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박물관
마르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철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1
1. 철학적 해석학에서 해석학적 철학으로
독일인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해석학적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는 나치 독일을 찬양했고, 독일 패전 뒤 비나치화 청문회 끝에 5년 동안 학문활동을 금지당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수였다. 한 때 로마가톨릭교회 사제가 되려고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가 나중에 철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나치 독일을 찬양했고, 독일 패전 후 5년 동안 학문활동을 금지당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 교수였다.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는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을 재촉했다. 신학적 해석학에 고유한 해석학적 기초이론을 제공할 목적이었다. 철학자 딜타이는 해석학을 모든 인문과학의 기초 이론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해석학에 대한 관심은 철학분야에서 계속 고조되었다. 한 때 신학적 사고의 한 분과였던 해석학은 인문과학의 기초이론 역할을 담당하는 확실한 자리를 차지고 있다.
딜타이의 제안은 일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제안이 아니었다. 해석학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재발견과 제안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는 에드문드 훗설(Edmund Husserl, 1859-1938)에게 현상학을 배웠고, 현상학을 가르치고 그 주제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현상학 운동의 창시자인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훗설의 작품을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를 변형하여 후대의 해석학자들에게 더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2. 에드문트 훗설의 현상학 강령
‘현상학’이라는 철학운동의 시작은 딜타이의 철학적 해석학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상학이 해석학의 발전에 미친 충격은 막대하다. 우리가 현상학의 기본적 특징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하이데거, 가다머, 리꾀르의 해석학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대두한 실증주의에 대항하여, 그리고 신칸트주의 운동의 칸트 사상으로 복귀 움직임에 반대하여, 훗설은 모든 종류의 철학적 체계들의 강요와 사변적 논의와 교리주의에서 철학적 사고를 해방시켜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논리연구」(Logical Investigations)와 「이데아론: 순수 현상학을 위한 일반적 서론」(Ideas: General Introduction to Pure Phenomenology)에서 철학이 물자체로 되돌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자기의 강령을 현상에 대한 기본적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철학적 성찰의 도구로 이해했다. 현상에 대한 기본적 오리엔테이션이란 사물들을 경험하는 행위 속에서 관찰자가 자신의 의도성을 갖고 고찰할 때 그에게 보여 지는 바로 그대로의 사물을 뜻한다.
우리는 가치, 목표, 수단들을 단순히 직접적으로 파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그것에 상응하는 주관적 경험을 파악하고,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자각’하게 되고, 사물들이 드러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은 ‘현상’이라고 불린다. 현상의 가장 일반적이며 본질적인 특성은 개별 사물, 사상-사건, 근거, 결론 판단이 내려진 상태, 계획, 결정, 희망, 기타 등등에 대한 ‘자각’ 또는 ‘나타남’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훗설의 강령은, 현상 파악이 사물 자체의 본질을 나타나도록 허용하는 공동자각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주체-객체의 분리 문제를 극복한다. 이 개방성은 모든 ‘현상’에 널리 퍼져있고, 우주의 모든 측면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기술(craft)을 의무화한다. 그러나 훗설은 현상학을 모든 과학의 방법론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과학”으로 이해했다. 엄밀한 과학적 철학에 기본적인 수단(organon)을 공급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훗설이 인문과학만 아니라 모든 과학 분야에 하나의 기초이론을 제공하려는 철학적 노력과 직면한다. 그는 현상에 대한 세부적이고 집요한 관심만이 참으로 ‘정직한’ 과학을 계속적으로 출발시킬 수 있는 확고한 위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참된 과학의 길속에서 이 여정은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훗설은 이 사안에 대하여 “그러므로 현상학은 현상학자가 하나의 철학체계의 이상을 포기할 것과 그렇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겸손한 일꾼으로서 영원한 철학(philosopia perennis)을 위해 살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훗설은 순수 현상들에 대한 확실한 의미파악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복잡한 절차를 발전시켰다. 그 첫째는 에포케(epoch: 뒤로 물러섬)이고, 둘째는 직관적 환원(eidetic reduction)이다. ‘에포케’는 검토 중인 것에 대한 모든 판단이나 관련된 것들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현상학자의 태도이고, 직관적 환원은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서 현상학자는 모든 경험들을 그것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가닥들에서 풀어낸다. 곧 경험의 본질을 해방시킨다. “지각, 판단, 감정과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그것들을 선험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들에 속해 있다. 따라서 순수하게 논리적인 설명(Aufklatungen)의 기초는 심리학이 아니라 현상학이다. 이 두 절차의 목표는 실제적(factual)인 형태로부터 본질적인 형상(eidos: 形相)로의 전환이다.
훗설의 강령은 세속적인 상황 바깥에서 본질을 파악하려는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이 세속성은 모든 본질들의 기초이므로 쉽게 무엇에 묶이거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종류의 속임과 왜곡에서 현상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해방시킨다는 것이 옳다고 할지라도, 훗설은 현상의 역사적 상황 곧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상황들을 “이해 행위”(act)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인간 이해를 왜곡시킨다.
3.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
하이데거는 훗설의 가까운 동료였다. 그는 상황적 차원을 현상학 사고에 도입시켰다. 야심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의 제목이 이미 암시하듯, 그의 목표는 훗설의 「논리연구」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인간 현존재(Dasein: being there: 現存在)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접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존재 안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접근은 훗설의 현상학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도 죽음, 세상, 존재, 덧없음과 같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스승 훗설과 달리 이 현상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순전히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인 성격을 그것의 상황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본질들을 해석학적 활동 속에 드러내려고 했다. 하이데거는 현상과 이 현상을 분석하는 자 모두의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만이 오직 ‘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제1부의 제목을 “일시성의 관점에서 본 현존재에 대한 해석과 존재의 물음을 위한 초월적 지평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분석”이라고 붙였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해석학적 철학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부적인 해석학적 성찰들을 제공했다. 이 성찰들은 이어지는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4. 하이데거의 해석학 성찰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첫 장에서 이 세상에서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조건들을 분석한다. ‘세상에서 존재함’이라는 현존재의 기본적인 구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현존재의 실존적인 상황, 이해의 차원에 해당하는 현존재의 실존적인 구조들을 논의한다.
