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칼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5
1. 바르트의 낯선 신세계
전쟁은 기존 질서, 사고, 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삶 자체를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 수백만 명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심각한 것은 전쟁의 공포, 죽음, 허기만이 아니었다. 혼동 시대의 의미에 대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전쟁은 새로운 신학적 사고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전쟁을 겪는 동안 경험한 인간 삶의 억눌림 현상은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한 답변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앞세운 인간의 도덕성과 기독교 신앙의 종합이 하나의 망상이라는 사실이 증명해 주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부서진 세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든지 아니면 옛 정치제도 아래의 황제들과 군국주의적 존재방식을 지지한 이데올로기와 운명을 같이 하든지 해야만 했다.
과거의 신학 양식 곧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 제국주의 정치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자유주의 신학은 전쟁과 그것에 따른 공포에 대한 공동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로 자유주의 신학은 불신을 받았다. 하나의 지적 실천 영역이던 신학은 성경적 기초를 가진 새로운 성찰을 요청했다. 성경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인 접근은 더 이상 전쟁 이후의 파산된 삶을 새롭게 정립하기 원하는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주지 못했다. 만약 성경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접근이 요청되었다. 설교자와 신학자 모두가 필요로 했다.
전쟁의 참극과 실존적 상황은 기독교 사상가들로 하여금 일반적으로는 텍스트 해석의 원리를, 구체적으로는 성경해석의 원리를 새롭게 성찰하도록 했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20세기 초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5-1968)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이었다.
참고로, 이 글 대본의 저자 진론드는 일반적으로 불트만의 해석학이 설정하고 있는 목적에 공감한다. 칼 바르트에게 초점을 모아 논의를 조직화 하면서 자신의 해석학적 전망의 균형을 잡으려 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경력을 설교 강단에서 시작했다. 스위스 어느 마을에서 목회를 하던 젊은 바르트는 전쟁이라는 새로운 실존적 상황에서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감당해야 했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눈으로 성경 텍스트를 읽도록 만들었다. 이 방향 전환은 바르트의 평생에 걸친 신학적 성찰의 배경이 되었다.
바르트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그것은 낯선 신세계였다. 이 도전의 첫 열매로 “성경 속의 낯선 신세계”(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라는 강연을 했고, 「로마서 주석」 제2판을 저술했다. 이와 동일한 의도로 그의 주요 저서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 전권을 저술했다.
바르트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이었다. 교수 바르트는 항상 목회자 바르트의 관심에 충실했다. 그의 학구적인 신학은 책임성 있는 설교의 임무를 다룬다. 그의 이론적인 노력은 항상 교회의 실천을 갱신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바르트는 그가 항상 칭송한 교회의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위한 신학을 했다. 물론 교수 바르트는 자신의 개혁주의 전통의 유산,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에 대한 강력한 강조에 대한 큰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배경에 대한 탐사가 그의 신학적 강령에 대해 새로운 질적인 차원을 부가하지는 않았다. 바르트의 임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복음적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신학 저작물 여러 곳에서 성경해석의 실천적 임무를 이론적으로 논했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교회교의학」 제1권 중 서론과 해석학적 문제를 아주 상세하게 다룬 장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로마서주석」의 다양한 서문들, 많은 논쟁을 야기한 해석학적 주장들, 그리고 평생의 친구 불트만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바르트의 해석학적인 관심은 본래 방법론적 통찰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텍스트 해석에 대한 적합한 이론을 어떻게 고안해 낼 것인가 하는 의식 있는 질문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해석학적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등의 궁극적으로 신학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신학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적 성찰이 아니다. 신학 그 자체의 일부 곧 교의학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을 해석학적-신학적 질문으로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누구인가? 바르트에게 해석학적 질문은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어떻게 적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바가 되게 하기 위해 그것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CD I/1:187쪽 이하).
