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장로교회 (글 내용과 무관함)
여자목사 제도에 대하여
아래의 글은 이광호 박사(실로암교회 목사, Ph.D. 대구가톨릭대학교, 브니엘신학교 강사)가 예장 브니엘교단 초빙으로 2009년 9월 14일에 발표한 논문이다. 이날 백석대학교 최갑종 교수(신약신학,Ph.D. 아이리프신학교)가 여자목사 제도 찬성의 글을 발표했다. 최갑종의 글은 <리포르만다> 아카이브(45번, 2014. 4. 3.)에 수록되어 있다. 찬반 두 글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두 사람은 모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를 한 저명한 신학자들이다. 브니엘교단은 두 학자의 발표를 듣고, 여자 목사 제도를 찬반 투표에 부쳐 부결시켰다. 브니엘신학교의 석사과정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은 독립교단연합회 등에서 목사안수를 받아왔으며,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여 목사로 안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자목사 제도'에 대한 비판적 논의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목사, 철학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1. 서론
21세기 교회는 여러 면에서 세속적 사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급변하는 사회적 물결이 무서운 속도로 교회 가운데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방어할만한 교회의 힘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과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 맞서기에는 상대가 마치 거대한 공룡과도 같이 느껴진다.
특히 직분관의 혼란은 교회로 하여금 더욱 긴장하게 한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일부 인사들 가운데는 직분제도를 아예 멸시하는 자들마저 있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이다. 칼빈은 교회의 직분제도와 교회정치를 폐지시키려 하거나 불필요한 것이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를 파멸시키고 파괴하려는 위험한 자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는 여자목사제도의 봇물이 완전히 열려버린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역사적 정통교회들이 여자목사를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명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이 되는 형편이다. 기독교 여성단체들에서는 그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마치 여성을 비하하는 것인 양 오해하기도 한다. 나아가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하는 깨어있는 자로 인식되는 반면 부인하는 자는 그와 반대로 인식되고 있다.
상당수 신학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을 근거로 들어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다수 교단들이 이미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 교단들에서도 여자목사제도를 심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교수나 목사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원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읽기에 주력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록된 말씀과 정통성 있는 교리적 전통을 벗어나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부 인사들의 현실 인식이 원리적 접근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여성을 비하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도리어 남성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미리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남성이나 여성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적인 문제로 인해 기득권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인 혹은 특정 부류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적 권리가 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섬길 수 있을 따름이다.
만일 직분을 기득권인 양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은 이미 교회의 직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 어느 한편을 지지하여 기득권적 논쟁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특정 부류의 편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여자목사제도 문제를 다루려 한다.
2. 직분에 대한 이해
(1) ‘직분’과 ‘직책’
직분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직분과 직책에 대한 의미상의 차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용어자체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편이다. 교회의 직분은 없어서는 안 될 항존하는 필수요건이다. 즉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해 분담하는 직책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본질적 은사이다. 이는 일반적인 직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 조직의 편의나 일의 능률을 위해 두고 있는 임의적 제도라는 점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로서 원리상 인간들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하거나 만든 제도가 아니다. 즉 직분은 교회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제정된 것이 아니라 원리상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직책이란 인간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다양한 직분들과 직책들이 있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적 방편이라면 남전도회장, 여전도회장, 선교부장, 구제부장, 주일학교 교사 등은 직책에 속한다. 이러한 직책은 조직 혹은 기관으로부터 맡겨진 일의 능률을 위해 남녀의 성에 관계없이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이므로 교회의 교사인 목사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제도에서 제사장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모든 제사장은 레위인으로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세워져야만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지파 자손이 아닌데도 그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인다고 하여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다.
