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德)이란 무엇인가?
[편집자 설명: <리포르만다> 운영자 이름의 뜻은 "최고의 덕(德)을 이루라"입니다. 이 이름을 선물한 부친은 동양인, 한국인입니다. 덕이 무엇이라고 이해했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고경태 박사가 <형람서원>에 게시한 글 "덕이 무엇인가?"를 옮겨 소개합니다.]
우리는 단어의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어의 개념(정의)이 다르면 서로의 대화는 전혀 의미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자(말하는 사람)가 사용하는 단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기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덕(德, virtue)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덕은 동양과 서양의 공유하는 용어이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양의 덕 개념을 빈번하게 배우는 반면에서, 동양적 사고의 덕, 한국적 사고의 덕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서양 저서들을 번역하고 그것을 학문의 기초로 삼아 배움을 진행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덕은 플라톤의 4 주덕 곧 정의, 지혜, 용기, 절제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7 주덕(4 주덕 + 사랑, 믿음, 소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네시스(phronēsis, 실천의 지식)에 근거하여 덕이 순환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견해에 근거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도 덕에 대하여 말합니다. 철학자나 신학자도 덕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주저 하지 않습니다.
합의, 일치된 정의는 없지만 공통된 것은 “인간의 자질”입니다. 인간의 특성과 성질을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특징은 교육으로 형성될 수 있는 후천적 성격입니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테(ἀρετή, arete)의 어휘적 의미는 “어떤 종류의 우수성”입니다. 덕은 훈련과 연단을 기본으로 하는 특성 계발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덕을 천리마에 비유합니다.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말이 천리마가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싣고서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 천리마입니다. 말의 기본은 잘 달리는 능력이지만, 우리가 논하는 것은 잘 달리는 자질의 방향성과 기능성입니다. 덕은 타고난 본성(nature)과 훈련되고 양육된(nurture) 특성입니다.
본성대로 방치된 것은 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도 아닙니다. 본성대로 방치된 것은 필연적으로 무질서입니다. 무질서는 가장 강력하게 자연을 부패시키거나 파괴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덕(virtue)과 건덕(edification)을 구분합니다. 교회의 목적 중 하나는 건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덕을 위한 건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건덕을 세우는 과정은 권징(disciplne, 경건훈련)입니다.
인간은 각각 개별체입니다. 그런데 개별적인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해야 자기 결핍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결핍의 원인은 죄의식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식(부끄러움)을 갖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나르시즘이나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는 병든 상태로 간주됩니다. 죄의식을 극복, 제거하고 자유를 얻어야 만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 8:32)고 합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요 17:3). 영생은 아버지께 받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함께 살 때 필요한 것이 곧 덕입니다. 덕이 있으면 사람을 주도하는 지도력이 있으며, 또 그 지도력을 따르는 순응력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력이 미치지 못할 때는 견딤 곧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도력에 대한 불만을 참고 견디게 하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도할 수 있는 용기와 따를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분석한 4주덕은 상당히 심오합니다.
동양에서 덕은 초월적 존재 신과 함께하는 인간 본성을 의미합니다. 유교는 덕과 예를 기본으로 한 인간의 탁월성을 지향합니다. 즉 덕은 인간 내면에 있는 행동의 근거입니다. 유교의 오상은 인의지예신(仁義禮智信)입니다. 서울의 궁성의 문들은 이것을 따라 이름붙였습니다. 남대문은 숭례문, 동대문은 홍인지문, 북대문은 숙정문, 서대문은 돈의문입니다.
덕은 인간사에 있는 모든 좋은 성질을 붙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덕을 이룸을 위한 방법은 다양합니다. 철학은 덕을 추구하고, 종교도 덕을 추구합니다. 철학이 추구하는 방법과 종교가 추구하는 방법은 같지 않습니다. 덕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입니다. 종교는 덕이 아닌 신일합일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유교는기복을 싫어합니다. 인간 존재를 까닭없이 격양시키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덕입니다.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형람서원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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