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개혁교회의 여자 직분 문제와 한국교회의 과제

by dschoiword posted Nov 21, 2019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여자 직분 문제와 한국교회의 과제

<개혁정론> 2017.7.15.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임 목사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신학대학원 Kampen(Drs.)과 Apeldoorn(Ph. D.)에서 공부했으며, 그의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Het spoor van de vrouw in het ambt”으로서 여성 임직과 관련한 내용이다.

 

        여성 안수 문제는 20세기 네덜란드 교회에게는 혁명과도 같았다. 이것은 여자를 직분에 허용한 교회뿐만 아니라, 허용하지 않은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 가운데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은 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21세기 초에 루터교회와 두 개의 가장 큰 개혁 교회가 연합하였는데, 이 교회들은 여성 안수를 오래 전부터 인정하고 있다.

 

        초대교회 이 후 20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교회가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본인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여성을 직분에 허용한 교회들이 총회 차원에서 논의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조사해 보았다. 논문의 제목은 『Het spoor van de vrouw in het ambt』(Tracing the woman in office)이다1). 논문의 목적은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 과정이 어떠했으며, 어떤 논점들이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원론적인 부분들이 충분하게 논의되고 고려되었는지 연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론적인 부분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결국 상황적이고 실제적인 논점에 의해 결정되었다.

 

 

I.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한 세 교회

 

1. 루터교회

 

        루터교회는 1922년에 특별한 반론이나 어려움 없이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네덜란드에는 이 보다 더 일찍 여성을 직분에 허용한 교회가 있었다. 항론파 교회(Remonstrants Broederschap)는 1915년에 여성을 교회 직분에 허용했다. 이 교회는 ‘자유’와 ‘관용’이 가장 중요한 교회 원리이기 때문에 쉽게 허용될 수 있었다. 가장 최초로 여성 안수를 허용한 교회는 재세례파 교회(Doopsgezinde Broederschap)인데, 1905년에 여성을 교회 직분에 허용했다. 재세례파 교회는 지역교회가 최고 기관이기 때문에 교리와 정치에 있어 독립적이다. 이들 세 교회는 공통적으로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안수를 결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논의의 과정도 없었고, 한 순간에 여성 안수가 결정되었다. 

 

2. 국가 개혁교회 (De Nederlandse Hervormde Kerk)

 

        국가 개혁교회(‘국가 개혁 교회’를 이하 ‘NHK’로 부른다)는 여성 안수 문제로 85년 동안(1892-1977) 씨름했다. 1892년 총회에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여성 선거권이 아직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1897년에 교회에서의 여성 선거권 허용을 요구했고, 1923년에 결정되었다. 여성 선거권 획득을 위하여 수많은 논점들이 동원되었는데, 여기에는 후에 여성 피선거권(곧 여성 직분 허용) 허용을 위하여 사용될 논점들도 있다. 그러나 원론적인 연구 위원회는 구성되지 않았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거권 문제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1905년부터 피선거권 문제가 선거권 문제와 동시에 총회 안건으로 상정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은 선거권 문제가 빨리 처리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Utrecht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헐링스(A. C. E. Gerlings) 여사가 여성 직분 허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NHK교회에서는 개체 교회 성도가 총회에 곧 바로 안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헐링스는 자신의 제안을 매년 계속하여 총회에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이 자꾸만 기각되고 성공하지 못하자, 1914년부터 여성들을 교회 사역에 더 많이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신학교 여학생들에게 교회에서 종교교사(한국 상황으로 보면 여 전도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의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14). 이 안건은 총회에서 곧 바로 기각되었다. 이유는 그렇게 되면 여성 신학생들이 결국 강단에까지 오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1915). 그러나 1921년에는 여성 종교 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최소한 10년 사역 후 그 교회에서 보조목사 형태로 설교가 아닌, 교훈적인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공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으며, 결혼식을 집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2)

 

        1923년에는 신학교 교육을 마친 여 학생들에게 ‘목사 보조사’(Hulppredikerschap)의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왕립대학교는 일종의 국립대학인데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과는 교회와 연계하여 교육하고 있다. 그래서 신학생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교회(본 글에서는 교회가 ‘교단’을 말함)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교회의 목사로 교육 받기 위하여 교회에 등록을 해야 한다. 여기에 여자들도 등록할 수 있도록 결정되었고, 교회에서 치르는 졸업 예비 시험도 치르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시험인 ‘설교 연습’은 여신학생들에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에게 목사직분이 허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이 기다려야 했다(1924년부터 1938년까지 계속 이 안이 총회에 상정되고 논의 되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NHK교회에는 1939년 이 후 1947년까지 ‘여성과 직분’에 대한 직접적인 제안이나 논의는 없었다. 교회의 직분에 여성을 참여시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다른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여성들이 교회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일 할 수 있도록 연결시키는 다른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1940년 총회에 신학교 여학생들에게 교회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1941년에는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을 위하여 일거리를 창출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해에는 ‘개혁 여성 봉사회’(Hervormde Vrouwen Dienst: HVD)가 만들어졌고(1951년까지 사역), 결국 1947년에는 총회에서 ‘교회 보조 사역자’(Kerkelijk medewerker) 개념을 도입하여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이 이름으로 교회의 다양한 일들이 여성에게 합법적으로 맡겨지게 되었다. NHK교회 여성들은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사역을 상당히 많이 향상시켰다. 특별히 신학을 졸업한 여성 신학자들이 ‘목사 보조사’ 자리에서 열심히 일함으로 여성이 강단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두려움을 많이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여성과 직분의 문제는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1950년에 연구위원회의 논문이 발표되고, 1957년에 또 다른 한 연구위원회가 논문이 발표된다.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논의되던 ‘여성과 직분’에 관한 논점들이 이 두 논문을 통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됨으로 체계적으로 논의 할 수 있게 된다. 총회 대표단들과 분과위원들이 토론한 결과 총회 과반수이상이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해도 된다는데 동의한다. 새롭게 등장한 성경 해석학이 전통적인 성경에 대한 견해를 무력화 시킨 것이다. 결국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새로운 해석학’이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됨으로 관련 성경 구절을 설명하는데 불확신이 상당히 팽배하게 된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직분’에 대한 개념이 여성의 직분에 대한 길을 넓혀 놓게 된다. 곧 ‘직분’이란 다스리고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더 나아가 실제적이고 상황적인 요소들이 여성 직분 허용에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결국 1966년 여자에게 전면적으로 교회의 직분을 허용하도록 NHK 총회에서 결정한다.

