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부산총회 주제강연장 (2013)
WCC 새 선교-전도 선언서(2012) 분석
세계교회협회의(이하 WCC) 부산총회의 하이라이트는 새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2012)이다. 선교와 전도를 “생명의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만물의 생명 충만을 향한 헌신” 활동으로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 피조물의 생명 지킴이, 환경운동 전도사, 인민해방운동가로 등장시킨다. 인간화, 인권, 혁명투쟁 활동을 선교로 여기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구도에서 그 관심의 폭을 피조 만물의 생명, 생명 충만으로 확대한다.
졸저 『신학충돌 II』(2013) 부록에 “함께 생명을 향하여: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 한글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새 선언서는 교회의 사회적 문화적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피조물의 생명과 생명 충만 활동을 하도록 자극할 것이지만 ‘기독교 선교와 전도 선언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함이 심대하고 주장이 이단적(heretic)이다. 기독교 핵심 진리를 배제하고 버려할 것들을 담고 있으며, 인류를 배신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십자가의 복음과 영생의 진리를 소개하지 않는다. 기독교 선교와 전도의 핵심과제인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도리, 중생, 구원,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대속사역, 화목제물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인간의 타락과 죄성을 도외시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있는 죄를 사회적 불의와 구조 차원의 모순, 자본주의적 탐욕, 생태학적, 경제적, 사회적 결함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정의와 평화가 유지되는 이상 사회로 환원시킨다. 만물을 창조하고 돌보는 성령의 활동을 그의 일반적 사역에 고정시킨다. 교회의 정체성을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의 연대성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종교다원주의를 담고 있다.
십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배제하고 죄 문제 해결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 신앙이 빠진 선교와 전도를 상상해 보라. 영적 쓰나미와 함께 죽음의 재가 몰아닥친 유럽, 북미, 대양주의 주류 교회들의 현실을 보라. WCC의 새 선교-전도 선언서가 담고 있는 독성과 그것이 가져올 재앙을 넉넉히 예측할 수 있다.
1. 생명, 생명 충만
WCC의 새 선교-전도 선언서는 1960년대부터 지향해온 마르크스주의적인 ‘하나님의 선교’를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 변화와, 글로벌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 환경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만유 돌봄 활동으로 확대시켰다. ① 창조세계 보전과 생명, ②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글로벌화와 교회와 신학의 변화, ③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민족·다문화·다종교 문제, ④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운동의 확대와 세계 기독인 분포 중심축의 변화, ⑤ 보편주의 기독론에서 보편주의 신론으로 이동, ⑥ 세속적 개념의 하나님 나라, ⑦ 다양성 안의 통일성 등을 다룬다. 삼위일체론을 유비(analogy)로 선교에 적용하고 자유주의 신학 패러다임에 따라 성령, 생명, 하나님 나라를 해석한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1항에서 11항까지는 “함께 생명을 향하여”라는 총 주제를 소개하면서 선교-전도의 초점을 창조세계 보전과 자연적 생명과 그 생명의 충만에만 둔다. 시작에서부터 이단성을 드러낸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제시킨다. 선교의 우주적 차원, 선교와 전도 중심 지역의 이동, 신자유주의 맘몬 숭배에 대한 대응, 복음과 종교간 대화문제를 다룬다. 제12항에서 제35항까지는 선교의 영, 생명의 숨결을 논한다. 성령의 선교와 피조물의 번영, 영적 은사와 영분별, 변혁적 영성을 말한다. 성령의 구원사적 활동을 제시하지 않는 이단성을 보인다. 제36항에서 제54항까지는 해방의 영성, 주변지역으로부터의 선교, 제55항에서 제79항까지는 공동체의 영, 살아 움직이는 교회, 제80항에서 제100항까지는 오순절의 성령,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위한 좋은 소식을 다룬다. 제101항에서 제112항까지는 생명 잔치를 결론적 확언을 담는다.