우리시대 교회의 직분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 권력이나 외적인 권세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식으로 직분을 이해하게 된다면 권력이나 권세를 가진 '높은 자리'를 여성들을 배제한 채 남성들만 가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히 허락한 은사이며 인간들의 명예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 직분의 언약적 의미
여자목사제도와 연관하여 현재 논의 되고 있는 직분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회의 직분이 마치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져야 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토론이나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변화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민주적인 절차에 따른 다수의 견해에 따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적 대세에 의해 직분제도의 변경이 가능함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는 위험한 조짐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상이한 문화를 가지게 된다. 역사적인 건전한 교회들은 항상 그 상이한 문화들 가운데 굳건히 존재해 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회의 직분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론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상속되어져 온 많은 교회들은 다양한 인간 문화들 가운데서 말씀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가 필연적으로 투쟁하고 싸우면서 한편으로 고난을 당해야할 요소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인간들의 여론이나 토론에 의해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토론은 특정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일반 종교적 이성과 경험을 통해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나 분위기 활용에 능숙한 사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에 대해 어떤 원리적 교훈을 주고 있느냐를 주의 깊게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론의 수렴을 거쳐 직분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을 결정하려는 노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 목사제도를 수용하는 대체적인 배경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아니라 사회 여건의 변화에 따른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적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절대 진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시대에 따른 직분관이 형성되면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이 흐른 후에는 어떻게 변해가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3) 성경에 나타나는 여성들과 직분문제
오늘날 여자 목사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성경에 나타나는 여 사사들이나 여성들의 종교적 활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신약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들의 입장도 이제 새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드보라와 같은 여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라합, 룻, 에스더 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들어 쓰신 믿음의 여성들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훌륭한 믿음의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할 바는 그 모든 여성들이 그러한 믿음의 지위를 남성으로부터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 가운데서 자신의 고유한 뜻에 따라 그 여성들을 특별히 선택하심으로써 놀라운 경륜을 이루어 가셨으나, 남성과 여성에게 하나님의 일을 고르게 분배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단순히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여성들의 다양한 봉사 또한 교회의 직책적 개념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직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한 언약적 가르침이었다.
사도바울은 구약시대에 여 사사들을 비롯한 훌륭한 믿음의 여성들이 많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감독직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것은 구약역사에 등장하는 여성에 관련된 내용들이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는 기본 개념 위에서 창조와 연관된 교회의 특이성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과 관련된 구약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시대의 교회적 규범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입장이라 할 수 없다.
여자목사제도를 인정하려는 자들 중에는, 교회 가운데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격자로서 인간 사이에 남녀간 아무런 차등이 없다는 것은 옳지만 직분에 대한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격이나 능력적인 측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첫 언약과 더불어 드러나는 남녀의 차이는 그대로 존재한다. 자녀의 출산은 여성의 몫이며, 외부의 위험을 방어하고 노동하며 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남성의 몫으로 그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3. 성경의 교훈과 적용
(1) 바울의 교훈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가르치는 교사로서 여성의 사역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의 계시임을 믿는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분명히 밝혔다. 바울의 계시는 고린도교회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1세기 당시 흩어진 교회들과 오늘날 우리시대를 비롯한 역사상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이 전해준 ‘유전’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고전11:2). 본문에서 말하는 ‘유전’이란 단순한 전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교회가 마땅히 받아들여야할 언약적 상속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그와 더불어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다(고전11:3). 이 말은 통상적인 언급이 아니다. 즉 각각 개인 여성들이 교회에 속한 다른 모든 남자들을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전체적이며 구속사적 의미 가운데 진술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성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일상적인 교회 생활에서 그렇게 하라는 의미와는 달리 공 예배시간에 그렇게 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는 이와 더불어 특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며,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창조와 언약적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천사들로 인해 권세아래 있는 표가 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남자들에 대해서는 그에 관한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전11:7-10)
우리는 바울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연관지어 계시된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남성과 여성을 통상적인 관점에서 차별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자 없이 남자만 있을 수 없고 남자 없이 여자만 있을 수없음을 이야기하며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고전11:11).
