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막춤
삼하 6:12b~20
이성환의 글
<Pen of Truth>에 게시된 글
문제 제기: 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다윗도 언약궤가 들어올 때에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 당신도 그렇게 춤을 춰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신나게 춰라.
찬양 인도자나 부흥 강사들이 소위 “분위기가 조용한” 성도들에게 흥겹게 춤을 추도록 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멘트이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쭈뼛대며 일어나 주변을 살핀 후 음악에 맞추어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빠르게 움직이다가 땅이 꺼져라 방방 뛴다.
처음에는 내가 춤을 추는가 싶더니, 곧 춤이 춤을 추고, 결국 춤이 나를 춘다. 교회당 안은 나이트 클럽과도 같은 분위기가 되고, 사람들은 흥에 겨워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목도할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아련해 진다. 다윗이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는 현상이 자꾸 외형적으로만 해석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위와 같은 멘트를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1) 다윗이 춤을 추기 바로 전에 무엇을 했는지, (2) 춤을 추기 전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과 몇 걸음씩 걸었는지, (3) 춤을 어디에서 추었는지, (4) 춤을 출 때에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5) 어떤 춤을 추었는지 등을 말이다. 우리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 채 다윗이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춤을 춘다면 우리의 춤은 다윗이 추었던 춤과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춤을 춘 이유에는 위에 던져진 질문들에 합당한 답이 있었다. 그것이 다윗의 춤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다.
잠시 삼하 6:12b~16, 20을 보자.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이제는 위에 언급된 질문들에 맞는 답을 하나씩 찾아보자.
첫 번째 질문:?다윗이 춤을 추기 바로 전에 무엇을 했는가? 여섯 걸음을 행보한 후 소와 살진 송아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후에 힘을 다해 춤을 춘 것이다. 보시다시피 춤이 먼저 나온 것이 아니다. 춤 전에 여섯 걸음의 행보와 제사가 먼저 있었다. 신학자들마다 이 의미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을 내놓는데 압도적인 해석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여섯 걸음씩 행보한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는 행위를 반복했다는 것이다.[1]
오벧에돔에서 다윗의 성까지는 약 20Km이다. 이 거리를 가는 동안 여섯 걸음씩 행보한 후 소와 살진 송아지를 죽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해 보자. 길은 동물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엄숙하고 숙연한 자세로 마음의 옷깃을 여몄을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있는 힘껏 춤을 춘 것이다. James Sime의 말을 들어보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피범벅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피로 얼룩진 시온의 길과 피로 흐르게 된 강, 도륙된 짐승들의 시체 더미와 뜨겁게 타오르는 제단의 불은 다윗의 춤과 어울리지 않는 대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2]
그렇다. 다윗은 피로 얼룩진 길 위에서 춤을 췄다. 그의 춤은 준비 없이 만들어진 경거망동한 춤사위가 아니라 희생된 동물의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예배였다. 교회당 안에서 춤을 추려는 성도들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윗의 춤이 동물의 피 위에 세워진 예배였듯이 우리의 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져야 하는 예배라는 것을 말이다. 찬양 인도자들이여, 제발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님 안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며 춤을 추게 만들지 말라. 보혈 밖에서 추는 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춤이 아니라 춤을 위한 춤일 뿐이다. 그들이 옷이 아니라 살갗이 벗겨지게 춤을 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다윗이 춤을 추기 전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과 몇 걸음씩 걸었나? 여섯 걸음이다. 왜 여섯 걸음일까? 신학자들마다 거의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여섯 이란 숫자에 들어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이다.[3] Sunny Philip의 해석을 들어보자.
여섯 이란 숫자는 사람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의 힘을 다하여 여섯 걸음을 갔고, 그 후에는 하나님 없이는 한 걸음도 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멈춰 선 것이다. 그가 또 한 번의 여섯 걸음을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것을 바라며 말이다. 그렇게 그는 제사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갔다.[4]
Robert D. Bergen도 여섯 걸음의 의미를 안식일과 연결시키며 언약궤를 옮기는 여정을 “다른 여정들과는 다르게 성별(聖別)”하는 중요한 의미라고 말한다.[5] 이렇듯 여섯 걸음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해석된다. 다윗은 이러한 의미들 속에서 하나님께 힘껏 춤을 춘 것이다. 그저 기분이 좋거나 흥분이 돼서 춤판을 벌인 것도 아니요, 분위기에 취해서 춤을 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당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대다수의 춤들을 보면 이런 의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저 드럼의 비트가 흥겹고, 노래의 곡조가 자극적이기 때문에 춤을 춘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그 분과 맺고 있는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춤을 위한 춤이 추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윗은?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과 그 분과의 화목한 관계를 생각하며 그 분께 춤을 예배로 승화하여 드린 것임을 말이다.
