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라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라합’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무엇입니까? 라합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보통 기생 라합을 기억합니다. 당연히 이름 앞에 강조된 ‘기생’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목회자라면 한두 번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할 만큼 널리 알려진 성경입니다. 하지만 기생 라합에 대한 설교 영상이나 설교내용을 보면 거의 동일합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서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라합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이 신앙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지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설교자의 몫입니다. 그 길을 함께 고민하며 떠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정탐꾼(정찰병) 두 명을 여리고로 파송했습니다. 속전속결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리고는 싯딤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중심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여리고를 정복하지 않고는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했습니다. 가난안 전 지경은 우상숭배와 다신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여리고는 이미 비상사태였습니다. 여리고를 통치하던 대통령은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역시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공포가 싸늘하게 녹아있었습니다.
여리고에 입성한 정찰병은 라합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주목할 것은 라합의 이름이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라합은 우상숭배하는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아무 문제의 소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2장 1절에 라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는 장면이 특이합니다.
Then Joshua, the son of Nun, sent two men from Shittim secretly, with the purpose of searching out the land, and Jericho. So they went and came to the house of a loose woman of the town, named Rahab, where they took their rest for the night.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수2:1).”
“라합이라 하는 기생.” 성경은 라합을 기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생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a loose woman, BBE 성경), 술집을 운영하는 여성 혹은 매춘부, 창녀(harlot, KJV)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수아 2장에는 라합의 이름이 총 6번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한 번 여호수아 2장 1절에서 그 라합을 “라합이라는 기생”으로 묘사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함락 될 당시의 기록을 담은 여호수아 6장에는 기생의 집(22절), 라합(23절), 기생 라합(25절)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여호수아 2장과 6장에서 라합의 이름이 총 아홉 번 등장하고 있으며 세 번 기생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기생의 집(2번), 기생 라합(1번)입니다.
아홉 번에서 세 번은 3분의 1입니다. 6을 생각하면 3은 그 닥 커 보이지 않습니다. 숫자로만 생각하면 당연이 6에 신경이 씌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합이라는 이름 보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 자꾸 기생이라는 단어에 꽂힙니다. 그 단어가 갖는 부정적 요소가 크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라합에 대한 기사가 총 세 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은 라합, 히브리서 11장 31절은 기생 라합, 야고보서 2장 25절도 기생 라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여호수아 2장, 6장의 내용과 모두 연결되는 문장입니다.
라합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은 기생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기생이라는 단어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라합을 기생이라는 단어의 안경을 쓰고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이라는 인물에 대해 객관적 분석이 약화되는 실정입니다.
과연 라합은 지속적으로 기생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인물일까요? 정찰병이 라합을 만났을 때도 몸을 파는 매춘부였을까요? 기생 라합이라는 단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지속적으로 매춘을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면 합당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어느 날 교회에 라합이라는 여성이 출석했습니다. 성품, 외모, 믿음, 빠질 것이 없는 자매였습니다. 헌신과 섬김, 물질로도 이름 없이 봉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교회 안에 가득했습니다.
“라합은 전에 매춘을 했던 사람이더라.”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라합을 라합으로 보지 않고 라합 앞에 창녀 라합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라합이라는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행실이 좋지 않은 라합, 기생 라합, 매춘부 라합, 창녀 라합 온갖 쓰레기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기생이라는 안경을 끼고 라합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인 라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녀의 틀로 투영해서 라합을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합은 견디기 힘들거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입고 완전히 교회를 떠났을지 모릅니다.
기생 라합 같은 사람을 현재 교회가 포용할 수 있을까요? 과거를 알고 나서 전과 같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요? 아무 마음에 거리낌 없이 라합의 인격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라합을 라합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고민해야합니다. 그 숙제를 안고 라합을 통해 하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의 중심 숲을 헤져나갈 것입니다.
2.
라합이 정찰병을 만나고 나누던 대화 내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And said to them, It is clear to me that the Lord has given you the land, and that the fear of you has come on us;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수2:9).”
