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9
1.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
독일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계몽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부상되었다. 개신교 정통주의가 주장하는 성경영감설에 따른 성경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신학이 아니라 신앙을 방아들이는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관과 감정에 근거하 신학 방법론을 구추했다. 이 방법론이 현대 기독교 사상에 끼친 깊은 영향력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또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를 극복한 개신교 근대신학의 선구자로 알려진다. 칼 바르트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운동은 그의 영향을 넘어서기 위한 여러 방식의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보편 해석학 발전에 영향을 끼쳐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유럽 계몽주의 이후 여러 명의 지식인들이 출현하여 해석학을 언급하거나 제안했다. 유럽 대륙철학 전통에서 해석학적 사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슐라이에르마허였다. 그는 해석학 주제의 보편적 범위를 파악하고 그 결과로 얻은 ‘이해’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체계화했다. 해석학의 성격과 범위를 재정의하여 신학적 해석학을 교회의 이데올로기 감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다. 이 감옥은 로마가톨릭정통주의와 개신교정통주의 해석학적 접근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설교자, 신학자, 고전문헌의 번역가였다. 그는 해석학의 발전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방식(mode)을 찾아내는 데 관심을 기울인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가동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주석 수준의 해석 작업을 넘어서는 특별한 해석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관심은 두 가지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이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며 “해석학을 “이해의 예술”(the art of understanding)이라고 정의했다. 해석학을 철학적으로 다루어야 해석학의 세분화된 관심들, 예컨대 성경주석을 위한 필수적이고 비평적인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확신과 노력은 철학적 기초가 부족한 해석학의 도약에 이바지했다. 그 요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인간의 이해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입의 말이나 손으로 쓴 글을 종종 잘못 이해한다. 해석학은 난제 풀이를 넘어선다. 인간 이해의 모든 측면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해는 하나의 예술(art)이다. 이는 하나의 독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의 과정에서 개인적 또는 주체적 차원은 이해되어야 하는 대상 곧 객체 차원의 언어학적 성격에 대한 올바른 고려를 수반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둘째, 모든 이해는 언어를 전제로 한다. 언어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언어를 통해서 의사를 전달한다. 언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석학과 수사학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언어는 항상 일반적 유형의 관습 곧 문법적 또는 객관적 측면과 개인적인 실행 곧 기술적-심리학적 또는 주관적 측면의 조합으로 생겨난다. 해석의 ‘문법적’ 차원의 작업은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의 도움을 받아 어떤 이야기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내는 예술”이다. ‘심리학적/기술적 해석’은 작품의 전체성과 통일성 그리고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의 주요 특징을 파악하려는 작업이다.
셋째, 이해의 이 두 차원은 모든 텍스트 해석활동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텍스트가 만들어 낸 모든 산물은 관습적인 언어학적 규칙의 개별적 또는 개인적 적용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모든 행위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관습적인 방식(mode)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기초한다.
넷째, 텍스트는 하나의 개별적 우주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개별적으로 적용된 관습이나 규칙들이 우주적 망(網)을 이루어 여기서 새롭고 의미 있는 전체를 창조하기 위해 함께 작용한다. 작문의 개별적 특수성은 텍스트의 ‘문체’를 형성한다. 순전히 문법적으로만 고려할 경우 특별한 문체에 대한 개념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개념화하는 그 자체가 이 개별성을 와해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텍스트는 결코 전체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완전한 파악 보다는 근사치 이해가 목표이다. 그럼에도 텍스트의 의미를 향한 이 해석상의 근사치는 해석과정의 비평적이고 책임 있는 특성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규칙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다섯째, 해석의 예술을 위한 규칙들은 하나의 실증적 형식(a positive formula)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어진 진술의 역사적인 동시에 예감적(divination, 예시, 예언, 본능적 예지, 직관적 인지)이며,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재구성이다.
2. 해석학적 규칙
슐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이 규칙들은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겨난 언어체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언어체계에 대한 텍스트 자체의 특별한 영향이 무엇인가를 해석자가 인식하도록 돕는다. 특정 진술이 개인의 마음 곧 저자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하나의 사실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진술 속에 담겨진 사상들이 저자에게 그리고 저자 안에서 어떻게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를 해석자에게 가르쳐 준다.
이 같은 이해 과정의 목표는 “먼저 텍스트를 이해하고, 텍스트의 저자가 이해한 것과 같이 이해하고, 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 작업의 목표는 해석자가 저자의 언어에 완벽하게 익숙하며, 더 나아가 저자의 내적 외적 삶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강령에서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감”(divination)이란 단어이다. 그에게 이 용어는 텍스트와 저자의 세계에 대한 또는 그것으로 들어가는 비밀스런 또는 신비적인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접근방법도 텍스트의 개별성을 다 알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텍스트에 대담히 접근하는 해석자가 감수해야만 하는 용감한 모험을 가리킨다.
