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공공신학은 근년에 등장한 용어이다. 기독교세계관, 칼빈주의 문화관, 칼빈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해방신학 등의 이름으로 논의되어 오던 것들을 묶어 공공신학이라고 한다.
공공신학은 하나님을 회중들과 신자의 마음만을 다스리시는 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을 주관하는 천지의 대 주재로 부각시킨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거대 담론을 하며 그것을 넘어 종교적인 가치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는 일상생활을 다룬다. 이 세상에 대한 기독인의 참여를 강조한다. 세상 참여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본성에 함의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신앙의 개인화와 개인주의에 반대하면서, 세상의 적극적 변혁, 변혁활동을 강조한다. 성도들의 삶이 교회 내적 윤리로 환원되는 것을 반대한다.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넘어 그 방법의 정당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공공신학과 해방신학은 손을 잡는다. 둘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긍정의 관점으로 바라 본다.
공공신학은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주변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엿보인다. 부차적인 것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반면 복음과 영혼구원과 교회설립에는 소홀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삶을 주관하는 천지의 대 주재이시다. 기독인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거대 담론의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의 세상 참여는 당연하다. 그러나 공공신학이 기독교 신앙의 개인화와 개인주의에 반대하고 세상의 적극적 변혁, 변혁활동을 강조하는 동안 사도직임 수행에 소홀히 하는 취약성을 보인다. 복음을 공공성과 동일시하거나 동등한 위치에 두지는 않는지 의문스럽다.
아래는 리차드 마우 교수가 Calvin Theological Journal 38(2003): 281~298 에 기고한 것을 손성은 목사가 번역한 것으로 다음 블로거에 실려 있다. 클라스 스킬더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문화관을 계승한 자이며, 예장 고신과 자매 관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31조판)의 신학자이다.
최덕성 박사 (리포르만다 대표)
클라스 스킬더와 공공신학
클라스 스킬더의 작은 책 『그리스도와 문화』가 이미 50여 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4반세기 전에 영어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 책은 북미에서는 화란의 이민공동체 안에 있는 개혁신앙을 가진 조그만 집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무시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스킬더의 관점은 공적 생활에 크리스챤이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양식에 대한 북미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 너무나도 적절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공”의 범위
공공신학이라는 어구는 최근 북미신학계에서 오히려 활발하게 논의되는 토론의 영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공공신학의 의제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북미 크리스챤 사상가들은 오랫동안 크리스챤 사회윤리의 범위 안에 떨어지게 되는 잇슈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왔고, 그들은 또한 WCC의 교회-사회 프로젝트들과 연관되어 있는 일들만 아니라, 정치신학의 주제들을 다뤄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다른 하부학문들, 특별히 사회윤리는, 여전히 너무나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이 논의들조차도, 윤리적, 정치적, 혹은 교회-국가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적절하게 전달되지 않는 공공의 생활에 관한 더 광범위한 질문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수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장된 신학적 초점은 최근세사에 미국의 광범위한 학문공동체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과 병행되고 또한 어느 정도 -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미 1970년대, 아주 유명한 사회학자인 Peter Berger는 사회생활의 규범적 잇슈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정치질서에 대해서보다도는 개인들의 관계들에 너무 많은 주목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가 “중재적 구조물들”(mediating structures)이라고 불렀던 것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한편으로는 개인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주의라는 쌍둥이 죄악을 피하려면, 우리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하나의 완충지대를 제공하면서, 그럼으로써 성품형성에 결정적인 자원들을 제공해주는, 다양한 연합적인 패턴들 이웃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조직들, 청소년 단체, 봉사집단들, 교회들, 가정 그 자체 - 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방법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습니다.
1970년 이후, 중요한 한 집단의 학자들이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시민사회의 대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최근의 눈에 띄는 사례는 하바드대학의 정치공학자인 Robert Putnam의 작품입니다. 논의가 많이 되었던 1993년의 소논문, “Bowling Alone”, 그리고 200년의 동일한 제목의 책자, 『Bowling Alone』(혼자서 볼링하기)에서, 그는 북미의 문화에서 자발적인 사회활동에서의 저조를 탄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의 글제목은 더욱 많은 미국인들이 볼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과거보다도 훨씬 적은 미국인들이 짝이나 팀을 만들어 볼링을 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혼자서 볼링을 하면서 볼링을 하는 도중에 서로 둘러앉아서 함께 먹거나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utnam이 주장하는 바는, 우정과 팀정신과 연관되어 있는 “사회적 자본”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들의 사회적 유대에 있어서의 퇴조는, 개인들이 시민 사회에서의 건강한 참여를 위하여 전제조건이 되는 공적 성품의 질을 발전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패턴이 지배적이 될 때 Berger가 개인주의냐 국가주의냐면서 양자택일의 극단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위험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한 관심들이 공적 신학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크리스챤 학자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공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를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광활하고 복잡한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친척의 영역을 넘어서면서도 아직 정치적인 것에 삼켜져 버리지 않은 혹은 최소한 그래서는 안 되는 인간적 관계망의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어떻게 크리스챤 공동체가 이 더욱 광범위한 공적 의제에 대해서 의견을 효과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요한 논쟁