 

        NHK교회는 다수가 자유주의적 신학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그룹이 존재했다. 그 이름은 ‘개혁 연맹’(Gereformeerde Bond)이다. 이 ‘개혁 연맹’이 여성 안수 허용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하게 이 결정에 항의한다. 이들의 반대는 NHK교회에 안에서 상당한 분위기를 형성했지만, 교단을 탈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 직분 허용은 지역의 개교회의 권한에 달려 있다고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개혁 연맹’은 자기 교회에게 절대로 여성 교역자를 강단에 세우는 일이 없다. NHK교회에 포함되기에 여성을 직분에 허용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개혁 연맹’에 속해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여성을 직분에 전혀 허용하지 않는 교회로 남게 된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여성을 직분에 허용했지만, 결혼한 여성에게는 제약이 주어지고, 남편과 함께 사역하게 되는 경우 등에 주어지는 차별화가 완전하게 없어지기 까지는 1977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 NHK교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정리해 보자. 첫째, 여성 안수 문제가 장시간의 논의를 거치면서 하나하나 진행되었지만, 상당한 반대에 부딫혀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 여성들이 교회에서 점차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게 됨으로 여성의 역할이 커지면서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게 하게 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셋째, 교회에는 집사와 장로 직분도 있는데, NHK교회에서는 여성의 목사 직분에 대한 부분만 논의 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눈에 뛰고 중요한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목사 직분에 대한 관심만 있었지, 집사와 장로직에 대한 관심과 제안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여성의 집사와 장로직은 목사직에 대한 허용과 함께 이루어진다. 넷째, 새로운 해석학의 잣대를 사용하게 됨으로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여성 안수를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흔들리게 된다. 다섯째, ‘성령의 자유하심’에 대한 주장이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논지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결국 투표에서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짓게 된다. 총회의 결정이 곧 성령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일섯째,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는 곧 성령의 자유로운 결정과 연결되어 여성 안수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곱째, 원리적인 논지들은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이동하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차이로 보게 된다. 교회에서의 직분적 사역에서 만인 제사장적 관점에서 은사적 봉사를 강조한다. 직분적 봉사도 권위적 봉사가 아니라, 섬기는 차원의 봉사를 강조한다. 여덟째, 여성 안수를 결정했다고 해서 바울의 여성에 대한 성경의 금지 명령이 모두 해결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고전 14:34-35절과 딤전 2:11-15절이 당시 시대에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영원히 유효한 말씀인지는 논의 가운데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소위 골치 아픈 성경 본문은 깊이 논의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아홉째, 직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열째, NHK교회는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세계 어떤 교회의 논의와 상황도 참고하지 않는다. 

 

3. 네덜란드 개혁교회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네덜란드 개혁교회 (이하 GKN이라 칭한다)는 여성의 직분 문제를 62년(1923-1985) 동안 총회 차원에서 논의하고 다루었다. GKN은 먼저 여성의 교회에서의 선거권 취득을 위하여 많이 논의한다(1923-1952). 결국 1952년에 여성에게 선거권을 허락한다. 이를 위하여 근원적인 연구 논문이 세 편이 출판된다(1927, 1930, 1952/53). 이 논문에는 이미 여성의 피선거권에 대한 논의도 상당 부분 진척된다. 여성과 남성과 관계에 대한 부분이 논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거권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선거권에 대한 생각의 변화다. 선거는 권위 행사라는 생각이 점점 바뀌어 권위 행사가 아니라는 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때만 해도 여성의 피선거권에 대한 얘기는 아직 없다.

