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와 라마크리슈나

by dschoiword posted Feb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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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히말라야여행동호회    


종교다원주의와 라마크리슈나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 가지로 모든 역사적 종교 또는 건전한 종교가 모두 다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구원에 제한을 둘 수 없다고 한다. 성령의 열매가 여러 형태의 종교들 안에도 존재한다고 고백한다. 이른 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표방한다.

 

기독교계 종교다원주의는 힌두교 배경을 가진 로마가톨릭 사제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인도인 목사 스탠리 사마르타(Stanley Samartha), 스리랑카의 감리교회 감독 웨슬리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가 발전시켰다. 이들의 사상은 신힌두주의(NeoHinduism)를 제시한 라마크리슈나의 종교다원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기독교계 종교다원주의는 힌두교계 종교다원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기독교계의 종교다원주의

   

파니카, 사마르타, 아리아라지 외에도, 기독교계의 종교다원주의를 발전, 심화시킨 신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익명의 그리스도론을 주창한 로마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신은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존 힉(John Hick), ‘신중심주의 그리스도론궁극의 신적 실재론(Ultimate Divine Reality)’을 외친 폴 니터(Paul Knitter), 그리고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주도하는 신학자 존 캅(John Cobb)과 로버트 펑크(Robert Funk) 등이다.

 

기독교 종교다원주의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펼친다. 첫째, 역사적인 종교들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구원의 길이다. 각 종교인은 각각 다른 길을 거쳐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중심의 존재에서 실재 중심 또는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어본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神國) 또는 불국(佛國) 실현에 힘쓴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함은 옳지 않다. 진리의 배타적 독립성 주장은 의미 없는 일이다.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전통을 가진 인류를 위한 유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은 난센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종교와 모든 문화 속에 차별 없이 관대하게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 종교 곧 기독교가 인류의 하나 됨의 구심점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셋째, 각 종교의 배후에는 궁극적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가 있다. 모든 종교는 같은 신적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동등한 가치의 종교 경험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도교, 유교는 인간이 각각의 문화 조건 아래에서 신적 실재를 그린 서로 다른 그림이다. 진정한 진리는 각 종교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은 모든 종교들 안에 자신을 계시한다. 각 종교의 신앙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전통을 따라 신과 관계하고 구원을 받는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구원의 길이다.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비기독교 신자를 기독교로 회심시키려 하지 않아야 한다. 신실한 이웃 종교인(타종교인)’에게 회심을 요구하고 그들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으려 함은 잘못이다.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기독교만이 구원의 종교라고 보는 유럽의 제국주의 발상과 그러한 종류의 종교 이데올로기이다.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은 모든 종교가 보편적 구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이웃종교 또는 타종교를 자기가 믿는 종교의 잣대로 평가는 것은 잘못이다. 특정 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명의 경건한 신도를 가진 종교를 어찌 참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진리 담론(談論)은 역사, 문화,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으므로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인간이 궁극의 신적 실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실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제한된 이성으로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종교의 가치는 경험에 있고, 그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인간 역사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계시란 항상 현재적이다. 기독교 성경에 담겨 있는 계시는 진리를 보여주기에 불충분하다. 기독교의 계시와 타종교의 계시는 동동한 차원이다.

 

일곱째, 바람직한 종교인의 태도는 자기의 고유한 것을 유지하면서 타종교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답고, 불교는 불교답고, 이슬람교는 이슬람교답게 각각의 고유한 색깔과 독특한 향기를 발한다. 건전한 종교인은 각자 자기가 귀의(歸依)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여 세계 평화를 유지한다.


2. 라마크리슈나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Paramahansa, 1836-1886)는 석가모니(佛陀), 샹카라(Shankara)와 더불어 인도의 3대 성자로 꼽히는 종교가·사상가이다. ()힌두주의를 정립한 거장 종교인이다. 유년 시절부터 자주 종교적 신비체험을 하고 황홀경(?惚境) 상태에 빠져들었고, 9세 때에 브라만 사제 계급의 상징인 신성한 끈을 받고 의례(儀禮)를 주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힌두교 여신을 숭배했다. 자신을 신과 일체감을 가진 자로 알렸고, 신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라마크리슈나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신을 깨닫는 수단은 박티(bhakti, 信愛)’ 곧 사랑과 헌신이다. 신은 유형 또는 무형 어느 쪽으로나 존재한다. 신은 시대, 지역, 민족에 알맞은 형식과 가르침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라마크리슈나는 30세 때 이슬람교를, 36세 때 기독교를 배운 뒤, 모든 종교가 똑같은 진실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종교와 진리의 귀결점이 같다는 자각을 가졌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신()을 보았다. “물웅덩이에는 온갖 가트(물길)’가 있다. 힌두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 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도는 파니라고 부른다. 기독교도는 워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같은 물질이며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라고 했다.

 

라마크리슈나는 그때부터 박애주의와 보편주의에 입각한 종교 간의 조화와 인류 협동의 이상을 설파했다. 그는 힌두교의 전통을 현대에 맞게 되살렸고, 이로써 인도인들, 힌두교인들의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인류 종교사에 기록될 만한 힌두교계 거성으로 부상했다.

 

3. 라마크리슈나 미션


라마크리슈나의 제자들은 스승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는 미션(포교원)을 세우고, 종파·신조·카스트 차별타파의 노력을 하고 난민구제와 사회복지 활동을 하고 있다. 인도 여러 지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남아프리카 등지에 100여개의 미션 지부와 수도원을 설립하여 스승의 종교사상을 가르치고 학교, 병원, 고아원, 도서관을 건립하는 등 열악한 사회 여건 개선에 헌선하고 있다.


