
제4항: 복음 전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주 예수님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제5항: 불신앙의 원인과 믿음의 원인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불신앙에 따른 죄책은 결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제6항: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유래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영원부터 아시기 때문이다(행 15:18; 엡 1:11). 이 작정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완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들이 믿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따라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악함과 완고함 가운데 내버려 두신다. 여기에서 똑같이 멸망 받아 마땅한 모든 사람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한 없이 깊으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행위가 특별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다. 악하고 더러우며 요동하는 사람들은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왜곡하여 그들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되지만, 거룩하고 경건한 영혼들에게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된다.
제7항: 선택
선택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시는 결정이다. 그 결정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자유롭고 선하신 뜻에 따라서, 자신들의 잘못으로 원래의 흠 없는 상태에서 죄와 파멸 가운데 빠진 온 인류 가운데서, 정하신 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택하셨다. 택함 받은 사람들이 택함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어떤 택함 받을 만한 자격이 그들에게 있어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비참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데,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모든 택함 받은 사람의 중보자로, 그들의 머리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기초로 정하셨다. 그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게 하시기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으로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이끄시기로 작정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으며,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들이 점점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그들이 나누는 교제를 권능으로 지키신 후, 마침내 택하신 자들이 영화롭게 되도록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찬송 받으시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제8항: 단 하나의 선택의 작정
이 선택은 여럿이 있지 않다. 구약과 신약 아래에서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같은 선택만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목적과 계획의 뜻이 하나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와 영광에 이르고, 구원받으며,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의 길을 걷도록 우리를 선택하셨다.
제9항: 앞을 내다보신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선택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택함 받는 데 필요한 원인이나 조건으로서의, 앞을 내다보신 믿음이나 순종, 거룩함, 또는 다른 선한 자질이나 기질에 근거하여 선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들이 믿고, 순종하고, 거룩해지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 따라서 선택은 구원에 따르는 모든 혜택의 근원이다. 믿음과 거룩함과 다른 구원의 선물들, 최종적으로는 영생 그 자체가 선택의 열매와 효과로 선택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제10항: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기초한 선택
받을 자격이 없는 이 과분한 선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뿐이다. 이 선하신 기쁨은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조건 중에서 사람의 어떤 자질이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죄인의 무리 중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자녀 삼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제11항: 변하지 않는 선택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불변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철회될 수 없고, 무효가 될 수도 없다. 택함 받은 사람들은 버림받을 수도, 그 수가 줄 수도 없다.
제12항: 선택의 확신
택함 받은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단계를 거치고 확신의 정도에서도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자신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선택을 자신들이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선택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감추어져 있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비밀한 일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캐물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선택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택함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려주는 선택의 명백한 열매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 자녀로서 하나님께 갖는 경외, 자신의 죄에 대한 거룩한 비탄,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과 같은 것들을 영적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자신 안에서 발견함으로써 얻는다.
제13항: 이 확신의 가치
이러한 선택을 깨달아 알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매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하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에게 먼저 그토록 큰 사랑을 보여 주신 하나님께 뜨거운 사랑으로 감사하게 하는 더 큰 동기가 된다. 따라서 선택 교리를 가르치고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데 해이하게 하거나 육적인 자기 과신에 빠지게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데 해이하게 하거나 육적인 자기 과신에 빠지게 하는 일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따라, 분별없이 선택의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거나, 택함 받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선택의 은혜를 무익하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제14항: 선택을 계속해서 가르쳐야 함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구약과 신약 시대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누구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을 선포하셨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 가르침들이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러한 가르침을 선포하도록 특별히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신중하게,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이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이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일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캐물으려는 태도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살아 있는 위로를 주기 위해 가르쳐야 한다.
제15항: 성경이 말하는 유기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영원하며,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과분한 은혜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우리 눈에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특히 성경은 모든 사람이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지나쳐 버림을 받는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더없는 자유로우심과 더없는 공의로우심, 흠잡을 데 없으며 변하지 않는 선한 기뻐하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작정하셨다. 곧 하나님께서는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 잘못하여 빠지게 된 그 공통의 비참 가운데 그들을 내버려 두시기로, 그들에게 구원받는 믿음과 회심하게 하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기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들이 선택해서 걸어온 길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남겨진) 그들의 불신앙과 그들이 지은 다른 모든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시고 그들이 영원히 형벌 받도록 작정하셨다. 이것을 유기의 작정이라고 한다. 유기의 작정은 하나님을 결코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는다(이는 불경한 신성모독이다!). 오히려 유기의 작정은 하나님을 두렵고 흠 없으며 공의로 재판하시는 심판자이시자 보응하시는 분으로 선포한다.
제16항: 유기 교리에 대한 반응들
그리스도께 대한 살아 있는 믿음, 확실한 마음의 신뢰, 양심의 평안,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이 순종하려는 열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아직 자신 안에서 활발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일들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시며 이를 위해 주신 수단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유기에 대해 들을 때 불안해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들을 유기된 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실 때를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하물며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며 진심으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진심으로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기를 원하지만, 아직 자신들이 열망하는 만큼 경건함과 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유기 교리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앞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적다. 우리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의 염려와 육신의 정욕 가운데 자신들을 전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로 진심으로 돌이키지 않는 한, 이 유기 교리는 마땅히 크게 두려운 것이다.
제17항: 신자의 자녀가 유아기에 죽을 때의 구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야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자녀들이 본성상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부모와 함께 맺게 된 은혜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부모들은 유아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신 자기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을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제18항: 선택과 유기에 대한 적절한 태도, 불평이 아닌 경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이 과분한 선택의 은혜와 공의로운 유기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사도들의 증언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 그리고 우리 구주의 말씀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 20:15)? 우리는 선택과 유기와 관련된 모든 비밀스러운 일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면서 사도와 함께 외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지금까지 선택과 유기에 관한 참된 교리를 밝히 드러냈으므로, 총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거부한다.