이해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끝없는 도전 과업이다. 이 과업의 양극적 성격(심리학적 차원과 문법적 차원)에 대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주장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한편으로 “예감”이 주어진 어의적 요소들(semantic facts)에서 하나의 개인적인 도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의 언어학적 구성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인 지식도 텍스트 전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해석자의 의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기껏해야 근사치에 가까운 텍스트의 재구성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과업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상호 관통하기 때문에 이것들의 조합은 궁극적으로 오직 예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학적 순환의 다양한 측면들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부분들이 오직 전체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듯이 전체도 부분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고대의 통찰력 있는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가 가지고 있는 순환적 성격에 답변하려면 두 가지 상호 관련 움직임 곧 예감과 비교가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점에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고전적인 해석학 지식을 뛰어넘는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이 이해활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발생한다. (1) 특정 텍스트의 내적 구조: 우리가 어떻게 부분들로부터 전체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텍스트 안에서 언어학적 도구들의 비교를 통해 부분들에 관해 알게 되는가? (2) 텍스트와 바슷한 언어학적 작품들과 전체와의 관계: 어떻게 우리가 비슷한 텍스트들의 빛 아래에서 특정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
단어와 내용에 대한 설명 그 자체는 해석이 아니지만, 해석학은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텍스트가 생겨난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해석자의 예감적 능력들을 집중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해석학의 목적은 텍스트가 생겨난 상황보다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 모든 예감은 전적으로 문법적 해석을 수반하므로, 문법적 차원을 해석학의 영역에서 배제시키지 않아야 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말의 기술과 이해의 기술이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말은 사고의 외적 측면에 불과하다. 해석학은 사고 기술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철학적이다.
이 새로운 해석학적 사고는 해석학 발전에 혁명적으로 이바지했다. 이전에는 해석학이 신학과 문학의 부수과목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타인이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들을 이해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철학의 한 분야로 등장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해석학이 자율적인 하나의 학문분야가 되는데 공헌했다.
이때부터 해석학은 정통신학의 어떤 특정 견해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에 대한 찬반 반응은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에 대한 찬반 반응으로 나타났다.
3. 일반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 해석학을 일반 해석학에 종속시켰다. 성경 해석자는 유별난 특권들을 가진 자가 아니다. 성경 해석자는 다른 분야의 텍스트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규칙들에 묶여 있다. 그러므로 성경 텍스트가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유별난 해석학적 규칙들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슐라이어하는 성경 텍스트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구별된 해석학적 규칙들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박하는 데 상당한 정력을 쏟았다. 성경 영감에 대한 ‘교리적’ 결정은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대 조차할 수 없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신성한 책이 신성하다는 사실은 그 책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도 신성한 책이 특별한 해석학을 요구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특별한 것은 보편적인 것을 통해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특별한 해석학은 일반적 해석학의 토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자신의 일반 해석학적 원리들을 명확하게 하려고 성경해석의 실례들을 자주 들었다. 특별한 성경적 또는 신학적 해석학의 요구에 대한 많은 힌트와 본보기를 제공했다. 특별한 해석학에 대해 중요한 제안을 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동료 신학자들에게 일반적 해석학의 원칙을 존중할 필요성을 확신시키려 했다. 신학적 해석학은 일반 해석학의 기본을 따라야 한다, 특별 해석학을 포기하라, 어떤 문장이나 구절을 텍스트로부터 분리시키지 말고 텍스트를 텍스트 자체로 신중히 다루라고 했다. 「신학연구개요」(Brief Outline on the Study of Theology, 1810출간)에서 일반 해석학과 특별 해석학의 관계를 언급했다. 일반해석학의 원칙과 타당성에 따르지 않으려는 개신교 신학의 정경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일반 해석학 원리들의 기초 위에서 신약성경의 독특성을 찾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약성경 각 권과 전체 집합을 균형 있게 취급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해석 임무 그 자체가 개별적인 해석자들의 지식 위에 무비판적으로 구축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오히려 성경 해석자가 자기의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용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사용하라고 했다. 타당한 어떤 교리적 결론 도출은 성경해석의 학문적 임무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는 해석학적 원칙들과 신학자의 학문적 임무는 언어학적 측면-문법적 해석과 기술적(技術的) 측면-심리적 또는 기술적 해석에 동원되는 예감 모두를 포함한다.
현대 해석학에 끼친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은 강력했다. 그는 성경적/신학적 해석학을 일반 해석학의 원리들에 종속시켰다. 이 무렵, 조용하게 지속되어온 철학적 해석학의 전통이 출현했다. 일반 해석학-철학적 해석학의 타당성을 성경주석에 적용하려는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를 거부한 성경 해석자들은 새로운 해석학 전통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반면, 일련의 성경 해석자들은 새롭게 출현한 철학적 해석학의 전통에서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주장에 동의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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