이러한 공적 신학 논쟁은 의미심장한 불일치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챤들이 공적 생활의 이슈들에 의견을 개진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종류의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쟁이 주고받아진 적이 있습니다. 많은 논쟁을 일으켰던 한 사상가가 바로 듀크대학의 Stanley Hauerwas인데, 그는 공적 문화의 현 상태에 대항하면서 서있는 “과격한 제자도” 공동체들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재세례파의 전통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Hauerwas는, 정의와 평화와 같은 용어들이 다양한 세계관의 관점들에서도 이해 가능한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크리스챤들이 중립적인 공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서 특별히 강력하게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Hauerwas가 주장하는 바는, 그 가정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을 떠나서” 크리스챤들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런 용어들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오직 성경적 증언만이 “우리의 신앙에 내용을 제공하고, 우리의 신앙에 여하한 제도적 구체화를 판단하며, 그 자체를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정치적 구호에 대해서도 의심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Hauerwas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너무 좁은 신학적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James Gustafson은 Hauerwas와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은 “분파주의적 유혹”에 넘어갔다고 비난합니다. 건강한 창조의 신학을 인식하는데 실패한 사상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판이 Max Stackhouse에 의해서 개진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공통적인 공적 언어사용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크리스챤의 관점으로부터 볼 때,
“인간생활은, 그 뿌리에서 있어서, 너무나도 심오한 로고스(logos)를 지니고 있고, 유대인들, 크리스챤들, 무슬림들,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이 서로간에 합리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고 또한 소량의 정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오스(theos)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어느 정도, 경계선을 넘어서 말할 수 있으며, 다소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면서, 우리가 통하지 않는 말을 할 때 우리를 도전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최근에 Hauerwas는 스펙트럼의 다른 극단에서부터 실제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가 공통의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Robert W. Brimlow는 Hauerwas가 비크리스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용어들로 특별한 크리스챤의 언어를 일종의 “번역”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그의 작품들 속에 있는 몇 가지 언급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Brimlow가 주장하는 바는, 이런 양보들은 Hauwerwas가 과격한 제자도에 대해서 강조하는 그 강조의 힘을 둔하게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Brimlow는, 크리스챤들은 “경계선상으로 부름을 받았고, 연약하고 분리되어 있도록 부름을 받고 또한 이렇게 우리 자신들을 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복음과 양립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의 등을 돌려대어야 합니다”고 주장합니다.
이 간략한 설명은 이 중요한 논쟁의 복합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만, 이 동시대의 미국 크리스챤 사상가들이 화란의 개혁신앙공동체 속에서 오랫동안 논쟁되어 왔던 물론, 간혹은 너무나도 분열적인 결과를 빚게 된 - 잇슈들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스킬더가 그리스도와 문화를 저술할 때에, 저 오랫 동안 견지되어 온 논쟁들이 그의 마음에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작은 책에 표현해 놓은 그 관점은 우리의 현재 맥락에서 세심하게 살펴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개혁사상의 연관성
이러한 최근의 미국의 논쟁들에서 고전적인 개혁사상의 뉘앙스들에 대해서 거의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었습니다. 확실히, 중심인물들 중의 몇몇 사람들은 현 주제에 있어서 Gustafson과 Stackhouse는 중요한 사례들입니다. 자기 자신들을 Hauerwas와 다른 이들의 관점을 거부하면서 특별히 개혁신앙적 주제들을 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분파주의적 유혹”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을 제기하면서, Gustafson과 Stackhouse는 그들이 보고 있는 바 크리스챤 정치사상의 존경할 만한 전통을 자신들의 견해와 연관시키고자 합니다. 곧 개혁신학에 공헌을 한 사람들을 포함하지만 그들에게 제한되지 않은 광범위한 사상가들을 결합시켜 놓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크리스챤 정치사상의 “자유주의적” 전통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Hauerwas에 반응하면서, Max Stackhouse는 그가 방어하기를 원하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이렇게 간략하게 요약해서 제시합니다:
“이런 자유주의적 관점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고 어거스틴, 토마스, 루터, 칼빈, 웨슬리 그리고 에드워즈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로크, 칸트, 웨버, 트뢸치, 화이트헤드, 그리고 니이버 형제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자유주의 크리스챤들은 기독교가 왜 모든 인류가 이 대화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는지를 가장 나은 설명을 제공해준다고 믿습니다[‘일반계시’, 원의(原義, justitia originalis), 죄로 인하여 모두 뒤틀렸지만 그렇다고 없어져 버리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이성의 선물].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자유주의 크리스챤은 또한 교회의 중심되는 과제들 중의 하나는, 이런 능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을, 계속해서 재발견하고, 확장시키며, 그것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비록 종교적인 이야기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느 것이 하나님에게 그리고 거룩한 삶을 위하여 가장 적절한 것인지를 보는데 사용하는 원리들과 행동들을 분류하는데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게 합니다.”