오류 1
항론파의 주장: 믿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선택에 대한 작정의 모든 것이며 전부다. 이 외에는 작정에 대한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되지 않았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선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바로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인내하게 하신다고 선포한다. 기록된 말씀이 증언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오류 2
항론파의 주장: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이며 불확정적인 선택이 있고, 특별하며 확정적인 선택이 있다. 특별하며 확정적인 선택에는 불완전하고 취소될 수 있으며 미결정적이고 조건적인 선택과 완전하고 취소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선택이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이르는 선택이 있고, 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 따라서 구원받는 결정적인 선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롭게 하는 믿음을 주시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자기 머리에서 지어낸 이야기이며, 선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다음과 같은 구원의 황금 사슬을 끊어 버린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오류 3
항론파의 주장: 성경이 선택 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쁘심과 뜻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조건 중에서 불완전한 믿음의 순종은 물론 본질적으로 구원받는 데 아무런 가치 없는 신앙의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이런 것들을 완전한 순종으로, 영생의 상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주신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치명적인 오류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 사람들이 무익한 연구를 하게 함으로써 받을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진리와 성경 교훈의 단순성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 주장은 사도의 다음 증언을 거짓이라고 비난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오류 4
항론파의 주장: 믿음에 이르는 선택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사람은 본성의 빛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며, 경건하고, 주제넘지 않고, 겸손하며, 영생을 준비해야 한다. 선택은 이런 요소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펠라기우스의 냄새를 풍기는 이 주장은 사도의 가르침과 반대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3-9).
오류 5
항론파의 주장: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불완전하고 미결정적인 선택은 이제 막 시작됐거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앞을 내다본 믿음과 회심과 거룩함과 경건함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반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믿음과 회심과 거룩함과 경건함 안에서 끝까지 앞을 내다본 인내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택함 받은 사람이 택함 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가치 있으므로 이 선택이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 믿음의 순종, 거룩함, 경건함, 인내는 영광에 이르게 될 사람들이 맺게 될 불변하는 선택의 열매나 효과가 아니라, 완전한 선택 안에서 택함 받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조건과 원인이며, 그들 안에서 성취될 것으로 하나님께서 앞을 내다보신 것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성경은 성경 전체에 걸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우리의 마음과 귀에 새긴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요 15: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오류 6
항론파의 주장: 구원에 이르는 모든 선택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택함 받은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멸망할 수 있고, 실제로 영원히 멸망한다. 그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겠다는 작정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는 이 엄청난 오류로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분으로 만들고,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선택의 견고함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위로를 파괴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택하신 자들이 미혹될 수 없으며(마 24:24),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 중에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요 6:39),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가르친다(롬 8:30).
오류 7
항론파의 주장: 이 세상에서는 변할 수 있고 불확실한 조건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누구도 영광에 이르는 불변하는 선택을 받는 것에 대해 어떤 열매도 자각도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성경에 따른 반론: 불확실한 확실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항론파의 주장은 성도들의 경험과도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자신들이 택함 받았음을 자각함으로 사도와 함께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택의 은혜로 말미암아 찬양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한다(눅 10:20).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마귀가 유혹의 불화살을 쏠 때도 자신들이 택함 받은 자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롬 9:33)라고 말하며 그 시험을 물리친다.
오류 8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아담의 타락과 죄의 공통된 상태와 정죄 가운데 남겨 두기로, 또는 믿음과 회개에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일에 누구는 주시지 않고 지나치기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런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꿋꿋이 서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또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비슷하게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오류 9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에게는 복음을 주시고, 또 어떤 민족에게는 복음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이것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받은 어떤 민족이 복음을 받지 못한 다른 민족보다 더 낫고 가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 주장의 오류를 반박한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4-15). 그리스도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나. 둘째 교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구속
제1항: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엄을 거슬러 저지른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 몸과 영혼 모두에 일시적인 형벌들과 영원한 형벌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만족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이 형벌들을 면할 수 없다.
제2항: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하나님을 만족하시게 하심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 자신을 건져 낼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시고, 보증이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을 하나님께 드리시도록,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그리스도께서 죄와 저주가 되게 하셨다.
제3항: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지니는 무한한 가치
하나님의 아들의 이 죽으심은 죄에 대한 유일하고 전적으로 완전한 희생제사이자 만족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니기에 온 세상의 죄를 속하는 데 넘치도록 충분하다.
제4항: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고, 동등하게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겪으신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제5항: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심
더욱이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모든 사람이 복음 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쁘심에 따라 어떠한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제6항: 불신앙에 대한 사람의 책임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하지만, 복음을 통해 부르심 받은 사람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불신앙 가운데 멸망한다. 이들이 멸망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제사가 흠이 있거나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제7항: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심어떤 사람들이 믿는 이유
그러나 참되게 믿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아야 할 죄와 멸망에서 건짐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혜택을 받는다. 하나님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은혜를 베푸실 의무가 없다. 다만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제8항: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효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만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이 믿음으로 그들이 반드시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고귀하게 치르신 죽음을 통해 택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으로 주권적인 계획과 은혜로 풍성한 뜻이며 의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백성과 족속과 나라와 방언 가운데서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택하셔서 그리스도께 주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새 언약을 확증하는) 피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속하시는 것, 그리스도께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다른 구원하는 은사들과 같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죽으심으로 값 주고 사신) 믿음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 그들의 원죄와 그들이 믿기 전에 지은 본죄나 믿은 후에 지은 본죄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하시는 것, 그들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셔서 마침내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는 것이다.