 

        GKN에서 여성의 피선거권에 대한 논의는 1961년 총회에 처음 등장한다.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라프스테인(A. Ravestein) 양이 목사 보조사로 등장하면서 총회에 질의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된다. GKN 안에서 선교와 교회 안에서의 여성들의 사역이 점차 증가하게 되자, 교회의 분위기는 여성에게 교회의 직분을 허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총회에 제출된 ‘여성과 직분’에 관한 연구 논문은 여성에게 교회의 모든 직분에 허용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물론 약간의 제한을 두었지만, 한 번의 총회 위원회의 연구 논문으로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하도록 결정하게 된 배후에는 여성의 선거권에 대한 연구 논문이 이미 세 편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과 직분’이라는 연구 논문은 다음 몇 가지 요소에 기초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충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 시대에 제한되는 성경 본문을 강조하는 새로운 해석학의 적용; 교회 직분의 섬김의 성격 강조; 교회에서의 여성의 사역 활성화. 1965년 총회에서 여성 안수는 결정되었지만, ‘개혁연합공의회’(Reformed Ecumenical Counsel: REC)3)에서의 여성에 대한 논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결정되는 데는 1968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REC에서 특별한 도움이 되는 결론이 없다고 생각하고 REC의 결정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이미 내려 놓은 GKN은 자신의 길을 간다. 1969년 여성에게 교회의 모든 직분을 허용한다. 약간의 불합리한 제한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마저 1985년에 모두 폐지됨으로 남성과 여성의 아무런 차이도 없어지게 되었다.

 

        GKN안에서의 여성의 직분 문제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8년 논의), 쉽게 가결되었다. 이 결정에 대한 반대도 거의 없었다. NHK와는 다르게 이렇게 쉽게 결정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첫째, GKN는 총회에서 교회법을 바꾸기에 비교적 쉬웠다. 둘째,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가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진행되어 왔던 여성과 투표권에 대한 논의와 여성들의 국내 교회와 외국에서의 활발한 사역이 결정을 빠르게 하는 요인이 된다. 셋째, GKN에서는 직분에 대한 논의의 시작도 현실적인 요인에서 출발하고 마지막 허용 결정도 현실적이고 상황적인 논지로 이루어진다. 넷째, 그와 동시에 원리적인 논점들은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하고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동하면서 결정이 가속화 된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강조점은 점점 상호보충적인 관계로 강조점이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여성을 직분에 허용해야 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 것에서,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는데 대한 어떤 결정적인 반대로 없다고 주장한다. 직분의 개념도 지배적 기능에서 섬기는 기능으로 강조점이 이동한다. 다섯째, 급진적인 성경 해석이 여성 직분과 관련된 성경 해석에서 전통적인 견해와 직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허물어 버린다. 새로운 직분에 대한 개념은 GKN에서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직분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성경 해석에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가 직분을 가져도 권위 행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직분의 다스리는 기능은 상대화 된다. 결국 새로운 직분관이 딤전 2:11-13절에 나오는 창조 질서에 호소하는 바울의 견해를 쉽게 해결한다. 

 

        GKN에서는 여자 직분 문제가 상황적이고 현실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상황적 현실적 요인들에 의해서 원리적인 논지들이 밀리게 된 것이다. 결국 원론적인 논점들이 깊게 연구되지 못하고 논의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결정은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II. 공통점

 

        위에서 언급한 세 교회의 여성 직분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보인 공통점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 직분에 대한 논의는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게 되면서 총회에 나타나게 된다. 19세기 말엽부터 여성들도 고등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첫 번째, 네덜란드 여성 목사는 재세례파 교회에서 나타난다. 만꺼스(A. Mankes-Zernike) 여사는 1911년 신학 공부를 마친다. 1905년에는 항존파 신학대학원에 세 명의 여성 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한다. 1921년에는 루터교 신학교에서 듀푸(L. C. Dufour)가 레이든(Leiden)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다. NHK 소속 헐링스(A. C. E. Gerlings) 여사는 1906년 위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한다. GKN 소속 스흐뤼더(J. C. Schreuder:1940년 신학 시작; 판 에그몬드(E. G. van Egmond)양도 같은 시기에 시작)와 라퍼스테인(A. Ravestein: 1955년 신학 시작)양은 여성 신학생들로서 여성 안수 문제에 깊게 개입한다. 여성 안수 문제는 이렇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여권 신장, 곧 여성해방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둘째, 여성 선거권문제는 형식적으로 피선거권과 전혀 다른 문제라고 여겨졌지만, 실제적으로는 선거권은 피선거권과 관계가 있다.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는 문제로 토의할 때에 나타난 논점들이 피선거권 논의에서도 여전히 등장하여 서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한 의견이 두 교회가 일치한다. 그들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과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성 안수 찬성자와 반대자의 결론 유추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강조점의 이동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처음에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을 강조했는데, 나중에는 그 동등성을 강조하면서 지지하는 쪽으로 결론난다.

 

        넷째, 새로운 해석학의 등장은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하는데 큰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기여한다. 성경이 시대에 제한된다고 생각하는 성경 해석학은 바울의 몇 몇 성경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불확실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다섯째, 이 새로운 해석학의 등장은 원론적인 논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아니고, 단지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전환은 현대 세계의 상황과 실제적인 논지가 가세하여 결정을 가속화 시킨다. 현 사회의 정황과 실제 상황은 여성들이 교회 사역에서 도외시고 되고 있는 교회 현실과 다르며, 특별히 성경의 원론적인 논점과 다르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고, 교회에 까지도 여성들이 많이 활동하게 됨으로 자연스럽게 원론적인 성경의 논의에 상당한 변화를 준다. 이런 요인들이 원론적인 성경의 논점들이 상대화 된다.

 

        여섯째, NGK와 GKN은 여성과 직분에 대한 초대 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의 관점에 대해서 전혀 연구하지 않고 논의도 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 사회적인 실제에 대한 관심에 집중한다.

