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기(韓半島旗), 석연치 않다
한반도기(韓半島旗, Korean Unification Flag)를 보면 석연(釋然)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흰색 바탕에 하늘 색 지도가 새겨진 이 깃발은 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서 남·북한을 상징할 목적으로 두 국가가 합의하여 만든 것이다. 남북정상들이 만남에서 사용되며,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반도기에 그려진 지도는 북쪽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에 제한한다. 모양은 가냘프고 색조는 얕아 진취적 기상을 가진 강한 나라, 위용 넘치는 국가의 상징, 영토를 확장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조직의 깃발답지 않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배운 역사에는 명백히 잘못 된 것이 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하는 대목이다. 학교 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교회 목사들도 그렇게 설교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대표 김준곤 목사도 종종 이 이야기를 소재로 감동을 주는 설교를 했다. 아주 틀린 역사 지식이다.
고려 창왕 2년(1389년) 박위가 이끄는 군사가 대마도를 정벌했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정벌군이 대마도를 휩쓸었다. 세종 1년(1419년) 이종무가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우리의 조국 고구려는 침략전쟁으로 세운 나라이다. 광개토대왕은 침략전쟁의 영웅이다. 정복군주이다.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 두만강에 제한하면 고구려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이고,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지방 호족 우두머리가 된다. 한반도기는 중국의 동북아공정을 정당화시켜 준다.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 현재의 지금의 남북한 땅을 가진 시기는 400년 정도 뿐이다. 조선 왕조 때부터 현재까지다. 한반도기에 그려진 영토는 조선국의 땅이다. 우리 민족은 광활한 북방 만주 땅을 영토로 삼아 종횡무진 누비며 지배했다. 왜 우리의 통일국가를 상징하는 기는 영토를 좁디좁은 현재의 남북한 지역에 고정시키는가?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이다. 전쟁 국가의 깃발은 단순하고 강렬해야 한다. 국경은 시시 때때로 변한다. 세계정세가 변하면 국경도 바뀐다. 대한민국이 강한 힘을 가지면 동북 지역의 옛 우리의 땅, 고구려 땅을 몽땅 되찾을 수 있다.
양계초(梁啓超, 량차치오, 1873-1929)는 중국의 근대 사상가다. 개혁가, 문학가, 사학가, 언론인, 교육가다. 압록강, 두만강을 국경으로 가진 조선이 일본에 의해 잡아 먹히던 1904~1911년까지 조선의 망국을 기록했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서울: 글항아리, 2014)의 핵심 부분은 옮겨본다.
일본과 조선의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고관들은 더구나 날마다 출세를 위한 운동을 하고, 새 조정의 영예스러운 작위를 얻기를 바라며 기꺼이 즐겼다. 무릇 조선 사람 1,000만 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감히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안중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조선에서 안중근 같은 사람이 중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 없는 자, 늘 강한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 약한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반드시 천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서양 학자들은 정치라는 것을 국민 심리의 반향이라고 한다. 이 말이 옳다면 정치 현상이 드러내는 바를 어찌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조선은 40년 전에 이미 군사훈련의 시급함을 알고서, 일찍이 군제를 개혁하고 외국인을 청해 교습을 했다. 그런데 그 나눠준 군량에 진흙과 모래가 섞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훈련받는 자들은 오래지 않아 곧 괴멸했다.
조선 백성은 본래 안일을 탐하여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정부는 또 착취를 그치지 않으니, 농민들은 1년 내내 부지런히 움직여도 먹을 것을 얻지 못했다. 때문에 온 나라의 밭이 다 버려지고 경작되지 않아 우거진 풀숲이 시야에 가득했다.
관리들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는 공석을 파는 것을 공공연히 거리낌 없이 했다. 과거시험에서 진사가 되려면 겨우 2,500원이면 가능했다.
조선은 외교에서 권모술수 부리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연합 분열 이간 포섭의 수완을 말한다. 늘 어떤 나라와 연합하여 어떤 나라를 막아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지만, 실상은 팔을 잘라 매를 먹이고 자신을 바쳐 호랑이에게 베푸는 것이었다. 매와 호랑이가 배부르지 않으면 몸뚱이가 문드러져도 죽을 때까지 각성하지 못한다.
조선 정치의 문란함은 다스릴 수도 없고, 썩어 문드러져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남산의 대나무를 다 쓴다 하더라도 그 1만 분의 일도 설명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어지러움을 도모함에 부지런히 힘쓰고, 분발하여 스스로 죽이는 것이었다.