세 번째 질문: 다윗의 위치는 어디인가? 여호와 앞이다. 다윗이 춤을 춘 위치는 여호와 앞이었다. 성경에서 “여호와 앞”이라는 표현은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의미는 피조물들의 자리이다. 욥 1:6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라는 표현이 있고, 계 7:15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시 61:7에는 [왕 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거주”한다고 되어있다. 반면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위치는 성부 하나님과 대등한 옆이다.[6] 이처럼 성경은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리를 명확히 구별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채 다윗의 위치를 보라.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앞이다. 그는 지금 절대자의 앞에 선 피조물로써 그 분께 춤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춤을 추다가 흥에 겨워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춤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췄다.
요즘 일반적인 교회의 찬양 집회 때 보이는 춤이 사람을 추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나? 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라. 마치 광신자 같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연상케 한다. 나도 없다. 너도 없다. 하나님도 안 계시다. 그저 춤에 취해 춤을 춘다. 내가 춤을 추고, 춤이 춤을 추더니, 결국 춤이 나를 추는 격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치고, 벌렁 누워서 구르며, 춤을 춘 후에는 방금 부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는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 이들의 춤은 다윗이 추었던 춤과는 사뭇 다른 춤임에 틀림없다.
네 번째 질문:?다윗의 복장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에봇을 입고 있었다. 에봇은 제사장이나 레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입던 조끼와 같은 것이었다. 그 에봇을 왕 다윗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은 왕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왕은 절대 권력가였다. 왕은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았고, 누구를 섬기지 않았으며, 누구를 위해 춤을 추지 않았다. 오히려 절을 받고, 섬김을 받으며, 춤을 구경했지 그것들을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왕보다 높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 속의 왕 다윗은 에봇을 입고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만 입는 에봇을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왕으로 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신 일개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겸손한 예배자로 선 것이다.[7]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거드름을 떨지도 않았다. 절대자 앞에 선 피조물로써 겸손하게 그 분께 춤을 드렸다. 다윗의 춤이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왕이 왕임을 내세우지 않은 채 절대자께 드린 예배자의 춤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 미가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다윗은 겸손하게 그의 하나님과 함께 행했다. 그것의 그의 춤을 예배로 승화시킨 것임을 잊지 말자.
다섯 번째 질문: 다윗은 어떤 춤을 추었는가? “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빙빙 돌다’는 뜻의 카라(???)이다.[8] 성경에 오직 두 번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삼하 6:14와 6:16에서 다윗의 춤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사용되었음을 아는가? 구약 성경에는 “춤”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많이 있다. 라카드, 마홀, 훌, 그리고 하가그 등 이다. ?이 모든 단어들에는 각각의 다른 의미들이 있지만 이음동의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카라는 예외다. 카라는 오직 언약궤를 옮길 때에 추었던 다윗의 춤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사용 되었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언지한다. 왜 언약궤를 옮길 때 추었던 다윗의 춤만 카라로 묘사된 것일까? 이 춤은 다른 춤과는 구별된 것이기 때문인가? Robert Jamieson의 말을 들어보자.