이스라엘이 침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미 여리고 성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감담이 녹나니”는 녹아 “물처럼 흘러내리다”의 뜻입니다. 눈앞에 다가온 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며 ‘우리’는 여리고성 사람들입니다.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어수선한 상황에 라합의 목소리를 성경은 놓치지 않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내가 아노라.” “the Lord has given you.” 이것은 미래형 문장이 아닙니다.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이미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관찰하는 라합의 믿음입니다.
라합이 믿음의 시야로 그렇게 단정한 이유를 다음 성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For we have had news of how the Lord made the Red Sea dry before you when you came out of Egypt; and what you did to the two kings of the Amorites, on the other side of Jordan, to Sihon and Og, whom you gave up to the curse.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수2:10).”
하나님이 홍해를 가른 일과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역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난 역사가 여리고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라합을 포함해 여리고 사람들이 모두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다음 성경구절입니다.
And because of this news, our hearts became like water, and there was no more spirit in any of us because of you; for the Lord your God is God in heaven on high and here on earth.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11).”
‘우리’는 여리고성 사람들의 마음이지만 “상천하지의 하나님”은 라합의 고백입니다. 최고의 신, 신중의 신, 역사의 통치자, 뛰어난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을 라합은 믿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을 여호수아 2장과 6장에서 실제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총 결론을 히브리서 11장 31절이 내리고 있습니다.
By faith Rahab, the loose woman, was not put to death with those who had gone against God's orders, because she had taken into her house in peace those sent to see the land.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는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는 라합의 믿음입니다.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는 여호수아 6장에 등장하는 라합의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은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의 모든 행위는 믿음에 의한 행동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로 그 시대마다 가장 뛰어났던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시대마다 믿음의 챔피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네스북에 올라온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는 라합은 이미 믿음을 소유했던 인물입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증한 라합이 계속 매춘부 생활을 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미 라합은 성경에 최초 등장할 때부터 기생의 삶을 깨끗이 정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절에 나오는 기생의 집도 현대인의 성경은 “라합이라는 기생이 운영하는 어떤 여관”으로 번역했습니다. 라합이 매춘부나 술집을 경영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기생 라합의 표기에도 라합이 계속 기생 생활을 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라합이 정탐꾼을 만났을 때에도 기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면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라합의 이름 앞에 붙은 ‘기생’이라는 단어로 인해 이미 기생노릇을 청산한 라합을 라합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라합이 살아있다면 수없는 사람들이 라합을 통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은연중에 라합이 숨기고 싶었던 과거 직업에 대해 흘리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끝까지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이 라합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고민하기 바랍니다.
3.
사사시대에 베들레헴 지경에 기근이 심해 나오미(Naomi) 가족은 모압(Moab)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남편(Elimelech)이 사망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두 아들(말론과 기룐 Mahlon and Kilion)은 이방인이었던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두 아들도 모압에서 사망했습니다.
홀로 남은 나오미의 삶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압에서 이민 생활을 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감회를 직접 들어 보겠습니다.
“And she said to them, Do not let my name be Naomi, but Mara, for the Ruler of all has given me a bitter fate.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1:20).”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심중에 바위섬 하나 박혀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였던 룻(Ruth)이 함께 동행 했습니다. 사실 아들이 살았을 때는 며느리였지만 나오미의 아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남입니다.
룻은 베들레헴에서 거부(지주)였던 보아스(Boaz)와 결혼을 하고 오벳(Obed)을 낳았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재혼을 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오벳을 나오미가 안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피한 방울 섞이지 않았습니다. 친손자, 외손자도 아닌 족보에 들어갈 수없는 아이입니다.
And Naomi took the child and put her arms round it, and she took care of it.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룻4:16).”
만약 세상에서 가장 행복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는다면 오벳을 품고 있는 나오미의 풍경입니다. 기쁨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최고의 그림입니다. 물론 ‘기업 무르기’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미의 삶에 넘치게 담겨있습니다.