크리스챤들이 중립적인 공공의 대화를 활용하는 것의 적절성에 대한 이 특별한 논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그 차이점들이 대략적으로나마 다음의 양자택일 가운데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임을 충분하게 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1) 현대의 다원적 민주주의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재세례파적 유형의 관점이 사용될 수 있겠다는 것과 (2) 공적인 영역에서 자유주의적 개신교의 활발한 참여를 강화하기 위해서 기독교전통의 다양한 자원들을 이끌어 들이는 광범위한 “공통의 지대”를 강조하는 것 이 둘 사이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을 평가하는 방법을 따라서 신앙고백상 개혁신앙적 면모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지금부터 스킬더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공해 주고 있는 경우에 특별히 초점을 맞춰서 개진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스킬더의 관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나는 내가 이 탐사를 계속 하는 중에 스스로 설정해 두고 있는 한계들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첫째, 내가 이 이슈들에 대해서 하나의 북미개혁 크리스챤으로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나는 화란개혁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신학적 전망들에 대해서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저 다양한 사상학파들 사이에 있는 상호작용들을 상당히 먼 거리에서부터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는 광의의 복음주의로 가장 잘 기술될 수 있는 신학적 영적 분위기 가운데서 나의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고, 화란의 토양에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논의되어져 왔던 잇슈들의 몇몇에 대해서도 조금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화란의 장면에서부터 배워온 교훈들을 북미의 맥락에 적용시키는데 있어서 대단히 선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내가 금방 간략하게 기술하였던 북미에서의 논쟁에 동정적인 접근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논쟁의 양편 모두에게서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점들이 제기되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나는 제시된 선택 안들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스킬더와는 너무나도 다른 정신 가운데서 잇슈들을 평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양편의 안들을 깊이 흠결이 있는 것으로 단순히 제외시켜버릴 이유들을 신속하게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쪽 편 모두 동정심을 갖고 북미의 토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동시에 몇몇 스킬더가 제공해 주는 중요한 통찰들은 상황을 볼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그것이 북미의 공공신학자들에 의해서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할 하나의 전망인 것입니다.
셋째, 나는 미국의 카이퍼리안으로서 이 통찰력들을 스킬더에게서 끌어내어 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북미의 광범위한 크리스챤 공동체에게 익숙한 화란 칼빈주의 맥락으로부터 나온 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 인식은 대단히 일반적인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2000년 10월, 아주 유명한 사회학자 Alan Wolfe 세속적 사상가는 대중적으로 회자하고 있는 잡지 『Atlantic Monthly』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소논문을 하나 발표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특별히 칼빈 칼리지, 휘튼 칼리지, 풀러신학교와 같은 곳들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복음주의적 학문의 부흥을 논의하였습니다. Wolfe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꼽아서 이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한 요인으로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카이퍼의 사상을 단지 너무나도 일반적인 용어들로만 기술하였는데, 지성의 활동이 간혹 무시되어 왔던 경건주의적 분위기들 가운데서 진지한 크리스챤들의 지성적 활동을 고무시켰다는 것입니다.
카이퍼의 관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면들의 몇몇에 대해서 알고 있는 화란계미국인의 하부문화 그 바깥에 있는 북미 크리스챤들이 있는데 그들은 화란에서 많이 토론되어오는 카이퍼의 사상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른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행복하게 카이퍼리안이라고 동일시하고 있는 미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조차도 교회의 위계주의(ecclesiastical hierarchicalism)나 가정적 중생론(presumptive regeneration)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카이퍼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맥락에 있어서 “카이퍼주의”는 몇몇의 대단히 일반적인 주제들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다는 하나의 명칭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왕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우주 공간에 “손톱만큼도 없다”는 선언을 인식하는 것, 영역 주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헌신한다는 것과 같은 일들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 있어서의 역설들 중의 하나는, 미국의 크리스챤들이 카이퍼의 영향력과 연관시키고 있는 특별한 개념들 중의 몇몇은 오히려 카이퍼의 것이라기보다는 스킬더의 것에 더욱 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 자신의 저서들 속에 문화적 사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나는 중요한 카이퍼적인 주제를 홍보하고 있다고 생각한지 꽤나 오래 되었는데, N.H.Gootjes가 이 용어는 “스킬더에 의해서 고안되었을 확률이 제일 높다”고 관찰한 것을 발견하고는 꽤나 놀랬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내가 오랫 동안 카이퍼의 것이라고 여겼던 관점, 곧 크리스챤 공동체는 그 자체의 독특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화패턴들을 만들어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실상은, 카이퍼의 관점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스킬더에 의하여 발전된 입장이었음을 Gootjes의 논의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Gootjes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문화는 카이퍼에게 있어서 일반은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카이퍼는 특별은총을 이런 종류의 독특한 문화를 산출하는 것으로서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킬더와 카이퍼
스킬더는 자주 카이퍼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항해서 몇 가지 카이퍼적인 주제들을 간혹 활용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1951년에 있었던 젊은 부인회에서의 한 강연에서 스킬더는 자신의 해방파(vrijgemaakt)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확신들 때문에, 화란문화의 일반적인 경향으로부터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더라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주장하기를, 개혁신앙의 크리스챤들은 이런 종류의 주변화(marginalization)를 신실성의 표지로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숫자가 전 세계에 걸쳐서 움추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화들을 제대로 파악하였는가,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적절하게 이해하였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고 스킬더는 말하는데, 여기서 스킬더는 자신의 말을 지지하기 위해서 카이퍼의 권위에 호소한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카이퍼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반정립이 가능한 한 명확하게 진술되어질 때에만 우리는 “마음이 반반이 된 변종 구경꾼들이 가능한 한 빨리 머리를 흔들면서 떠나가게 될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킬더가 이런 관찰들을 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1878년 카이퍼는...” 여기서 스킬더가 분명하게 표시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초기의” 카이퍼의 권위를 소환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카이퍼의 다양한 언급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초기”와 “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는 칼빈대학의 역사학자 James Bratt에 의하여 이런 식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카이퍼의 그의 경력의 첫 번째 절반, 제도적 형성의 시기에 있어서 절정에 있었던 반정립에 대한 호소는, 칼빈주의자들이 공공의 삶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몫을 보여주어야 했던 그의 후반기에 오게 되면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 개념은 [그의 경력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략적 목적에 봉사하였습니다. 개혁신앙을 가진 회의론자들에게 문화적 활동은 신앙의 순결함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그 활동이 잠재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전이의 기간 중에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그 활동은, 분리의 기억 속에서 행하였던 것처럼 살고 있는, 많은 분리파개혁신앙인들을 동력화시켰던 것입니다.”
