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1943)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1943 출범)은 한국 기독교의 배교 전력의 한 단면이다. 이 교회 조직의 규정은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를 훼절, 변절했다고 하는 따위의 용어로 설명하고 규정함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교회사, 신학, 교리에 근거하여 평가하자면, 당시의 한국교회는 배교했다.
위 그림의 일본 교단 규칙은 총 66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순일본기독교'라고 하는 신생 종교로 개종했음을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를 한 죄악만이 아니라, "교의학, 성경해석, 예배 의식 등 종래의 사상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순일본적기독교"라는 이단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말한다.
일제는 1939년에 일본과 점령지 한국의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종교단체법'을 공포했다. 미국을 상대로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비상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의 종교단체들을 통합시켰다. 일본의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단>이라는 단일 집단으로 통합하여 전시체제에 활용했다. 이 집단은 현재도 잔존하며, 신학적으로 자유 분망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들은 1942년경 스스로 해산했고, 1943년 5월에 창설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어 일제 기독 교회로 출범했다. 감리교회도 1943년 10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에 흡수되어 일본기독교 집단으로 다시 출범했다. 이 조직들은 1944년에 해체되고,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에 등에 속한 교회들을 병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1945)으로 또 다시 개편되어 출범했다. 일본기독교단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 또는 조선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창립 한 달 만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연속성을 가진 한국교회라는 신앙고백공동체가 배교한 사실이다. 일본기독교인, 한국기독교인, 주한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인식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제27차 총회(1938)에서 이를 일제의 '국민의례'라고 변명하면서 그것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총회 임원들이 솔선수범 평양 신사를 찾아가 우상숭배를 했다. 총회는 나아가 신사참배권유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전 세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우상숭배를 시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무후무하다.
한국교회의 배교행위는 우상숭배 결의와 시행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교의, 신학을 신도교에 부합하게 변개한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왕중왕이심을 부정하고 성경을 편집했다. 한국교회는 목사를 교회사(敎誨師), 교사(敎師)로 일컬었다. 정통기독교 신앙을 뉘우치고 버리도록 가르치고 적극적으로 신도기독교라는 이단 신앙을 가지게 하는 자였다.
한국교회의 교회당 안에는 이동식 신사(神祠)를 설치하고 예배 중에 그것을 향하여 참배를 했다. 예배 도중에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황거요배를 하기도 했다. 교회 대표자가 예수보다 천조대신이 더 높다는 진술서에 서명했고, 성경을 편집하여 유대교적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구약성경을 버리게 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를 공격한 이단 마르시온주의와 여러 면에서 일치한다.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규칙(1943)은 한국교회가 단순히 변절하거나 훼절한 것이 아니라 배교한 사실을 일부 확인시켜 준다.
제3조: 본 교단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조선반도에서 복음주의 기독교회 설립은 명치 초년 내지 및 만주로부터 포교받은 것을 발단으로 하여 명치 17년 이후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교파수 20여에 이르렀으며, 그 중 최대의 교파는 조선예수교장로회로 교회 수 3,000개, 신도 수 30만 명을 갖고 있다.
소화 16년(1941) 12월 8일 황공하옵게도 대동아전쟁 선포의 대소환이 발하자 우리들 황국신민은 일억일심, 총력을 기울여, 팔굉위우의 건국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반도내의 각 교회도 적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 하는 것을 최대 급선무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그 교의신학, 성서해석, 교회조직 및 의식습관 등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여 순일본적기독교로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하여 그 명칭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라 칭하리고 하고 각 지방의 대표가 소화 18년(1943) 5월 5일 경성(서울)에 모여, 새롭게 교단 규칙을 제정하여 직역 봉공, 종교 보국에 매진하는 새로운 발족을 하기로 하다.
제6조: 본 교단의 생활강령은 아래와 같다.
1. 황국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각각의 분을 다하여 신도(臣道)를 실천화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
2. 교의를 받들어 주일을 지키며 공예배에 참석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
3.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국풍을 중히 여기며 경건의 수행을 쌓고 가정을 깨끗이 하여 사회 풍교(風敎)의 개선에 힘쓴다.
위 책은 소화 18년(1943) 10월 7일 경성(서울)에서 발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관식(金本觀植)이다. 발행장소는 경성의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본부이며, 인쇄는 평양에서 했다.
위 문서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한국교회가 역사적 기독교, 정통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버리고 신도기독교라는 이단으로 개종하여 배교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들 황국신민은 일억 일심, 총력을 기울여 팔굉위우의 건국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고, 반도 내 각 교회도 적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 하는 것을 최대급선무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그 교의신학, 성서해석, 교회조직 및 의식관습 등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태도를 깨끗이 청산하여 순일본적기독교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하며... 직역봉공 종교보국에 매진한다. 황도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신도를 실천하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 경신숭조의 국풍을 중히 여기며, 사회풍교의 개선에 힘쓴다."
한국교회의 비극적 역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은 목사 김관식(1887-1948)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이원군에 있는 이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 시절에 개신교에 입문했다. 1917년에 장로로 장립을 받았고, 1921년에 장로회신학교(평양)를 졸업했다. 캐나다 토론토 녹스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다.