새 선언서에 따르면, 예수의 성육신은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 선교의 초점은 만물의 생명 충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주심―생명 살리기 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로 초대한다. 성령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비전을 증거하는 일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유지자이며,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며 전체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 유지 활동을 하게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와 전도는 자연적 생명을 축하하고 생물학적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에 저항하고 변혁시키는 임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활동은 교회가 정말로 수행해야 하고 인류에게 시급히 필요한 십자가 중심의 선교-전도 과업을 방해하거나 배제하는 점에서도 이단적이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에 따르면, ‘선교사 예수’는 생명을 거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고 변혁시켰다. 예수는 ‘하나님의 선교’의 모델이다.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고, 생명을 거부하는 세상에 저항하고, 빈곤, 차별, 비인간화를 초래 지속시키는 문화와 구조에 대항하여 싸웠다.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가치에 저항하고 이것들을 변혁시키는 삶을 살았다. 억압당하는 자들의 해방, 깨어진 공동체의 치유와 화해 그리고 전체 피조물의 회복을 통해 생명 충만을 유지시켰다. ‘하나님의 선교사’ 예수는 모든 생명과 피조물을 섬겼다.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과 연대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도왔다. 새 선언서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세상 변혁 목적으로 세상에 주어진 선물로 이해한다.
새 선언서는 1960년대 도입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원리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 돌보는 일(mission)에 비유하여 인권, 인간화, 정의, 평화, 혁명투쟁, 변혁, 환경 활동 따위를 기독교 선교-전도의 기본 과제로 간주한다. 새 선언서는 환경보호와 지구보전을 이에 포함시켰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만을 위해 아들을 보낸 것이 아니다. 부분적 구원을 위해 그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은 피조물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을 위한 좋은 소식이다”라고 선언한다. 모든 생명과 전 세상이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web)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교회는 지구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 명백한 이때에, 분열과 긴장을 극복하고 세상만물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한다. 역사적 기독교가 선교로 여겨 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설 공간을 배제한다.
기독교의 선교와 전도는 무엇인가? 한국교회 구성원들, 선교사들, 선교사역 뒷바라지를 하는 기독인들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까? 선교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역사적 기독교가 수행해온 선교-전도 활동은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화해자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제하고 반면에 인간화, 인권투쟁, 노동쟁의, 빈곤퇴치, 주한미군철수, 환경지킴이 활동을 함은 기독교 선교와 전도를 왜곡시키고 교회 사역의 주객을 전도시킨다.
기독교회는 오순절 날 출범 이래 약 1950년 동안 그리스도 중심의 선교-전도를 수행해 왔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와 영원한 멸망과 저주에서 구원하려고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사도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려고 교회를 세웠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임한다(마 6:10).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이 세상의 종말은 다가온다. 마지막 날에 예수가 심판주로 나타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다(마 24:14, 막 13:10). 기독교 선교와 전도의 핵심은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알리는 복음전파 활동이다.
역사적 기독교는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피조물을 창조하고 돌보고 생명을 유지한다고 믿고 고백해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 부여자―시여자(施輿者)이다. 창조세계의 보전과 자연적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생명을 사모하며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시 34:12),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눅 12:15),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이다”(약 4:14).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WCC가 출범하기 오래 전부터 인류 구원의 복음과 함께 인간 사회의 발전과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계 돌봄과 구원 역사(役事)는 각각 다른 범주에 속한다. WCC는 하나님이 이 두 영역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사실을 무시한다. 성경적 진리를 거부한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자연적 생명을 부여하고 돌보고 계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와 영적인 이스라엘인 신앙고백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 일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구원사에 해당한다. 새 선언서는 부성경이 제시하고 역사적 기독교가 고백해 온 이 구분을 철폐했다. 모든 인간과 전 피조물에 부여된 자연적 생명(biological life)이 제한받지 않고, 최대한으로 충만히 그 자체를 누리도록 하는 일을 선교와 전도의 목적으로 설정한다.
