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쉐퍼의 네 가지 도전
우리 시대에 우리가 강조해야 할 네 가지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는 쉐퍼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는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며 장로교 목사이자 복음주의 운동가이다. 쉐퍼는 신학적 모더니즘를 반대하고 역사적 개신교 정통 신앙을 촉진시켰다. 자기 시대의 질문에 대답할 기독교 변증학을 위해 전제주의 변증 방법을 발전시켰다. 성경을 통해서 철학과 문학 그리고 사회와 정치를 분석하고 예언적 방향을 제시헸다. 그의 접근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라브리공동체를 창설하여 \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과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토론하고 기독교 문화에도 많은 도전을 주었다.]
프란시스 쉐퍼의 여러 공헌들 가운데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회의(로잔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중요한 기여의 하나로 들 수 있다. 특히 이번에 분석하고 같이 대화해 보려고 하는 <두 내용, 두 실재>는 로잔 대회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회 주최 측으로부터 보내졌던 프란시스 쉐퍼의 “주제 논문”(position paper, 1974)이었으므로, 로잔대회에서 쉐퍼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강조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30년 전에 쉐퍼가 그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지적했던 문제는 3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의미 있게 숙고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내용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쉐퍼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 시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우리가 점차 직면하게 되는 점증하는 압력에 바로 맞서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네 가지 요점이 있다고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바른 교리(sound doctrine), 솔직한 질문들에 대한 진솔한 대답들(honest answers to honest questions),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 그리고 인간관계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human relationships)이다(전게서, 이하, 407). 쉐퍼는 이 중 앞의 두 가지를 ‘두 가지 내용’이라고 하고, 나 중 두 가지를 ‘두 실재’라고 명명한다. 이 네 가지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세대 안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422). 이제 우리가 가져야할 그 네 가지가 과연 무엇인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내용: 바른 교리(sound doctrine)
‘바른 교리’라는 말로서 쉐퍼는 기독교의 중심 요소들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 내용을 뜻한다. 이를 언급할 때 그는 우리가 특히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실존주의 신학에 대해 양보하고 절충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407). 물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같이 주장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양보와 절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408).
그런데 쉐퍼가 좀더 우려하는 것은 이렇게 이론적인 신정통주의보다는 그가 ‘복음주의적 실존주의’라고 표현하는 “묻지 말고 믿으라”(Don't ask questions, just believe)는 태도의 융성이다(408). 이와 같은 태도는 언제나 잘못된 것인데, 특히 현대와 같이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명확히 나누고 종교적인 것들을 비종교적인 영역에 위치시키는 일관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 잘못되었다고 말하다(408). 묻지 않고 믿는 것이 더 영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08). 복음이 진리라고 이해하고 믿을 사람은 전인이므로 우리는 지성을 포함한 전인에게 접근해야 한다.
물론 얼마나 많은 내용을 전하고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대상에 따라 다를 수 있다(408). 그러나 그 어떤 정황에서도 우리는 풍성한 내용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408). 불충분한 내용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믿기로 하고,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했다고 하는 것은 실상은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쉐퍼는 자신의 라브리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강조한다(408).
그 한 예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409).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이들은 무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시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가치를 지니며, 사람의 문제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 타락에서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정항한 데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참되다고 생각하며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게 되면 잘못하다가는 그들로 곧 기독교적 진리에서 벗어나 멀어지게 하고 다시 복음과 진지하게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상실하게 할 수 있기 쉽다는 것이다(409).
‘복음주의적 실존주의’에 빠지는 또 하나의 길은 창세기 전반부를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다(409). 그러나 사실 창세기 전반부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space-time history)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위해 죽으러 오셨는지를 알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이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409).
그런가 하면 성경에 있지 않은 것을 마치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잘못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사회 중산층의 가치 기준을 마치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것과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410). 히피 복장을 한 사람이나 그 사회에서 잘 용인하지 않는 복장을 한 사람들의 대한 교회의 반응이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것들과 동등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과거의 복음주의 교회가 인종 문제에 대해서 아주 연약한 입장을 나타내 보인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고 쉐퍼는 언급한다(410).
이와 같이 바른 교리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아주 강한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쉐퍼는 강조한다(410). 그리고 강한 교리적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그 교리를 참으로 신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자녀들과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 삶으로 드러내어 보여 주어야 한다(410).
바른 교리에 대한 그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쉐퍼는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우리가 믿는 성경적) 내용에 대해 강한 강조를 해야 한다(412). (2) 성경의 명제적 성경에 대한 강한 강조가 있어야만 한다. 특히 창세기 초반을 다룰 때 말이다(412). 기독교적 진리는 명제들로 진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416). (3) 진리의 실천에 대해서 강하게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해도 성경적 내용과 진리의 실천이라는 기독교적 기초 위에 있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집을 건축하려는 것이요, 결국 혼동을 낳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12).