제9항: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성취
택하신 자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우신 하나님의 이 계획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매우 힘 있게 이루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매우 힘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 계획을 좌절시키려고 헛되이 애쓴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때가 되면 택함 받은 사람들은 하나로 모이며,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진 신자의 교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이 교회는, 신랑이 자신의 신부를 위해 하듯,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들의 구주 그리스도를 늘 변함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예배하며, 지금부터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구속에 관한 참된 교리를 밝히 드러냈으므로, 총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거부한다.
오류 1
항론파의 주장: 성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구원할 변하지 않고 분명한 작정 없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구속의 필요성과 유익과 가치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구속이 실제로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완전하며 온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주장은 성부 하나님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모욕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른다. 우리 구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나는 그들을 알며”(요 10:27). 선지자 이사야는 구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마지막으로 이 거짓 주장은 교회에 관하여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하는 신경을 거스른다.
오류 2
항론파의 주장: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실제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언약이든지 행위 언약이든지 사람과 한 번 더 언약을 맺으실 권리만을, 성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얻으시는 것이었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거짓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모순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의 보증과 중보자가 되셨으며(히 7:22),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야 유효하다고 가르친다(히 9:15, 17).
오류 3
항론파의 주장: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드리신 만족하시게 하심을 통해 실제로 어느 누구를 위한 구원 그 자체를 공로로 얻으신 것이 아니며, 구원받게 하는 그리스도의 이 만족하시게 하심이 실제로 어느 누구의 것이 되게 하는 믿음도 공로로 얻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성부 하나님을 위해 사람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 성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새로운 조건을 세우는 권위와 완전한 의지만을 공로로 얻으신 것이다. 하지만 이 조건들을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이 조건이 충족되게 할 수도 있고, 단 한 사람도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가장 중요한 열매와 혜택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정죄 받은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지옥에서 다시 가져왔다.
오류 4
항론파의 주장: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과 은혜 언약을 새로 맺으셨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은혜 언약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요구를 사람에게서 철회하시고, 믿음 그 자체와 불완전한 순종을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여겨 주실 뿐만 아니라, 은혜롭게도 그 믿음과 불완전한 순종을 영생의 상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4-25). 또한 항론파는 간악한 소시누스가 모든 교회가 일치하여 고백한 믿음을 거슬러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성경과 다른 칭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오류 5
항론파의 주장: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은혜 언약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어느 누구도 원죄 때문에 정죄 받지 않으며, 정죄 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원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났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한다(엡 2:3).
오류 6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얻으신 혜택들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기 원하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받지만 어떤 사람들은 받지 못한다. 이런 구별은 차별 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적용하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며, 그들 안에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힘 있게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의 선물 때문은 아니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것과 구원을 적용하는 것의 구별을 오용함으로써 분별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이들은 건전한 의미에서 이 구별을 제시하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펠라기우스주의의 치명적인 독을 주입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오류 7
항론파의 주장: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실 수도 없었고, 죽으셨어도 안 되며, 죽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비슷하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또한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단언하시는 우리 구주의 가르침과도 모순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다. 셋째, 넷째 교리: 사람의 부패, 하나님께로의 회심과 그 회심이 일어나는 과정
제1항: 타락이 사람의 본성에 끼친 영향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에 대한 참되고 유익한 지식으로 채워주시고, 사람의 의지와 마음은 의롭게, 정서는 순결하게 지으셨다. 참으로 사람의 모든 면이 거룩했다. 그러나 사람은 마귀가 유혹하자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이 탁월한 은사들을 스스로 상실했다. 그리하여 이 탁월한 은사들을 대신하여 사람의 지성은 무지와 끔찍한 어둠과 헛된 생각과 왜곡된 판단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마음과 의지는 사악하고 패역하고 완고해졌으며, 그의 모든 정서는 불결하게 됐다.
제2항: 부패의 확산
타락 후 사람은 자기 자신과 똑같은 본성의 자녀들을 낳았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부패한 존재로서 부패한 자녀들을 낳은 것이다. 이 부패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따라 아담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졌다. 이는 이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악한 본성이 유전됨으로 일어난다.
제3항: 전적 무능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 중에서 잉태되며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 구원받을 만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고, 항상 악을 행하며, 자기 죄 가운데 죽었고, 죄의 노예다. 사람은 성령님의 중생하게 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거나, 타락한 본성을 고치거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새롭게 하시도록 내어드리려고 하지도 않으며 할 수도 없다.
제4항: 불충분한 본성의 빛
물론 타락 후에도 사람에게는 본성의 빛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만물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선행에 어느 정도 열의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이 본성의 빛으로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으며, 참되게 회심할 수도 없다. 게다가 사람은 지금까지도 자연계에 관련된 일들과 사회적인 일들에서조차도 이 본성의 빛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이 본성의 빛의 특성이 정확히 어떤 것이든 여러 방법으로 이 빛을 왜곡하고 불의로 이 빛을 억누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게 된다.
제5항: 율법의 불충분함
본성의 빛에 대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신 십계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십계명 곧 율법은 비록 사람이 지은 죄의 무거움을 드러내고, 그 죄책을 더욱 깨닫게 하지만,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을 비참의 상태에서 나오게 할 수도 없고 빠져나올 방법을 그에게 알려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율법은 죄인을 저주 아래 남겨 둔다.
제6항: 복음의 필요
그러므로 본성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화목하게 하는 말씀 또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통해 이루신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에 관한 복음인데 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 아래에서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기뻐하셨다.
