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적십자사
1. 칼빈주의 기독교
칼빈주의(Calvinism)는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을 강조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학과 신앙 체계이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성경적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체계화 된 프로테스탄트 주류 신학이다. ‘칼빈주의’는 칼빈과 쯔빙글리 등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오늘날에는 ‘개혁파 정통주의’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이라고도 부른다.
칼빈주의는 스위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영국, 스코틀랜드 등 유럽 전역에 자리 잡고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통해 확산되었다.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후대에 형성된 회중교회, 그리고 침례교회 일부가 칼빈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이 한창일 무렵, 여러 명의 종교개혁 신학자의 사상을 종합하고 체계화 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유독 칼빈의 영향이 큰 것은 기독교 신학과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한 그의 신학작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의 생피에르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쳤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미국의 초기 이주민들, 영국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인들을 포함한 이민자들은 대부분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와 중서부의 개혁교회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개혁교회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이다, 한국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칼빈주의를 앞세운 장로교회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헬베틱신앙고백(스위스), 도르트신조(네덜란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영국) 등은 모두 칼빈주의 기독교 신념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오직성경, 오직믿음, 오직은혜라는 종교개혁 원칙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성경의 주 개념인 언약사상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조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아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조약, 계약은 양방의 합의하에 체결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라는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일방적 선언으로 체결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신다. 인류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된다.
둘째, 구원론과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다. 인간이 전적 타락했으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선택했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언약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으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어떤 류의 칼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제한적 속죄론) 복음 역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기독교의 문화적 사회적 책임과 하나님의 영역의 주권에 대한 확신이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사회참여 또는 사회복음주의를 강조하기 이전에,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 원리가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믿었다. 개인영혼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환경, 예술, 스포츠, 산업, 자연보호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사회사업, 인도주의 활동, 문화발전, 평화운동, 핵확산금지 노력, 환경보호 등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유엔 제네바 본부와 기타 여러 국제기구들이 자리 잡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는 신정국가를 꿈꾸던 칼빈주의 기독교 신앙의 요람이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구원받은 기독신자들이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믿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본거지였다. 그곳에는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현 제네바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칼빈주의 기독교, 곧 오늘날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신앙전통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과 <정통신학과 경건> 그리고 필자의 역서 <개혁주의 전통>(존 헤세링크),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오스터헤이븐)을 참고하면 상세히 알 수 있다.
2. 앙리 뒤낭
장 앙리 뒤낭 (Jean-Henri Dunant, 1828-1910)은 칼빈주의 신념체계를 가진 가정에서 자라나 인류를 위해 중요한 일을 수행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적십자사의 창시자이며,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앙리가 태어나고 자란 스위스의 제네바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신정정치를 꿈꾸던 도시로, 아직도 그의 영향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앙리는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앙리의 부모는 약 300년 전의 제네바 신학자 존 칼빈을 존경하는 칼빈주의자였다. 어머니가 더욱 열성적이며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칼빈은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난 파리에서 교육을 받고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스위로 옮겨 가 살았다. 그의 프랑스어 발음은 장 칼뱅, 장 깔뱅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를 깔뱅주의라고도 한다. (필자가 칼빈, 칼빈주의라고 표기하는 것은 이 영어식 발음가 표기방식이 오래 전에 한국에서 고유명사화 되었기 때문이다).
앙리는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힘썼다. 1844년 영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기독교남자청년연합회(YMCA) 창설에 참가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활동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서, 북아프리카 알제리로 가서 그곳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製粉) 회사, 곧 밀가루 공장을 설립했다.
앙리는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다가 길에서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났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국적에 구애 없는 구호 활동을 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었다.
이 책에서 앙리는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 없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앙리는 적십자사 활동을 하느라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글을 옮겨 적는 힘든 일을 했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보불전쟁(프로이센 프랑스전쟁,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에스파냐 국왕의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했다. 그는 1892년에는 스위스 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 산이 바라다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앙리에 대한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평화롭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상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소년이 되었을 때 생일 날 많은 선물을 가지고 고아원에 가는 도중 발을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죄수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앙리는 17세 때 기독교남자청년연합회(YMCA) 회원들과 교도소를 방문하고서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원인이 대부분 가난과 무지 때문임을 알았다. 다음 날 당장 빈민촌을 방문하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도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앙리는 즉시 ‘사랑의 돌격대’를 조직하고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청년 앙리가 알제리로 간 것은 회사에 들어가 모범 사원으로 인정받아 그곳 책임자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 원주민들의 더욱 비참한 삶의 모습을 보고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으며 자립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물 문제를 해결하려고 프랑스 황제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앙리는 황제를 만나러 가던 도중 전쟁으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아군과 적군 모두를 치료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왜 적군까지 치료하느냐고 항의하자, 앙리는 우리나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당신의 자녀들이 적진에서 적군이라는 이유로 치료받지 못해 죽는다면 어떻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도 적군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소문이 퍼져 나갔다. 나폴레옹 3세는 앙리를 초청하여 구호품을 주고 적군 치료를 허락했다.
이탈리아 전쟁터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앙리는 스위스 제네바의 집에 돌아와 전쟁의 참상을 담아 위에서 말한 <솔페리노의 회상>을 출판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짐승들의 싸움과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의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아군이나 적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앙리의 주장에 동감했다.
3. 국제적십자사
앙리는 책을 펴낸 뒤 1863년 베를린 국제 군의관 회의에서 연설하는 등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박애 정신을 전했다. 그 해 10월 25일 16개국 사람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부상병 치료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거기서 12국 대표들이 모여 적십자 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전쟁터에 있는 병원과 의료진은 중립을 지킨다. 둘째, 일반 시민들도 부상병을 간호할 수 있다. 셋째, 부상병은 국적을 불문하고 치료한다.