김관식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저명한 친일파 목사이다. 한국교회의 황민화, 신도기독교화, 이교화에 이바지했다.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 1940 설립)의 전임강사로 일본인들 2명과 함께 가르쳤다. 이 학교는 일본신도주의 교회사, 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신도기독교라는 일본민족주의(일본국가주의, 일본군국주의) 종교로 개종하도록 지도하는 자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서울)는 채필근이 설립한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천명한다. 총신대학교(서울)는 자신이 이 학교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역사를 자신의 설립 연대에 산입(算入)하여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 해 동안 여러 차례 성대해 거행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평양신학교는 친일 배교하던 자들에 의해 채필근 목사를 중심으로 1940년에 설립되었다. 반면, 평양에 소재한 장로회신학교는 1901년에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주한장로교선교공의회가 소유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말미암아 1938년에 자진 폐교했다. 평양신학교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같은 학교가 아니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장로회신학교(남산, 1948년 설립)와 무관하다.
한국 기독교 지성인 김관식의 지도력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파하고 궤멸시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는 1943년에 조선장로교회를 해체하고 일본기독교에 속한 조선장로교단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1945년 7월에는 이 조직마저 없애버리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친일파 교단 출범을 성사시키고, 자신이 초대 통리로 취임했다. 조선신학교(서울, 현 한신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순일본기독교'를 표방하는 등 한국기독교인들의 황민화 교육을 주도했다.
신도기독교는 신사참배-우상숭배를 행하고 신도교를 국교로 삼은 종교국가 일본의 민속신앙에 기초한 식민지주의에 기독교를 접목시킨 집단이다.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를 일본종교 신도교 사상에 적합하도록 개조한 이단이었다.
그 무렵, 일부 순수한 정통 기독교 신앙인들, 순수한 한국교회는 감옥과 한촌(寒村) 사랑방에 있었다. 교회라는 조직이 사라지는 즈음에 이 '지하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속성에 해당하는 신앙고백적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였다. 경남, 평양, 봉천 등에 존재했다. 만주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독일고백교회의 "바르멘신학선언"(1934)에 견줄만한 "장로교인 언약"(1940)이라는 역사적 신앙고백문서를 남겼다. 이 교회의 구성원 다수가 순교했고,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하던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한국교회 복구,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교회를 허무는 활동과 황민화에 앞장서 온 김관식은 광복 뒤에도 "충량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조선신학교의 전임강사로 가르쳤다. 이 학교가 1946년에 남부대회(한국장로교회 제32회 총회)에서 장로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직영신학교로 인정받는데 그가 이바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관식은 "한국기독교회(The Christian Church in Korea)"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미국에서 발행되는 국제선교지(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April 1947)에 기고했다. 일본제국주의를 괴멸시키고 자유의 날을 가져다 준 연합군과 미국 군대에 감사를 표하며,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배경, 남북이 모두 고립되어 있는 상황을 알리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 교회의 재건, 신앙고백공동체의 본질 회복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 지성인 김관식, 그는 친일행각과 배교와 범죄에 대한 공적인 참회나 자숙 없이 광복 뒤에도 한국교회를 주도했다. 죄인석에 앉아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할 자가 재판석에 앉아 출옥성도들을 재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선언하는 해괴한 역사를 연출한 한국 기독교 친일파의 수괴(首魁) 역할을 했다.
광복 뒤 일제시대에 조선기독교연합운동을 지휘했다. 그는 이 친일 기구를 1946년에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곧 현재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바꾸고 자신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대한기독교서회, 대한성서공회의 사업과 찬송가 합동사업에도 개입했다. 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배교 전력을 적통으로 계승한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한국지부 역할을 하고 있다.
친일파 목사들은 광복 이후 참회와 반성보다 궤변적인 자기변호와 불순한 짓거리들과 악취 진동하는 발자취들을 남기기에 바빴다. 김관식이 통리로 이끌었던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후예들, 친일파 인사들의 백귀난행의 과거사, 몰역사성, 범죄행각, 민족배신, 배교 행위는 장로교회의 치리회 규직에 따른 참회, 권징, 과거사 청산 없이 현재도 한국교회의 혈관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교권주의, 교회교(Churchanity) 기질, 신행불일치, 진리 변개, 상황에 따른 태도 바꾸기, 이기적 목적의 타협, 진리 내동댕이치기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의 한국교회 절대 다수는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해 온 교회의 후예들이다.
실패는 성공을 향한 도약의 값진 발판이다. 수치스런 실패를 거울과 교훈 삼아 개혁하고 성장하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 속성에 충실한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배교 역사를 보여주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출범과 그 규칙은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 회복의 밑거름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과거사를 숨기기에 급급해 왔다. 정직하게 시인하고 반성하고 교훈삼는 것을 기피해 왔다. 역사가 주는 값진 영양소는 버리고 영양가 없는 겁떼기만으로 배를 채우는 어리석음을 지속해 왔다. 수치문화(shame culture)의 영향이 없지 않은 듯하다. 이 주제들은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이 상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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