제7항: 하나님께서 복음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비밀을 구약 아래에서는 단지 소수의 사람에게만 계시하셨다. 그러나 신약 아래에서는 민족 간의 차별 없이 많은 사람에게 이 비밀을 드러내셨다. 복음이 이러한 차이를 두고 전해진 이유는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가치가 있어서라거나, 본성의 빛을 더 잘 사용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선하신 기쁨과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것 대신에 오히려 그토록 심히 큰 은혜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엄격하고 공의로운 심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려 해서는 결코 안 되며 사도들과 함께 경배해야 한다.
제8항: 복음을 통해 진지하게 부르심
그렇지만 복음을 통해 부르심 받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진지하고 지극히 진실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자신의 말씀에서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 또한 진지하게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제9항: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
복음 사역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회심하지 않는 것은 복음 탓도,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탓도,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탓도 아니다.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생명의 말씀을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을 받되 마음에 새기지 않은 까닭에 일시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기쁨이 이내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근심의 가시로 생명의 씨앗을 자라지 못하게 막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게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이 내용을 가르치신다(마 13장).
제10항: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회심하는 이유
복음 사역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회심한다. 그러나 이를 사람의 공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교묘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회심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했기 때문에, 믿고 회심할 수 있는 똑같은 또는 충분한 은혜를 받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회심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믿고 회개하게 하시며,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다. 이는 성경에서 사도들이 자주 증언하는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고, 그들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제11항: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키시는 방법
더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안에서 이 선하신 기쁨을 따라 행하실 때, 곧 그들 안에서 참된 회심이 일어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도록 돌보시고, 성령님의 권능으로 그들의 지성을 밝게 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중생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님의 효과적인 일하심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속까지 파고들어 가셔서, 닫힌 마음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마음에 할례를 행하신다. 또 그들의 의지에 새로운 자질들을 주셔서 죽은 의지를 살리시고,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꺼리는 의지를 소원하는 의지로, 완악한 의지를 순한 의지로 바꾸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지를 움직이시고 강하게 하셔서 좋은 나무가 그러하듯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신다.
제12항: 초자연적인 중생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그토록 밝히 선포하는 중생이다. 새 창조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과 부활이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 중생은 결코 외적인 가르침이나 도덕적 설득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다 하신 후에, 사람이 중생할지 아닐지, 회심할지 아닐지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일이다.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지극히 기쁘고 심히 놀랍고 더없이 신비하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행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영감된) 성경에 따르면 중생의 능력은 적어도 창조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에 못지않다. 고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이토록 놀랍게 일하시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적확히, 효과적으로 중생하고 실제로 믿는다. 이제 그렇게 새로워진 의지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고 동기를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용을 끼치셨기 때문에 그 자체가 활동적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그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회개한다는 말 또한 옳다.
제13항: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중생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일어나게 하시는지를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혜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구주를 마음으로 믿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경험하기에 만족해한다.
제14항: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는 방법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단지 사람이 받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사람에게 실제로 주시고, 불어넣으시고, 주입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단지 믿을 가능성만을 주신 뒤, 사람이 스스로 믿기로 동의하거나, 어떤 믿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기다리신다는 의미에서의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원할 뿐만 아니라 행동하게 하시며, 참으로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으려는 의지와 믿음 그 자체를 주신다는 의미에서의 선물인 것이다.
제15항: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태도
하나님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은혜를 베푸실 의무가 없다. 주게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베푸셔야 하는가? 정말로, 죄와 거짓 외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베푸셔야 하는가?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드려야 하며 영원히 감사드린다. 그렇지만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런 영적인 일들에 관심이 전혀 없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해하고, 실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리석게도 지나치게 자신을 믿고 헛되이 자랑한다.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신앙을 밖으로 고백하고 그들의 삶을 갱생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사도들의 본을 따라 가장 호의적으로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없는 것을 있게 부르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그들보다 우리를 더 낫게 여기며 거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제16항: 사람의 의지를 올바로 되살아나게 하는 중생
그런데 타락했다고 해서 지성과 의지가 사람에게서 상실된 것은 아니며, 죄가 온 인류에게 퍼졌다고 해서 사람의 본성이 파괴된 것은 아니다. 다만 죄는 사람을 부패시키고 영적으로 죽였다. 마찬가지로 중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사람을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돌이나 나무처럼 대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와 의지의 속성들을 파괴하거나 꺼리는 의지를 힘으로 강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를 영적으로 소생하게 하고, 치료하며, 교정하고, 기쁨으로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힘을 다해 복종하게 한다. 그 결과 이전에 육신의 반역과 저항이 완전히 지배하던 곳을 이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순종이 우세하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의지의 참되고 영적인 회복과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을 만드신 경이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지 않는다면, 죄가 그 안에 없을 때도 자유의지로 자신을 파멸 가운데 거꾸러뜨린 사람에게는 자신의 자유의지로는 타락에서 일어설 아무런 소망도 없다.
제17항: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심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생명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하심은 수단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수단을 반드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그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앞에서 말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하심은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효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크신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과 사도들을 이어 가르치는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은혜에 관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낮추도록 경건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사도들과 교사들은 복음의 거룩한 권고를 따라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 아래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기쁨 안에서 함께 밀접하게 결합하기 원하신 것을 나눔으로써 감히 주제넘게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권고를 통해 주어지며,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더욱 기쁘고 즐겁게 행할수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더욱 빛나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욱더 진전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을 주시고, 그 수단을 통해 구원하는 열매와 효과도 주시는 하나님 홀로 영원히 모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지금까지 사람의 부패,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회심하는 과정에 관한 참된 교리를 밝히 드러냈으므로, 총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거부한다.