카이퍼의 공적 리더쉽의 후기 단계에 있어서 그는 신앙과 불신앙의 과격한 반정립을 덜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스킬더는 이것을 개혁신앙적 정통주의에 대해서 카이퍼의 헌신에 있어서 약화되고 있는 징표라고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Bratt은 그 발전을 오히려 칭송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기의 카이퍼가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반정립적 사고방식은, 카이퍼의 문화적 리더십에 있어서 개혁신앙 공동체의 신뢰를 획득하는데 있어서는 중요하였지만, 또한 칼빈주의의 “더 어두운 유산”에 연관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교만을 배양시키거나 원리적 분석을 남용하는데 있어서 반정립만큼 강하게 작용하였던 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반정립개념에 너무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개혁신앙적 문화관에 얼마간 위험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 Bratt에 동의합니다. 나는 또한 후기의 카이퍼의 강조들에 의해서 야기된 위험들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주의적 정신과 비크리스챤들의 사고와 행동패턴들에 너무 쉽게 동화되는 위험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스킬더는 이런 위험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의 대안적 관점을 강조하면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내가 현재의 북미의 맥락 가운데서 그의 저작들을 읽어가면서 발견한 것은 Stanley Hauerwas와 다른 이들의 재세례파적인 유형에 상당히 중요한 일치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적 신학논쟁을 진지하게 취하고 있는 미국 내의 개혁신학적 크리스챤들에게 스킬더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숙고해 보는 것을 흥미롭게 해 줍니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는 길이에 있어서 약 100페이지 정도 분량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스킬더가 취급하고 있는 주제들의 모든 것을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킬더의 어조는 거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면서 그의 마음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논쟁점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가 실제적으로 이러한 문화적 활동을 논의하게 되기 전에 많은 신학적 논쟁점들을 다루는데, 특별히 기독론에 대해서 많이 다루게 됩니다. 이것은 미국의 독자들, 특별히 스킬더의 신학적 맥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고안되어진 종류의 책은 아닙니다. 스킬더는 그의 생각들을 새로운 환경 속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려운 과제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미국인 “번역-해석자”(translator-interpreter)가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목적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기로는, 내가 최소한 어떻게 더 광범위한 그 과제가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힌트들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여기서의 미천한 노력은 그의 논의 가운데서 단지 두 가지 주제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나는 그의 관점들이 Hauerwas와 다른 이들에 의해서 제기된 재세례파 유형의 문화적 전략에 얼마간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방식들에 주목하겠습니다. 그것은 개혁신학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카이퍼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의 사상가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입장일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는 스킬더에게 있어서의 이러한 강조가 어떻게 더 넓은 전망 속에서 적절할런 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 전망 속에서 더 넓은 문화적 과제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얻고자 하는데 있어서 최소한 몇 가지 힌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세례파적” 교정
나는 스킬더가 자신의 책의 마지막 세 문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도발적인 관찰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옳은 방식으로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우리의 지혜로운 장로야말로 복된 자이다. 자신은 모를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의 문화세력이다. 사람들이 그를 욕한다 하더라도 내버려 두라. 그런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문화적 게으름뱅이들일 뿐이다!”
여기서 함축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문화적 변혁에 참여하는 어떤 과제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것도 없이 수행되는, 지역교회의 회중의 일상적인 일이, 사실은 하나의 결정적인 문화적 활동입니다. 크리스챤적인 전망으로부터 보면, 그것의 많은 차원들 가운데서 더 넓은 문화를 형성하고자 직접적으로 원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북미 논쟁들에 있어서 Stanley Hauerwas는 스킬더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가지 도발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에서, Hauerwas는 교회는 어떤 사회적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have)이 아니고 교회 자체가 사회윤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Hauerwas는 말하기를, “교회의 첫 번째 사회윤리적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계속 설명하기를, 스킬더가 자신의 신실한 장로에 대해서 언급하였던 것과 평행이 되는 예를 사용하면서, 교회는 그 자체의 의제를 설정하게 될 때 더 넓은 문화에 가장 잘 봉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먼저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과부와 가난한 자들, 그리고 고아들을 보살핌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보살핌은, 세상적인 전망에서부터 보면, 정의의 대의에 조금도 공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보살핌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세상도 무엇이 정의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인 것입니다.”