이웃들의 반응도 흥겹습니다. 나오미를 칭송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진풍파를 이겨낸 인생 말년에 확인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And the women said to Naomi, A blessing on the Lord, who has not let you be this day without a near relation, and may his name be great in Israel.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룻4:14).”
다시 기억을 되돌려 보십시오. 오벳의 아버지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Salmon)입니다. 그 살몬의 아내가 여호수아 2장에 최초로 등장했던 라합(Rahab)입니다. 그렇다면 오벳과 라합과의 관계는 친할머니입니다.
나오미가 오벳을 안고 그렇게 행복했다면 라합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기쁨의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라합의 품에 안겨있는 오벳의 그림을 마음껏 감상해 보십시오.
수년 전 필자 가족은 한국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종화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월급 받은 것을 친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수년이 지난 지금도 손녀가 건넨 돈 봉투를 성경 갈피에 넣어 두고 하루 서너 번씩 꺼내 보는 행복을 말씀합니다.
그때 처음 장성한 손자, 손녀와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진을 남겼습니다. 여전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확대해서 걸어 놓은 사진 속 손자, 손녀의 모습을 보며 삶의 의미를 새깁니다.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바라보는 마음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라합이 안고 있는 오벳의 두 그림은 필경 감동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거부였다면 당연히 그 시대 풍조로 아버지 살몬도 거부입니다. 라합의 말년 삶도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라합에 대한 말년의 삶의 기록이 전무합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And the son of Salmon by Rahab was Boaz; and the son of Boaz by Ruth was Obed; and the son of Obed was Jesse;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1:5).”
왕의 족보에 이름이 등재된 기록에는 기생이라는 꼬리표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왕의 족보에 라합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 어떠한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이것 보다 더 좋은 축복이 없습니다. 비교대상이 없는 축복입니다. 라합의 말년을 성경이 침묵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창녀가 신앙인이 되어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간증을 한다 해도 남녀 간에 그 지저분한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감동이 있겠습니까? 듣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 모두 불편할 뿐 아니라 거북한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우상숭배하다 크리스천이 되었다든지,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든지, 무당, 스님, 점쟁이가 믿는 자가 되었다든지, 마약 하던 사람이 회복되었다든지... 그런 유의 간증은 들어봤지만 창녀의 간증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매춘은 숨기고 숨겨도 수치스런 단어입니다. 아무리 창녀 생활을 청산했다해도 그 과거가 들어나면 부정적인 시각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매춘을 했지만 나는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우월감입니다. 과연 우리는 기생 라합 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까?
하나님이 ‘기생’이라는 단어를 노출 시킨 것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내 자신을 살피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철저히 검증하라는 경고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기생 라합보다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죄인과 창녀 중 누가 더 고상합니까? 죄인은 본질 상 죽은 존재입니다. 죽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존재입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아니 마이너스 1000입니다.
For this reason, as through one man sin came into the world, and death because of sin, and so death came to all men, because all have done evil: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하나님이 기생생활을 청산한 라합의 이름 앞에 ‘기생’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해서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도 라합 보다 우위를 선점할 잘난 내용이 인간에게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유는 인간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선에서는 위, 아래 없이 존재론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창녀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죄를 벗는 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난 받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의 본질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생 라합의 구원을 통해 나의 구원이 확이 되어야 합니다. 창녀 보다 못한 나를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야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에 와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증명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구속을 설명하는 실제가 없습니다.
기생 라합의 가치는 왕의 족보에서 라합의 이름으로 기록될 때입니다. 왕의 족보 밖에서 아무리 기생, 창녀가 강조 되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왕의 족보에 등재된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원의 최절정입니다.
오늘부터 보좌의 라합처럼 당당히 세상을 이기십시오. 왕의 후손답게 그 은혜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기를 축복합니다.
백승철 목사, 시인 (칼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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