오류 1
항론파의 주장: 정확히 말하면, 원죄 그 자체는 온 인류를 정죄하거나, 온 인류가 일시적인 형벌과 영원한 형벌을 마땅히 받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리고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롬 5:16).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오류 2
항론파의 주장: 선함, 거룩함, 의로움과 같은 영적 은사들 또는 선한 자질들과 덕들은 사람이 처음 지음 받을 때 사람의 의지 안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이 타락했을 때 이런 것들이 사람의 의지에서 분리되었을 리도 없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주장은 사도가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묘사와 충돌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분명히 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오류 3
항론파의 주장: 영적 은사들은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을 때 사람의 의지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부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다만 어두운 지성과 무절제한 정서에 방해받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는 이러한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면 선천적으로 자유로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지는 그 앞에 놓인 그 어떤 선도 원하거나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원하지 않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이상한 생각이며 오류요, 자유의지의 능력을 치켜세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곧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다음의 말씀과 반대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또한 사도의 증언과도 반대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엡 2:3).
오류 4
항론파의 주장: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확실히 또는 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며, 영적 선을 행할 능력을 모두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의와 생명에 주리고 목말라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상하고 통회하는 상한 심령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가 주장하는 이런 견해들은 성경의 명백한 증언을 거스른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 “허물로 죽은 우리”(엡 2: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더욱이 비참에서 건짐 받아 생명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하나님께 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오직 중생하고,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만의 특징이다(시 51:17; 마 5:6).
오류 5
항론파의 주장: 부패한 자연인도 일반 은혜(항론파 곧,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본성의 빛이라 부르는) 또는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은사들을 잘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큰 은혜, 곧 복음적 은혜 또는 구원하는 은혜와 구원 그 자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편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친히 계시하실 준비를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충분히 또 효과적으로 베푸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모든 시대의 경험뿐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이 이러한 주장이 거짓임을 증언한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 147:19-20),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행 14:1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오류 6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참되게 회심할 때 그의 의지에 새로운 자질이나 성향, 또는 은사들을 주입하시거나 부어주실 수 없다. 참으로 우리를 처음 회심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믿는 자”라고 불리게 하는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입해주시는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단지 사람의 행위다. 믿음을 얻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닌 한 믿음은 결코 은사로 불릴 수 없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믿음, 순종,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자질들을 부어주신다고 선포한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 44:3),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또한 이 주장은 교회가 선지자들과 함께 지금까지 함께 기도해 온 것과도 충돌한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오류 7
항론파의 주장: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도록 하는 은혜는 단지 부드러운 설득이다. (다른 사람들이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설득을 통해 사람이 회심하도록 하시는 것이 가장 고귀한 방법이며 사람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더군다나 도덕적으로 설득하는 이 은혜만으로도 타락한 상태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덕적 설득이 아니고서는 사람의 의지가 동의하도록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혜택을 약속하시지만, 사탄은 일시적인 것들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효과는 사탄의 일을 압도한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전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이며 성경 전체와 모순된다. 성경은 이러한 설득 외에도 그 이상의 다른 것, 곧 사람을 회심시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훨씬 더 효과적이고 신적인 방법을 승인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오류 8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하게 하실 때 자신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사람의 의지를 강력하고 확실하게 꺾으셔서 믿고 회개하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심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모든 은혜의 일을 다 행하셨을지라도 사람은 하나님께 저항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저항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그에게 중생을 일으키시고자 의도하시고 뜻하신다 할지라도 사람은 중생이 결코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중생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참으로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같은 주장은 우리를 회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오는 모든 효과적인 기능을 부인하는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사람의 의지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의 증언과도 모순된다.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일하심으로써 우리가 믿는다고 가르치고(엡 1:19),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분에 넘치는 선한 뜻과 믿음의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고 가르치며(살후 1:11),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고 가르친다(벧후 1:3).
오류 9
항론파의 주장: 은혜와 자유의지는 협력하여 회심을 시작하게 하는 회심의 부분적인 원인인데, 회심이 일어나게 하는 순서에서 은혜는 의지의 효과적인 영향보다 앞서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의지가 움직여서 회심하기로 결단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심하도록 그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돕지 않으신다.
성경에 따른 반론: 초대교회는 이미 오래전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사도의 증언에 기초해 정죄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라. 다섯째 교리: 성도의 견인
제1항: 중생한 사람도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음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부르시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게 하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죄의 지배와 죄의 종노릇에서도 해방하신다. 하지만 그들을 이 세상에서는 육신과 죄의 몸에서 완전히 해방되게 하시지는 않는다.
제2항: 연약하여 날마다 죄를 짓지만, 온전함을 푯대 삼는 성도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연약하여 날마다 죄를 짓고, 심지어 그들의 최선의 행위에도 흠이 있다. 이런 이유들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을 매일 겸손하게 낮추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로 피하며,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또 경건을 거룩하게 행함으로써 육신을 점점 더 죽이고, 마침내 이 사망의 몸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천국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과 함께 왕 노릇 할 때까지 온전함을 푯대 삼아 힘껏 달려가게 한다.
제3항: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켜주심
성도들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잔여들과 세상과 사탄의 유혹 때문에 회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 은혜 가운데 계속해서 굳게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쁘신 분이시다. 자비롭게도 그들이 한 번 받은 은혜 가운데 있도록 그들을 굳세게 하시고, 그들을 그 은혜 안에서 끝까지 권능으로 지켜주신다.
제4항: 참 신자들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음
참 신자들을 은혜 안에서 굳세게 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육신의 힘보다 훨씬 우세하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께 감동되고 인도받는 것은 아니다. 몇몇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는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시는 길 위에서 벗어나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고, 굴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참 신자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이끌려 죄를, 심지어 심각하고 너무도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허용으로 말미암아 참 신자들은 때때로 시험에 든다. 성경에 기록된 다윗, 베드로, 또 다른 여러 성도가 죄에 빠진 슬픈 사건들이 이 사실을 증언한다.