스킬더의 관점이 재세례파로부터 온 영감을 주장하는 동시대의 미국적 전망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평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킬더와 전망과 재세례파의 전망 사이에 있는 관계에 대하여 질문해 보게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스킬더는 그 비교를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빈주의자들 편에서 재세례파의 생활과 사고에 대하여 오랫동안 적대감이 존재해 왔었습니다. 너무나도 적대하여서 재세례파적 경향을 가진다고 하는 고소는 칼빈주의들이 상호간에 토론하는 중에 사용해 왔던 것들 중에 더욱 심각한 모독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칼빈주의자들 편에서 재세례파들을 향한 이 깊이 뿌리내린 적대감은 “가족내”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약간 길게 다른 곳에서 논증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을 다시금 자세하게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에게 분명한 것은, 재세례파들에 대한 개혁파 공동체의 좌절은 존 칼빈의 스위스에서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였는데 재세례파들이 칼빈주의자들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점들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방식들에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의 권징에 대한 개혁교회의 강조와 관계됩니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은 루터파와 가톨릭교도들에 대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느슨한 것을 비난한 것을 언급하면서, 재세례파들은 자신들은 개혁교회보다도 더 진지하게 권징을 실시하였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더 광범위한 문화에 대한 교회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도, 재세례파들은 칼빈교도들을 죄악된 문화와 동화되는 패턴들을 규칙적으로 발견하면서도 전적 부패를 믿음을 주장하고 있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더 넓은 문화의 정치체제를 칼빈이 인정하고 나아가서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권장하기까지 한 것을 꼭 집어서 비판하였습니다. 분명히, 재세례파들은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으로 연루되어지는 것 안에서 “검”을 칼빈교도들이 사용하고자 한 것에 대해서 가장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외부적인 폭력에 관한 관심과는 별로로 한다 하더라도, 재세례파들이 칼빈교도들의 죄악된 문화 속의 정치적 패턴들과 타협하고자 하는 열심히 보았던 것에 대한 그들의 너무나도 기본적인 반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주의에 대한 이러한 재세례파적인 비판의 유형들이 스킬더의 저작들 속에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칼빈주의자로서 크리스챤의 문화적 활동을 위한 적절한 전략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른 개혁파 크리스챤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개혁파-재세례파간의 변론들이 갖는 가족내 성격에 대한 나의 분석이 옳다면, 이것은 우리들을 놀라개 해서는 안 됩니다. 스킬더는 재세례파들이 많은 칼빈교도들의 실행에 있어서 지적해 왔던 바로 그 일관성이 없음을 피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엄격한 권징을 실시하는 것을 주장하여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문화생활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복종하는 패턴들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신앙을 가진 문화적 활동과 불신앙의 문화활동 사이에 있는 반정립의 실재에 대해서 충분하게 정당성을 제공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Stanley Hauerwas 자신이 크리스챤의 제자도의 특수한 언어는 덜 공개적인 크리스챤의 공적 강화 속에 “번역되어질” 수 있다는 암시와 함께 그 자신의 반정립적인 언급들 중 몇몇을 약화시켰던 것으로 비난을 받아 왔음을 나는 앞서서 언급하였습니다. Hauerwas의 동기는 여기서 칭찬할 만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더 넓은 인류공동체의 행복에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의무를 성취할 수 있는 분명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결함은 우리가 앞서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기본적인 전제에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다른 재세례파들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적 전망으로부터 볼 때, Hauerwas의 문제는, 창조의 교리에 문화적인 중요성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재세례파의 사고에 특유한 것입니다. 스킬더도 더 넓은 문화적 의무를 감지하면서도 또한 그 의무를 진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뉘앙스가 있는 창조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스킬더의 사상이 제공해주는 의미심장한 유익인 것입니다.
“절제”의 선택권
스킬더는 더 넓은 인류공동체의 재난으로 닥친 문제들을 단순히 무시하려고하는 크리스챤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종류의 “크리스챤의 문화적 절제”에 대해서는 “증오심, 게으름, 수줍음, 느슨함, 혹은 협소한 마음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아주 매서운 말들로 비판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영웅적인” 절제가 있는데, 이것이 그가 추천하고 있는 전략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올바른 종류의 문화적 절제는 “크리스챤들이 자신들의 동료들을 돌보고,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남겨두신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등, 카이퍼와 다른 이들이 문화적 변혁이라고 불러왔던 저 매우 가시적인 일들을 그들이 수행하기에 어렵게 만드는 “...신적인 의무감으로 수천의 다른 일들을 행하는 중”에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더 넓은 문화적 소명의 합법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다른 긴박한(urgent) 필요들을 위하여 그 문화적 소명의 한계와 합법화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고 이 나라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이 패턴은 반문화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활동을 실행하는 영역에 제한을 가하는 것입니다.
문화의 연루에 대한 이 절제-서약적 접근을 옹호하면서 해야 할 말들이 많습니다. 어떤 특별한 칼빈주의 공동체나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재세례파 공동체가 자체의 내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문화적 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너무나도 합당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개인들이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꼭 그것처럼, 특별한 크리스챤 공동체들도 그러합니다. 스킬더가 이 점에 있어서 “천국을 위한 고자”라는 심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특별한 문화적 절제에 대한 서원이 모든 크리스챤 교회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인지 아닌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일단 우리가 더 광범위한 문화적 참여로부터 제한하고자 결정하는 것이 특별한 서원이고 다른 상황 속에서 그리고 다른 크리스챤들의 경우에는 그것 없이도 추구할 수 있는 가치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지낼 수 있다는 부르심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상황 속에서 이 패턴의 절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예를 든다면, 주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 넓은 바벨론 사회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회 안에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그들의 유수기간 동안을 지내도록 두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롐 29:7).
