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횡경막: 고난주간 묵상
옛날 옛날에 처음으로 설교했을 때의 일이다. 설교-예배가 끝나고서 우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들 가운데 눈이 퉁퉁 부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황급히 나가는 한 여성이 있었다. 유소년부 교사를 시작한 분이었다.
몇 주 뒤 유소년부에 뭔가 문제가 있어 지도 좀 하려는데 이 여성분의 안색이 싹 돌변하는걸 보았다. 대번에 나는 ‘접때 설교 듣고 대성통곡한 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과 신앙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얼마 전 한 유명하다고 알려진 한 시인이 방송에 나와 ‘굴욕 외교’이니 뭐 그런 정치 이슈와 관련해 자기는 임진왜란 때 끌려가신 분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도 눈물이 안 나기 때문이다.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신학자 한 분은 강의를 하다가 최근 대한민국 대통령이 천안함 55명의 전사자 이름을 부르다 목이 메어 약 5분을 멈칫 울먹인 것처럼 울먹였다. ‘인자 예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약 5분간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훗날 그의 가까운 직계 제자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자는 그 신학자가 돌아가기 직전 그분을 방문한 자리에서 “선생님, 예수님을 믿으시냐”고 나직이 물어봤단다. 그랬더니 고개를 가로로 저으시더라고 했다. 고인이신 이 저명한 신학자가 주창하신 신학을 이름 하여 ‘민중신학’이라 부른다.
이 신학자가 울먹인 ‘인자 예수’란 나사렛 예수가 아니다. 그 시대의 모든 가난한 민중을 지칭한 술어이다.
그로부터 2천년 이후에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가장 큰 난제는 성경 활자의 어떤 어려운 난독화 코드가 아니다. 2천 년 전처럼 슬퍼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한 촌락의 그 한 사람 예수에 대한 슬픔보다는 복수의 민중 또는 익명의 예수를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우는 시인처럼 고도로 훈련된 시적 감성을 동원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집어넣고 섞어 우는 방법이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인 오늘 이 맘 때는 언제나 고난주일인 동시에 기쁨의 종려주일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듣다가 순식간에 안색이 달라지는 날이다.
오늘을 기념하여 1세기의 성경저자는 ‘넘겨주다’라는 동사에 주목했다. 파라도테세타이(παραδοθήσεται), 완전히 팔아먹는 걸 뜻한다. 1세기에는 예수를 종교와 제국에 팔아먹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은 주로 감성을 이성에 팔아먹거나, 이성을 감성에 팔아먹는다. 앞에 든 예시의 경우처럼 말이다.
오늘의 주일예배 곧 고난주일 본문 중 첫 절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주문이 들어 있다. 원문에는 순서가 바뀌어 “품으로 이 [마음]을”(τοῦτο φρονεῖτε)로 시작하는 일종의 노랫말이다. 이 구절에는 ‘마음’이라는 명사가 들어 있지 않다. ‘품으라’고 하는 동사 안에 ‘마음’을 내장하고 있는 독특한 어휘의 문장이다.
이 프로네이테는 당대 헬라 문화에서 지혜를 촉구하는 동사였다(‘너 주제를 알라’와 같다). 횡경막을 뜻하는 명사 프렌(φρήν)에서 파생한 말이다.
요즘 의학에서도 쓰는 심장을 의미하는 카르디아(καρδία)가 동적이라면, 프렌은 감싼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는 뭔가를 막는다는 뉘앙스도 있다.
‘프렌’도 심장으로 쓰일 때가 있지만 카르디아는 약간 다른 셈이다. 감싸는 뉘앙스 때문에 언제나 모종의 이해를 동반한다. 이 문장은 이 횡경막 곧 장기 기관을 뜻한다. 2천 년 전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으로, 우리 것과 동일하다. 실상 이 문장을 해독하는 것보다 ‘이 마음을 품는’ 일이 더 훨씬 어렵다.
남미 지역의 그리스도교도 전통에는 실제로 손바닥에 못을 박거나 횡경막 근처 피부를 긁어 피를 흘리는 미신이 성행한다. 그럴 용기가 없는 현대인은 그런 짓을 미개하게 여기고 익명의 민중이나 자신의 처지를 ‘이 마음’으로 바꿔치기 한다.
횡경막의 떨림이 내 장기에 느껴지는 방도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는 일 밖에는 없다. 오로지 죄를 통해 진입하는 것이다. 이 ‘죄’란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모든 죄에 선행한 타고난 죄를 말한다.
아 고난 주간의 시작입이다.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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