제5항: 그런 심각한 죄들의 결과
더군다나 참 신자들이 그런 극악무도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노하시게 하고,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며, 성령님을 근심하시게 하고,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게 막고, 양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며, 때로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일들은 그들이 진실하게 회개하여 의의 길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당신의 얼굴을 그들에게 다시 비춰주실 때까지 계속된다.
제6항: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잃어버린바 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심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불변하는 선택의 작정에 따라, 심지어 그들이 통탄할 만한 죄를 지었을 때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성령을 완전히 거두지 않으신다. 또한 그들이 은혜로 양자 된 것과 의롭다 하심 받은 은혜를 박탈당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 또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거나, 그들 자신을 영원한 멸망 가운데 스스로 던져 넣을 정도로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제7항: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새롭게 하심으로 회개하게 하심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타락했을 때도 성도들을 중생하게 한 자신의 썩지 아니할 씨가 소멸하거나 제거되지 않도록 성도들 안에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확실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게 하셔서 그들이 지은 죄들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경건하게 슬퍼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과 상한 심령으로 중보자의 피 안에서 죄 용서를 구하고 받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누리게 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하게 하시며, 그때부터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시기 때문이다.
제8항: 택하신 자들을 지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하고 변하지 않음
따라서 성도들이 믿음과 은혜를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고, 파멸 속에 끝까지 남아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나 능력 때문이 아니요 오직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다. 성도들 자신을 생각하면 믿음과 은혜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파멸 속에 끝까지 남아 잃어버린 바 되는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고 확실히 일어나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신 것을 바꾸지 않으시며,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며, 자신의 뜻에 따라 부르신 것을 취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심과 성도를 지키심이 파기될 수 없으며, 성령님의 인 치심이 무효가 되거나 소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9항: 견인의 확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그들을 지키시고 믿음 안에서 참 신자들로 견인하게 하심을 확신할 수 있고, 자신들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실제로 확신하게 된다. 이 믿음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참되고 살아 있는 지체로 항상 남아 있을 것과 자신들이 죄 용서와 영생을 받았음을 굳게 믿는다.
제10항: 이 확신의 근거
이 확신은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무관한 어떤 사적인 계시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확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자신의 말씀에서 매우 풍성하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일어난다. 또한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인 것을 증언하시는 데서 온다(롬 8:16-17). 마지막으로 이 확신은 선한 양심과 선한 일을 진지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추구하는 데서 생겨난다. 만약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는 이 확고한 위로와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이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다면 그들을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제11항: 견인의 확신을 항상 누리지는 못함
한편, 성경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인간적인 온갖 의심과 싸워야 하며, 그들이 힘겨운 유혹을 받을 때는 그들의 믿음에 관한 충분한 확신과 견인의 확실성을 항상 누리지는 못한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모든 위로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그들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그들 안에 견인의 확신을 회복해 주신다.
제12항: 경건을 장려하는 확신
그런데 견인을 확신하는 것은 참 신자를 교만하게 하거나 육적인 자기 과신에 빠지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견인을 확신하는 것은 겸손, 자녀로서 하나님께 갖는 경외, 진실한 경건, 모든 다툼 중에서의 인내, 뜨거운 기도, 고난 가운데서도 진리를 고백함, 하나님 안에서 견고히 누리는 기쁨의 참 근원이 된다. 성경의 증거와 성도들의 예가 증언하는 것처럼, 견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며 선한 일을 하도록 장려한다.
제13항: 이 확신은 신자들을 게으르게 하지 않음
견인을 새롭게 확신하는 것은 넘어졌다 다시 일으킴 받은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하거나 경건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더욱 마음을 기울여 주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주의 도를 주의 깊게 지키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견인을 계속 확신할 수 있도록 주의 도를 따른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선하심을 오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우신 얼굴(경건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생명보다 더 달콤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는 것이 죽음보다 더 쓰다)을 자신들에게서 돌리시고, 그 결과 자신들이 더 큰 영혼의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한다.
제14항: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견인의 수단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이 은혜의 일 시작하기를 기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또한 복음을 듣고 읽는 것, 복음을 묵상하는 것, 복음으로 권고하는 것, 경고, 약속, 그리고 성례의 시행으로 이 은혜의 일을 지키시고 계속하시며 완성하신다.
제15항: 사탄은 증오하고 교회는 사랑하는 견인 교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경건한 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참 신자와 성도의 견인, 견인에 대한 확신 교리를 자신의 말씀 안에 매우 풍성하게 계시하셨으며, 신자들의 마음에 새겨 주신다. 이 교리를 육신에 속한 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사탄은 증오하며, 세상은 조롱하고, 무지한 자들과 위선자들은 악용하며, 오류의 영은 공격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 교리를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로 언제나 소중히 사랑하고 굳세게 옹호해왔다. 그리고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이 세운 어떠한 계획도 가치 없게 하시고, 그들의 어떤 힘도 무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계속해서 그렇게 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지금까지 성도의 견인에 관한 참된 교리를 밝히 드러냈으므로, 총회는 다음의 오류들을 거부한다.
오류 1
항론파의 주장: 참 신자들의 견인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얻은 하나님의 선물도 아니다. 견인은 이른바 하나님의 “확정적인” 선택과 의롭다 하심 이전에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성취해야만 하는 새 언약의 조건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성경은 참 신자의 견인이 선택을 따라 나오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간구하심의 공로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증언한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7).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2-35).