미산 소 씨가 말하기를 “육국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했다. 일본이 별의별 궁리를 다해 남의 나라를 도모한 것만이 문제겠는가? 일본이 정예를 길러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만이 문제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왜 다른 나라를 도모하지 않고 오직 조선을 도모했으며, 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조선을 망하게 했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어쩌겠는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보라. 그 국토 면적과 인구가 모두 조선보다 훨씬 못하지만, 유럽의 여러 큰 강국이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그건 국제법상의 영구 중립을 빌려 다행히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전에 매우 강성했던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의 20여 개 작은 나라들을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음을 보지 못했는가? 또 이전에 매우 강성했던 오스트리아가 오랫동안 쇠약했던 이탈리아를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음을 보지 못했는가? 성대했던 영국이 사자가 토끼를 잡는 힘을 가졌지만, 결국 그들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허용함을 보지 못했는가?
이런 까닭에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지 일본이 아니다. 무른 조선 사람들은 망해가는 것을 스스로 즐겼으니, 또한 무엇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그러나 저들로 말미암아 청일, 러일 두 차례의 전쟁이 피땀으로 만들어낸 자원을 전비로 짜냈다. 일본 사람들은 이를 얻어, 회복할 수 없게 된 두 나라는 옆에서 조선의 장례를 거들었다.
아! 상서롭지 못한 날이로다! 아! 이제 조선은 끝났다. 황실의 위엄이 어디 있으며, 관리의 권세가 어디 있으며, 양반의 가문이 어디 있으며, 백성의 기름을 짜내어 이룬 경복궁이 어디 있으며, 삼청동의 여러 민 씨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저택들이 어디 있으며, 남종 북종 노론 소론의 파벌이 어디 있으며, 일진회/대한협회가 어디 있으며, 뇌물을 쌓는 허리춤 전대가 어디 있겠는가? 턱으로 지시하고 기색으로 부리며 한번 호령하면 모두가 앞에서 대답하던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모두 재처럼 타다가 날아가 없어지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깊이 생각하고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랬던가? 그런데 도 조선 사람들은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양계초의 탄식스런 지적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일리가 있다. 왜인들이 탐심으로 조선을 병탄시킨 것은 참으로 악한 짓이다. 침략은 죄악이다. 그러나 국제정치 관점에서 보면 이족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한 조선의 무능이 일차적 비난의 대상이다. 국방력이 없어 나라와 땅을 빼앗겼다. 지정학적 이유만을 탓하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조선멸망사, 국제정치학, 전쟁사를 전공하지 않아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그러나 조선은 자기 방어를 할 국방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국치일이면 생각나는 "일한병합조약"(1910.8.29 공포)은 여섯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항,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께 양여한다. 제2항,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제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에 병합함을 승락한다"이다. 조선은 항쟁 한 번 하지 않고 반만년 역사를 가진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제3항과 제4항은 왕과 태자와 후비와 후예들에게 상당한 존칭, 위엄,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와 자금을 공여하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제5조와 제6조는 훈공, 작위, 일본 법을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총 6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이 적에 대항하여 싸우고 저항할 때 백성이 마음으로 존경하고 믿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법이다. 부패한 조선 왕실은 왕족의 존칭과 위엄과 명예 향유에 급급했다. 나라가 없어지는 마당에 조선은 이 씨 /씨족의 종묘사직 보호와 왕가의 귀족 지위에만 연연했다. 국치일의 서울 시내는 너무도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오늘날 같으면 시민들이 촛불들을 모아 종묘를 불태워버렸으리라.
우리 사회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조선의 무능을 질책하고 황실이 저항조차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존칭과 위엄과 명예 향유에만 급급했다고 지적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우리가 일제의 피해자라는 정신적 노예농장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영토는 쉬지 않고 변한다. 힘이 강한 나라는 빼앗고 힘이 약한 나라는 빼앗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방이다. 영토변경, 세계지도 변경은 1815년부터 1965년 사이, 150년 동안, 770번 이루어졌다. 국토변경은 국력과 경제 부흥에 따라 이루어진다. 세계정세가 변하면 국경도 바뀐다. 힘을 가진 나라가 땅을 차지한다. 세계사는 전쟁사, 영토확장사 또는 영토축소사다. 번성하던 나라가 없어지기도 하고, 없던 나라가 등장하기도 한다.
