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세속성
중국어권 선교사로 존경 받는 한국인 류 모 목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어 보통어(만다린)로 진행하는 고신대학교 목회학 신학석사 학위(M.Div.) 과정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젊은 중국인들을 모아 현지 중국인 기독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지성인으로 양육하고 있다.
나는 고신대학교에 위 학위 과정 설립을 하도록 제안하고 독려했다. 여러 명의 중국인 학생들을 입학시켜 학부와 신학대학원 교육을 받도록 했다. 필요한 재정을 직접 지원하기도 했고, 후원자, 후원 교회를 찾아 소개하기고 연결시키기도 했다. 신학전공자 유학생들에게 대학교가 수업료 절반을 장학금으로 제공하도록 권유했다. 중국인 토착 기독인들에 비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학교육을 받도록 노력한 것이다.
류 목사는 자신이 존 네비우스(John Livingstone Nevius, 1829-1893)의 삼자원리 곧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 선교정책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신대학교 학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 과정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중국인 다윗 군의 결혼식을 주례하려고 산동성 태산 지역을 함께 여행할 때 들려 준 이야기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네비우스 삼자선교 정책이 한국에서 먹혀 든 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신심(信心)과 재력 덕분이라고 했다. 특히 북한 지역의 풍부한 곡식과 풍요로운 정신적 자산이 한국교회의 자립적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했다.
한국교회사가들과 선교학자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교회의 자립과 부흥에 크게 이바지헸다고 호평한다. 사실이다. 삼자 원리가 기여한 바 크다. 네비우스 원리는 선교지 교회의 '토착화'(indigenization)에 목표를 두고 있다. 전략적으로 선교지 교회의 자립적인 힘을 길러주어 독립하게 하고 성장하면 선교사가 조속히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자립적인 힘을 길러주지 않으면 피선교지 교회는 선교사와 후원교회의 원조에 길들어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오로지 네비우스 선교정책 덕분인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네비우스 선교원리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국인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실성, 신심, 잠재적 영성 때문은 아닌가? 세계복음화에 쓰임 받는 교회가 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도의 결과는 아닌가?
네비우스 삼자 원리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 공산주의 정부이다. 중국 정부는 19세기 말 주중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존 네비우스가 소개한 선교정책을 종교정책 삼자원리 또는 삼자애국교회 원리로 채용하여 엄격히 시행하고 있다. 삼자정책은 중국 기독교의 성장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독립성과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의 삼자 정책 덕분이다. 중국교회는 박해 때문에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차용한 삼자 정책 때문은 아니다.
초기 주한 선교사들은 이 땅에서 선교부, 선교사, 한국인들 간의 불화로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었다. 주한 미북장로교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선교부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시행을 명했다. 당시 산동성에서 활동을 하던 네비우스를 서울로 보내어 지도하게 했다. 서울에 두 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회합을 갖고 선교정책 강연을 했다.
존 네비우스는 미국 뉴저지 태생 선교사로 중국 산동성 닝포에서 사역했다. 현지인 교회를 세운 성공 경험과 실패한 그 이전의 선교사역을 비교한 글을 <차이니즈 리코더>(Chinese Recorder)라는 선교 잡지에 연재했다. 나중에 이 기고문들을 모아 <선교지 교회의 개척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네비우스는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요청으로 1890년 6월에 한국으로 건너와 주한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선교 세미나를 개최했다. 오늘날까지도 “네비우스 선교정책”(The Nevius principle or method)으로 호평받은 원리를 가르쳤다.
네비우스는 중국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집 〈선교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 1855)을 발표했고, 미북장로교회 선교부의 호응을 받았다. 그의 논문과 강연 내용은 선교정책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주한 선교사들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중국 선교 40년을 두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었다. 전반기 20년은 고용체계(employment system)를 적용하여 많은 유급 사역자, 조사들을 두어 교회를 개척하게 했으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돈을 목적으로 개종하고, 취직 목적으로 전도인이 되는 이른바 '쌀 신자'(rice christian, 식량 신자)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외국 자금에 의지한 토착 교회는 자립하지 못했다. 선교 사역 후반기는 자원체계(voluntary system)로 전환하여 사역을 하게 했다. 토착인들 스스로가 예배당을 마련하고 자립적으로 교역자를 섬기도록 했다.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은 영국국교회 선교이론가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미국 회중교회 선교이론가 루파스 앤더스(Rufas Anderson, 1796-1880)에게서 빌려온 '토착교회 선교이론'이다. 선교사업의 궁극 목적을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에 두고, 선교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 세 가지를 내세운다. 19세기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함께 추진한 토착교회 육성 방안이었다.
네비우스는 주한 미북장로교회 선교사들에게 자립을 강조하여 조선인 전도들과 목사들이 선교부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토착인들의 헌금으로 활동하게 했다. 학교와 병원 등 시설비가 많이 드는 기관을 제외한 교회당 건축비는 토착 교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도록 유도했다.