더 넓은 문화적 소명이 우리의 현재 상황보다도 저 고대 세계에서 더욱 긴박하였겠습니까? 우리들 모두로 하여금 문화적 고자들이 되도록 요구하는 우리들의 현대의 상황 속에서의 독특한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떻게 스킬더가 나찌경찰로부터 몇 달 동안을 숨어지내야 했던, 그 전쟁 중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교회의 우선순위를 일시적으로 재조정하는 견지에서 생각하게 하였을 것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문화상태들 아래에서의 전체 크리스챤 공동체에, 아니면 심지어 전체 칼빈주의 공동체에 왜 그의 특별한 권장사항이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억제”의 약속
하지만, 나는 스킬더의 논의에 있어서 이 절제의 주제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가 현재 시대의 교회가, 유럽에서든 북미에서든, 주님의 다시 오실 때까지 절제를 맹세해야 하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간단히 말해서 그가 틀렸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주장하는 바의 중심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최소한,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주님께 신실하려고 하면서 그의 묵상들로부터 우리가 응용할 수 있는 것의 핵심적인 주장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의 절제의 서원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현대의 상황 가운데서 유념하고 있어야 할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많은 현재의 공공신학의 토론자들이 재세례파의 전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반정립적인 음조를 띄고 있어서, 자유주의적 전망에 대한 유일하게 그럴 듯한 대안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음을 나는 이미 관찰하였습니다. 그 자유주의적 전망은 개혁신학과 다른 자료들에 선택적으로 취사하여, 더 넓은 공적 영역에서 공통성과 중립적인 공적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제의 서원을 변호하면서, 스킬더는 문화적 퇴거가 협상 불가능한 원리의 문제라고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논의 가운데 문화적 사명에 대해서 온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카이퍼의 선언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 웅변조를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크리스챤 공동체로 하여금 열심을 크게 하여 더 넓은 문화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고안되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갑자기 그가 절제의 전략을 인정하게 될 때, 그것은 그가 더 넓은 문화적 프로그램이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가 살고 있던 주변세계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그가 어둡게 평가한 것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킬더의 문화적 비관주의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동시대 장면을 종말론적으로 읽는 것을 받아들인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스킬더가 관찰하기를,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억제하셔서 복음의 선포가 때때로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영역들 속으로 아주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억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없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계속적으로 있을 것도” 아니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것이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최소화되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때에는 “교회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현상유지(status quo)는 양편에서부터 모두 제거되어지는데, 문화적 생활 속에서, 정확하게 바로 그곳에서 제거되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단지 하나님의 택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적그리스도 주변에 몰려들 것입니다.”
나는 스킬더가 여기에 기술하고 있는 대로의 그의 종말론에 대해서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 그렇다 치더라도, 종말의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견고한 평가들에 대한 문화적 일들 위에 우리의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을 기초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의 강한 이끌림은, 우리의 노력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히 우리들의 시대에 그의 말을 반복해서 말한다면 -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영역들 속으로 아주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스킬더에 의하여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술되어진 그 “억제”의 약속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물론,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적그리스도의 능력에 우리 자신들의 힘으로 맞서야 할 그 때가 실제적으로 언제 도달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분별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가장 잘 무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목적들을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아니면 미묘하게 작용하는 불법과 반역의 특별한 표지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지들은 하나님께서 깊은 관심으로 보살피시는 것들, 곧 인종적인 정의, 가난한 자들의 고통, 인간관계들 안에서의 신실함, 그리고 사람들이 창조하지 않은 질서의 고귀함에 대해서 무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불법의 더 광범위한 패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불법이 나타는 곳마다 때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고자 준비되어 있는 한, 미래에 대한 경고들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강건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함께 함”(Being-Together)
스킬더는, 최소한 어떤 역사적 상황들 속에서는, 말씀이 “심지어는 심지어는 불신자들의 영역들 속으로 아주 깊이 파고들어갈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우리가 선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견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식의 선포를 증진할 수 있다고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문화적 목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도움을 주는 방식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수누시아(sunousia), 곧 함께 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문화적 코이노니아(koinonia)”와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문화적 코이노니아는 “동일한 본성이 동일한 기본적 원리들을 위하여 사랑을 통하여 달려가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는 곳에서, 그리고 동일한 이익들이 공통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증진되어지는 곳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유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우리의 배타적인 크리스챤적 관심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수누시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수누시아는 최근의 북미의 논의 가운데서 공적이거나 시민적인 사회에 대한 주제들에 대략적으로 일치됩니다. 크리스챤들이 더 넓은 인류공동체의 지체들과 더불어서 함께 존재하는, 그 수누시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가 언급한 것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고 숫자도 많지는 않고, 또한 언제나 죄악된 세대의 문화적 패턴들에 동화되는 것에 대항하여 경고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언급들을 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언급들을 할 때 수누시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크리스챤의 의무로서 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서 그가 좀 더 많은 것들을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수 있겠고, 그가 더 자세히 말해주는 것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바를 약간 짜내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가 그것들을 자세하게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주저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는 개념들을 강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적 타협에 대한 스킬더의 경고들은 전형적으로 성경의 종말론적 기록들에서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요한계시록 18:4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도록 주님께서 불러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것이 크리스챤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서둘러서 그는 첨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8장의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면서 그는 창녀로서의 바벨론과 관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여성성을 저주하는 것이거나 자연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고 관찰합니다. 