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성공적 통합을 위한 지침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 대신)은 2015년 9월에 예장 백석과 옛 예장 대신이 하나로 합쳐진 교단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교단이 2018년 가을 총회를 기점으로 3년 만에 분열했다. 옛 교단 잔류 그룹에 복귀하는 그룹, 새로 구성된 그룹, 백석에 잔류한 교회 들으로 나뉘어졌다. 1960년에 예장 고신파와 승동파가 통합하여 '합동'이라는 교단을 태동시켰으나 이듬해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를 존속시킨다는 교단 합동 조건을 총회가 파기했기 때문이다. 예장 합동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폐교시키기로 결의하자, 고신파 인사들이 이를 교단 '합동 계약 위반'이라면서 원위치 했다. 환원한 것이다.
예장 대신과 백석의 통합은 분열된 한국교회가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준다는구호를 앞세우면서,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교단이 됐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이루어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면서 박수갈채를 쳤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법원이 '대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란다. 통합을 반대하던 옛 예장 대신 측 목회자들이 '예장 대신 수호 측'이라는 이름으로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명칭 사용을 하지 않도록 제소했고, 법원이 이 그룹의 손을 들어주었단다
교단 명칭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가. '하나 됨'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통합 과정의 한두 가지 미비한 절차를 문제시 하지 않을 수 있다. 예장 대신의 통합 유지의 실패 원인은 따로 있다. 신학적 차이를 조율하지 않았고, 세몰이 식 통합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선결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은 기구적 통합은 공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표지로 삼아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신실하게 가르치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는 어떤 류의 정치형태와 특성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성 안에 있다. 교회는 한 주(主), 한 믿음, 한 세례(엡 4:5)로 하나가 되어 있다. 서로 다른 지역, 배경, 기질,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성삼위 하나님의 관계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진리를 고백하고 파수하는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여럿이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하나의 교회로 존재한다(행 15:36-41 참고).
신약성경은 교회의 영적 통일성을 말하는 반면에 교회조직의 일치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의 원리에 따르면 지상교회가 이런 저런 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나뉨이 교회의 통일성을 와해시킨다는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위해 나뉘어졌어도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였다.
교회는 여러 가지 역사, 문화, 사회 요인으로, 때로는 사소한 교리나 신앙생활을 이유로 의견대립과 갈등을 겪다가 나누어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다. 성경은 교회를 향하여 ‘연합을 이루라,’ ‘일치하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한다. 이미 존재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지키라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앙고백적·영적 통일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교단이 나뉘어져 있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성이 깨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내적, 영적 통일은 외적 형태의 연합과 일치로 구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자와 신자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의 영적인 하나 됨은 외형 조직의 하나 됨으로 표현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다. 한국교회의 교단 통합은 환영할만하다. 예장 대신과 에장 백석의 통합 실패는 인본적인 동기의 하나 됨이나 과시적이거나 세몰이 식의 통합이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교단 통합의 선행 조건을 간파하고 합리적으로 진행하고,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1. 솔직한 역사연구
1983년에 미국북장로교회(UPCUSA)와 미국남장로교회(PCUS)가 통합하여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를 태동시켰다. 그 무렵에 미국장로교회(PCA)와 복음개혁장로교회(RPCES)도 합동을 했다. 위 두 교단의 통합은 모두 분열될 당시의 원인에 대한 역사적 규명과 신앙고백의 일치 여부에 대한 확인 작업부터 시작했다. 분열이 발생한 역사적 요인에 대한 솔직한 분석과 신앙고백과 신학에 대한 검토라는 선결조건을 해결한 뒤에 교단을 통합했다.
분열된 교회, 교단들이 새로운 형태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데는 나누어지던 당시의 원인에 대한 역사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 한국장로교 제1차 분열―고신분열의 경우를 보자. 이 분열은 교권이 진리를 핍박하고 총회가 출옥성도들과 그 지지자들을 교단 밖으로 축출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친일전력자들이 총회를 장악하고서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신앙의 순수성과 민족적 정통성과 신앙고백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닌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들 중심의 경남노회를 정치폭력으로 제거한 결과로 발생했다.