주한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선교에 적용했다.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1891)에 따르면, 한국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는 10개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1893년에 확정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 ‘3자(三自)’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목회자 후보생들의 신학교육의 수준을 토착민보다 너무 높이지 말라, 선교 대상을 근로자, 부녀자, 청소년 중심으로 잡으라,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라는 등의 원리를 담고 있다. 이것은 1890년 이후부터 사용되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전후로 하여 한국교계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주한 선교부들이 직접이든 간접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네비우스 원리에 따라 교회를 개척하고 확장하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는 세속적 면모가 약간 엿보인다. 다름 아닌 금전에 관한 이기적 동기이다. 요즘의 언어로 만하면 백인우월주의에 기초한 '갑질' 원리이다. 선교를 하라고 선교부가 보내준 돈은 '갑'인 선교사만 사용하고, 한국인 사역자들과 한국교회 곧 '을'의 비용은 한국인 신자들이 헌금한 돈으로 충당한다는 원리이다. 자기 호주머니의 돈은 자기만 쓰고, 토착인에게 필요한 것은 토착인 신자들이 충당하라는 것이다.
한국에 온 첫 장로교회 대표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는 1859년에 런던에서 태어나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네덜란드계 개혁교회에 출석했다. 1881년에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가까운 곳의 뉴 브런스윅 개혁교회 신학교에 진학했다. 1884년 7월에 북장로교회 파송 한국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 1885년 4월 5일,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나이 25세 때였다. 같은 날 함께 입국한 미북감리교회 파송 선교사 아펜젤러는 26세였다.
초기에 한국에서 사역한 미국 선교사 대부분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 20대, 30대 청년들이었다. 선교경험, 목회경험 없는 상태에서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이라는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건너왔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단순한 복음과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언더우드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을 자치, 자립, 자전으로 정리하여 “삼자원리”(Three Self Principles)라는 글을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 1908)라는 제목으로 작성하여 선교사 잡지에 기고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해 있는 일터에 남아서 자신의 일을 하면서 자활(自活)해야 하며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둘째, 교회의 방법들과 기구(機構)는 한국교회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만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는 최선의 자질을 갖추고 교회가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서 정식 사역자로 일하게 한다. 넷째, 예배당은 토착적인 모양과 토착 기독교인들 자신의 재원을 가지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건축하게 한다. 다섯째, 목회자들의 지식 수준을 너무 높게 교육시키지 않고 토착 교회 신도들 수준보다 약간만 높게 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선교정책 삼자원리는 이 요점들을 압축한 것이다. 피선교지의 한국인 시각으로 바꾸면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한국인 신자들은 외국 선교사들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하지 말라. 둘째, 한국교회와 기관들은 한국인 신자들의 돈으로 운영하라. 셋째, 한국인 정식사역자의 생활비와 활동비는 그가 사역하는 한국교회가 책임지라. 넷째, 한국교회 건축은 한국인 신자들의 돈으로 하라. 다섯째, 교역자들의 너무 높이지 말라. 이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제각기 살아 갈 방도를 꾀하라“는 것이다.
언더우드는 세속적 가치에 골몰했다.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동양인 특히, 한국인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떤 식으로 가르쳐야 한국인이 복음을 신속히 깨닫고 복음적이며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등을 고민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복음전도를 한다는 순수한 동기로 내한했지만, 1908년경을 전후로 미국 선교본부와 신자들이 보내주는 선교기금들을 선교사들의 생활비, 고용인들에게 지불하는 수고비와 경비, 활동비 등으로 지출하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인 정식 사역자들의 생활비와 교회건축 비용 등에까지 선교기금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골몰했다. 관심이 복음에서 돈으로 바뀌었다. '갑질'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 준 것이 네비우스의 '각자도생' 원리였다. 미국교회가 선교하라고 보내준 돈은 선교사가 사용하고 한국인 정식 사역자들과 한국교회의 비용은 한국인 신자들이 헌금한 재정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변형시켜 적용한 미국인 선교사가 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사역하던 아담스였다. 그는 네비우스 정책을 기본적으로 찬성하면서도 구체적 적용을 달리했다. 네비우스의 경험은 중국에서 이뤄진 일이고, 조선에서는 다를 수 있다. 네비우스의 실패는 정책의 실패라기보다는 사람을 쓰는 데 실패했는지 모른다. 한국인 전도는 한국인이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외국 선교사가 해 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전도자들이 이루어냈다. 다름 아닌 믿는 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이다. 한국인들의 소양과 기질에 알맞는 전도 방법이 필요하다. 한국의 유급 사역자들, 조사들은 중국인과 달리 다만 돈을 목적으로 일하거나 취직을 목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복음의 동역자이다. 함께 지역 교회를 섬기며 토착 교회의 성장에 이바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스는 한국인 토착인 사역자들이 신심이 강하고 신실한 점을 눈여겨 보고 그들을 신뢰했다. 한국인 사역자들, 조사들은 진정한 복음의 헌신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드렸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경비를 지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조치였다. 아담스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그와 함께 사역했던 많은 한국인 사역자들은 대구 경북지방의 신실한 목회자로 교회를 섬겼다.