여기서 스킬더는 에스겔16장을 삽입하여서 이스라엘이 간음하고 있다고 책망하시면서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 가운데서 그녀(이스라엘)의 원래의 피조된 여성성 그녀의 기저의 ‘본성/자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선 그는 우리의 바벨론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요약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벨론의 피조성과 함께 그 수누시아를 부인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있는 몫(수누시아)과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갖는 코이노니아의 의무 사이에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들은 구속받지 못한 인간성이 성취한 문화적 성취들에 대해서 스킬더가 매우 뉘앙스가 있는 평가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는 심지어 이 점에 있어서 그들 불신자들의 “공헌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들을 할 때 그는 일반은총에 대한 카이퍼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스킬더에게는, 언제나 은혜는 구원케 하는 능력이며, 그것이 “일반의/공통의” 것이라는 유일한 의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모든 이들에 의해서 공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를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데 있어서 “일반의/공통의 억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삶은 아직 지옥과 천국의 형태로 분리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불경건은, 비록 이것이 그들의 숨겨진 욕망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수고 가운데서 사탄주의의 발작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항하는 종말론적 분노함으로부터 여전히 저지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택자들은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제어를 받고 있는데, 그들이 현재로서 “그들과 일치되는 것을 적절하게 수행하는 것이 저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과 계시의 역사의 목표들”을 이뤄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어떤 것도 완전하게 계발되고 절정에 이르지 않았고, 어떤 것도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중간의 중간”시대에, 구속받지 못한 인류의 문화적 활동들 속에는 식별될 수 있는 원래의 피조 됨의 “조그만 남은 것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여기서 스킬더가 양보하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예를 들어서, 칼빈이 구속받지 못한 인류에 대해서 쓸 때 사용하였던 그 빛나는 종류의 용어들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류는 “비록 타락하고 그 온전함에서 뒤틀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로 옷 입혀지고 치장되어 있습니다.” 스킬더는 다음과 같이,
“이 잔여물들이...여전히 그것이 그분을 기쁘게 하는 대로 새로운 문화적 공헌들을 촉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자(Christ’s Sender)가 모든 역사의 기독론적 진보에 있어서 유지하시는 그 발전과 억제의 체계에 따라서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낙원의 세계에서 주어졌던 것의 가능성이 촉발되는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세상과 더불어서 가지고 계시는 그분 자신의 목적과 의도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심판날의 불길 속에 집어 던지시도록 보존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 카이로스를 지니고 있는 그 가능성이 촉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킬더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단지 대략적으로 요약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공공신학에서 존재하는 선택안들 중의 대부분에 중요한 교정책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매우 강조하는 크리스챤의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지지하는 창조적이고 로고스 모티브를 자유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과는 달리, 스킬더는 우리의 타락한 세상 속에서의 문화적 패턴들이 과격하게 죄악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과격한 크리스챤들의 공동체적 일체성을 현 시대에 방어하고 있는 재세례파적인 전망과도 다르게, 스킬더는 심지어는 바벨론의 부패함 가운데서도 남아있는 자연의 흔적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을 계속해서 전개해 가는 것을 계속 정당하게 보려고 힘씁니다. 교회는 그 자체의 내적인 문화생활을 발전시키는데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더 넓은 인류공동체에 대한 그 문화적 의무감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킬더가 비록 약간은 주저하면서 말한다고 하더라도, 강력하면서 결정적으로는 비재세례파적인 창조에 대한 강조는 분명합니다: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며, 수누시아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는 현대의 개혁신학의 사상가들이 숙고하는데, 도움이 되고, 심지어는 결정적인 것이 여기에 많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공공생활의 현대적인 이슈들을 개진하는 그 목적을 위한 함축성들을 강조하면서, 그 전망들 또한 계속해서 개발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며, 나는 이 논의에서 현존하는 몇 가지 힌트들을 이끌어냄으로써 스킬더의 생각을 우리는 확장시킬 수 있다고 내가 믿는 한 가지 중요한 예를 제공함으로써 이 확신을 나는 간략하게나마다 실증할 것입니다.
공적 경건
무슬림에 의해서 세계무역센터건물이 파괴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개신교개혁교회(PRC)의 미시간 주에 있는 세 곳의 회중들이 뉴욕시에서 발생했던 그 비극적인 사건들에 반응해서 하나의 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PRC의 정기잡지인 『The Standard Bearer』지에 실린 이 예배에 대한 짧은 보고서에 따르면, 예배를 인도하였던 목사들은,
“이 세 지역의 크리스챤들의 관심을 반영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비극으로부터 직접 고통을 당하였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관심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요? 크리스챤들은 이 사건들을 우리 주님의 재림의 넓은 그림 가운데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된 그 두려움의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 관심의 목록 안에 명백하게 부재하고 있는 것은 그 무서운 사건들에 의해서 너무나도 상처를 입은 비크리스챤들에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확실하게, 이것은 요약된 뉴스 리포트이고, 이 예배에서 언급되었던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말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또한 다른 PRC의 회중들은 9월11일의 그 비극에 관계된 다른 종류의 관심들을 다루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다른 것들은 『The Standard Bearer』지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뉴욕에서의 그 사건 이후 매회 그 잡지들을 검토해 보았는데 그 9월11일 사건에 대한 어떤 다른 의미심장한 언급들이 없습니다. 이 짧은 뉴스 리포트에서 유일한 강조점이 신자들에 대한 관심들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거리가 아닙니다. 그 관심은, 그 사건 때문에 상처를 입은 이 선택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사건들을 종말의 때와 관계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 파멸을 멀리서 지켜보는 크리스챤 가정들의 두려워함에 대한 것입니다.
PRC는 Herman Hoeksema의 지도력 아래에서 카이퍼의 일반은총개념이 1924년 CRC 총회에서 성경적인 교리의 진술로 받아들여진 것을 거하였기 때문에 설립되었습니다. 훅세마와 그의 동료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신적인 호의의 태도에 대한 어떤 개념도 일관되게 부해 왔습니다. 다른 칼빈주의자들이 유기자들을 향한 은혜로우신 신적인 선물들로서 해석하는 것을 PRC는 구속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을 심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봅니다.