장로교 그룹들이 진정으로 고신과 하나 됨을 원한다면, 장로교의 일치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분열이 발생한 역사와 정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서로 호의를 가지고 역사 사실을 직면하고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 정말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상동 목사는 정말로 독선적인 분리주의자인가, 김재준 교수는 정말로 자유주의자인가, 박형룡 박사는 정말로 근본주의자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조상의 공과(功過)를 대면하고 솔직히 공(功)을 인정하고, 용감하게 과(過)를 시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 교단 신학교는 자파의 존재를 부여한 역사적 뿌리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 교회사가들은 자파의 역사를 기술하고 교단의 정체성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자파변호 식으로 접근한다.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에 쉽게 과(過)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객관적’ 서술보다는 자기 교단의 존재의의와 설립의 대의를 확대하고 상대 교단을 폄하한다. 이러한 교회사 교육은 문제해결보다 오히려 분열을 고착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교파의 신학자는 그 교파의 후예이기 때문에 과거사를 솔직하게 밝히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기준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상반된 기준들을 묶어주는 것이 있다. 교회일치나 교단통합의 절대근거는 성경이다.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의 신앙고백, 관리표준(정치원리,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중심으로 분열과정을 연구하고 평가하면 자파가 가진 오류가 드러나고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 교회사를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당파적 시각으로, 힘의 논리로, 다수의 관점으로 서술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
역사를 솔직히 연구하고 공과 과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은 연합일치의 첫 번째 장애물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는 교회사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교육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회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면 먼저 교회사가들이 허심탄회하게 역사해석의 기준을 설정하고 솔직하게 대화를 하고,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역사교과서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존의 왜곡된 시각에 대한 비평적인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공동으로 발표해야 한다.
강자의 논리로 접근하면 교회의 일치 노력이 성공할 수 없다. 한 공동체가 다른 한 공동체에 대해 터무니없게도 분리주의, 독선주의, 형제를 정죄한 집단이라는 따위의 적반하장의 오명을 뒤집어씌운 것이 교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해는 불가능하다. 진리성에 기초하지 않는 역사연구와 자파옹호 식으로 기술된 교회사는 광복 반세기를 넘긴 이 시점에도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분리주의 운동으로 보고, 광복 뒤 교권주의자들의 정치폭력으로 인한 분열을 교회분열운동으로 보는 따위의 역사왜곡이 거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청산과 참회고백이 없고 친일파 전통의 단절이 없는 상태에서 진정한 한국교회의 일치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정치적 힘으로, 조직기구를 일일시적으로 일치시킨다고 해도 그러한 연합은 또 다른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두 교회가 일치하면 세 교회가 될 수 있다. 분열 당시의 역사에 대한 솔직한 연구를 회피하고, 공과를 시인을 하지 않으려면 연합이니 일치니 통합이니 하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말아야 한다.
2. 지침 만들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초창기에 단일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향하는 두 교파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무산되었다.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으면 교파 단일화 노력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회의 일치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성경을 연합일치의 절대 근거로 보는 정통신앙과 포용주의를 일치의 근거로 삼아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거나 수용하는 교회들까지 하나로 묶으려는 것은 물과 기름을 섞으려는 것과 같다.
한국의 상당수 장로교단들은 교단통합이 가능한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조건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거나, 그러한 사상을 선전하는 신학자를 제재하지 않는 교단과 하나가 되는 것은 옳은가? 자유주의 신학과 바르트주의를 수용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분명한 교리―신학 지침(指針)을 마련해야 한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거부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신학자를 용납하는 교회와 일치를 시도하는 것이 배교적인가 아닌가 구분할 수 있는 이른 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의식에 항거하다가 분열했다. 신학과 교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므로 중추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경우는 그 집단에서 분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953년도와 1959년도의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빌미가 된 당시의 신학 차이는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근본 차이에 비하면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자유주의 기독교와 유서 깊은 기독교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변신앙과 계시신앙이라는 서로 다른 바탕에 뿌리를 박고 있다.
한국교회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조차 무시하고 있다. 하나됨을 위한 노력은 분열보다 훨씬 더 힘든 작업이다. 교단의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 일치를 위한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신학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에 충실하고 구성원들이 폭넓게 동의할 수 있는 교리―신학 지침이 필요하다. (1)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거부하거나 개념을 달리하여 해석하는 자들을 규제할 기능을 가졌는가, (2) 세계교회협의회와 같은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칼 단체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3) 로마가톨릭교회와 타종교와의 일치를 위한 대화는 어떻게 볼 것인가 등도 다를 수 있다.