 

III. 차이점

 

        두 교회에서의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가 각각 다르게 진행된다. NHK교회에서는 여성 선거권이 1923년에 허용된다. 이것은 1897년에 이미 총회에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GKN에서는 NHK에서 선거권을 허용하는 해, 1923년에 처음으로 여성 선거권 안이 총회에 상정된다. 여성 피선거권 문제(여성 안수)는 NHK에서는 1902년에 이미 논의 된다. 이 논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양을 갖추게 된다. 1923년과 1950년 사이에 ‘종교 교사’와 ‘목사 보조사’ 영역에 여성을 진출 시킬 것을 논의하고 허용된다.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는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GKN에서는 여성에게 선거권을 허용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1930년까지 논의한 후 19년 동안 여성과 피선거권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1930-1949). 1953년 여성에게 선거권을 허용한다. 여성에게 피선거권은 겨우 1961년부터 1965년까지 4년 논의 후 원리적으로 허용한다. 매우 짧은 기간에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하게 된다.

 

        둘째, 두 교회는 안건이 상정되고 결정하는 부분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NHK에서는 총회 기간 안에 안건이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GKN에서는 노회에서 논의된 문제만이 총회에 상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NHK에서는 GKN 보다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일찍 논의될 수 있었다. 그러나 NHK에서는 GKN 보다 여성과 직분에 대해 훨씬 오랜 동안 논의 한다. 이것은 총회 절차와 그 결정 과정의 차이에 기인한다. NHK에서는 교회법을 개정하기 위하여 총회의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며 다음 해 노회에서의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만 개정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GKN에서는 어렵게 총회에 안건이 올라오기만 하면 2/3의 총회의 결의로 교회법을 개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셋째, 교회의 다양성과 하나 됨이 여성 안수 결정의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NHK 가운데 있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차이로 인해 여성과 직분 문제가 쉽게 결정 나지 않는다. NHK 내에 있던 ‘개혁 연맹’은 비교적 큰 힘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반대는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어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그에 비해서 GKN은 신학적으로 1944년 이 후 일치된 관점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1944년에 신학적으로 입장이 다른 한 그룹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4) 신학적으로 이미 자유화되기 시작한 GKN은 여성을 교회의 직분에 허용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1969년 여성을 직분에 최종적으로 허용한 후 어떠한 반대 항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사실은 GKN은 오랜 동안 정통 개혁 신앙을 유지해 왔는데, 1944년 한 정통 신앙을 주장하던 한 그룹의 교회가 떨어져 나가자(성도의 1/3정도), 상황은 달라진다. 1963년 여자 직분 의제가 총회에 상정되자, 금방 이 문제가 결정 난다. GKN 성도들이 생각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스럽게 흘러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연구 논문에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NHK는 여자 직분과 관련한 총회적 차원의 두 편의 폭넓은 연구 논문이 나왔음에 비해, GKN에서는 총회적 차원으로 한 개의 연구 논문도 이루어지지 않다. 단지 여성의 선거권에 대한 세 편의 총회적 차원의 연구 논문이 있을 뿐이다.

 

        다섯째, GKN에서는 직분에 대한 개념이 NHK에서 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GKN에서는 직분이 섬기는 기능만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NHK에서는 직분이 다스리는 성격과, 섬기는 성격이 함께 공존한다고 인정한다. 직분자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대리자임을 인정한다.

 

IV. 결론

 

        여성 안수를 허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교회 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과 직분 문제의 논의 과정에서 각 교회의 독특한 특징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여성과 직분에 대한 성경적인 논점들은 충분히 만족할 만큼 논의되지 못한다. 여성과 직분에 대한 중요한 원론적인 논점인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상황적 논지’와 ‘실제적 논지’들이 ‘원론적 논지’를 뛰어 넘어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가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여성들이 사회와 교회에서 많이 활동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론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유명한 성경신학자인 H. Ridderbos는 자신의 교회가 여성을 직분에 허용해야 할 시기가 가까웠음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원론적인 합의도 없이 결정되게 된 상황을 ‘강요된 결혼’으로 비유했다.5) 더구나 그는 딤전 2:11-15절에서 여성에게 가르치는 것과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단순히 시대에 제한 된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총회의 논의는 전문가의 말을 경청할 여유가 없었다.6) 성경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여기는 교회에서는 이 부분들을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일 것이다.

 

V. 세계 교회의 논의

 