신약성경의 핵심 메시지의 핵심은 ‘생명’이다. 이것은 WCC가 강조하는 자연적 또는 생물학적 생명―목숨(bios)이 아니다. 영적 생명, 영원한 생명(zoe)이다. 성경은 이 둘을 엄연히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된 생명은 후자와 직결되어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요 5:24).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33).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 6:5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 14:6).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20:31).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행 11:18).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요일 5:12).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믿음을 통해 성령이 주는 ‘생명(zoe)은 지속기간이 제한되는 피조물의 생명(bios)이 아니다. 세상적인 성질의 목숨이 아니다.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이 선물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 생명을 주려고 인간으로 성육하였고,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선물은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 관계를 회복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과 장로 요한의 편지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언급하는 생명은 모두 영원한 생명, 영적 생명이다.
WCC의 새 선언서가 말하는 ‘생명’과 ‘생명 충만’은 아프리카의 부족 종교도 공감하고 한국의 박수무당도 환영할 수 있다. 인도의 범신론적 종교 사제도 받아들 만한 개념이며 뉴에이지 운동의 구루(guru)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신적 신앙인들과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도 호감을 가질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종교 신봉자들이 쉽게 수용하고,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다. ‘살생금지’ 불교 계율에 나오는 생(生)과 같다. 새 선언서가 말하는 생명의 부여자 ‘성령’도 타종교인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힘, 에네르기, 정령(精靈)과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 성령의 구원하는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제한시키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를 지향하는 WCC의 신학을 반영한다. WCC는 기독교의 범주를 넘어서는 구원의 신학을 모색해 왔다.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거대 에큐메니즘(macro-ecumenism)과 폭넓은 에큐메니즘(weider ecumenism)을 거론해 왔다. 모든 종교들이 환영할 생명(bios)과 그 생명 충만에 선교-전도의 초점을 두는 새 선언서는 WCC가 추구하고 있는 종교통합을 향해 질주할 수 있는 고속도로이다.
새 선언서가 총 112개의 적지 않은 문항들에서 예수가 누구이며, 왜 그가 그리스도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어야 하는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점에서도 이단적이다.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중생한 경험을 한 사람이면 하늘에서 내려온 떡―빵을 먹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기독교의 지형변화
WCC가 복음을 세속 개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동일시하고, 인간화와 혁명투쟁을 ‘하나님 나라’의 수단으로 여기는 점에서도 이단적이다. “하나님의 선교” 는 선교와 전도 마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마르크스주의 복음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는 주목할 만하다. WCC를 추종하던 유럽, 북미, 대양주의 주류 교회들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퇴락했다. 이 교회들은 세상과 다르지 않은 사회기구(social organization)로 변모했다. 설교 강단은 공해, 환경, 인권 메시지로 채워졌다. WCC 총회 선교 아젠다(agenda)에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도가 없다.
위 교회들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조종을 울린 시점은 마르크스주의 정치 국가들의 몰락 시점과 일치한다. WCC 신학자들도 세속적인 ‘하나님의 나라’ 개념 때문에 교회가 위축되었음을 자각하는 듯 하다. 새 선언서의 부제에 ‘지형변화’(Changing Landscape)라는 글귀가 이를 입증한다. 유럽, 북미, 대양주의 주류 교회들의 거반 죽었거나 조종을 울리고 있음을 사실상 시인하는 셈이다.
WCC는 1980년대에 정의, 평화, 피조세계 보전 따위를 ‘하나님의 선교’ 과제로 삼으면서 성경의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적 통치를 구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으로 뭉친 인류공동체로 여기고 이를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과 같다. WCC는 196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에 공중납치 당했다. 그 결과로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도입하고 세상사 곧 인간화, 정의, 평화, 환경보전 노력이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이상적 인간사회 확장 방법이라고 믿었다.
