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사관학교 지도자의 구원관

by dschoiword posted Jul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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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사관학교 지도자의 구원관


2009.219. 작성자 겸손


토라사관학교의 송00 교수의 음성화일을 보내준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모두 들었습니다. 하나는 1시간이고 하나는 1시간40분이어서 약 2시간40분을 앉아서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주의를 기울이면서 들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많은 은혜를 받기도 했고, 송00 교수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는 것 같아서 감동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성화일을 통하여 들은 그의 주장은 몇가지로 정리되어집니다


첫째, 구약의 출애굽기를 통하여 구원을 비유한 것입니다. 즉 출애굽을 제1 은혜로 비유하고, 가나안 입성을 제2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정 60만명 중에서 2명만이 제2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유를 통하여 좁은 문을 강조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비유하여 적용시킨다면 모세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됩니다.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 대속사건은 신약 이후의 구원의 보편성과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적용시켜야만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둘째, 구원을 번제단과 물두멍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갖고 온 희생제물을 번제단에서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고, 그 앞에 있는 물두멍으로 나아가 손과 발을 정결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자아를 죽이고, 완전한 성결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을 구약의 제사적인 개념으로 비유하는 것은 좋지만, 제사의 과정과 제사에서 사용되는 도구들과 일치시켜 비유하는 것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번제단과 물두멍이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신명기 27-28장을 통하여 송 교수의 신학적 사상을 "언약신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두 개의 음성화일은 언약사상이라고 명칭만 언급될 뿐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27장에서의 가나안입성의 준비적인 예식과 28장의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것을 비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영원한 새 언약(히13:20)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히7:22)에 대해서는 왜 침묵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송00 교수가 이러한 성경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비유한 것은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어떤 신학적인 결론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즉 그의 주장은 "완전성화"이며, 제2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음성화일에서 송00 교수는 완전성화라는 용어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제2의 은혜라는 용어는 빈번히 인용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웨슬레에 대한 언급도 나타납니다. 저는 웨슬레안으로서 송재근교수가 말하는 제2의 은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 들었습니다.


완전성화, 즉 제2의 은혜는 요한 웨슬레가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은 완전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인간이 죄로부터 완전한 무흠이나 완전한 도덕적 윤리적 개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웨슬레가 말한 완전성화는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신앙적인 목표가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으로서 용어적인 의미가 다릅니다. 즉 웨슬레의 완전성화에 대한 교리는 완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혹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장로교의 신학교수가 웨슬레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웨슬레안의 입장으로서는 한편 반가운데, 그러나 웨슬레신학의 용어와 개념을 빌려왔지만, 웨슬레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 문제입니다.

 

                          

또 웨슬레는 완전성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에 반하여, 송재근교수는 완전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송00 교수는 자기의 논문으로 인하여 총신대 교수직에서 제명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당연히 장로교의 신학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웨슬레 신학과도 다릅니다. 더욱이 기존의 신학적인 견해를 사탄 운운하는 주장은, 자신의 신학적인 주장을 반대하면 사탄이 된다는 것인지 의아합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박옥수 구원파에 빠질뻔 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 사람이 신학적인 뿌리가 제대로 정립된 신학교수하는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수를 감히 본인이 신학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적인 신학은 사실 깊이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닌 기본적인 것으로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본인이 보기에는 송00 교수가 주장하는 제2의 은혜는 장로교의 신학과도 다르지만, 웨슬레가 주장한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아주 부분적인 성경구절만을 인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는 기존신학을 완전히 사탄의 신학으로 간주하는 극단적 배타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웨슬레와 다른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 완전성결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두번째 오류입니다. 그는 첫 번째 은혜로는 분명히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것 역시 웨슬레와 현저하게 다른 차이점입니다.

 

세 번째, 비록 그가 제2의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가 강조하는 점은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는 결국 비장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웨슬레와 다르며, 웨슬레는 이것을 제2의 은혜, 제2의 축복이라고 불렀으며 성령의 주도적인 은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송00 교수는 자아와 가치관과 중독과 습관을 버려야 하며, 기존 신학적 지식까지 비장한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 모두 버려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실제적인 예를 드는데, 클래식을 전공한 한 자매는 그동안 클래식이 중독이라고 간주하여 그동안 수집한 클래식 음반 수백장을 모두 밟아 깨버렸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전공 지식까지 버리는 것이 제2의 은혜라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전공과 직업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송00 교수 스스로 그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학적 견해부터 버리기 바랍니다. 또 자신은 자아를 버리는 과정이 15년이 걸렸으며 모세는 40년이 걸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생애가 10년이 남은 평범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요?

 

그는 그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난 후에 앞자리에 앚아서 설교를 듣던 어느 할머니가 설교 후에 자기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말하며, 그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송재근교수의 구원론은 전공 지식을 버리지 못한 사람, 무식한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아직 이해력이 없는 어린이와 초등학교나 중학생들, 의지력과 결단력이 약한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저주의 구원론입니까?

 

그의 설교를 들으면 그는 마치 정통신학에 대해서 원한이 맺힌 사람으로 보입니다,

 

 

네 번째, 신약의 복음은 율법의 저주와 달리 기쁜 소식입니다. 송재근교수는 인간의 의지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구절을 단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평범하고 전체적이며 일반적인 성경구절들은 모두 무시하고 부정하여야만 합니까?

 

 

그가 인용하는 신약의 성경구절은 “십자가를 지라”라든가 “자기를 부인하고” 혹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혹은 "싸우라"는 등등의 부분적인 구절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알수 있듯이 신약의 기쁜소식은 분명히 구약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일 구약의 사건적 상황을 신약과 지금에서도 그대로 적용시켜야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대속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구약의 율법으로는 온전한 의인이 단 하나도 없지만,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는 어떠한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가 구약의 사건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십자가 죽음 이후로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건너 뛰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가 쓰레기라고 주장하며, 마틴 루터의 이신칭의는 시대적인 상황이 달랐다고 주장하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송재근교수의 주장이야말로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개념을 희석시키는 쓰레기로 보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 60만명에서 가나안 입성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고작 2명뿐이었다고 말하면서 토라사관학교를 지원한 사람이 일천명이라고 할지라도 단 열명만 얻으면 성공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용사는 300명이면 족하다는 비유도 그는 자신의 정예부대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외부로 들려오는 토라사관학교의 문제점들은 이러한 well-trained person 방식의 주입식 교육으로 추정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의 "선한 싸움"은 "믿음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심"은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즉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투쟁과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송00 교수는 과연 예수님이 60만명 중에서 2명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그 피를 흘리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새 언약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못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구약의 수건이 벗겨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헬: 팔라이도스 디이데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

 

신약과 구약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는,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서 구체화된 반면에 새 언약은 에클레시아 안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은 예비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신약은 집행적 성격을 가집니다.

 

다시 말하여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접근법은 모형론(typology), 즉 신약과 구약의 요소들의 상응성을 비교하여야만 하며, 그 계시의 정점은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통하여 완성되어진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중대한 모티브를 무시하고, 계속적으로 구약의 언약만을 강조하고, 구약의 선택성, 소수성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복음적인 개념이 아닌 슬픈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