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

by dschoiword posted Feb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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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

 

종교간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대립이 가져오는 피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을 가져온다.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Religious Dialogue of Action)는 상호 갈등을 줄이고 화합과 협력으로 평화와 사회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역사적 기독교는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포기하는 종교다원주의 형태의 대화를 거부한다. 기독교의 근본도리를 부정하고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이라는 식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전제로 하는 종교 간의 대화를 환영하지 않는다. 종교인 간의 평화, 협동, 격려 중심의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는 환영할만하다.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종교 간의 대화 방법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KOREA-NEPAL INTERNATIONAL CULTURE CONFERENCE 2017에서 발표한 글(2017.2.22.)이다. 영문과 한글로 작성한 것의 일부이다. 원제 “종교적 자아 정체성과 행동하는 대화: 카트만두와 서울의 상호 협력을 향한 종교적 기초의 일부분이다. 네팔은 힌두교 신자가 인구의 80퍼센트이고 불교인이 약 10퍼센트이다. 한국 정부는 2015년의 개신교 인구가 약 2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네팔과 한국의 종교 간의 대화 곧 종교적 자기정체성 포기를 강요하지 않는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 시스템 구축과 활동의 증진이 요청된다.

 

1. 힌두교, 불교, 기독교

 

대한민국(이하 한국)은 지진피해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2016년 가을에 발생한 강진으로 국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학교가 수업을 중단하고, 대규모 회의가 갑자기 파회한 경우도 있다. 카트만두와 그 인근 지역에 2015년 봄 지진 때, 급히 달려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한국인이 있었지만, 지원의 폭이 크지는 않았다. 신속한 지원 방법과 정보를 가지지 못한 탓도 있다.

 

인간의 삶에 친구가 중요하다. 참화, 불행, 비극을 만날 때 필요하다. 친구는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슬픔을 당한 자에게 희망을 준다. 용기를 가지게 한다. 환난을 당할 때 친구의 위로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친구관계 형성과 잦은 왕래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평소에 쌓은 두터운 친분, 열린 대화, 협력 시스템 구축이 신속한 지원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는 문화와 예술의 창의적 뿌리이다. 민속춤은 대부분 제의적(祭儀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네팔의 소설, 수필, , 미술, 공예, , 노래 등 여러 예술과 문학 분야는 힌두교와 불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종교는 세계관과 정신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아시아는 종교들의 고향이며 텃밭이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종교 사상들의 발상지이다. 역사적 종교들은 아시아의 정신적 개방성의 종교 전통에 뿌리내리고 그 토양에서 자라왔다. 세계 도처에서 종교 간의 불화가 심화되고 있다. 종교의 텃밭인 아시아가 자비, 평화, 조화, 협력의 모델이 될 것인지,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은 갈등, 참화, 부조화, 의사소통 단절의 표본이 될 것인지, 그 여부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적 만남과 대화의 폭, 깊이, 질에 달려 있다.

 

네팔 정부는 2011년의 네팔 인구가 약 26백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한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한다. 통계에 따르면, 네팔 국민 약 80퍼센트가 힌두교인이고, 9퍼센트가 불교 신자이다. 석가모니 탄생지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이 네팔에 있는 점을 고려하면, 네팔의 불자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슬람 신도가 인구의 4퍼센트, 기독교 신자 1.4퍼센트이다. 네팔 국민 10명 가운데 8명은 힌두교인이고, 1명은 불자인 셈이다. 두 종교의 영향 아래서 네팔인 절대다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불멸하며 끝없는 윤회 속에서 존재하고, 전생의 업보에 따라 다른 존재 형태로 계속 옮겨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15년의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발표했다. 기독교인 약 9700만 명, 불교도 약 7600, 로마가톨릭교회 신자가 약 3900만 명이라고 한다. 소수의 원불교, 유교, 천도교, 대종교, 무속신앙인들도 있다. 한국 국민 5명 가운데 1명이 기독교 개신교 신자인 셈이다.

 

한반대륙에는 아주 오랫동안 비폭력과 자비정신을 천명하는 불교가 강세(强勢)였다. 1500년 동안, 한국사회의 종교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반세기 전까지도 한국이 불교국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이 땅에는 불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 신도 수가 다수이다. 교회당들이 불교 사원보다 훨씬 많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불교가 4세기에 들어왔고, 유학이 15세기에 유입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1770년대 말에, 기독교 개신교회는 1880년대 초에 들어왔다. 첫 개신교회는 한국인 스스로 세웠다. 뒤를 이어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선교사들이 찾아와 외세침략과 부패한 정부에 의해 삶이 피폐해 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에 이바지했다.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이 전하는 종교 진리를 환영했다.

 

한반대륙의 북쪽에는 약 2500만 명의 동족이 살고 있다. 공산주의 무신론 국가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가르친다. 모든 종교를, 특히 기독교를 억압한다. 북한은 핵무기로 미국과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5천년 민족 역사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문화적 경제적 삶을 누리고 있다. 교육수준의 향상, 사회복지의 발달, 체육과 문화의 도약, 의술의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신장(身長)과 평균 수명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한국이 경제와 삶의 질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발전한 시기와 기독교인 인구가 증가된 시기가 일치한다. 한국기독교인들은 나라의 발전과 복지향상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덕분이라고 믿는다. 한국이 이족침략, 동족상잔의 전쟁, 천연자원 부족이라는 악조건을 딛고 용감하게 일어나 윤택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자살률과 이혼율이 높고, 국민행복지수가 낮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2. 한국기독교의 자아 정체성

 

유럽기독교 사회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신자들이 기독교인들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이 독실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 믿으라,” “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기독인들에게, 이러한 태도와 발상은 매우 낯설다. 한국기독교는 유럽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백인 전용이라는 딱지가 붙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원시설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에 거부감을 느낀다. 기독교의 진리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인류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한국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이 기독교인보다 더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불자들이 만물의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자비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한국기독교인들에게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힌두교도, 불자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가?” 하고 물으면, 일부의 사람들은 답변을 회피하거나, 주저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말할 것이다. 다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모든 종교가 동등한 종류의 구원의 길이라고 보는 종교다원주의를 환영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가 궁극적 진리를 계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과 능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교회연합운동을 경계한다. 진리의 배타적, 독립적 소유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곧 종교적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는 종교 간의 대화를 거부한다.