오류 2
항론파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인내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주시고, 만약 신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신자에게 이 힘을 계속해서 주실 것이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인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과 하나님께서 믿음을 지켜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더라도, 여전히 신자가 인내할지 안 할지는 항상 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주장은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다. 이 견해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도록 만든다. 이 견해는 복음의 일관된 가르침, 곧 사람이 자랑할 모든 근거를 그에게서 없애고 이 혜택에 관한 모든 찬송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돌리는 가르침에 반대된다. 또한 이 견해는 사도의 증언과도 충돌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오류 3
항론파의 주장: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만이 아니라 구원과 은혜를 완전히 그리고 확실히 잃을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영원히 멸망한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 의견은 의롭다 하시고, 중생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은혜를 무효로 만들며, 사도 바울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순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8-9). 또한 사도 요한의 증언과도 충돌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반대된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오류 4
항론파의 주장: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도 사망에 이르는 죄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
성경에 따른 반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6-17절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언급한 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친 후 곧바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오류 5
항론파의 주장: 특별한 계시가 없이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앞으로의 인내를 확신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른 반론: 저들의 이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참 신자들이 누리는 견고한 위로를 빼앗고 로마가톨릭교도의 의심을 교회 안으로 다시 들여온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의 확신은 어떤 특별하고 비상한 계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지니는 특유의 표지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렇게 선포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사도 요한도 증언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오류 6
항론파의 주장: 성도의 견인과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는 바로 그 본성과 특성 때문에 육신의 마취제와 같으며, 경건과 미덕과 기도와 다른 거룩한 행함에 해롭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성도의 견인과 구원의 확신을 의심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이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적인 활동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부정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견인과 구원을 확신했음에도 기도와 다른 경건한 일들을 꾸준히 행한,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예로도 반박된다.
오류 7
항론파의 주장: 단지 한때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받는 믿음은 다르지 않다. 다만 믿음이 지속되는 기간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경에 따른 반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마태복음 13장 20절과 누가복음 8장 13절,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한때 믿는 자들과 참 신자들은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분명히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한때 믿는 자들은 씨를 돌밭에 받지만 참 신자들은 씨를 좋은 땅에 받고, 한때 믿는 자들은 뿌리가 없지만 참 신자들은 뿌리를 견고히 내리며, 한때 믿는 자들은 열매가 없으나 참 신자들은 꾸준함과 인내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신다.
오류 8
항론파의 주장: 이전에 중생했던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이 다시, 심지어 자주 중생하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지 않다.
성경에 따른 반론: 저들의 이 주장은 우리를 중생하게 하는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씨를 부인하며 사도 베드로의 증언과 충돌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 1:23).
오류 9항론파의 주장: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도 신자들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의 인내를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다.
성경에 따른 반론: 항론파의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모순된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신다고 증언한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요 17:11),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마. 결론
이렇게 하여 총회는 네덜란드에서 논쟁되어 온 다섯 조항에 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며 정직하게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잠깐 네덜란드 교회를 동요하게 한 오류들을 거부했다. 총회는 이 설명과 거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에 일치하는 것으로 판결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들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게 행동한 것이며, 모든 진리와 공평과 사랑을 거스른 것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예정과 예정에 관련된 개혁교회들의 교리는 바로 그 특성과 성향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모든 경건함과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 교리들은 육신과 마귀의 마취제이며 사탄의 근거지다. 사탄은 이곳에 숨어서 모든 사람을 기다렸다가 많은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많은 사람에게 절망과 자기 과신이라는 화살로 치명상을 입힌다.
이 교리들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요, 불의한 폭군과 위선자로 만든다. 이 교리들은 스토아주의, 마니교, 방종주의, 이슬람교를 새로 꾸민 것에 불과하다.
이 교리들은 사람들을 육적인 자기 과신에 빠지게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들은 택함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아무것도 그들의 구원을 빼앗을 수 없으며, 그래서 그들이 매우 극악한 죄를 지어도 안전하다고 믿게 하고,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성도에게 속한 모든 일을 진심으로 행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이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이, 순전히 그분의 임의적인 뜻으로 세상 대부분이 정죄 받도록 예정하시고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같은 방법으로 선택은 믿음과 선한 일의 근거와 원인이며, 유기는 불신앙과 불경건의 원인이다.
신자의 많은 어린 자녀가 아무런 죄도 없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잡아채어져 잔인하게 지옥으로 던져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도 그들이 교회에서 받은 세례나, 세례를 받을 때 드린 교회의 기도도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외에도 개혁교회들이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온 마음으로 맹렬히 규탄하는 다른 많은 거짓 가르침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도르트 총회는 여기저기에서 들은 거짓 비방을 기초로 개혁교회들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경건하게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엄명한다. 또한 몇몇 고대와 현대 교사들의 사적인 진술을 본래 의미와 다르게 종종 그릇되게 인용하거나 문맥에서 벗어나게 인용한 것으로 판단하지 말 것을 엄명한다. 신자들은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과 총회에 참석한 모든 회원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정통 교리에 관한 이 설명을 근거로 판단할 것을 엄명한다.