아담스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지혜롭게 탄력적으로 적용했다. 가난하지만 복음전도 사역에 협력하는 토착민 사역자들에게 일정한 월급을 지불했다. 그리고 자신이 설립한 한국의 교회들에 일정한 재정을 지원했다. 이것은 네비우스 정책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선교사들과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자기의 선교정책을 강화하려고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선교기금을 만들었다. 유명한 ‘아담스 전도기금’(the Adams Evangelistic Fund)이다. 지역 토착인 전도자들을 지원하려고 특별히 확보한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 선교부의 재정이나 예산과 구분, 독립된 것이었다. 아담스는 선교회와 경북노회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 기금을 운용했다. 영남지방의 선교의 성공은 아담스의 현명한 삼자정책 무시에 힘 입는 바 크다.
한국동란의 비극적 상황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수정 폐기하고 새로운 선교정책을 도입할 것을 재촉했다. 낙동강 지역 전선까지 밀려 내려온 피난민 교회들과 한국인 목사, 전도사들은 네비우스 정책의 한계를 절감했다. 네비우스 정책의 긍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한국사회의 도농의 격차가 커지고 빈부차가 극대화되면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잠재되어 있는 한계와 세속적 특성이 감지되었다.
한부선 목사(Rev. Burce Hunt, 1903-1992)는 미국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주한 선교사였다. 그레이스앰 메이첸 교수가 주도한 미독립선교회로 속을 옮겨 한국에서 활동했다. 나중에 만주지역으로 옮겨 사역했고,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했으며, 옥고를 치렀다. 포로 교환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 여러 곳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연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차원에서그 공로를 인정해야 마땅한 선교사이다.
한부선은 광복 후 부산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나는 현 고신대학교에서 한부선의 '수사학' 강의를 들었다. 부인 그레이스 헌트에게 영어를 배웠다. 나는 어느날 스승 한부선에게 물었다. “미국에 가서 더 높은 단계의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 돌아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신학교수로 봉사하고 싶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도록 안내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영어로 말했다. 유학 길을 탐문하고 주선을 요청한 것이다. 한부선은 한국말로 응답했다. "미국 유학 갈 필요 없습니다. 고려신학교 좋습네다. 고려신학교 아주 좋습네다. 고려신학교 졸업하고도 휼륭한 목사 될 수 있습네다."
한부선의 답변을 들었을 때 네비우스의 각자도생(各自圖生) 원리와 토착인 목회자 우민 정책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부선은 훌륭한 전도자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교사이다. 한부선과 정통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신봉자들이었다. 선교정책을 탄력적으로 응용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를 재정적으로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들을 후원하고 재정후원자를 물색해 주는 일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한부선 또는 정통장로교 선교부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공부했거나 교회 사역을 했다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나는 고신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2년을 수학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시 대학과정, 신학교 과정을 밟고 또 다음의 두 과정을 더 거쳤다. 미국에서 10년 이상 신학, 철학, 교육, 역사 학문을 탐구했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하버드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선교단체나 개인으로부터 생활비나 학비 후원을 받지 않았다.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없었다. 친척이나 교회나 지인이나 선교단체 등으로부터도 한 푼의 등록금, 생활비를 후원받은 적이 없다.
나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고난도 학문과정은 토착인의 지적 수준보다 조금만 앞서는 정도로 신학 교육을 시키라고 지도한 네비우스의 '토착인 사역자 우민화 정책'에 역행하는 교육이었다. 나는 이 학문 여정이 과잉 소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학교수가 아니라 목회자로 일생 봉사를 했어도 내가 배운 학문이 여러 모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 영혼구원, 교회 성장에 요긴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앞세운 선교는 환영할만 하지 않다. 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할 생각이 없다. 토착인들의 자립을 목표로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존경한다. 다만 돈 들이지 않는 선교는 탁상공론이며, 선교비로 보낸 돈은 선교사만 사용하고 토착인이 필요한 것은 토착인 교회가 부담하라고 하는 각자도생 선교정책에 세속성이 엿보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삼자 선교정책이 콘텍스의 상황과 무관하게 어느 경우에나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비평적으로 생각할 점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재정 후원은 하지 않으면서 선교하라고 하거나, 선교하라고 준 돈은 선교사만 사용하고, 현지인 사역자와 신학교육은 현지 교회의 재정으로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 동기가 담긴 일종의 갑질 선교정책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오랫 동안 중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급 신학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선교사 류 목사와 중국인 학생들의 고급 신학교육에 힘써 온 나는 네비우스의 충실한 제자가 아니다. 네비우스와 그의 삼자선교 정책을 존경하고 토착화 자립 정책을 높이 평가하지만, 보편적 선교정책으로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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