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 목사는 고려신학교 총무였는가?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손양원 목사(1902-1950) 순교 60주년을 맞으면서 그의 순교를 기념하는 여러 모임이 개최되고 있다. 지난 5월 14일에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용서와 화해의 순교자 순양원 목사’란 주제로 발표회가 있었고, 6월 22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역사위원회가 주최한 손양원 목사 기념 심포지엄이 전남 여수에서 열러 그의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9월 9일 경남 밀양 마산교회에서 모인 영남인물사연구회도 손양원 목사의 삶의 여정을 헤아려 보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9월 28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한국기독역사학회와 손양원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 세미나에서는 손양원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구라활동, 그리고 해방 이후의 생애를 점검하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필자와 관련된 모임만도 이 정도였으니 그의 삶의 여정이 오늘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가 걸어간 신앙여정이나 그의 삶의 행로는 우리 고신교회와 더욱 밀접하고 우리의 신앙노선과 일치하지만 정작 그를 기리는 일에 우리는 완전히 제외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런 문제를 관장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총회 ‘기독교문화유적보전위원회’를 통합이나 합동 교단의 경우처럼 ‘역사 위원회’로 개칭하고 교단 역사관련 사안을 총괄할 수 있는 기구로 개편해 줄 것을 기독교문화유적보존위원회를 통해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금년 총회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는 고신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그는 고신교단이 형성되기 이전인 1950년 9월 28일 순교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고신교단의 우산 아래서 사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말하면 그는 고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의 고신(苦辛)의 길을 가며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고신(拷訊)을 당하면서 오로지 주님 의지하고 외로운 고신(孤身)의 길을 걸어갔으니 그는 고신 정신의 적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손양원은 전남 여수에서 목회했지만 부산 고려신학교 설립과 그 이후의 고려신학교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허순길 교수는, 손양원은 1948년 5월 박윤선의 고려신학교 제2대 교장 취임과 함께 “고려신학교 총무로 봉사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1) 이점은 여러 논자들에 의해 거듭 주장되어 왔다.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인 주남선, 한상동과 신학이념을 같이했고, 신사참배 반대와 거부로 함께 옥고를 치른 점에서 정서적으로 동지적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손양원의 고려신학교에의 관여와 후원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흔히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주남선, 한상동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 이 일을 주도한 인물은 한상동이었다. 1946년 봄 한상동의 주도로 주남선을 만나 신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1946년 5월 20일 경남 진해에서 한상동은 주남선, 박윤선, 손양원 등과 함께 신학교 설립에 대한 합의를 거쳐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이 회합에 손양원이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상동은, 손양원 목사도 이런 취지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그를 기성회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한상동과 손양원 양자는 근친한 관계에 있었고 서로를 이해하는 믿음의 동지였다. 이런 근린간계에서 한상동은 손양원을 부산의 고려신학교 기성회에 함께 동참하도록 권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손양원은 전남 여수에 체류하고 있어 직접 한상동과 의견을 나눈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신학교 설립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이다. 이 점은 그가 고려신학교 설립과 그 이후의 학교 운영을 위해 후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즉 손양원은 고려신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1946년 7월 20일 초량교회와 마산교회의 후원에 이어 세 번째 후원자로 일금 500원을 후원하였다. 고려신학교가 정식 개교(1946. 9. 20)한 이후인 11월 12일에는 다시 500원을, 1947년 11월 16일에는 5,000원을 후원했다.3) 당시 전임교수였던 박윤선 교수의 봉급이 1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손양원의 후원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비록 손양원은 지역적으로 멀리 있었으나 고려신학교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5월 박형룡는 한상동과의 의견 대립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고신에서 철수했다. 그해 6월 초 박윤선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신학교가 설립된 후 겨우 2년이 지난 때였고, 박형룡이 떠난 고려신학교는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과거 박형룡의 교장 취임과 함께 조선신학교를 떠난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편입해 왔으나,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나자 고려신학교 학생 50명이 고려신학교를 자퇴하고 박형룡을 따라 서울로 갔다. 34명이 편입해 왔으나 50명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이다. 박형룡이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들은 고려신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북 출신 학생들은 전부 고려신학교를 떠났고 이제 남은 수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에서 박윤선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고신(高神)의 행로가 고신(孤身)의 길임을 보여주었다. 심리적 좌절감이 허름한 적산가옥의 광복동 교사를 무겁게 감싸고 있었다.