바울은 또한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섭리적 차이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주안에서 복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대적 관습을 배경으로 한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3-27)
바울의 이 말은 1세기 고린도교회에만 유효하고 오늘날 우리시대 교회에는 골동품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매우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야 할 바는 이 말씀이 지상의 교회와 직접 연관하여 설명된 진리라는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강조한 의미 가운데는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고 그 교훈은 고린도교회 혹은 1세기 교회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 그 본질적 의미가 남아 있어야 한다. 나아가 바울이 전한 교훈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할 내용이다.?
바울은 단순히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남성들에게 가부장적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성을 비하하는 것인 양 오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계시된 말씀은 지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언약과 창조적 질서 가운데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상교회에 그런 특별한 요구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해당한다.
또한 바울은 직분과 연관하여 특별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당시 관습에 따른 일반 윤리적인 요구가 아니다. 즉 1세기 고린도교회의 특별한 문화적 배경을 문제 삼아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를 위한 분명한 계시의 말씀이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14:34,35)
고린도전서 14장은 특별히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기 위한 은사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여자로 하여금 교회에서 잠잠하도록 요구한 것은, 율법 즉 구약성경을 근거로 하여 은사와 관련된 직분적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위 본문은 여성과 관련된 일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배경으로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본문 가운데서, ‘율법에 이른 것 같이’라는 분명한 단서를 붙이고 있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구속사적 언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바울의 요구가 일반 교회생활이나 논의에 있어서 잠잠하여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나아가 교회 안의 여성들에게 소위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말로 보아서도 안된다. 만일 그런 논리를 적용하여 주장한다면 여성들이 그에 반감을 가질 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하는 이유가 율법에 근거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은 성전과 제사장 직분과 어느 정도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약시대 여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사할 수 없었던 사실과 신약시대의 성전인 교회 가운데서 여성에게 목사직분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음'의 의미가 '여자답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이 허락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기록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남성은 교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어야 할 교훈은, 교회의 교사직분이 남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직분을 성적인 우월개념에서 남성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의 기록은, 교회의 상속이 구약의 율법을 바탕으로 한 교사인 목사직분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고유한 질서가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목사직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직분이다.
바울은 또한 나중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면서 교회의 직분에 관한 언급을 했다. 그 가운데는 특별히 여성들이 가져야할 순종의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 여성이 교회에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단순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맨 처음 인간이 범죄에 빠진 사건에 연관되어 있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1-14)
사도바울이 기록한 디모데전서는 이른 바 목회서신으로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특히 디모데전서 2장은 직분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여야할 언약적 교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창조질서와 더불어 인간이 범죄한 초기 과정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런 연유로 인해 여성에게는 가르치는 목사의 직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 의미는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여야 할 원리적 교훈이다.
즉 성경에서 여성들이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을 가지는 것을 허락지 않는 이유는 여성비하나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창조질서와 연관하여 더욱 본질적인 것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위의 본문 가운데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이라는 언급은 목사의 교사사역에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말은 감독 곧 목회사역과 연관된 직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직분은 시류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인가
성경은 이렇듯이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여권주의자들이나 시대적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자 목사제도를 인정하려고 애쓰는 현실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성의 지위와 권익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가 두드러지기 전에 벌써 그에 대한 충분한 성경적인 논의가 있어야만 했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여성들과 여성옹호론자들이 여성의 권익과 더불어 남녀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과거 역사 가운데 있어왔던 남성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적 사고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급기야 교회 가운데도 들어오게 되었으며, 직분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살피기에 앞서 여권회복의 차원에서 논의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와 같은 주장은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성적 차별이 불필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도 남녀가 공평하게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과거 남성들이 여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모든 직분과 권위를 독점해 왔으므로 이제 빼앗긴 여성의 직분적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의 직분을 권력 및 가부장적 권위와 연관된 소위 '높은 자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직분을 정치적인 직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왜 그 높고 힘 있는 자리에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고 남자들만 올라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목사들의 잘못된 권위주의와 교회를 무시했던 악한 행태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이 목사 직분을 맡도록 허락된 것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성품이 우수하다거나 지적으로 유능해서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남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볼 때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이 더 섬세하고 정확한 면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남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차별성으로 인해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목사제도가 허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유는 성경의 원리적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교회 가운데 여자 목사를 금하고 있는 성경의 교훈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우리가 지켜야할 규범이다. 그 가운데는 시대를 초월해 모든 교회들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언약적 교훈이 담겨있다.