한국교회가 교과서처럼 사용할 수 있는 교회일치를 위한 목적의 신앙고백서 공동안(共同案)을 작성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각 교단이 파견한 전문 연구원들이 연구하여 만들고 신학자와 목회자와 일반성도들이 모여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해석하는 교의학 연구도 수반되어야 한다.5 신앙고백서 작성은 도그마 형식으로 요약하고 정착된 것이 아니라 신학사상의 혼란, 종교다원주의 분위기, 상대주의 정신의 팽배, 한국교회가 처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 종교혼합주의, 타종교와의 대화,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 종교통합 움직임 등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서 작성은 기도와 함께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 아래서 진행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당시에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선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서 회의를 시작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서 작성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에 대한 고백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정통신학을 지향하는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종교다원주의자를 묵인하고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를 모색하는 교회와 더불어 공동의 고백문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교리를 등한히 하고 있다. 목사, 장로, 집사로 안수를 받을 때 교회의 신앙고백서를 수납하는가 하는 질문에 ‘예’ 하고 답을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교리, 탈교리 풍토가 점차 팽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리와 신학을 고려하지 않는 연합일치운동은 기존 교회의 세력에 맞서게 된다. 그 일을 추진하는 자신도 새로운 권력의 일부가 되어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교리―신학 지침이 만들어 교회가 그것을 인지하도록 광범위 하게 알리는 것은 연합일치의 두 번째 걸림돌 제거 작업이다.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교회의 분열이 신학적인 차이 때문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6 드러난 분열의 이유가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인종적, 문화적 이유 등이 개입되어 있다고 한다. 교회의 분열에는 신학적인 원인과 사회학적인 원인과 삶의 요인들이 혼재된 경우가 많다. 신학과 신학 외적 요인은 항상 결부되어 있다. 신학은 신학 외적 요인에, 신학 외적 요인은 신학에 서로 영향을 주어 갈등을 증폭, 심화시킨다.
연합일치운동에 앞장 서는 인사들은 대부분 교회의 분열에 비신학적인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 인간적인 요인 때문에 분열된 것을 인정하면 연합일치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기 교단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기존 시각을 버리면 다른 교단과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신학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에큐메니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차이를 심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학의 차이가 교회 일치를 깨뜨릴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신학자와 지도자들이 작은 차이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고 분열된 교회를 당연시 하면서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본다. “성경론이 과연 어디까지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 사실 신학자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기는 신학적인 차이가 과연 교회를 분리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의 신학은 교리논쟁의 신학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신학이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보수교단 교회들이 진보교단 이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펼치고 있고, 진보교단들이 보수교단 이상으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신앙무차별성을 강조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적, 신앙고백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조직기구의 일치, 외형적 통일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에큐메니스트들은 고신분열(1951)을 출옥성도들의 독선신앙과 분리주의 태도의 결과로 본다. 타락한 교회를 정화하고 참회고백을 하여 진정한 교회를 재건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교회과 신학의 동기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다가 분열한 것이 아니라 기장분열(1953)은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적 차이가 주원인이 아니라 박형룡을 따르는 황해도 출신 목회자와 그를 반대하는 평안도 출신 목회자의 반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메이첸이 미국북장로교단의 신학논쟁에서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정통장로교회를 세운 것에 대해서도 그가 미국의 남부 출신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적 세계관을 고집한 것이 주원인이라고 단정한다.
교회분열의 주원인이 비신학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시각을 일컬어 사회학적 환원주의(Sociological Reductionism)라고 한다. 이 시각은 교회일치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1960년까지의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것이었다. 이 말을 바꾸면, 교회연합과 일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신학의 차이라는 말이다. 교회라고 하는 신앙고백공동체를 움직이는 동인(動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다. 따라서 신앙고백과 교리와 신학의 차이를 배제하고서 교회의 연합일치를 추구하는 노력은 헛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하나 됨에 가장 중요한 조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고 있다.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일치를 간과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연 무엇을 위한 연합이며 누구를 위한 일치인가? 신학의 차이를 도외시한 연합일치운동은 교리의 약화를 가져온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앗아간다. 집단의 신앙고백적 정체성을 와해시킨다. 말씀, 성례, 권징, 윤리 실천에 대한 독특성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신앙의 정통, 생활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덧없는 것으로 보게 한다. 이렇게 되면 교리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가 다른 교회와 합하여 교리와 생활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서 또 다른 교회를 세우게 된다. 연합일치를 위한 노력은 결국 또 다른 교회분열의 빌미가 된다.
전술했듯이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교단장협의회’는 각 교단의 신앙고백 문건을 살핀 뒤 신앙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의 연합, 일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상론으로 보인다. 정통신학, 바르트주의, 자유주의 신학이 그다지 차이가 없는가? 자유주의 기독교와 유서 깊은 기독교 사이에 성경해석에서 생기는 견해 차이 이상의 그 어떤 것이 있다. 신학은 서로 다른 전제, 개념, 사고양식, 상이한 뿌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리와 신학 조건을 배제하는 연합일치운동은 그 자체로 자유주의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 삶의 세계 극복
1960년에 고신파는 승동파와 합동을 했다가 3년 만에 환원(還元)했다. 합동이 깨어진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고신파와 승동파의 신앙고백의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합동을 호소했다. 고신파는 그 본래의 목적이 교단형성이 아니라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이 땅에 확립하는 것이었던 만큼, 그 제안을 별 이의 없이 수락했다. 연합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신앙고백이 동일한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라고 보고서 이를 서둘러 진행했다.
