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의 해석학: 진리인가 방법인가?
최덕성 해석학 강의론 12
1. 인간 태도와 이해
독일인 철학자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금세기 해석학의 주요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해석학 주제들에 대한 많은 논문들을 출판했다. 주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1960)으로 유명하다. 하이데거의 강한 영향을 받은 교수자격 논문 "플라톤 문답술적 윤리학"(1931)으로 부상하여 나중에 칼 야스퍼스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인문과학의 다양한 해석학적 성찰을 평가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도전과 척도를 모두 제공했다.
가다머는 현상학 전통을 따르면서 자신의 해석학을 방법론적인 강령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이해활동에 수반되는 요소들에 대한 성찰로 이해했다. 그의 해석학은 반(反)방법론적인 성격을 지녔다. 가다머는 해석학적 통찰과 해석 방법의 결합이 해석학을 순전히 기교적인 개념으로 이끌고 가며, 그렇게 되면 해석학이 현대의 다른 기술(技術)의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그 대신 해석학의 ‘철학적’ 특징을 강조했다. 곧 해석학은 인간이해와 인간의 자기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관심을 두며 '실천철학'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가다머는 인간이해를 분석하면서 텍스트 해석의 예를 든다. 이해의 과정에서 선-판단의 역할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을 따르면서, 텍스트 이해의 과정이 독자들의 선이해와 텍스트의 의미(sinn)에 참여하는 독자 자신의 관심에 의해 항상 연료를 공급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텍스트 이해의 궁극의 목적은 독자와 텍스트의 실질적 일치이다. 이해의 목표는 두 지평 곧 텍스트 지평과 독자 지평의 융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해는 주관성의 행위라기 보다는 전통의 과정 속에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이다. 이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이 융합된다. 가다머는 이 이해의 과정을 스포츠 경기 경험에 비유한다. 독자는 마치 특정 게임의 규칙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궁극적으로 그 게임에 의해 지시를 받거나 움직이는 경기자와 같다. 이 규칙이 운동경기를 성립시킨다. 이처럼 가다머는 이해를 추구하는 자가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게임’ 조건들에 대한 성찰을 자신의 해석학적 성찰로 이해한다.
가다머는 “효과적 역사의식”(effective-historical consciousness)을 강조한다. 이것에 대한 통찰은 해석학적 조건 이해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항상 한 텍스트를 일련의 질문들을 가지고 접근한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텍스트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에게 의미를 드러내려는 텍스트의 잠재성에 의해 우리의 생각이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된다. 우리들은 옳을 수도 있고 그릇된 것일 수도 있는 기대의 지평을 통해 이해의 과정에 들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텍스트 이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사전달의 역사적 실체에 의해 항상 조건지워진다.
이해의 과정에서 두 지평들의 실제적인 융합이 발생한다. 역사적 지평이 투사 되자마자 그와 동시에 그 지평들이 사라진다. 이 융합의 의식적인 행위는 “효과적 역사의식”의 과업이다.
이 “효과적 역사의식”의 구조는 언어이다. “언어는 두 사람 사이의 대상에 관한 이해와 일치가 발생하는 중간지대이다.” 대화는 두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특별한 형식이다. 물론 텍스트는 능동적이거나 교정을 해 나가는 방식으로 독자와 관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해의 과정을 인간의 대화에 비유해 보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상호운동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주도권은 물론 독자에게 있다. “텍스트는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지만 사실상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해석자의 작업이다. 텍스트와 해석자는 이 작업 속에서 공유점을 가진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가다머에게 언어는 의사전달의 매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가다머에 따르면, 언어의 본질은 의사 전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오직 언어만이 존재의 총체성과 관련을 가지며, 유한자 곧 역사적인 제한을 받는 인간을 인간 자신과 세계에 매개시킨다.” 그러므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이 말은 언어가 진리를 드러내는 일에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함을 의미한다. 진리는 언어학적 형식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 같은 진리의 드러남을 해석학적 경험의 궁극적인 축복으로 여긴다.
해석학적 경험은 인간의 서로다른 여러 가지 경험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인간이 진리에 접근하는 하나뿐인 방법이다. 해석학적 경험의 이 성격 때문에 가다머는 이 경험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인 해석학이 모든 철학의 “보편적인 측면”을 대표한다고 본다. 해석학을 인문과학을 위한 방법론적인 기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가다머는 해석학을 인문과학의 기초이론으로 평가하는 딜타이의 견해를 거부하고,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관한 실존적인 해석을 따른다. 가다머에 따르면, 해석학은 인간의 이해 현상과 인간존재에 대한 적합한 이해에 관한 것들을 성찰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하나의 ‘실천철학’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한 성찰은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을 진전시켰다. 특히 “효과적 역사의식”에 관한 논의와 이해의 과정에 등장하는 선-판단의 생산적인 역할에 대한 분석에 이바지했다. 이것은 해석학적 순환에 관한 하이데거의 통찰을 구체화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답을 얻지 못한 채 남아있다.