새 선언서는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초월적 지평을 간과한다. 인간의 타락과 죄성, 원죄와 자범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십자가의 도리, 사죄,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생명’을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정체성을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에 연결시킨다. 죄를 불의한 정치적, 생태학적, 경제적 구조가 가진 결핍으로 환원시킨다. 새 선언서는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가 명백하게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는 전도와 선교의 핵심인 죄와 죄 문제 해결의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많은 성경구절을 전거(典據)로 인용한다. 성경적 기반을 가진 선언문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주장과 근거가 불일치한다. 아전인수 격이다. 예컨대 첫 항은 선교를 “만물의 생명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관심이며 선교이다”라고 정의하면서 요한복음 10장 10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도적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는 이 예수의 말씀에 나오는 ‘생명’은 WCC 새 선언서가 말하는 자연적 삶―목숨(bios)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며, 성육하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유일한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할 때 죄 사함과 동시에 주어지는 새 생명(zoe)이다.
새 선언서는 ‘선교사 하나님’이 모든 자기의 백성을 불러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을 부여한다면서, 요한복음 20장 21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이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영원한 생명’의 복음 전도자로 보낸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파송한다는 말이 아니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성령 사역에 대한 분별력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 실현에 참여하도록 초대교회들이 세상에 파송되어 생명주심-살림 활동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8절을 제시한다. 이 성경 본문 내용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증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 선언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 실현”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WCC 유형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이와 전혀 다른 무엇을 말한다.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펼쳐질 구속사적인 사랑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영적인 나라를 말하고 있다.
WCC의 성경 오용과 전거일탈의 오류는 사회구원지상주의, 마르크스주의, 만유보편구원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이다. 그래서 이 단체는 성령의 구속사 사역을 세속적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 활동과 동일시한다. 선교-전도의 영역을 피조물 보존과 통치, 정의와 평화의 이상적 사회로 이끄는 활동으로 전환 또는 축소시킨다. 세속사와 구원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일반 활동 영역에 해당하는 피조물 보전과 생명 유지 활동에 제한시킨다.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구원 역사, 중생, 영적인 재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올 종말론적 성취의 가치를 간과한다.
3. 종교다원주의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종교다원주의를 담고 있다. 타종교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 활동을 발견하고, 타종교들의 영성 안에 내재된 가치와 지혜를 인정한다. 참된 선교는 타인을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로 여긴다고 말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 정체성과 독특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웃 종교들과 공동의 증언에 근거한 쌍방통행의 대화를 강조한다. 만인보편구원주의에 근거하여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두지 않고(without setting limits to the saving grace of God)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난, 그리고 부활의 중심성(centrality)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하는 선교활동이다”라고 한다. ‘중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잡다한 여러 가지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한계를 두지 않고”라는 문구는 WCC의 공식 문서들에 여러 번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 선언이다.
