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셨는가?
변종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없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의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있다(제44문).
하지만 한국 장로교회가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이 부분이 없다. 그냥 “장사 지낸 바 되어 죽음의 능력 아래 머물러 있었으나 썩음을 당하시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VIII.4). 소요리문답에도 이 부분이 없다. 다만 대요리문답에서 “제 삼일까지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시고 죽음의 능력 아래 계셨던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표현했다”고 설명한다(제50문의 답). 고대교회의 신조들 가운데 니케아신조에는 없지만 아타나시우스 신조에는 있다.
이처럼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신조들에 따라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은 물론 이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조들 중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예수님)가 그의 모든 고난 중에, 특히 십자가에서 겪었던 말할 수 없는 고통들과 슬픔들, 공포와 지옥의 고뇌”라고 설명하고 있다(제44문). 따라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음부’ 또는 ‘지옥’ 내려가셨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십자가에서 겪은 예수님의 고통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에서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음에 “음부(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나온다. 따라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순서상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 안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여러 모로 난제거리이다. 사도신경 본문도 시대마다, 교회마다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도신경에 대한 기록인 히폴리투스 로마누스(Hippolytus Romanus. 215년 또는 217년 기록)의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 부분이 없다. 그 후에 이어서 나오는 네 개의 문서에도 없다. 4세기의 튀라니우스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의 기록에 처음으로 이 부분이 나오는데, 그 후 6세기 이후에 좀 나오며 그 외 대부분의 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cf. 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원래의 사도신경에는 없었는데 후대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전서 3:19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느니라.”(개역개정) 개역한글판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고 되어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가서’가 덧붙은 것은 진전된 번역이기는 하나 위치가 좀 잘못되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다음에 와야 더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두 번역 다 ‘전파하시느니라’의 시상(시제)이 잘못되었다. 이 동사(에케뤽센)는 아오리스트로서 ‘전파하셨느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영어 번역은 다 그렇게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제로 지하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칼빈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며, 따라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내려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가셨다고 말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여기의 ‘필라케’를 ‘옥’으로 보지 않고 ‘파수대’로 본다. 즉, 경건한 영혼들이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풀이한다(벧전 3:19 주석 중).
그러나 여기의 ‘옥에 있는 영들’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경건한 영혼들’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임이 분명하다(20절). 한편, 개혁교회에서는 대개 그리스도의 승천 시에 그의 승리를 죽은 자들에게도 선포하셨다고 본다(Bavinck, Greijdanus 등). 19절의 ‘가서’를 22절에서와 같이 ‘승천’으로 보고, 또 ‘전파하다’를 복음 전파가 아니라 단지 부활로 말미암은 승리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물론 교리적으로 문제없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주석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9절은 분명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라고 말하며, 22절처럼 ‘하늘로 가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죽은 자들’에게 가서, 또는 ‘반항하는 천사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고 본다. 그러나 반항하는 천사들 곧 악령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 것은 외경에 나오는 사상일 뿐, 본문에서는 이들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20절)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전하신 것일까? 19절은 ‘영으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앞 구절과 연결해서 살펴 볼 때 ‘성령으로’이다. 곧 예수님은 ‘성령으로’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아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계셨으며, 그 때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이것은 고대교회의 어거스틴의 견해이며, 또한 베자와 고마루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노아를 통해 그 때 그의 영(성령)으로 전파하였다.”(Gomarus) 우리는 이 견해가 옳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베드로 자신이 20절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요 1:1, 8:58 등), 또한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벧전 1:11, 벧후 1:21). 성령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에게도 역사하셨으며 이삭과 야곱에게도 역사하셨고, 나아가서 모든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사 59:21, 63:11, 학 2:5, 느 9:20). 구약 시대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갔다(cf. 요 3:5). 노아 시대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노아를 통해 당시에 패역한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전파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성령으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노아는 이를 위해 사용된 한 도구였다.
그러면 왜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때 노아의 설교를 듣고 불순종하여서 ‘지금’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그들은 지옥에 ‘영’으로 있었다. 이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음은 베드로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20절). 지금 지옥에 있는 그들은,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노아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베드로전서 4:6에도 나타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이것은 예수님이 음부(지옥)에 가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곧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 곧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는 100년 전에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곧 이 땅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은 지옥에 있는 영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다가(18절) 갑자기 노아 시대의 복음 전파로 넘어가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수천 년을 뛰어넘는 데에는 어떤 연결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 ‘그리스도의 선재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있음은 이미 말하였다. 베드로는 구약 시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였다(벧전 1:11, 벧후 1:21).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다(21절). 노아 시대의 ‘물’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함과 동시에 노아 가족에 대한 ‘구원’을 상징한다(cf. 벧후 2:5).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베드로 당시의 구원의 역사과 노아 시대의 구원의 역사가 나란히 놓여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원리의 사건으로 오버랩 되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또 하나 더 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건짐 받은 경험이 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은 보통의 물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짐 받은 구원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다가(18-19절), 곧바로 ‘물’ 가운데서의 구원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며(21절), 이를 위한 중간 다리로서 ‘노아 홍수’ 사건이 쉽게 떠올랐을 것이다.
어쨌든 신약성경 전체에서 볼 때 예수님이 음부 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상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 또다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맞지 않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견해들을 배척한다.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후대이다. 초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단순한 고백뿐이었다.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베드로전서 3:19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를 추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