또한, 총회는 거짓 비방자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많은 교회와 교회의 신앙고백을 거슬러 거짓으로 증언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히고, 참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 많은 의심을 일으키려고 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겁게 심판하실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보라고 진심으로 경고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총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동료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학교와 교회에서 이 교리를 다룰 것을 간절히 권고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이 교리를 말하고 이 교리에 관하여 글을 쓸 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생명의 거룩함과 고통받는 영혼들의 위로를 추구해야 한다. 또 이 교리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믿음의 유추를 따라서 성경에 부합하도록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사역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 의미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모든 표현을 삼가서, 파렴치한 궤변가들에게 그들이 개혁교회들의 교리를 조롱하거나 심지어 비방할 좋은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시며, 건전한 교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에게 지혜와 분별의 영을 주셔서, 그들이 전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고,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을 세우는 일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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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신조문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 이며 그리고 믿음은 잃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도르트 총회는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정죄했고, 4세기 펠라기우스 이래로 논쟁이 지속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 교회, 신자의 삶이 명백히 규명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부르고뉴(Bourgogne) 영토에 속했던 네덜란드에서 칼빈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1540년대 이래로 인적교류, 제네바 아카데미, 서적보급, 서신교환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15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스페인 출신 필립 2세(Phillip II.)의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여 독립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는 견고한 조직을 갖추었다. 1609년 스페인과 12년 휴전조약을 체결하며 독립국가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에 네덜란드는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적인 관용주의가 확산되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도 다양한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504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던 야코부스 알미니안누스(Jacobus Arminianus)와 프란시스쿠스 호마루스(Franciscus Gomarus) 사이의 ‘예정론 논쟁’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테오도르 베자(Theodor Baza)에게 배웠던 알미니안누스는 1586년 암스테르담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구원에 대한 예정론 교리를 비판하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오류투성이라고 주장했던 디르크 코른헤르트(Dirck V. Coornhert)를 신학적으로 논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 속에서 알미니안누스는 코른헤르트의 입장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신인협력적인 보편구원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602년에 흑사병으로 죽은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를 대신해서 레이든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될 때 그 자신은 주변의 의심을 떨치기 위해서 칼빈과 베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철저히 서 있다는 사실을 소명해야 했다. 하지만 알미니안누스는 1604년 2월 7일에 열린 한 학술토론회에서 자신이 감추고 있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예지예정론을 드러내면서 결국 호마루스와 직접적으로 논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04년 10월 31일에 호마루스가 인간의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주장하며 알미니안누스를 반박한 이래로 두 사람의 논쟁은 온 교회의 관심이 되었다.
1609년 10월 19일에 알미니안누스가 사망했지만, 이 예정론 논쟁은 종결되지 않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승되었다. 1610년에 요한네스 위텐보거르트(Johannes Wtenbogaert)를 중심으로 43명의 목사들은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이 네덜란드 교회 안에서 관용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결행했다. 알미니안누스의 사상을 다섯 조항으로 정리한 ‘항의서’를 홀란드(Holland)와 서프리스란드(Westfriesland)의 주(州)정부에 제출한 것이다. 요약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a.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인간들을 작정하셨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c.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성령을 통하여 거듭날 수 있다. d.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이다. e.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해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주의 깊은 판단이 필요하다. 이 항론파들은 항의서의 논쟁점들과 관련하여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상충하는 입장들을 수정해 줄 것도 주장했다. 그 항의서는 8년 동안 계속된 다양한 논쟁들을 통해서 도르트 총회가 열리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호마루스를 중심으로 한 목회자들 역시도 1611년에 알미니안누스의 입장을 반대하여 ‘반항의서’를 작성하여 반격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그리고 믿음은 잃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반항론파들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역할을 인정한 항론파들을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위협하는 ‘비밀교황주의자들’로 인식했다.
이 예정론 논쟁은 당시 복잡했던 대내외적인 조건들 속에서 ‘항론파들’의 신학적인 관용과 지방자치제를 지지했던 요한 올덴바르네펠트(Johann van Oldenbarnevelt)와 ‘반항론파들’의 신학적인 엄밀함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지했던 오라녜 마우리츠(Willem van Oranje)의 불화 속에서 두 정치적인 진영의 첨예한 대립으로까지 발전되었다. 1617년 10월 6일에 국가총회 소집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된 이래로 두 정치지도자의 긴장관계는 서로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정도로 더 이상 합리적으로 풀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결국, 이 사태를 심각하게 느꼈던 네덜란드 의회의 위임 아래서 마우리츠가 1618년 8월 29일에 올덴바르네펠트와 그의 세 동료들을 체포하여 감금시킴으로써 두 진영의 정치적인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로, 앞서 1618년 6월 25일에 공고된 국가총회의 개최가 현실화되었는데, 즉 1617년 11월 20일에 이미 결정된 장소인 도르트에서 오랜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네덜란드 국가총회가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29일까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르트 총회에 자국 인사들로는 네덜란드 주(州)의회들로부터 파송된 정치인 20명, 각 지역노회로부터 파송된 목사 30명과 장로 17명 그리고 네덜란드 다섯 대학교의 교수들 5명이 참석했다. 개회일 때 항론파 인사들은 우트레흐트로부터 겨우 3명만 왔고,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소환된 회기 때인 1618년 12월 6일 - 1619년 1월 14일에는 15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1618년 6월 25일에 발송된 초청장을 받고 참석한 외국 인사들은 8개 지역의 27명이다: 영국(6명), 팔츠(3명), 헤센(4명), 스위스(5명), 제네바(2명), 브레멘(3명), 엠덴(2명) 그리고 나싸우-베테라우(2명).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대표는 다양한 내부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도르트 총회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를 넘어선 유럽 개혁주의 교회연합의 국제적인 종교회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펠라기안적인 구원론을 주장한 알미니안주의(항론파의 입장)는 정죄되었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론이 다섯 가지 교리적인 항목으로 정리된 도르트 신조가 채택되었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그 밖에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의 신조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르트 교회규범도 승인되었다.
도르트 총회는 단순히 당시 활동했던 알미니안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을 정죄했다는 것에만 의의가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핵심적으로 4세기에 펠라기우스가 등장한 이래로 논쟁이 지속되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 교회 그리고 신자의 삶이 명백하게 규명되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우리의 가려져 있는 눈을 열어서 인간적인 헛된 망상을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리를 위해 나서게 한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앞에 우리가 겸손과 경외로 엎드리며 사는 삶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