신앙고백이 같은 두 교회가 합동했는데도 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교권주의, 권모술수, 공약위반, 배신, 생활순결에 대한 견해차, 인간적인 연약성이 교회를 다시 갈라놓았다.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를 한 이사회 아래에 공존시킨다는 공약을 합동한지 1년도 경과하지 않은 시점에서 무시, 파기(破棄)했다. 고려신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목숨 걸고 불의에 대항하고 투쟁한 사람들과 ‘생존의 슬기’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통합 공약과 그 파기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서로 다른 ‘삶의 세계’가 충돌한 것이다.
합동이 유지되지 못한 것은 그 밖에도 합동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검토가 없었고, 과거사 청산이 없었고, 조급하게 단지 통합만을 추구한 탓도 있다. 하나 됨 그 자체만을 덕목으로 삼은 탓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앙고백과 신학이 동일하다고 하여 성공적인 교회일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리의 차이나 사회적인 조건의 차이 외에도 삶의 방식, 사고방식, 생활습관, 역사의식, 의사소통 방식 같은 것들이 교회 분열에 영향을 미치고 연합을 방해한다. 신앙 집단은 각각의 사회적·문화적·경제적·지리적 상황을 가지고 있다. 독자적인 관행(mores), 의사소통 방식, 정신, 이데올로기, 억양, 기호,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집단의 고유한 클리셰(cliche: 상투 어구)를 가지고 있다. 느낌, 감정이 다르고, 반응방식이 다르다.
현상학자 에드문트 훗설(Edmund Husserl)은 인간이 저마다 독특한 삶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삶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단은 공유하는 정신, 역사, 사상, 기질, 관습, 자랑스런 인물·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 삶의 세계(Lebenswelt)가 인간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집착하는 사람은 “교회사 속에 나타난 연합운동이 실패[한 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양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10이라고 본다. 교리와 신앙고백의 조건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교회일치가 성사되거나 유지될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원인들을 신중한 고려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연합과 일치의 세 번째 장애물을 제거하는 길이다.
한국장로교는 70년대 말과 80년대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분열을 경험했다. 이 분열은 목회자들의 상식결여·교권의식·헤게모니·무지·방종 등 삶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삶의 세계’ 차이로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학의 차이 때문으로 분열된 경우도 있다. ‘삶의 세계’의 차이와 신학적인 원인은 결합되어 있다. 미국남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노예문제, 정통장로회(OPC)와 성경장로회(BPC)의 분열을 가져온 개혁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음주문제는 신학과 관련된 것이었다. 음주를 아디아포라(양심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는 개혁주의와 그것을 죄악으로 본 근본주의의 시각 차이는 당시의 상황 에서는 상당히 큰 신학 주제였다. 진화론과 근대과학과 성경고등비평에 대한 반지성주의 태도를 가진 근본주의와 과학성과 문화를 높이 평가한 개혁주의의 차이도 또한 신학적인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에 성공하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려면 ‘삶의 세계’의 차이를 서로 존중해야 한다. 유태인에게는 유태인의 방식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방식으로, 로마인에게는 로마인의 방식으로 접근하듯이 상호관습과 기질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자가 약자에게 더 큰 것을 양보하고, 큰 교단이 작은 교단에 더 많은 아량을 베풀고, 기득권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더 오래 인내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의미, 언어, 상징을 가진 집단은 각각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면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이 가지는 의미, 개념, 전제 등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의 연합은 갈등을 낳는다. ‘값싼 일치’는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을 증폭시킨다.
미국의 보수계 개혁주의 교단들의 연합체인 ‘북미장로교회-개혁교회협의회’(NAPARC)는 교회일치를 내다보면서 총회를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고 있다. 교리적으로 일치는 가능하지만 삶의 세계에 대한 상호 간의 거리를 좁히고 친교하기 위한 연합활동을 하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를 추구하는 한국의 교단들도 이러한 연합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일치를 도모해 봄직하다. 우선 각 교단 총회 안에 교회연합일치연구위원회를 둘 것과 각 교단 위원회들끼리의 회합과 논의 그리고 일치를 위한 신학지침을 만드는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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