따라서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직분에 관한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행사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변화해가는 시대적 조류에 맡겨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창조적 남성과 여성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유혹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음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직분과 연관짓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여자를 목사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군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가 목사직분을 남성에게 허락함으로써, 여성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 온 죄악을 다스려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교회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선포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목사 혹은 교사직분이 여성에게는 금지되고 남성에게만 허용된 중요한 이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여성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내세우며 여성 목사를 인정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의 언약사상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모범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에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죄에 승리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은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여러 훌륭한 여성들을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구약시대 뿐 아니라 사도교회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드보라, 기생 라합, 룻, 마리아, 엘리사벳, 한나, 막달라 마리아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성 여부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쓰신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가정과 가정의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인식한다. 가정에서 가장(家長)의 위치는 언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에서 남편에게 묻고 배우도록 했는데 이는 언약으로 말미암는 가장의 권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고전14:35). 따라서 한 가정의 가장인 남편은 단순한 대표자 혹은 지배자를 의미하지 않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입창출자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가장은 언약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하고 계신다. 목사의 직분을 오용하며 주님을 욕되게 하는 남성들도 많은데 반해 그 직분을 가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는 것이고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차등 없이 매우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 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직분을 허락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며 몫이다. 여권주의자들이나 여성 옹호론자들은 시류의 영향으로 인해,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교회 안의 성숙한 여성들은 교회의 목사, 즉 교사로서 직분을 담당하는 형제들을 위해 권면하며,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온당한 순종을 위해 협력함으로써 주님의 교회가 굳건히 잘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런 설명에 대해, 교회에서 여성들이 가르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른다. 목사가 있지 않은 작은 교회나 주일학교 같은데서 여성들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독립된 교사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즉 교사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비단 여전도사 뿐 아니라 남자 전도사나 주일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4. 결론
우리시대의 연약한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교훈이 아니라 세속적 시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목사 직분을 감당하는 남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적인 목회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앞세운 인본적인 목회를 함으로써 그러한 잘못된 욕구들이 더욱 강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이 일반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잘못된 태도에서 기인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말씀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시대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신학자들마저 현실에 동조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바라기로는 교회 가운데 가르치는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목회를 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가 현대 페미니즘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다든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보다 신앙이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목사 직분을 가진 남성들 보다 특별한 직분을 가지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자목사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도교회를 이어 보편교회 가운데 허락된 직분은 항상 소중히 보존되어야 한다. 정통교회에서 고수해오던 남성목사 직분제도를 여성에게도 허용한다면 앞으로 수십 년이 흐른 후에 동성애 목사제도를 허용하는 위험한 길목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것이 더 높거나 나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교회가 허락한 직분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해 갈 따름이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잘못 세워진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부족한 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목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말씀에 나타나는 원리 자체를 무시하거나 바꿀 수는 없다. 남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직분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구적 견해 때문이 아니다. 직분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대에 따른 문화적 특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교회의 중심에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영원한 교훈이다.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능력에 따른 상하구별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목사라는 직분자체로 인해 천국에서 영웅이 된다거나 더 많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며 특별히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엄한 책망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기억하며, 직분을 기득권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개인적인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주님의 뜻을 오해하는 자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에서 옮겨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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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3:2, 킹흠정)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
(딤전 3:12, 킹흠정)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
(딛 1:6, 킹흠정) 『어떤 사람이 책망 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거나 제멋대로 한다는 비난을 받지 아니하는 신실한 자녀들을 두었으면 임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