1. WCC (World Couns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일찍이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지속적인 논의가 있었다. 이 논의의 발전에 대하여 Constance F. Parvey가 1980년에 쓴 Ordination of Women in Ecumenical Perspective: Workbook for the Church's Future(Faith and Order Paper 105 WCC Geneva 1980)에서 잘 서술하고 있다.7) WCC 내에서 여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이미 19세에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던 자들이 있다. 19세기 말 Antoninette Brown Blackwell은 여성해방론자로서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주장했다. 1894년에는 Gordon-Conwell 신학대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A. J. Gordon이 The Ministry of Women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미 여성에게 교회에서 직분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석했다. 1920년에는 미국에서 여성 투표권을 통과시키는데 역할을 한 Margaret Sanger의 Women and the New Race라는 책이 유명하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 내에서의 여성 운동은 자연스럽게 WCC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910년 Inter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 in Edinburgh (IMC)에서는 선교를 위한 여자의 기도 사역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지만, 1921년에는 긍정적으로 논의되었고, 1923년에 연구 논문이 제출 된다: A study on the Place of Women in the Church in the Mission Field. 1917년에 Picton-Turberville 양이 The Place of Women in the Church라는 책에서 여성의 역할을 주장한다. 1927년에는 신앙과 직제 운동의 시작에 여성 안수 문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의제였다. 1927년 처음으로 로잔느에서 모였을 때 400명의 대표자 중 7명이 여성대표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여성의 교회에서의 사역과 역할에 대해 질문했다. 1937년 The World Conferences on 'Life and Work' and on 'Faith and Order'가 영국에서 WCC를 조직할 것을 동의했지만, 세계 제 2차 대전의 발발로 1948년으로 미뤄지게 된다. 전쟁 후 제네바에 있는 WCC사무실에서 일하는 네덜란드 목사 Dr. W. A. Visser 't Hooft씨의 특별한 개입으로 여성들이 WCC사역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 YWCA 전국 위원인 Samuel Cavert 여사가 세계 YWCA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WCC도 방문하게 되는데, 여성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영국인 학자 Kathleen Bliss가 이 운동에 개입되면서, 1949년에 WCC내에 공식적인 위원회가 만들어진다: An Official Commission of the Life and Work of Women in the Church. 1952년에는 WCC가 선정한 위원회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책이 만들어 진다: Kathleen Bliss, The Service and Status of Women in the Churches (SCM Press Londen 1952).

 

        이 여성 운동은 점차 방향을 틀어 남자와 여성의 관계성으로 나아가게 되어 위원회의 이름이 변하게 된다: 1953년 = Department of the Man-Woman Relationship in Church and Society; 1954년 = Department of the Cooperation of Men and Women in Church and Society. 이 부서는 세계 각 곳에서 여러 논의를 계속하면서 1961년 뉴델리 대회에서는 최초로 회원으로 가입된 그리이스 정교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리이스 정교 안에서의 여성에 역할에 대한 부분도 연구한다. 

 

        지금까지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논의했지만, 1967년부터 여성의 안수 문제를 신앙과 법제 위원회에서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8년 웁살라(Uppsala)대회 이 후 여성의 안수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8) 1975년 나이로비(Nairobi) 제 5차 총회에서는 WCC회장단 6명 중 2명이 여성으로 구성된다. 1978년에는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이 추진된다. Dr. Constance Parvey 목사가 총 책임을 맡고 The Community of Women and Men in the Church 연구를 시작한다. 이렇게 진행되는 여성과 남성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WCC에서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 연구들은 결국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지 않은 여러 회원 교회들에게 직 간접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WCC 회원 교회가 168개 교회였는데, 48개의 교회가 여성에게 모든 직분을 허용했고, 9개 교회가 부분적으로 허용했다.9) 21세기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교회들이 여성에게 모든 직분을 허용하고 있을 것이다.

 

2. REC (Reformed Ecumenical Council)

 

        Reformed Ecumenical Council (REC)10)은 1946년에 창설되어 개혁 신앙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연합기구이다. 주로 네덜란드 개혁 교회와 이민 교회들이 발기 교회이다.11) 그 후 많은 세계 개혁교회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2004년 현재 39개 교회가 회원이다. 

 

        1953년 Edinburgh 대회에는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CRC)가 보낸 여성의 선거권에 대한 질의를 다룬다. CRC에서는 1947년에 몇 교회가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이것이 1950년 총회의 논의거리가 되고, 연구하여 본 결과 찬반이 나누어졌다. 그래서 결정을 미루고 REC에 상정하여 다른 교회의 의견을 묻기로 하여 상정한 것이다. REC은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여성들이 성찬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없어도 가능하듯이 여성에게 투표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없어도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에 기초하여 선거권을 주는 것이 가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선거는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REC이 다룬 문제는 ‘여성과 직분’의 문제이다. REC은 1958년 Potchefstroom 대회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제안으로 ‘교회에서의 직분의 기능’을 연구하여 여성에게도 교회의 직분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도록 연구위원회를 구성한다. 연구위원회는 1963년 Grand Rapids 대회에 논문을 제출하지 못하여, 다시 연구위원을 구성하여 새로운 이름을 준다: The Committee for the Women and Office. 이 위원회는 1968년 Amsterdam 대회에 논문을 제출하여 여성에게 안수 집사직분을 허용할 수 있으며, 모든 직분에 여성을 허용할 수 있을지 다시 연구 위원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REC은 토의 후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성과 직분에 관련된 것을 연구하도록 다시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고, 여성에게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직분에 허용하지 않는 것이 가하며, 교회의 덕을 위하여 여성을 성경이 가르치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하기로 결정한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1968년 REC에서의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하는 긍정적인 결론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돌아가 이 대회 때문에 미결되었던 ‘여성과 직분’에 대한 결정을 끝낸다. REC의 결정을 따를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1972년 Sydney에서 열린 대회에 연구 논문이 제출된다. 'Office in the New Testament'라는 연구 논문인데, 대회는 이 논문을 가지고 토의를 한 결과 여성에게 직분을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1968년에 안수 집사직분을 여성에게 허용한다는 것도 뒤집고, 불가하다고 결론 내린다. 단지 여성들에게 다양한 교회의 사역에 활동할 수 있도록 고무했다.

 

        이 후 REC에서의 여성과 직분에 대한 큰 논의를 나타나지 않았다.