히브리인들 에게는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춤이 있었다. 그 춤은 하나님의 좋으심과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엄숙한 절기와 같은 때에 하나님께 드려졌다.[9]
그렇다. 다윗이 여섯 걸음을 걸은 후 피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향해 힘껏 추었던 카라(???)는 막춤이 아니였다. 디스코 장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추는 그런 류의 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춤은 구별된 춤이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드려진 춤이었다. 성소에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었던 향이 있었듯이, 다윗에게도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춤이 있었다. 그것이 카라(???)이다. 이 춤이 정확히 어떤 안무로 이루어 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춤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충동적 춤이 아니”[10]기 때문에 관광 버스에서 술에 거하게 취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 추시는 춤이나 교회당 안에서 무질서하게 뛰면서 구르는 춤과는 거리가 먼 것만큼은 확실하다. 요즘 많은 찬양 인도자들이 교회당 안에서 나이트 클럽에서 추는 춤을 그대로 추면서 “누구를 위해서 추느냐가 중요하지 춤의 모양새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시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만약 삼하 6장에 있는 다윗의 춤을 예로 들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반증할 것이다. 삼하 6장에 있는 다윗의 춤은 이러한 주장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춤이었다. 이 춤은 아무때에, 아무를 위해서, 그냥 흥겹다는 이유로 추어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했던 향처럼 하나님께만 드려진 춤이 다윗의 카라였다.
끝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으로 준비한 다윗은 드디어 언약궤를 성으로 모셔온다. 그 때 그가 느꼈던 감격과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래 시간 동안 준비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진행했으며, 기쁨과 경외가 한데 어우러진 여정을 막 끝낸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벅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 힘껏 “뛰놀며 춤추”다가 옷이 벗겨졌다 (혹은 살이 드러났다). 이것은 그가 경거망동하게 행동했기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을 잊고 춤을 위한 춤을 추었기 때문도 아니다. 드럼의 비트가 흥겹고, 곡조가 자극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열심대로 춤을 춘 다윗을 옷이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막춤을 요구하는데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교회당 안에서 다윗처럼 춤을 춰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춤은 거룩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드려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당 안에서 막춤을 추기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윗의 춤은 제의적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예배였고,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만들어 진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전능자 앞에서 드려진 피조물의 예배였고, 높으신 하나님을 향한 겸손의 예배였다. 다윗의 춤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진 구별된 예배였더, 이러한 의미 속에서 드려지는 춤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춤이다.
참고문헌
[1] Jensen, Polzin, Ryken, Longman, Garland, Spence-Jones, Day, Youngblood, McCarter, Carlson 그리고 De Wette등이 이와 같은 해석을 한다. 이러한 해석이 석연치 않았던 Keil와 Delitzsch도 해석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위의 구절은] 길을 가는 동안 여섯 걸음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진 것이라고 받아 드려진다. 몇 천 마리의 소와 살진 송아지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것이다 (Keil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2, 592).” 이런 해석을 반대하는 John Peter Lange의 견해도 있지만 히브리어의 광범위한 사용법을 무시하고 만들어진 것인지라 받아들여질 수 없고, 여섯 걸음마다 제사가 드려졌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면 “והיה אם יצעדו”라고 표현되었어야 한다는 Samuel R. Driver의 주장도 언어의 유동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른 해석을 보기 원한다면 다음 저자들의 주석을 보라: (1) 반대 – John Gill, Arnold Albert Anderson, S. R. Driver, Hans W. Hertzberg; (2) 중립 – Robert Barron, John Woodhouse.
[2] James Sime, The Kingdom of All-Israel: Its History, Literature and Worship (London, James Nisbet &Co., 1883), 288.
[3] McCarter, R. A. Carlson, Robert D. Bergen, Youngblood 등.
[4] Sunny Philip, Becoming a Person of God: Understanding the Process (New York: AuthorHouse, 2011), 132.
[5] Robert D. Bergen, 1, 2 Samuel, vol. 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Holman Publishers, 1996), 331.
[6] 막 16:19, 눅 22:69, 롬 8:34, 골 3:1, 히 12:2, 벧전 3:22
[7] James E. Smith, 1 &2 Samuel, The College Press NIV Commentary (Joplin, MO: College Press Pub. Co., 2000), 387; John Woodhouse, 2 Samuel: Your Kingdom Come, ed. R. Kent Hughes (Wheaton, IL: Crossway, 2015), 188.
[8] Francis Brown, Samuel Rolles Driver, and Charles Augustus Briggs,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ak Harbor, WA: LRS, 2000), 502–503.
[9]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Oak Harbor, WA: LRS, 1997), 2 Sa 6:14.
[10] James E. Rosscup, An Exposition on Prayer in the Bible: Igniting the Fuel to Flame Our Communication with God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08), 496. Cf.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