새 선언서는 “바아르선언문”의 종교다원주의 문구들을 인용하면서 각 종교의 기독교적 요소를 강조한다. “대화란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보다 앞서서 [타종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해 온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대와 더불어 시작할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그곳에 계시기에,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모셔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그곳에 어떻게 이미 현존하는지(how Christ is already present)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어디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지(where God’s Spirit is already at work) 분별하기 위하여, 복음은 더 폭넓은 콘텍스트에 참여하는 대화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전도는 모든 유형의 문화―종교의 가치를 존중하고, 피선교지에 이미 먼저 가서 선교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한다. 모든 종교들에 기독교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보면서 개종전도금지주의를 타종교에 확대시킨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인간을 위하여, 종교와 신념의 자유를 존중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 개종주의(Proselytism)는 복음 메시지에 역행한다. […] 우리는 각각 모든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복음이 특정 그룹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선교지로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새 선언서는 일부 복음적 선언으로 보이는 문구들을 ‘하나님의 선교’의 들러리 장식어로 등장시킨다. 그러나 즉각 “우리는 개인화, 세속화, 물질화된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세대를 향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는가?”로 연결시킨다. 새 선언서는 “우리들의 메시지와 전도의 중심성은 성육신, 십자가, 부활이다”고 말한다. 전도는 이 소식을 듣지 않는 자들과 나누며 그리스도의 생명경험으로 초대하는 일이며, 선교의 다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의도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과 제자도, 개인적인 회심으로 초대하는 일을 포함한다고 한다. 복음적으로 보이는 이 용어와 표현들을 이해하자면 WCC가 말하는 새 생명, 제자도, 개인적인 회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새 생명, 제자도, 개인적 회심의 중심이 전도라고 말하면서 이것들을 ‘하나님의 선교’와 그 구도 안에서 새로운 과제인 생명, 생명 충만 활동과 관련시킨다. “개종주의는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함이 중요하다”고 한다. 전도는 사랑의 행위이며, 화해, 연합, 정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천하는 일이다. 제자도(discipleship)에 초대함이라고 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복음적으로 보이는 용어와 스타일로 쓰인 문서의 내용은 역사적 기독교의 의미와 같지 않다. 복음주의 용어와 스타일을 동원하는 까닭은 자신의 신학이 ‘통전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 때문이다. 따라서 한두 구절이 복음주의 스타일로 쓰였다고 하여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4. 하나님의 나라
새 선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종말론적 기대를 언급하지 않는다. 새 문서를 작성한 신학자들이 세상사 해결에 집중한 나머지 어쩌다가 실수로 빠뜨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교’ 구도 안에는 이 주제들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 구현을 위한 세상 변혁 목적으로 세상에 준 선물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선교’ 활동 곧 세상 변혁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한다고 본다. 교회는 세속사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교회는 정의, 평화, 인간화, 혁명투쟁, 선행, 환경보전, 생명 충만 등 하나님의 일―선교의 도우미로 부름 받았다. WCC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꿈꾸어 온 지상천국 곧 이상적인 인간사회이다. 부산총회는 이 나라가 정의, 평화, 생명, 생명 충만을 위한 변혁 활동을 통해 실현된다고 선포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현재의 세상 상태가 점진적으로 변혁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바뀐다는 개념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그 영역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불가시적인 왕국이다. 이 나라는 성육신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 가운데 임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이 나라는 예수와 더불어 왔고, 믿는 자들에게 임하고, 심판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메시아 왕국이 완성되면 악은 사라진다. WCC가 추구하는 생명, 정의, 평화의 나라, 생명과 생명 충만한 세상도 그 때에 완전히 사라진다.
역사적 기독교의 선교사―전도자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고 심판주의 재림과 완전한 왕국의 도래에 대한 기대로 고무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복음전도에 열정을 쏟는 까닭은 예수의 지상명령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전도에 열성적이며, 영성과 경건한 삶에 독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제말기의 일부 한국 기독인들은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옥고를 치렀다. 공산정권 치하에서 많은 기독인들이 희생되었다.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천국 시민의 책임 의식과 종말론적인 기대 때문이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유일성 신앙을 말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 취득 조건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WCC가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언급하지 않는 까닭은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새 선교-전도 선언서가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과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를 담고 있지 않는 까닭도 이와 동일하다. 여기서 기독교와 WCC, 한국교회와 WCC의 강한 대립과 신학충돌이 드러난다.