 

3. CBE - CBMW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은 19세기 말엽부터 시작하여 20세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본격적인 운동은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1960년대를 지나면서부터이다. 서구 사회는 전반적으로 권위에 대한 불신과 자유로운 생각과 활동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대모와 시위를 주도하면서 히피족들이 거리를 휩쓸었던 시절에 여성들도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여성해방주의’(feminism)라 부른다. 이 영향력은 교회에까지 스며들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여성의 불평등을 파헤치고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노력을 시도한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접근했다. 이때 수많은 책들이 쓰여 지고 출판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것을 ‘첫 번째 물결’이라고 이름 하자.

 

        이러한 운동에 대해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주장하였다. 이들을 일컬어 ‘복음적 여성해방주의’(evangelical feminism)이라 한다. 성경을 연구하면 여성들이 남성과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과 남성이 존재와 역할에서 같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986년 이 후 ‘여성해방주의’에서 동성애에 대한 지지를 반대하면서 탈퇴하여 1987년 “Christians for Biblical Equality” (CBE)라는 단체를 만든다. 이 단체는 존 스토트(J. Stott) 목사가 지원 했던 ‘Men, Women and God’이라는 조직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유명한 사람들이 Catherine Clark Kroeger와 남편 Richard Kroeger이다. 이 단체는 여러 복음주의 진영에서 여성사역을 극대화하고 남성과 여성들이 참여하여 매우 활동적으로 사역을 확장하고 있고 많은 책과 글들을 출판했다. 이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성경해석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은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의 동등됨 만을 찾아낸다. 이 세상에서 가부장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기에 없어져야 하고, 남성과 여성은 교회와 사회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할 뿐 아니라, 사역에의 기회에서 있어서도 남성과 동등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두 번째 물결’이라고 이름 하자.

 

        복음적 여성해방주의’에 반대하는 교수, 목사, 평신도들(총 31명)이 “The Council on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 (CBMW)이 협의회를 결성했는데, 이를 ‘세 번째 물결’이라고 부르자. 이 단체는 1989년 1월 3일 Christianity Today지에 자신들을 광고하면서 유명한 “The Danvers Statement”를 발표한다. 이것을 발표한 후 1년 뒤 CBE가 1990년 4월 9일자 Christianity Today에 “Men, Women and Biblical Equality”라는 글로 반박하며 응수한다. 이에 대해 CBMW는 1991년에 Recovering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 A response to Evangelical Feminism (Wheaton 1991)라는 책을 출판한다. John Piper와 Wayne Grudem이 편집했다. 공개적으로 집단을 이루어 토론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CBMW는 CBE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CBE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CBMW가 전통적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고 비평한다.12) 그러나 CBMW는 전통주의자들과 복음적 여성해방주의 모두를 반대한다. 예를 들면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과 ‘차이’를 인정한다. 동등함을 주장하는 것은 ‘전통주의자’에 반대하는 것이고,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복음적 여성해방주의자’를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동등을 주장하면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시에 남녀의 차이를 말하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차이의 경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논의는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어 두 입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들과 토론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4. 세계 교회

 

        미국 장로교(PCUSA)는 1922년 여성에게 안수 집사직을 허용하고, 1930년에 장로직에, 1955년에 목사직에 허용했다. PCUSA는 오랫동안 WCC정회원이고,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노선에 서 있었다. 미국 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는 1956년 여성에게 목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1976년 여성 목사 제도를 법으로 제정했다. 이 교회도 WCC 정회원이면서 신학적으로 자유적이다. 미국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는 1995년에 여성 안수를 결의한다. 1996년 여성 안수 결정 취소를 요구했지만, 122대 54로 부결됨으로 현재 여성 목사가 배출되고 있다. 이 문제로 교단에서 떨어져 나간 교회들이 모여 교단을 새롭게 형성했다.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도 일찍이 WCC 정회원이면서 1988년 여성에게 사제직을 허용한다. 감독에는 여성이 뽑히지 못했는데, 그것이 다음 목표이다. 여성 안수를 위한 운동이 있다. ‘The Movement for the Ordination of Women’이 1996년 결성되었다. 성공회에는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그룹도 있다. ‘The Defenders of the Faith’라 불리는 단체는 여성 안수 반대 운동을 벌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미미하고 많은 신부들이 교단을 떠나고 로마 천주교로 가입한 신부들도 많다.

 

        아직도 개신교 안에서도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지 않고 있는 교회들이 있으며, 크게는 그리이스 정교와 로마 천주교가 여성을 직분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

 

 V. 여성과 직분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1.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 역사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여성에게 교회의 직분을 허용한 교회들이 있다. ‘하나님의 성회’,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구세군 대한 본영’, ‘나사렛 성결교’가 그 대표적이 예이다. 은사적 사역을 강조하는 교회들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직분을 허용한 교회는 ‘기독교 대한감리회’이다. 이 교회는 1931년 여성을 목사와 장로 직분에 허용했다. ‘한국 기독교 장로회’는 1955년 5월 제 41회 총회에서 여성에게 장로직을 허용한다. 그 후 1974년 9월 제 59회 총회에서 여성에게 목사직을 허용한다. 1977년 11월 경기노회에서 양정신씨가 최초의 장로교 여 목사로 안수 받는다. 한국 장로교는 본래 1907년 첫 독노회가 창설될 때부터 목사와 장로의 자격을 “목사와 장로는 세례 받은 남자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회 헌법에 보면 “목사의 가격을 27세 이상 된 남자”로 규정한다. 193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 (UPC)가 여성에게 장로직을 허용하자, 1932년 한국 장로교 경안노회가 이 문제에 대해 총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의를 한다: “어느 성서에 근거하여 이런 결정을 했으며, 동일한 신조를 갖고 있는 우리 교회는 왜 저들과 다르게 해석하느냐?” 총회는 답한다: “우리와 상관할 것이 없고, 우리 조선장로교는 본 정치에 의하여” 여자 장로를 세울 수 없다고 답한다. 1933년 여장로 제도를 함남노회를 통하여 총회에 제출했지만, 기각당하고, 1934년에 재차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장로교 중 통합측은 1970년 이 후 거의 매 해 여성 안수 청원건을 총회에 상정한다. 여전도회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94년 제 79차 총회에서 여성에게 모든 직분을 허용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2003년 현재 약 450명의 여성 목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한국 교회의 현 상황

