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받은 자의 삶에 대하여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 정성욱교수
정교수)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칼빈) 그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엄청나게 강조했지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대 원리 중 하나였지요.
정교수)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칼빈) 저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믿음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 심령에 인 쳐진바 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진실한 약속에 기초해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와 은총에 대한 확고하고도 분명한 지식입니다. 이 정의를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느냐는 문제인데,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6:16)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경건을 가장한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정초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믿음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해하고 연구하려는 마음은 믿음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워 준다는 것이죠.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해되지 않아도 또한 지식이 없이도 마치 잘 믿을 수 있는 것처럼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참된 믿음은 참된 지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심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굴복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믿음이 유지되거나 성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먹고 자라납니다.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실한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은 바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만 유지되고 자랄 수 있습니다. 넷째로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 믿음은 흔들릴 수 있으며, 오류를 믿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일시적인 불신앙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자 그대로 ‘흔들림 없는 믿음’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진리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최고의 스승이라도 새롭게 깨닫고 배울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과 불신앙이 서로 투쟁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과 근심과 불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한다 해도 참된 믿음의 사람은 완전히 엎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정교수)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구원의 혜택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칼빈) 구원이란 여러 가지 선물을 담고 있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선 영원히 완전한 사죄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정교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인정받게 된다는 교리가 결국
‘이신칭의’ 교리이지 않습니까? 루터는 이 교리가 교회를 서게 하고 또 넘어지게도 하는
중요한 교리라고 주장하면서 엄청나게 강조했습니다. 선생님은 루터의 관점에 동의하시나요?
칼빈)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의 세 원리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교황 권위에 대항하여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오직 성경의 원리, 둘째가 행위 구원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신칭의 원리, 셋째가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가톨릭 전통에 대항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직 성경의 원리가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라면, 이신칭의의 원리는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루터의 말에 동의합니다.
정교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혹은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완전히 소멸된다는 말인가요?
칼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에게서 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를 죄인에게 덧입혀 주십니다. 즉 예수님의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전가된 예수님의 의 때문에 죄인은 이제 더 이상 죄인이라고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죄인을 향하여 “you are not guilty, but righteous." (너는 죄가 없다. 도리어 의로운 자다)라고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된 사람들에게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잔존해 있다는 것입니다. 잔존해 있는 죄의 본성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다루어지다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정교수)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칭의는 성화가 아니고 성화는 칭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두 가지는 뚜렷이 구별되지만,
칭의가 성화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연결된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칼빈) 맞습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신분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이라면, 성화는 우리의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중적 혜택입니다. 믿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합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한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따라 변화하게 되지요.
정교수)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는 과정, 즉 성화의 과정 역시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협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까?
칼빈) 어떤 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듭나고 중생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얻는 것 역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처럼, 어떤 그리스도인이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는 과정 역시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는 이 ‘오직 은혜로만’의 진리가 왜곡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의 신학적 입장을 따른다고 하는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이 ‘오직 은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초칼빈주의자’ 또는 ‘방종주의자’로 불러야 합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책임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강조되는 것은 저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도 바울의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는 말씀에 위배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영과 마음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거룩한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책임지기’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이끌려서 하게 되는 자유 가운데서의 ‘책임지기’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지기’를 ‘협력‘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지기‘가 마치 협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협력이나 해드린 것처럼 나중에는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협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은총이 좋아서 우리 나름대로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실 책임이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가 바로 ’반응할 수 있음(response+ability)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은혜와 사랑에 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 반응은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전인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음이 우리 피조물 된 사람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반응은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생각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교수) 인간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인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청결한 양심, 선한 양심 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칼빈) 예, 그렇습니다. 인간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인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많은 사람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어떤 문화권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취급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모든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거죠.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청결한 양심, 선한 양심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하여 요구하시는 거룩함과 일치하는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교수) 이 선한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의 상관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선한 양심이 무디어진다면 믿음 성장에 장애가 되나요? 그렇다면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나요?
칼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다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것 또는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율법과 양심의 역할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성경의 원리에 기초할 때 선한 양심대로 살지 않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청결한 양심을 잃어버리고 더러운 양심, 화인 맞아 무디어진 양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성경은 고발합니다.
거듭나고 중생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잃어버린 선한 양심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6~27) 여기서 말하는 새 영과 새 마음은 새로운 양심을 포함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회복된 선한 양심은 날마다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잔존해 있는 죄 된 본성과 육신의 소욕으로 인해 우리의 양심이 자주 무디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양심이 무디어진다면 우리의 믿음 성장에 장애가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무디어지면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약해지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게 되며, 따라서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죄악과 연약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의미의 겸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한 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거스틴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미덕중의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진실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어떠한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고 참으로 믿는 사람, “내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진실하게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청결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선하고, 청결하고, 거룩한 어떤 것이 나왔다면 그것은 오직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는 사람만이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영적인 공격과 유혹에 대항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시로 기도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령의 인도를 구할 때 우리는 선한 양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교수) 오직 은혜라는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비교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십시오.
칼빈) 오직 은혜라는 표현은 범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라는 말 자체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을 무시하거나 그것들의 가치를 폄하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직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만이 참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죠. 오직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참되게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게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사랑과 순종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되니까 나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겠지 또는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지 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겠지.”라는 식의 생각은 애당초 오직 은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은혜’는 사람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할 바른 자리를 회복시키며, 그 노력의 동기를 바르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만일 ‘협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저는 용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진 자인 것처럼 가르친다면 저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고, 선할지라도 그것은 때 묻은 걸레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름발이 같은 우리의 노력을 은혜로 귀히 보시고 보상해 주시며 복 주십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노력을 마치 크게 협력이나 한 것인 양 보아 주시는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1세기 한국교회 방향제시를 위한 "정성욱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 中 9.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pp. 8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