국제정치학자 타니샤 파잘(Tanisha M. Fazal)은 <국가의 죽음>(State Death: The Politics and Geography of Conquest, Occupation, and Annexation, Princeto: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7)이라는 책에서 국가의 죽음이 예상보다 훨씬 흔하다고 말한다. 근대 민족 국가 체제가 시작된 1816년 이래 2000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는 207개국이었다. 그 가운데서 66개국(32퍼센트)이 소멸되었다. 그 중 50개 국가(75퍼센트)는 폭력에 의해서 없어졌다. 조선이 일본에 삼켜진 것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 1945년 이후 국가의 소멸 사례가 상대적으로 희귀하다. 이 사실은 일반인은 물론 학자들조차 국가의 생존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국제 사회에서 국가의 죽음이란 예상보다 훨씬 흔하다. 나라의 생존(survival)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국기, 어느 나라의 기인가, 일장기 아닌가?
베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손기정을 '우리나라 선수'라고 칭송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선명성을 선호하는 나의 머리는 어리둥절해진다. 금메달 시상식 게양대에는 일장기가 올랐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었다. 손기정은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고, 일장기를 달고 달렸고, 마지막 순간에도 일장기를 달고 1등 테이프를 끊었다. 시상대에도 일장기를 달고 올라섰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조선인 손기정은 어느 나라 선수인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국적은 금메달 시상대에 오른 선수의 표정, 기분,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느낌, 감정, 원한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독도는 우리 땅인가? 왜 우리의 땅인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교과서가 독도를 우리의 땅이라고 기록하고, "독도는 우리 땅” 하고 노래하기 때문인가? 독도는 역사 기록, 구호, 노랫말로 지켜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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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의 땅이다. 대한민국이 군사적으로 점령, 장악,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독도는 언제까지 우리 땅인가? 우리가 힘으로 지킬 수 있을 때까지다. 뺏길 때 까지 우리의 땅이다. 독도는 외국이 전쟁을 일으켜 무력을 장악하지 않는 한 우리의 땅이다. 영토는 국력과 국방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
"독도는 우리의 땅"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다. 우리 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한반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반대륙'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은 절반의 섬나라인가, 절반의 대륙인가? 반도(半島, peninsular)는 섬나라 일본인과 영국인들이 붙인 명칭이다. 대륙 시각으로 보면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의 일부다. 왜색이 짙은 '한반도' 보다는 '한반대륙'이라고 일컬음이 옳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땅을 '한반대륙'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를 문제 삼을 자들이 있는가?
나는 대한민국 병사로 36개월을 봉사했다.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단축시키는 정부 정책은 내게 불안감을 준다. 단축해도 국방이 안전하다면, 겨우 18개월 복무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 까닭은 두말 할 나위없이 우리나라의 국력 곧 경제부흥과 국방력을 키워준 초기 국가 지도자들과 동맹국 미국 덕분이다. 꿀벌처럼 일한 노동자들, 새벽마다 남편의 사업성공을 위해 교회당에 엎드려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우리의 어머니들 덕분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부국강병 정책 덕분이다.
나는 대학생 초기에 미국인 노만 핀센트 피일의 <적극적 사고방식>과 로버트 슐러의 <불가능은 없다>를 즐겨 읽었다. 저자들은 두 사람 다 목사다. 지금도 나는 적극적 사고방식, 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신앙으로 삼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눈, 진취적인 기상,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결기, 과단성, 포부, 원대한 이상 또는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 나라의 영토를 지키고, 넓히고,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행동거지, 사고방식이 여성 같은 젊은 남성들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라고 말씀하셨다. 복 있는 자에게는 전쟁의 참화나 땅을 빼앗기는 비극은 오지 않는가? 양심적 병역 거부가 정당한가? 정당하다면 36개월 국방의 의무를 다한 자는 양심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기독교인은 냉혹한 국제정치를 비켜갈 비방을 지니고 있는가? 현실주의적 시각과 현실적 대응을 무시할 수 있는가? 교회조차 힘, 돈, 교세를 가진 자가 정통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지 않은가?
세상 정치는 욕망의 탁류이며, 추한 흐름의 바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같지 않다. 창과 검으로 정복할 수 없다. 양육강식이 통하지 않는다. 한반도기는 민족번영의 상징이 아니다. 국민을 무기력, 무능력, 피침략 정신에 가두는 정신적 노예농장을 연상시킨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광개토대왕을 중국인의 조상, 중국의 지방호족으로 만드는 동북아 공정에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 원리가 세상에서 과연 승리할 수 있는가? 위 성경 구절을 본문삼아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들을 후다닥 적어본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전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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