인간의 ‘이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현존재의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구조이고, 다음은 앎(knowing)의 많은 가능한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하이데거는 첫째의 의미 곧 현존재의 실존적 구조로 사용된 ‘이해’가 현존재 그 자체의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현존재가 갖고 있는 존재의 류(類)는 존재에 대한 ‘이해’ 속에 실존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존재는 어떤 특별한 방법을 통해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어떤 것이 아니다. 가까이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가 바로 자체의 존재 가능성을 파악하는 데 까지 이를 수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두 가지 주된 가능성을 구분했다. 그 결과로 이해의 특징은 투사(project)될 수 있고 그 결과는 옳을 수도 있고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이해의 실현 양식(forms)을 해석(Auslegung)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 행위는 항상 이해관계 또는 의도(Vorhabe), 예견 (Vorsicht), 선이해(Vorgriff)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해석은 전제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이데거는 텍스트 해석이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이것을 설명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것’에 호소하기를 원할 때,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일차적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논의되지 않은 가정임에 틀림없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이 통찰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의미(Sinn: sense)의 뜻을 정의하도록 도왔다. “의미란 어떤 것에 대한 가해성(可解性)이 그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 가해성은 언제나 이해하는 사람의 선(先) 판단에 의해 미리 구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인간의 상황 바깥에서 발견될 수 없다. 실존적 구조의 의미는 다만 그 자체만이 의미일 수도, 무의미일 수도 있는 현존재에만 속한다고 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모든 이해에는 선(先)구조가 필연적이다. 이해는 항상 순환적이다. “이해에 기여하는 어떠한 해석도 장차 해석된다. 해석자는 이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이 해석학적 순환이 유감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앎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원시적인 형태의 적극적인 앎의 가능성은 순환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의 해석에서, 시종일관 계속적인 과업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관계, 예견, 선이해가 공상이나 인기 있는 개념들에 의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들 자체의 관점에서 이것들의 전(前) 구조를 세워 과학적 주제를 확보함이다. 앎의 순환성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앎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사물들 자체의 관점에서”라는 문구로 현상학적 관심을 강조한다. 모든 이해가 적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이해란, 어느 누구도 선-판단의 법칙 밖에서 곧 해석학적 순환을 떠나서 사물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사물 자체에 대한 최선의 파악의 배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무엇이 사물에 대한 상대적으로 적합한 이해를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5. 하이데거의 언어이론
하이데거는 후기 작품에서 관심의 방향을 돌려 언어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 몰두했다. 1950년대에 발행한 강의록과 논문에서 언어를 내적인 움직임들 또는 그것들을 지도하는 세계관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인간 수단으로 보는 전통적인 이해를 교정하려고 했다.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성찰은 존재의 본질(Wesen)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증진시켜 주는 열쇠와 같다.
하이데거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과학적인 언어관으로는 언어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언어는 본질상 표현이나 인간 행위가 아니다. 언어는 말을 한다(Die Sprache spricht)”고 했다. 언어가 말을 하는 가장 순수한 모습은 시어(詩語)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 작가의 전기나 작품이 출현한 원래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어에서 언어 그 자체가 말을 하며, 언어가 그것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이 진정한 본질은 사물의 본성을 일깨우는 언어의 능력 속에 놓여있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 사물과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스런 차이(Unter-Schied)가 분명하게 파악된다.
언어는 존재의 외침을 전달하는 인간의 말하기(speaking)를 필요로 한다. 시어는 인간언어의 참된 본래의 표현이다. 일상 언어는 그것에서 파생된 빈약한 표현이다. “언어는 말을 한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언어에 대응할 때이다. 대응은 듣기이다.” 참된 존재와의 접촉을 회복하기 위한 열쇠는 언어에 대한 사려 깊은 듣기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의 듣기가 참된 듣기이며 왜곡되거나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듣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인간존재의 본질과 존재의 존재됨을 밝히는 적합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상 시어에 대한 듣기만인가? 하이데거의 실존적, 해석학적, 언어학적 성찰 곧 그의 거시적 해석학 이론은 어느 정도로 텍스트 해석에 대한 비평적 이론의 발전을 촉구했는가?
6.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철학의 중요성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기여는 해석학적 순환의 본질과 이해에서 선-판단의 생산적인 역할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은 해석학에 대한 금세기의 관심을 강화시켰다. 이해 조건에 대한 그의 설명은 해석학 연구의 폭발적인 관심을 증가 시켰다. “중요한 것은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따라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자 해석학 연구와 현상학 분석은 많은 방법론적 강령들을 낳았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신학에 대한 영향은 세 가지이다. 첫째, 진정한 삶에 대한 찬성/반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실존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철학적 설명은 루돌프 불트만과 다른 신학자들에게 실존적 상황에 상응하는 새로운 신학적 강령들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둘째, 언어에 대한 그의 성찰은 일반적으로 ‘신해석학’으로 알려진 학파를 낳았다. 셋째, 인간존재의 해석학적 조건에 대한 하이데거의 총체적인 통찰이다. 이것은 성경해석 영역에서 올바른 해석 방법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영향을 주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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