스킬더는 비슷한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의 공통의 문화적 은사의 모양은 신자와 불신자와 동일하게 동일한 창조물의 맥락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실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노동의 유사성은, “그들의 다양한 마음들의 유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견고하고 변함이 없는 재료들의 유사성에 의해서 야기됩니다.” 이 동일한 자료를 사용하면서, 그들은 너무나도 다른 생산물을 낳습니다. 하나는 예배를 위한 건축물을, 다른 사람은 반역을 위한 장소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들이 사용하게 될 진흙을 위하여 동일한 구덩이에 가고 그들이 사용할 대리석을 위하여 동일한 채석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스킬더의 설명에 대해서 근본적인 논쟁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내 자신의 글 속에서 나는 일반은총의 신학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유익들이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나는 또한 인용부호에 넣어서 ‘일반은총’이라고 표시하자는 Henry Van Til의 제안에 공감을 표현하였습니다. 반틸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택함받지 못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혜택을 베푸시는 선하심”의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베푸시는 축복”의 구속적인 것을 동등하게 여길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근거 위에서 말입니다. 일반은총의 개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역자: 곧 인용부호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틸의 염려는, 진실된 염려이며, 나도 공감하고 있는 것이며 일반은총 신학 안에 있는 얼마간 위험한 경향에 대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반은총을 곧이곧대로 모두 부인하는 것 속에서 내가 보는 경향들에 대해서도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 경향들은 그들의 예배 속에서 PRC의 목사들에 의해서 표현된 제한된 어젠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신앙의 크리스챤들은, 인간의 고통의 그 가공스러운 공포에 대해서 증거할 때, 그 희생자들이 크리스챤이나 아니냐에 관계없이 그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위하여 깊은 슬픔을 경험합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개혁신앙의 크리스챤들은, 소방수들, 경찰, 군인,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그런 종류의 사고 상황 속에 빠져있는 피해를 당하고 죽어가는 자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보여주는 용감함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신앙적 크리스챤들은 그러한 노력들에 경탄하며 그러한 영웅적인 행위들을 보여주는 자들이 크리스챤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그들의 선함을 이렇게 표현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러한 크리스챤들의 반응들에 대해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여야 할까요? 우리는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슬픔과 경탄을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혼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게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들임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성품특성(character traits) -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영적 기질(spiritual dispositions)이라고 표현되는 것- 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 그리고 욕구에 있어서 거룩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계발해야 할 것 말입니다(벧전1:13~16).
카이퍼는 우리가 공적 경건신학(a theology of public piety)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개발할 필요를 인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시민적 덕성, 가정적 감각, 자연적인 사랑, 인간 덕성의 실행, 공적 양심의 증진, 통합성, 사람들 사이의 상호간 신실함, 그리고 경건의 누룩이 있는 생활을 위함 느낌이 있는 곳마다” 일반은총의 “내부적” 양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카이퍼는 분명하게 구속받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 안에 이런 특성을 계발하는 것을 고무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특성들은 뉴욕시가 공격을 받는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보여주어야 할 크리스챤적인 반응들을 특징지어주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그의 논의 중에 이런 관심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적 경건의 신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위하여 계발되어질 수 있는 경우에 들어맞는 표현들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곳에서, 그는 교회는 “모든 세상의 짐들을 지도록” 부름을 받은 새롭게 된 인간성을 낳는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 설명하기를, 이 교회는 “국가적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기준들을 관련된 시간과 장소의 언어로 선포할 수 있고, 그렇게 그 공동체에게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 어떤 부요함이 그 생명에 있어서 발전될 수 있는지, 이것이 어떻게 되어질 수 있고 또한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금 말하자면, 이것들은 최대한으로 좋게 말해서 힌트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탐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전세상의 짐들을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특별히 국가적인 위기의 때에 더 넓은 인류공동체를 향하여 그 넓은 공동체의 본성과 연계되어 있는 부요함들에 대한 시간과 장소의 언어로서 어떻게 우리들이 신자들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정부의 행정관들에 대한 존 칼빈의 조언은 이 점에 있어서 도발적입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맹렬하게 분노함에 이끌려 가서는 안 되고 혹은 증오심에 사로잡히거나 무정하게 엄격함으로 불타올라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그들이 지금 심판하려고 하는 그 사람의 특별한 잘못 안에 있는 공통의 본성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이 공통의 본성에 대한 동정심이 칼빈이 이 맥락에서 “무장한 강도”로 묘사하고 있는 종류의 사람을 향하여 계발되어야 할 적절한 태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억압의 희생자들인 사람들을 하여 친절을 베푸는 감정을 계발하는 일에 있어서 심지어는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목적들과 그 목적들이 죄악된 인류에게 인식되지 않고 있는 곳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 목적들의 능력에 대한 스킬더의 강력한 강조는, 공적 경건신학의 방향에 있어서 비록 강조되고 있지 않는- 그의 힌트들을 탐구하도록 우리들을 자극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반정립의 실제를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는 개혁신앙의 크리스챤들을 위해서, 더 넓은 인류공동체를 향한 적극적이고도 거룩한 감정들을 가질 수 있도록 권장하는 신학적 근거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반정립주의 교사들로부터 어떤 신학적 권장이 결핍된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영혼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심지어는 그곳에서 간혹 분노하기조차도 하는 이런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반정립주의적 개혁신앙의 전망의 더욱 넓은 강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전망이 제공해주는 어떤 자원들을 부지런히 탐구해야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적 타협에 대항하여 신랄하게 경고하는 것들 가운데서도 우연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의 표현들 가운데서라도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의 패턴들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면서,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의 “성품” 차원으로 말하라는 명령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3:13~16). 이런 기질들을 계발하는 것은 우리들 시대를 위한 하나의 공적 경건의 중요한 요소인데, 주님께 기쁨이 되는 거룩함의 패턴들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스킬더는 거룩함의 이 특별한 차원의 계발에 명백하게 주목을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중요한 틀 - 그리고 심지어는 몇 몇의 도움이 되는 힌트들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 과제를 오늘날 자발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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