새 선언서는 유토피아의 꿈으로 끝난 마르크스주의 이상과 자유주의 신학의 하나님의 나라―이상사회 건설과 변혁을 강조한다. WCC가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들에게 거액을 지원한 용공주의 활동도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WCC는 선지자적 사명을 앞세우면서도 공산주의 통치자들의 억압, 핍박, 비인도주의 행위에 대하여 침묵해 왔다. 하나님의 나라 곧 정의, 평화, 인간화가 공산주의 강압통치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WCC는 소련과 중국과 북한의 인권과 신앙의 자유 억압에 대해 침묵하거나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북한 문제를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는 한국교회의 간청에 소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한반대륙 통일과 평화에 관한 문서에도 유린당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은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에 따르면, 교회와 기독인에게 부여된 선교-전도 과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투쟁과 사회 변혁 활동이다. 배금주의, 시장경제이론, 글로벌 시장의 확대, 경제적, 생태학적 부정의와 위기를 거부하고 변혁시키는 일이다. 새 선언서는 구령사업과 교회성장에 힘쓰는 교회운동을 지탄한다. 세상 변혁을 위한 투쟁과 저항 활동을 선교와 전도로 규정한다. 교회의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인간(종교, 인종, 지역 초월)과 피조물, 특히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삶의 충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이라고 한다. 모든 불의한 구조에 대항하여 싸우는 형태의 적극적인 정치, 사회참여 등의 활동이 있는 곳에 성령이 일한다고 한다. 이러한 선교-전도는 철학, 정치, 경제 영역까지 확대된다. 정치가, 경제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기타 전문가들, 국제연합(UN)과 비정부기구(NGO)가 수행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까지 교회가 떠맡아야 한다.
그렇다면 WCC가 말하는 ‘개인적 회심’과 ‘제자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는 철저한 자각이며 세상사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 곧 이상적인 사회 건설과 세상일에 대한 철저한 태도 변화이다. 이러한 과제 수행의 실천과 철저성을 뜻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독인은 사회 문화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인, 경제학자, 사회학자, 기타 각 영역의 전문가, 국제연합(UN)과 비정부기구(NGO) 단체 구성원들의 전문성과 탁월성을 가질 수 있는가? 정치인, 경제학자, 사회학자, 기타 전문인, 그리고 국제연합 등이 대처하거나 성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허사로 끝난 세상사 곧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신앙고백공동체인 교회가 잘 해결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요람이던 유럽, 북미, 대양주 교회들의 퇴락, 생명력 상실, 조종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거미줄 처진 폐광처럼 싸늘한 유럽 기독교의 퇴락의 시점이 일치하는 점을 주목해 보라.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기독교 인구분포의 중심축의 이동을 의미하는 ‘지형변화’를 강도 높게 언급하면서도 그 까닭을 밝히지 않는다. 지형변화를 엉뚱하게도 ‘이민’과 관련시킨다. “이민은 전 세계적이고 다방향적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지형을 재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 북미, 대양주 기독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민을 떠난 탓으로 교인수가 급감하고 교회가 퇴락했다는 말인가? 새로운 기독교 인구의 중심축이 된 아프리카와 남미와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부흥한 까닭은 백인들이 그 지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인가?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다.
새 선언서는 일부 복음적인 용어들과 서술들은 동원한다. 입술에 발린 구호인 ‘전 복음’(whole gospel), ‘통전적 신학’(holistic theology)의 장식어로 동원한다. 진지하게 옳게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지하든지 아니 하든지 간에 모두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만인보편구원주의, 만유보편구원주의 구도 안에서 사용한다. 새 선언서가 언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라는 종교다원주의 문구와 나란히 그리고 함께 서술된다. 따라서 새 선언서가 등장시키는 복음적 용어들을 근거로 그 내용이 복음주의적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함을 알 수 있다.
5. 뉴비긴의 오판과 탄식
레슬리 뉴비긴(1909-1998) 주교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신학자로 국제선교대회(IMC)를 WCC에 흡수 통합(1961)시키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와 전도 활동이 시급하고 긴박하다고 생각하고서 두 기구(WCC와 IMC)가 통합되면 복음전도와 선교가 활발해 지는 교회생활의 이상적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세속화의 격랑 속에 시달리는 유럽교회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WCC를 향한 그의 기대와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WCC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통전적이지 않았고, 전 복음적이지도 않았다. 종교다원주의가 WCC 안에 강화되고, 타문화 지역에 대한 실제적인 복음전도가 약화되었다. 뉴비긴은 1960년대에 ‘하나님의 선교’가 WCC 선교신학을 장악하자 크게 낙심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서 이 단체의 선교개념과 전략을 비판했다. 예수 복음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사역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WCC를 향하여 변절자라고 비판했다.