바르트의 특별계시-해석학을 신학자 불트만의 해석학에 대한 접근 방식과 비교하면 그 특성이 쉽게 드러난다. 불트만은 한 때 마르부르그대학교의 동료였던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은 성경 본문이 오늘날 말해질 수 있는 상황 곧 이 텍스트가 개인적인 인간실존을 만나는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추구했다. 성경해석 과정의 형식적 요소들 곧 언어학적, 철학적,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요소들과 관점적인 조건들(Vorverstandisse)을 명확히 헸다. 그는 텍스트들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특별한 전제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권고를 따라 그는 독자가 읽기를 진행하는 동안 다양한 장애물을 더 잘 깨닫도록 이 조건들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불트만은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이해 곧 독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삶는 것은 실제로는 독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성취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케리그마에 대한 인간의 해석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고 보았다. 이 두 신학자들은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한 점에서 일치했다. 그러나 불트만은 바르트 보다 세계와 역사 그리고 철학의 중재적 역할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바르트는 성경 본문에 대한 불트만의 해석학적 접근을 거부했다. 불트만을 일컬어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인간적인 방식이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는 데 충분하고 적합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만든 철학적인 과오와 기타 요인들의 희생자로 보았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방법, 인간의 해석학, 인간 해석의 대상일 수 없다고 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해석하는 주체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하기 때문에 역사의 해석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순서에 따르면 여기서 요청되는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해석되도록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다. 곧 자신을 하나님 말씀에 가장 잘 일치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계시가 역사의 술어(述語)가 아니라, 역사가 계시의 술어이다”(CD I/2:58)라고 했다.
2. 독자와 성경 텍스트
바르트는 「로마서주석」의 여러 서문들에서 옛 게르만 용어 “트로이에”(treue:충성)를 사용하여 독자와 성경 본문의 관계를 묘사한 바 있다. 텍스트에 대한 이 신실성은 모든 인간의 말(심지어 바울의 말조차)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상대성에 대한 비평적 인식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바르트와 불트만은 일치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관심은 단어, 문장 또는 개념들에 대한 세부적인 역사적, 주석적 연구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텍스트의 주제-내용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비평적 주석들이 이 텍스트의 주제-내용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분간할 수 있도록 비평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역사-비평적 주석들은 해석학적 노력에서 지나치게 온건하다.
바르트는 성경 텍스트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인간에 대한 바로 이 하나님의 관계 곧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바로 이 인간의 관계가 성경의 주제이며 동시에 철학의 요약이다.”
바르트의 해석학적 성찰은 불트만의 해석학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지점 곧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했다.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주신 계시에 대한 증거(witness)로 이해했다. 어떤 특정 성경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바르트 해석학의 특징은 어거스틴과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전체적인 신학적 의미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사랑', 루터에게 '믿음에 의한 칭의'는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타자성'과 근접성이다. 그러나 어거스틴과는 달리 바르트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 말씀의 의사소통적 언어학적 조건을 철저히 성찰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트만과는 달리 바르트는 평생 동안 성경해석의 특정 인간학적-철학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불트만은 먼저 인간이해의 과정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해석학을 내용적(material)이라고 한다면 불트만의 그것은 형식적(formal)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이해하는일에 등장하는 모든 형식적인 해석학적 원칙의 강요를 거부했다. 한편 불트만은 내용적 강요를 거절했다. 이해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특정 신학적 교의학이 강요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거시적-해석학으로 시작했고, 불트만은 바르트가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거부한 미시적- 해석학으로 시작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경에 대한 적합한 독해는 인간의 조잘댐 곧 아이스제시스(eisegesis)를 피해야 한다. 오히려 해석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할 수도 있는(might) 인간의 말인 성경 속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말인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가 말해지고 들려지도록 원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다”(CD I/1:471).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 성경 텍스트들의 중재적이고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증거를 통해서 자체를 들려지게 할 수 있고 들려지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는 신적 계시에 대한 근원적이고 합법적인 증거로서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함께 믿는다”(CD I/2:502).