 

        장로교회 안에서는 기장측을 제외하고는 통합측이 1994년 최근에 여성에게 교회의 직분을 허용한다. 같은 장로교 안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합동측 신학교인 총신대학원에서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김의환 총장이 권두언 “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에서 여성의 직분을 분명하게 금지한다. 박아론 교수는 “여성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를, 홍치모 교수는 “여성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최근의 동향”, 그리고 권성수 교수가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이라는 좋은 글을, 마지막으로 김길성 교수가 “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기고했다. 권성수 교수의 글과 같은 딤전2:11-15을 연구한 글이다. 이것이 합동측 교수들의 공적 의견으로 된 후 아직까지 아무런 공적인 반대 글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교수들이 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총신 교수들은 여성에 대한 직분 허용에 동의한다. 그러나 토론의 분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모 교수가 총장 시절에는 아예 반대 의견을 피력하지도 못하도록 금지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2004년 5월 [목회와 신학]은 이 주제를(1993년 3월호에 이 주제를 정리했음) 다시 다룸으로 이 주제가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뜻 이 논의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없다. 권성수 교수가 일찍이 1996년 자신의 글에서 밝혔듯이 한국 교회에서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13) 첫째, 교단의 분위기가 학문적 토론을 저해한다. 둘째, 한국적 유교문화가 학자들 간에도 입장을 달리하면 토론하기가 곤란하다. 셋째, 한국 기독인의 정서가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어서 반대-찬성의 흑백논리로 편 가르기를 하기에 토론이 어렵다. 넷째, 여성 안수에 반대하면 시대적 낙오자, 혹은 은사에 대한 반대 혹은 진보적이고 현대적이지 못한 구태의연한 구세대라는 낙을 찍게 되기에 토론이 힘들다. 그러나 토론은 공정하고도 냉정하게 말씀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교회나 성도라면 성실한 자세로 이 토론에 임해야 할 것이다.

 

3. 논의를 위한 제안

 

        교회에서의 여성과 직분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를 제안하려 한다.

 

        첫째, 문제를 일반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 열등하거나, 남성이 우월하다고 본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박보경씨는 [목회와 신학] 글에서 CBMW를 소개하면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이고, 우등과 열등의 관계인 것처럼 표현했다.14) 이것은 CBMW가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인데도, 여성 안수에 반대하면 무조건 그렇게 보려는 태도에서 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15). CBMW도 전통적인 가부장적 폭력과 여성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한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잘못된 결과일 뿐이다. 그 반대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여성 안수를 지지하면 무조건 모든 성경을 믿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 또한 잘못된 일반화의 한 예이다. 김세윤 교수의 글이 [목회와 신학]에 개제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반화를 하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캘빈주의자들로 자처하는데, 남자의 권위를 세우고 여성을 굴종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구약의 의식법에 호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구약의 의식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16)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구약에 근거해서 율법적 차원에서 논지를 펼치지 않는다. 신약에 여러 성경을 해석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개신교 신학, 그 중에서도 개혁신학을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들이 되고 중세의 사제주의를 부활시키는 자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17)도 마찬가지 일반화이다. “이런 거짓 보수주의의 왜국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들과 신학교들 안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천명할 진정한 보수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18) 이와 같은 일방적으로 일반화 시키는 태도는 논의에 도움도 되지 않고 발전에도 해악만 될 뿐이다. 

 

        둘째, 상황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원리적인 것을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원리적인 교리가 있고, 실제 역사가 있다. 우리는 종종, 역사에서 원리를 거꾸로 설명하는 과오를 범한다. 대표적인 예가 오순절 신학이다. 경험에서 성경을 들어다 보니, 그들의 경험이 정당화 되었고, 더 나아가 원리화하고 교리화한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 학자인, Gordon Fee도 거부한 방법이다. 성경에 여러 여성들의 활동들이 있었다. 구약에서도 그 활동들과 인물들을 나열할 수 있으며, 신약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서 주변에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활동 자체가 원리적인 부분을 앞지를 수 없다. 성경에 원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이 실제적인 부분을 설명하게 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세윤 교수는 [목회와 신학]에서 ‘여성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질문한다.19) 여성을 굴종시켜서는 유익이 없다는 얘기이다. 김세윤 교수에게는 인간적인 득실의 유무가 원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도 원리적인 부분에 대한 토론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쪽에서 상황적인 논지와 실제적인 논지를 앞세워 분위기를 이끌어가서 결국 가결하는 쪽으로 이끌어 가게 된다. 원리적인 부분은 결국 해결을 보지 못하고 실제적이고 상황적인 것이 여성 안수 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점은 앞으로 여성 안수를 논의할 때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셋째, 결국 투표수가 그 문제를 결정하게 되지만,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고,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성 안수에 대해 토론하는 자는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하는 성경을 찾고 설명하기에 정신이 없고,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연구한다. 성경신학자는 성경을 전제 없이 주석해야 한다. 해석학에서 전제 없는 해석학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성경신학자들은 최대한 객관적이고 성실한 주석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성경신학자들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좋은 주석은 좋은 논의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가 감정적인 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R. T. France같은 교수는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학자이지만, 상당히 객관적인 주석을 하려고 노력하는 교수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김세윤 교수는 예수님 당시 여성들은 억눌리고, 인간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유대 랍비들의 문헌을 소개했다. 그러나 France 교수는 예수님 당시 여성들이 공직을 가지지 못했지만, 상당한 지혜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이 재능을 통해 사회에서 의미 깊은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직시한다.20) 이은 예수님 당시 어떻게 여성들이 예수님 주변에서 일할 수 있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Mary J. Evans도 여성 안수 지지자이지만, 롬 3장 28절이 남녀의 동등성을 주장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아님을 인정한다.21) R. T. France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22) 건강하고 수준 있는 주석을 하는 성경신학자들이 필요하다.