라마크리슈나 미션이 운영하는 수도원에는 독특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힌두교 수도사들과 서양기독교 선교사들을 포함한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마룻바닥에 앉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Upanishads)와 힌두교 복음서들을 공부한다. 둘째, 큰 강당 안에 인류의 주요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걸어 놓는다. 마호메트, 석가, 예수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 마다, 라마크리슈나 미션의 구성원들은 예수의 초상화 앞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인도가 기독교로 개종함을 의미하는 표지가 아니다. 예수를 힌두교 세계관에 끼워 맞추는 종교 행사이다. 예수도 모든 인간이 갇혀 있는 존재의 수레바퀴 곧 카르마(Karma)’삼사라(Samsara)’의 끝없는 순환에 걸려 있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는 예식이다. 예수는 힌두교 세계관에 편입된 종교인이고, 진실한 인물이고, 신과 일체감을 가진 위대한 존재로 해석되고 이해된다.

 

자유주의 신학 형태의 유럽기독교와 인도와 네팔에서 번성한 힌두교가 근래에 공유하는 것은 신비적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심령주의(Spiritualism) 전통이다. 두 종교는 궁극적 존재의 기원과 진리를 직접 접촉하는 종교체험에서 만난다.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이 두 종교 전통을 합류시킨다. 모든 인간은 이성(理性)의 사용 또는 신(), 신성(dieties)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신을 체험할 수 있으며, 신이 된다고 생각한다. 인본주의와 합리주의(rationalism)에 기초한 유럽의 기독교는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이 등장한 이후에 인간 이성을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거의 포기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유럽기독교는 서서히 그리고 극도로 쇠락했다.

 

4. 라이문도 파니카

 

로마가톨릭 신학자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1918-2010)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주창한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무지개 이론이라고도 일컬어진다. 파니카는 스페인 출신 로마가톨릭교회 신자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 신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이며,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위해 활약했다.


파니카는 힌두교와 로마가톨릭 두 종교의 사상과 실천에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종교 간의 대화와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한다. 초기 작품인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 1964)는 계시의 완성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17년 뒤에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은 그리스도의 절대 우월성을 대폭 삭제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천명한다. 예수-기독교와 무관하게 그리스도가 힌두교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파니카에 따르면, 각 종교가 서로 다른 교리와 실천과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로고스를 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우주의 이법,’ ‘신적 빛,’ ‘이성의 빛인 로고스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 이 로고스는 특정 지역, 특정 인물, 특정 종교에 제한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역사 사건과 인물 속에서 순수성과 투명성을 달리하면서 드러난다. 다양한 종교들은 로고스의 현존이다. 예수·석가·공자·모하메드는 로고스의 구체적인 성육화(成肉化)의 결과이다.

 

파니카는 보편적 그리스도특수한 예수를 나눈다.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교의 구원자들에게서도 그리스도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실재 곧 신, 인간, 우주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다. 시원적(始源的)인 신인(神人) 양성의 실재이다. , 인간,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통일의 상징이며, 그 본질이다. 보편적 로고스는 예수 안에서 성육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의 궁극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예수만이 그리스도인 것은 아니다. ‘보편적 그리스도는 기독교 밖에도 무수히 존재한다. 힌두교의 라마(Rama), 크리쉬나(Krishna), 불교의 석가(Buddha), 이슬람교의 마호메드(Muhammad) 등 역사적 인물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타종교를 적대시하거나 흡수하려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종교는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파니카는 흥미롭게도 종교적 포용주의 태도를 거부한다. 기독교의 진정성을 기정사실로 보지만,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조차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여 이를 배격한다. 그는 각 종교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이 나사렛 예수를 거쳐 실현된 기독교 신앙을 성실하게 가질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과 대화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면 불행과 갈등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랑의 하나님을 기독교나 예수가 독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이 타종교를 이해하고 함께 인간 구원의 길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파니카는 무지개를 가지고 이를 설명한다. “인류가 갖고 있는 다양한 종교 전통은 신적 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난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통,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백색 광선은 궁극적 실재이고, 일곱 가지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무지개의 색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들이다. 세계의 각 종교는 한 개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 역사의 반응이다. 역사적 종교는 그것이 불교든, 이슬람교든, 힌두교든, 기독교든 간에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킨 파장들에 지나지 않다. 각 종교의 고유소(固有素)는 타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특정 종교의 유형적 특성을 타종교를 판단하는 규범, 잣대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타종교에는 우리가믿는 구원의 내용이 없으므로 참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든지, 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접근함은 그릇됨이다. 그 까닭은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이 개별 종교마다 나름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상의 하나인 빨강색이 보라색에게 너는 색깔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무궁화가 들국화를 향하여 너는 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한다.

 

파니카의 이러한 유비(analogy, 類比)는 구도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 백만 송이의 가짜 장미는 한 송이의 진짜 장미와 질적으로 대조될 수 없다. 진짜 꽃과 진짜 꽃을, 가짜 꽃과 가짜 꽃을 견주어 보는 것은 구도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을 견주어야 비로소 그 차이가 드러난다. 진짜 장미는 인조장미를 향하여 너는 꽃의 모양은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최덕성


리포르만다 제7회 학술회(2017.2.14., 부산)에서 발표한 논문의 일부분. KOREA-NEPAL INTERNATIONAL CULTURE CONFERENCE 2017(2017.2.22., Katmanthu)에서 발표한 글이다. 영문으로 작성한 것이다. 원제 “종교적 자아 정체성과 행동하는 대화문화: 카트만두와 서울의 상호 협력을 향한 종교적 기초의 일부분이다.

  































최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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