이 단체는 붉은 십자가를 상징으로 정하고 그 이름을 “적십자사”라고 명했다. 1947년에 앙리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사의 날”로 정했다.
앙리는 적십자사 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각 나라에 지부를 설립했다. 자기가 소유한 것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 재산이 다 소비되자 결국 그는 파산했다. 런던과 파리 등지의 빈민가를 떠돌며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앙리의 삶은 아시스의 탁발 수도사 프랜시스를 떠올리게 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남을 돕는데 다 소비하고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다가 파리에서 런던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스위스 출신 어느 의사가 빈민가 사람들의 국적을 조사하다가 앙리를 발견하고 그를 스위스 하이덴에 있는 양로원으로 보냈다.
앙리의 선행이 점차 알려지자, 노벨상위원회는 1901년 그의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앙리는 노벨상 상금을 적십자사에 바치고 1910년 9월 3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앙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따라 한 마리 짐승처럼 무덤에 가겠다며 일체 장례행사를 거부한 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제네바에는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묘는 초라하리만큼 소박하다. 그는 죽은 후에도 ‘하나님 영광제일주의’를 말하고 있다. 앙리의 장례에 관한 이야기는 칼빈의 삶과 묘지 모습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사 설립자라는 영광스런 단어는 앙리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수식어일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노력을 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했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앙리의 존재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스위스이다. ‘스위스=평화’라는 인식은 앙리 덕에 굳어졌다. 스위스 주요 도시에 국제기구들이 들어서고 사람들과 돈이 모이게 된 것도 적십자사와 제네바회의 시리즈(series)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배후에는 제네바를 실제적으로 장악해 온 칼빈주의 기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위대한 삶은 신념체계, 가치체계에서 비롯된다. 앙리는 칼빈주의자 부모 아래서 자랐고, 칼빈주의 요람인 제네바에서 성장했다. 앙리와 칼빈주의의 관련성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그의 부모가 자상한 분들이었고,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앙리는 칼빈주의와 그 신학의 핵심인 언약사상과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정신에 대해 배웠을 것이 확실하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뒤낭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적,백애주의적인 신념이 적십자사의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 신앙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살벌한 전쟁터에서 붉은 십자가의 깃발은 휘날리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의 칼빈주의적 사상과 그가 성장한 도시 제네바의 정신 등에 비추어 볼 때 칼빈주의와 적십자사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구가 기대된다. 어쨌든 인류애를 실천하기 위해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나가는 국제기구 적십자사는 칼빈주의 기독교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앙리가 19세기 초 스위스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고, 기독청년회(YMCA) 활동에 적극 동참하여 제네바 지부에서 연락책을 맡고 있었던 점을 보면 그가 칼빈주의의 영향만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감옥 개혁자 엘리자베스 프라이와 근대식 간호의 선구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사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앙리의 인도주의적 사회사업과 적십자사의 출범은 칼빈주의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세 아이들
하나님은 내게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선물로 주셨다. 유학생 시절에 미국에서 태어나 지금은 모두 성인이 되어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태평양 상공을 매년 두세 차례 왕래하면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 곁에 하루라도 더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기러기 아빠’라는 조건 때문에 아이들에게 실제로 ‘좋은 아빠’가 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잘 돌보았다. 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잘 자라 주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할 것 밖에 없다.
나는 조국에서 봉사하고자 한국으로 귀환하여 신학교육과 학문 활동에 매진했다. 그 결단은 일면 아이들과 가족의 복지를 계산하지 않은 ‘믿음’의 선택이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는 내게 편지로 가족의 복지를 고려하여 미국에서 사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소명감은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게 했다. 한국으로 역이민을 온지, 어느 듯 20년이 지났다.
나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정신문화를 소중하게 여긴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것들을 배우고 싶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칼빈주의 신념체계를 따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감과 계시를 인간 인식을 뛰어넘는 진리전달의 수단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성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면서, 성경이 바깥세계에서 인간세례로 들어온 특별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소요리문답을 두 차례에 걸쳐 암송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는 매일 소요리문답을 식탁에서 한 문답 씩 가르치고 외우게 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하는 문답이다. 성인이 된 지금은 소요리문답 전부를 암송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신념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만사가 가르친 대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역사적 기독교 신념체계를 가르쳐 고백하게 하고 그 신앙에 부합하는 삶을 살며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봉사자가 되라고 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다. 이것은 역사적 칼빈주의 기독교 신념체계의 핵심이다.
뉴욕 맨하탄 끝자락 월스트리트에서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칼빈주의 신념체계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자란 ‘언약의 자녀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다. 오래 살면서 하나님이 이 언약의 자녀들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당시 딸은 유엔본부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월스트리트 45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막내 아들은 월스트리트 금융계에서 일을 하면서 세계금융기구(IMF) 총재를 꿈꾸고 있었다.
나는 칼빈주의의 언약개념을 아이들에게 주지시켰다. 하나님이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사랑하셨다. 언약관계는 이렇게 하여 형성되었다. 자식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언약의 자녀인 너희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가르쳤다.
성공과 행복은 궁극적으로 덤, 횡재(Serendipity)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앙리 뒤낭이 노벨평화상과 적십자사 창설자라는 명성을 얻은 것은 그가 그것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결과이다.
앙리는 우리에게 성공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이며,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나의 자식들이 자기 시대의 고상한 정신과 선한 문화와 유익한 교훈과 호흡하면서도 칼빈주의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열매 있는 삶, 봉사하는 삶을 살아 제2, 제3의 장 앙리 뒤낭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지나친 기대일까?
최덕성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2009.2.26.
위 글은 "리포르만다"(www.reformanda.co.kr)에 게재되었다가 사이트의 개편으로 사라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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