 

        넷째, 성경이 시대에 제한되는가? 성경 본문이 쓰여 진 그 시대에 제한되고, 그 정신만이 오늘까지 전달된다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여성 안수와 관련된 소위 논쟁이 되는 성경구절들이 제아무리 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쓰여진 그 시대 상황에 국한된다고 해석해 버리면, 단 한 칼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여자에게 잠잠하라, 든지,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들이 그 시대의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여성들을 향한 권면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성경이 그 시대와 쓰여진 당시 상황에 제한을 받는 것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쓰여진 당시 시대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성경은 당시 상황에 피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시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섬기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의 여성 관련 본문이 시대에 제한(Time-bound)된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원리를 당시 상황에 맞도록 적용한 점에서 그 시대를 섬기는(Time-serving)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아전인수격 성경 해석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자가 가장 쉽게 빠지는 잘못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의 여성에 대한 태도이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얘기하고 그녀를 가르친 것을 당시 사회 정황으로 볼 때 혁명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똑 같은 해석자가 예수님은 왜 12제자에 여성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사회에 혁명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회적 정황에 잘 적응한 경우라고 해석한다. 일관성있는 해석을 하자면, 예수님은 여성에 있어서 혁명적으로 행동하셨기 때문에 12제자를 뽑는데도 여성을 포함시켰어야 옳다고 해석해야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은 혼란스럽거나, 상충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은 일관된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

 

 


1) K. K. Lim, Het spoor van de vrouw in het ambt. Kampen KOK Kampen 2001 (Diss.).

2) 실재로는 소위 여자 전도사가 미자립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교훈이며, 성례를 집례할 수 없었다.

3) 1946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주창자가 되어 국제 개혁 교회 협의회(Gereformeerde Oecumenische Synode: GOS)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도 여성의 교회에서의 직분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4) 이때부터 네덜란드 Kampen 시에는 같은 이름의 두 개의 다른 신학교 존재했다. Oudestraat에 위치한 신학교는 1854년 설립된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이고, 1944년에 시작된 학교는 Broederweg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후자의 학교만 남아 있다. 현재 전자의 신학교는 국가교회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이렇게 세 개 교단이 연합한 교회로 들어갔고 그 후 정부의 대학 통폐합의 물결에 쓸려 없어지고 말았다.

5) K. K. Lim, Het spoor van de vrouw in het ambt. KOK Kampen 2001, 267

6) K. K. Lim , 265.

7) Susannah Herzel도 이에 대해서 1981년에 한권의 책을 썼다. A Voice of Women: The women's departm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Geneva 1981.

8) Brigalia Bam, What Is Ordination Coming To? Report of a Consultation on the Ordination of Women, Cartigny Switzerland 1970.

9) C. den Boer, Man en vrouw. Kampen 1985, 194.

10) 본래 명칭은 ‘Reformed Ecumenical Synod’였는데, 최근에 이름이 바뀌었다.

11)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와 ‘Reformed Church in the Netherlands’와 ‘Nederduitse Gereformeerde Kerken in Zuid-Afrika’, 이 세 교회가 발기 교회이다.

12) 장로회 신학대학 선교학 교수인 박보경 교수가 CBMW가 보수주의자라고 비평한다. 박보경,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여성상”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 108-109.

13)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신학지남] 제 63권/ 통권 248호 1996/가을호, 66-67.

14) “이와 같이 남성의 지도력과 우월성을 인정하고 여성의 종속성을 인정한다는 보수적 입장은 한국교회에도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는 남펴평등을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며, 여성들의 활약이 날로 커지는 21세기의 사회에는 걸맞지 않는 것이며, 한국교회가 여전히 이러한 견해를 고수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변화 속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박보경,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여성상”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109.

15) John Piper & Wayne Grudem, 13.

16) 김세윤, “여성, 그 복음적 이해와 목회적 적용”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69.

17) 같은 책.

18) 같은 책.

19) 같은 책, 69-70.

20) R. T. France, “Women in the New Testament Church - and in the Church Today Continuity and Development” (Women in the Church's Ministry)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호에 번역되어 실린 내용, 192.

21) Mary J. Evans, Woman in the Bible. Devon 1983,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