둘째 내용: 솔직한 질문들에 대한 진솔한 대답들(honest answers to honest questions)
둘째 내용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진리이므로, 우리는 솔직한 질문들에 대한 진솔한 대답들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412). 성경에는 지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이분법이 있지 않다(412). 우리는 기독교에 덧붙여진 플라톤주의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인(the whole man)을 창조하셨는데, 그 전인이 타락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몸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the whole man)이 구속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도 사람과 그 존재의 모든 부분을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412). “기독교가 성경이 선포하는 바와 같은 진리라면, 그것은 삶의 모든 측면과 다 관련되어야만 한다”(413). “우리의 사람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셔야 하고, 성경이 그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413). 소위 영적인 것만 성경 아래 있고, 지성적인 것과 창조적인 것은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사람의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성경 아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쉐퍼는 이렇게 성경으로부터 대답하는 사역의 대표적인 예로 바울의 사역을 들고 있다. 바울의 사역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토론의 사역’(a ministry of discussion)이었다고 한다(413). 때로 고리도 전서에서 바울이 지성의 사용에 대해 반박하며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쉐퍼는 강조한다(413). 고린도전서는 사람이 자율적이 되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자신의 지혜나 자신의 지식에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려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다(413). 즉, 바울은 인간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지성주의를 반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사역도 계속해서 질문에 답하시는 사역이었고, 그는 질문에 대답하시는 분이셨다(413).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종류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동감적 마음을 가지고 질문을 들어야 한다. 그들의 질문이 참으로 무엇인가고 물으면서 대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잘 대답할 수 없거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책들을 읽고 연구해야만 한다(414). 물론 우리가 대답해 주고 그가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게 될 때 이루어진다(414). 즉, 우리는 먼저 우리가 자율적인 인간이 아니라 창조자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사역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기도하고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할 정도로 동감하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414).
이상에서 우리는 쉐퍼가 강조하는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쉐퍼가 말하는 두 가지 실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 하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게 되는 실재(영적 실재)이고, 또 하나는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사람과 사람간의 아름다운 관계라는 사랑의 실재이다.
첫째 실재: 참된 영성
우리는 앞에서 명제로 진술될 수 있는 기독교적 진리를 강조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목적은 단순히 명제들만을 반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른 명제를 가진 후에는 하나님을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416). 진정한 영적 실재를 가지지 못한 추한 죽은 정통은 거부되어야만 한다(416).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삼위일체 전체의 매순간의 사역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현재적) 의미이며(416), 이를 쉐퍼는 ‘진정한 영성’(true spirituality)라고 부른다(417). 쉐퍼는 그가 '진정한 영성'에서 말한 바를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근거한 순간순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이전의 라브리에서의 지성적 토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라브리와 같은 것은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417). 영적 실재는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완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417). 하늘(Heaven)에서 돌아본다면 여기서의 우리의 삶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진정한 영적인 실재는 여기서도 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 실재: 인간관계의 아름다움
둘째 실재는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라는 실재이다. 참된 기독교는 진리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도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과의 따뜻한 인간관계에 근거해서 세상에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417).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과연 누구인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이다. 현대인은 인간이 사람이 아닌 존재들과 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알지 못함으로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417f.).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사람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로 여겨야만 한다(418). 바로 여기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엄한 존재로 여겨야 하고, 더 오랜 관계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도 서로를 존엄한 존재들로 여겨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의 신학에 대립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우리는 존엄한 인간으로 여기며 대우해야 한다(418f.). 신학적으로는 대립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는 가능하다(419). 성령님의 능력에 의존하면,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때에도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우리 자녀들의 눈앞에 우리는 우리가 선포하는 진리를 파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419).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동물들이나 기계로만 여기는 현대인의 빙식과는 아주 대조되는 인간관계의 방식을 나타내야만 한다. 아주 다르기에 세 상이 복음을 듣게끔 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권하게 할 만큼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복음주의자들인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해 있을 때 서로 다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을 대우한 추함에 대해서 우리를 요서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419).
쉐퍼는 이렇게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을 공동체의 정통성(an orthodoxy of community)이라고 말하기도 하고(420, 422), 실천하는 공동체(practicing community)가 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20).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약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그런 교회, 예를 들어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 말씀의 진리 가운데서 하나가 된 안디옥 교회 같은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물질적 필요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잘 돌아 보는 그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420, 421). 공산주의는 아니고, 각기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나누어 쓰는 독특한 공동체를 말이다(421). 이런 뜻에서 쉐퍼는 ‘우리가 복음주의적 교회들 안에서 과연 이런 공동체를 드러내었는가?’라고 진지하게 질문한다(420).
쉐퍼의 권고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1974년도에 쉐퍼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주었던 권고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과연 지난 30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쉐퍼의 권고를 제대로 받아들였는가?
안타깝게도 복음주의자들 중의 상당수는 쉐퍼가 말하는 바른 교리를 저 버리거나 바른 교리를 양보하고 절충하였다. 쉐퍼 자신은 10년 후인 1984년도에 그런 현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우려하면서 복음주의권의 대재난을 말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로부터 20여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는 그런 현상이 더욱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던 것을 학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도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학문을 포기해 버린 반면에(쉐퍼가 염려하던 반지성주의의 승리), 또 한편의 일부 복음주의주의자들은 학문의 이름으로 그들의 신앙을 더 많이 양보하고 절충해 가고 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좁은 의미의 복음에 집착하여 복음의 풍성함과 성경의 풍성함을 잊은 반면에, 또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학문적 교류를 위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솔직한 질문에 대해 진솔하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대답한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질문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순간순간 경험하는 일에서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순간순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를 하고 있지 않다.
그 결과로 많은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이들도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가장 아름다운 인간성과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에서 실패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루는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고, 복음주의적 교회들 간의 아름다운 교제도 부족하며, 이 세상 앞에 교회의 참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도 못하다.
쉐퍼가 30년 전에 경고하던 바에 많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도 동일한 문제와 역기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러 모로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하는 말만은 아니다. 마치 30여 년 전 쉐퍼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시대의 교회를 새롭게 하며, 그 시대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제안할 때, 그는 절망을 토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그리했던 것처럼,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더 어두운 밤에도 동일한 꿈을 꾸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들 안에 ‘교리적 정통성’(the orthodoxy of doctrine)과 공동체적 정통성(the orthodoxy of community)이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의 사명이며, 그 결과로 이 땅 가운데 진정한 기독교가 있게 해야 한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와 신학> 2006년 9월호 기고 글, 이승구 교수의 개혁신학과 우리 사회 이야기 http://blog.daum.net/wminb/7864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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