이때 박윤선도 고심을 거듭했다. 박형룡의 요청을 받아드려 그도 박형룡과 행동을 같이할 것인가? 아니면 고신에 남아 학교를 재건해야 할 것인가? 박윤선은 박형룡의 고신철수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드렸다. 비록 후일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박윤선은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일을, “한국장로교 전체에 바른 신학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한 일이므로 그렇게 한 일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4) 그러나 그가 박형룡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다른 집을 세우려는 건가요?”라는 박형룡의 의혹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박윤선은 고려신학교의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려신학교에 남기로 한 것이다. 특히 그는 한상동, 주남선과 더불어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자며 기성회를 조직하며 동참했던 2년 전의 합의를 파기할 수 없었다.?? 이제 박윤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려신학교의 조직을 정비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교장 직을 수행해야 했던 박윤선은 손양원을 고려신학교 ‘총무’로 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당시 순천노회에 속해 있던 손양원이 부산의 고려신학교 총무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무’라는 이름으로 고려신학교와 관련지으려 한 일은 박형룡의 철수 이후 심리적 공백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손양원은 다른 출옥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흥회 집회 강사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고, 정서적으로도 고려신학교와의 통교(通交)의 순연한 내인(內因)이 있었다. 박윤선이 손양원을 생각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1948년 4월 20일 소집된 제34회 총회에서 순천노회가 최초로 고려신학교 문제를 총회적 차원에서 제기한 일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즉 순천노회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되는가?”라고 물었고, 총회 정치부장이었던 김관식(金觀植)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상태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설학교라는 점이 고지되었다. 순천노회의 질의 자체가 고려신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교장으로 취임한 박윤선은 순천노회 소속의 손양원의 협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손양원에게 고려신학교 ‘총무’라는 직을 부여했으나 실제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고려신학교 문서에서 총무직 자체가 언급된 바도 없고, ‘총무’의 역할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아마도 박윤선은 명목상 손양원을 고려신학교 ‘총무’라는 이름으로 협력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던 손양원은 ‘총무’라는 이름의 일을 한 일이 없다. 그는 여전히 여수 애양원 교회의 목사로 활동했고, 전국 교회를 순회하는 부흥강사였다. 아마도 그해 10월에 발생한 두 아들의 순교와 이로 인한 활동도 고려신학교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단지 손양원은 고려신학교 운영을 위해 기도하고 단 한번 후원했을 뿐이다. 그는 1949년 1월 11일자로 고려신학교에 3,000원을 후원하였고, 그가 시무하는 애양원교회 유치원 일동이란 이름으로 400원을 후원했다. 그해 7월 7일에는 애양원교회 강두례(1,000원), 차종석(2,000원) 양인이 고려신학교를 후원했는데,5) 이것은 손양원의 권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제한적이고 정신적 후원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1950년 9월 그가 순교함으로 총무라는 명목상의 직위도 곧 해제되고 만다.
정리하면 그는 목회자로 일하는 한편 고려신학교에도 관여하게 되지만, 고려신학교를 위한 그의 봉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손양원이 “고려신학교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해왔다”6)는 허순길의 언급은 사실의 적시라고 볼 수 있다.
1)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도서출판, 영문, 1996), 87. 동일한 내용이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국, 2002), 338에도 언급되고 있다.
2)허순길, 35.
3)고려신학교 회계록(1946. 5-1949. 12, 고신역사 기념관 소장 자료).
4)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99.
5)고려신학교 회계록(1946-1948).
6)허순길, 87.
위 글은 '남부산청년들' 카페(2010.10.13.)에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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