 

기독교 종교다원주의는 서로 다르고 다양한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 계명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가치가 같다고 말한다. 이는 신앙과 행위의 절대 규범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발상이다. 주관주의·상대주의의 결과이다. 현대판 자유주의 신학인 종교다원주의가 이스라엘 역사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 준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탁(神託, oracle) 곧 특별계시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어두워진 자연인의 계시와 동일시함은 부당하다. 성경 내용을 유태인들의 종교경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 신학 사조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유럽, 북미, 대양주의 주류 교회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종교다원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한국기독교는 실체가 없는 절대적 진리에 연연하고, 한 가지 진리에만 몰두하는 광신성(being fanatical)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에도 타종교들과 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지내고 있다. 불교, 유교, 로마가톨릭교회 등 타 종교인들과 일상생활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지내는 법을 알고 있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배우고, 같은 사무실과 노동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정치무대에서 함께 정치활동을 한다. 타종교와 대화를 희망하고, 조화, 협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확신은 기독교 진리가 바깥세계로부터 온,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만이 이 한계를 뛰어넘는다. 기독교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인간 구원 지식을 담고 있다. 참 진리는 배타적이며, 유일하며, 불변하다고 믿는다.

 

이 종교적 인식론적 전제하에서 한국기독교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고 믿는다. 그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본다(14:6; 4:12; 딤전 2:5). 그리스도 예수 밖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총은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인간이 예수를 믿어야 할 까닭이 있다. 예수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분은 십자가에 달려 대속제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이다. 참과 거짓은 배타적일 때 드러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다운 통치를 받는 데 있다. 기독인이 되는 목적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zoe) 취득이다. 한국기독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함께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윤리적, 도덕적, 정신적 측면에서만 아니라 인권침해, 폭력, 고문, 불평등 등에 맞섬, 평화와 조화를 향해 종교 간의 행동하는 대화, 종교의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 제언 기능을 중요하게 여긴다.

 

3. 행동하는 대화문화

 

종교 간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충돌보다 더 끔직한 참화를 가져온다. 비극을 피하려면 종교 간의 대화가 매우 중요하다. 그 대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국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대화를 환영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 인간관계의 위기 해소, 환경 개선, 핵 억제, 인권신장 등의 주제에 종교 간의 상호신뢰와 협력을 위한 대화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민의 비참한 빈곤, 퇴폐, 억압적인 지배, 정부의 타락, 많은 사람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천민사상, 여성차별, 노동자에 대한 착취행위 등이 인간 사회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으며 이에 항거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기독교는 타종교인과의 만남, 상호신뢰, 좋은 관계, 향상된 생활에 서로 도움을 주는 높은 가치와 풍부한 규범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대화공동체, 마음 공동체(community of heart and mind) 구축을 원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와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싶어 한다.

 

종교 간의 상호존중과 대화가 무비판적인 종교혼합주의(uncritical religious syncretism)를 낳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행동하는 대화(dialogue of action)가 필요하다. 실제적인 협력, 공동사역, 연대행동이 절실하다. 앞에서 언급한 종교 간의 협력 주제들만이 아니라 기아, 자연재해, 지진, 피해 지역에 대한 긴급원조를 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행동하는 대화문화 증진과 협력 시스템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WCC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는 분리시키고 봉사는 일치시킨다”(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는 구호를 즐겨 사용한다. 이 슬로건은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처한 기독교에 적합하지 않으나 종교 간의 대화, 협력에 관계에 더 적합하다. 행동하는 대화가 다른 신조, 신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조화와 협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귐이 신뢰를 구축하고, 신뢰가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화가 상호 협력을 만들어 낸다. 재난을 당한 이웃에 대한 도움과 원조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려면 평소에 적극적인 대화, 신뢰, 친교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 국가, 기업, 학교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가와 국가 간에 상부상조할 수 있는 대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아시아인에게는 물질적 도움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 사랑이다. 친구 되기이며, 친구와 함께 함이다. 친구가 됨은 사귐 시스템이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긴급한 도움의 필요를 알게 하는 시스템을 가진 행동하는 대화는 종교인들을 조화롭게 만든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선결 과제는 행동하는 대화문화의 증진이다. ‘행동하는 대화는 종교의 다원성(religious plurality)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종교적 자기 정체성을 버리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상호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조화롭고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적인 대화이다.

 

대화는 자기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타인의 확신을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대화는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게 자신을 개방한다. 타종교인과 공동의 선행과 구체적 실행을 위해 협력한다. 행동하는 대화 시스템 구축은 종교 간의 평화와 협력과 조화를 보장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후기: 이 글은 대한민국과 네팔 정부가 후원하는 문화교류행사(2018, 카트만두)에서 발표한 영어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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