독자는 어떻게 잘못된 이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독해의 과정에서 전통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왜 텍스트는 권위를 가지며, 그것이 제시하는 전통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가? 두 지평의 융합은 행복한 융합인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가? 텍스트의 해석에서 진리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2. 해석과 이데올로기: 가다머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평
가다머에 따르면, 이해는 이해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텍스트의 주장에 복종시키려고 하고 텍스트가 제시하는 전통에 들어오려고 하는 한 항상 성공적일 수 있다. 가다머는 이와 같은 해석학 개념이 철학의 보편적인 특징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다머의 이와 같은 견해는 날선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는 가다머의 주장을 거절하면서 이해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한다. “해석학적 의식(意識)은 그것이 해석학적 이해의 한계(限界)에 대한 자체의 성찰을 고려하지 않는 한 불완전하다”고 했다. 하버마스의 특별한 관심은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조직적으로 왜곡될 경우에는 이해에 관한 가다머의 모델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었다.
해석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것은 ‘정상적’인 말 곧 병리학적 이상이 엿보이지 않는 말에도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유형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때 뿐이다. 의사소통의 두절이 해당 당사자들에 의해 감지되지 않는 사이비 의사소통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 대화에 새로 참여하는 사람만이 그들이 서로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버마스는 보다 깊이 있는 해석학과 보다 적절한 의사소통 이론을 요구했다. 전자는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형식들을 치료하는 데 필요하고, 후자는 비억압적 의사소통 활동의 조건들과 왜곡된 의사소통의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방법들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성찰이 지닌 가치 있는 것들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다머가 하이데거를 따라 설명한 “해석학의 존재론적 개념 자체”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가다머는 하버마스의 비평을 거부했다. 자신의 의도는 다만 어떻게 지식이 해석학적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려는 것 뿐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억압의 세력이 실제로 엄청남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텍스트와 그 텍스트 전통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해석자의 자유에 근거를 둔 행위로 보았다.
가다머는 하버마스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비평과 해석 작업에 수반되는 이데올로기적 행위의 역할에 대한 특별한 분석을 요구했다.인간의 의사소통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하버마스의 비평은 가다머의 보편적인 요구를 무효화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평적 또는 보다 깊이 있는 해석학조차 하나의 해석학이기 때문이다.
3. 적합한 이해 기준의 필요성
가다머는 해석학적 경험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면 ‘이해’의 성공을 당연시 한다. 왜곡된 의사소통과 독자가 정말로 텍스트를 이해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점들이 해석학적 성찰에 개입되지 않는다면 두 지평의 융합은 하나의 행복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독자가 텍스트를 오해할 수도 있다. 오해가 가능하다는 의심이 생기면 해석학적 경험에 대한 가다머의 현상학적 묘사들은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석학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방법론적인 움직임들에 대한 가다머의 주된 의심은 적합한 이해의 기준들을 발전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언어를 도구로 보는 현대 언어분석의 ‘도구주의’ 영역에서 그것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복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언어학적 절차들이 비평적 해석학의 강령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보지 못했다.
가다머의 명저 「진리와 방법」(1960)은 그 책 이름을 「진리인가 방법인가?」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으로는 해석학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과 다른 한편으로는 적합한 텍스트 이해를 위한 현대의 수많은 방법론적 제안들 사이에 발생하는 첨예한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학 이론의 첨예한 갈등을 다루기보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개념과 최근 두 세기 동안 등장한 수많은 중요한 해석 이론가들이 제공한 비평적 움직임들을 결합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텍스트 해석 방법들에 대한 토론은, 가다머가 제기한 해석학적 경험에 관한 탁월한 질문들에 반드시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서도 개인적 해석학 작업에 대한 실질적인 비평적 검증을 가능하게 한다.
해석학적 두 지평들의 융합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평적인 논의가 없으면 이 개념은 완전히 관념적인 것이 되고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왜곡에 문을 열어주게 된다. 예컨대 근본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독특한 지평들의 융합이 성경의 진리를 드러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독자들도 텍스트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원론(Monist)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와 같은 해석학적 작업은 독자의 지평과 텍스트에 대해 추정적 이해의 지평 곧 그것의 권위와 그것에 상응하는 전통의 권위에 대한 철저한 비평을 수용하지 않는 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되고 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어떤 특별한 ‘전통’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텍스트 해석의 진정한 가치를 강조하려고, 곧 그 ‘전통’에 도전하기 보다는 그것을 변호하고 확립할 목적으로 가다머의 해석학을 사용할 수 있다.
‘갈등’은 자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실제적 해석학적 경험을 묘사하는 핵심 용어이다. 해석 작업에 생기는 갈등은 진리를 밝히려고 텍스트를 펼칠 때와 같은 중요한 과정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검증될 필요가 있다. 진리는 이 과정에서 상호중재 역할을 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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