바르트는 따라서 신학이 항상 성경 ‘아래’에 있다고 말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become) 곧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때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기적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오직 신앙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CD I/2:506). 이 신앙과 이 신앙을 요구하는 말씀 밖에는 어떤 굳건한 기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3. 글자와 텍스트의 정신
바르트는 글자와 텍스트의 정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성경주의(Biblicism)를 비난했다(CD I/2:506-12). 성경은 무오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책이지만 하나님의 초월적인 말씀을 증거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은 책의 실재를 변형시킨다. 그러나 이 변형은 책의 힘이 계시를 실제적으로 일어나게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는 이 계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으나 계시 사건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활동에 기인하지 성경의 활동 때문은 아니다. 바르트는 이 통찰을 성령의 교리로 뒷받침했다. “그러므로 성경의 증거는 곧 성령의 증거이다”(CD I/2:538).
바르트에 따르면, 계시 사건에 대한 유일하고도 적절한 응답은 순종이다(CD I/2:543). 하나님 말씀 아래에 있는 공동체인 교회는 따라서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CD I/2:575).
바르트는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록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성경은 형편에 맞게 고치거나 왜곡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을 계속적으로 물리칠 수 있으며, 교회의 개혁을 위한 성경의 개방성과 잠재성이 보호된다고 보았다(CD I/2:583이하).
모든 기독교인들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의 자유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데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적합하게 설명하기 위한 근본적인 규칙(vorstellungen) 곧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공급되는 계시의 증거에 모든 인간적인 개념, 관념, 그리고 확신들의 자유롭게 수행되는 종속행위”(CD I/2:715)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르트의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방식은 종속(subordination)이다. 종속은 자유분방한 처분과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종속되는 것이 존재하며 그 자체로 계속 현존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나 종속은 제자도(hintanstellung) 곧 상급자에 대한 피종속자의 융통성을 의미한다.”
'종속'과 '순종'은 바르트가 우리의 모든 감정, 공리, 체계, 철학 등에 대항하여 성경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한 핵심적인 용어이다. 어떠한 해석방법이나 해석학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성경에 순종하며 기꺼이 성경이 자신들을 해석하도록 할 것과 성령이 본문을 통해 독자에 대해 판단의 말씀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성경해석 원칙을 성경에서 찾아낸다. “성경의 내용과 그것이 증거하는 바는 죄인인 인간을 은혜롭게 다루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다”(CD I/2:720). 바르트에게 이 내용에 대한 인정은 인간 사고의 모든 자율적 활동들을 제외시킨다. “성경의 증거...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사상 세계의 자율성은 하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해석학적 강령이다”(CD I/2:721).
이 성경해석의 원리는 바르트가 성경 본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 추천하고 있는 세 가지 실제적인 단계들을 또한 결정지었다. 첫째 단계는 관찰이다. 관찰은 텍스트의 구조와 의미의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제시가 그 목적이다(CD I/2:722이하). 둘째 단계는 성찰이다. 성찰은 텍스트를 따라서 생각하고 텍스트를 평가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CD I/2:727이하).
이 점에서 바르트는 어떤 독자도 해석학적인 열쇠 없이는 텍스트를 따라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바르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불가피하게 어떤 사고방식(Denweisen) 또는 철학을 갖고 텍스트에 접근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철학 사상들은 단지 경험적인 성격의 것일 뿐이며, 따라서 이것들이 우리의 독해를 결정토록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고방식과 성경의 방식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내가 가진 수단의 본질적인 부적절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나는 만약 나의 시도가 옳고 나의 사고방식이 끝까지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 된 것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CD I/2:731).
셋째 단계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 본문을 자신의 이해로 만들어 나감)(CD I/2:736이하)이다. 성경해석의 이 세 번째 단계는 성경의 다양한 이용(usus scripturae)이라는 고전적인 개념과 일치한다. 이것은 적용에 관계되고, 성경의 증거를 자기 자신의 책임성 있는 지식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용은 우리가 성경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수행을 위해 성경이 우리를 취하도록 우리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신앙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이다.
바르트의 해석학이 지닌 성경 해석상의 문제점들과 의의는 무엇인가? 바르트의 제안은 신학적 해석학과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 상황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바르트와 불트만을 비교하면 이 두 신학자 사이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금세기 해석학의 발전만이 아니라 바르트나 불트만이 제공한 것보다 더 적합한 신학적 해석학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분명한 상(像)을 갖도록 돕는다. 우리의 논의는 바르트의 해석학이 얼마나 비평적이었으며, 비평적인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불트만의 제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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