뉴비긴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행한 비처특강(1966)에서 WCC의 변절을 신학 패러다임의 이동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에큐메니칼 사상에 이른바 ‘종교 상호 간’의 차원을 포함시켜 혼란스러운 ‘에큐메니즘’을 만든 것은 못마땅하다.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중심성과 종결성을 수용하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이 입장을 바꾸는 것은 그 운동의 합법적인 확장이 아니라 후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비긴은 WCC가 반기독교적 방향으로 치닫고,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함을 감지하고서 의미심장한 말을 자서전에 남겼다. “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인류 문화사 가운데서 유일한 장소 곧 죄와 용서, 속박과 자유, 갈등과 평화, 죽음과 삶 같은 궁극적인 신비들을 다루는 결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수수께끼 같은 것이 많이 있지만, 내가 아무리 비틀거리며 걷더라도, 지난 50년 동안 거듭해서 경험했듯이, 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고, 그 불빛을 받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나를 인도하는 그 별이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이며, 죽음과 종말에 이를 때까지 줄곧 빛을 비추어 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뉴비긴의 오판과 실수는 인류에게 복음서가 말하는 생명(zoe)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 ‘기독교’의 선교-전도 기회를 가로막았다. 교회의 세속화를 가중시키는 변질된 선교운동에 이바지했다. WCC 신학을 추종하는 백인 주류 교회들의 생명력 상실과 퇴락과 죽음의 시점을 앞당겼다. 검정 색 페인트가 가득히 담긴 통에 한 숟갈의 흰 페인트를 집어넣는다고 하여 전체가 희게 되지 않음을 깨닫게 했다.
결론: 가서 제자 삼으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부서지고 있다. 자연은 황폐화되고, 인간의 빈부격차와 소외는 점점 심해진다. 부정의와 억눌림과 탐욕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자유하게 하며 활동은 중요하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생명들을 사랑한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생명-삶의 소중함을 배우면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전진하자고 하는 구호는 불평등, 분열, 갈등을 타파하고, 피조세계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일은 고무시킨다.
그러나 인류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다. 피조물들도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 생명 충만, 정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다”(창 3:18). 인간에게 진실, 인애, 하나님 지식이 없고, 오직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하며, 포악하며, 살인이 계속되자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호 4:1-3)해졌다. 따라서 WCC가 선교의 초점을 둔 만물의 생명과 생명 충만의 첫걸음은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거룩해 지는 일이다. WCC 부산총회는 인류와 만물을 배신한다.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인간의 죄 문제 해결과 영생의 복음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독론과 구원론이 중심인 기독교의 복음전도와 구령사업을 도외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말씀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선교’ 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권, 인간화, 해방투쟁, 신토불이 유형의 생명, 생명 충만 활동을 하라고 하는 부름이 아니다.
새 선언서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본질을 왜곡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의 기회를 방해하여 결국 인류와 만물의 진정한 회복을 방해한다. 교회의 세속화와 인본주의화와 퇴락을 가속시킨다. 죄 문제 해결 방법과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소개하지 않는다. 성령론을 왜곡시키고, 교회의 우선적 과제를 전도시킨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세속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구도에는 성경의 제시하는 구원의 복음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여러 면에서 WCC 새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는 이단적이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쓰나미 같은 재앙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종교개혁 신학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이 종교생활의 요새에 침입하면 중추적인 교리와 성례의 효험을 파괴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틀림없이 죽게 된다. 교회를 지탱하는 핵심 교훈 곧 예수 그리스도 구원 유일성 진리가 제거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립할 수 없다. 건물은 기초가 무너지면 쓰러진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이다”(딤전 3:15).
위 글은 [신학충돌 II: 한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3), pp.144-182, 제5장 “선교-전도 선언서(2012)”를 간추려 <뉴스앤조이>(2013.10.07)에 기고한 것이다. 전거와 WCC의 새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 한글 번역문은 위 책에 실려 있다.
최덕성 교수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