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by dschoiword posted Jan 24, 2017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589.jpg


사진: 이규왕

성령세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회는 1992년에 동료 모 교수(히브리어 전공)가 제기한 성령론, 특히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논의를 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의 요청에 따라 아래의 성령론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승미 교수, 최덕성 교수, 변종길 교수, 유해무 교수가 연구한 것을 최덕성이 주도하여 종합, 편집했고, 이근삼, 오병세, 허순길 교수를 포함한 교수 회원 전체가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공식문서로 채택하여 1993년 고신 총회에 보고한 것이다. 상당한 진통 과정을 거쳐 나온 역사적 교회 문서이다.


아래의 텍스트는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것을 옮겨온 것이다. 당시의 컴퓨터 파일은 오늘날의 것과 달라서 호환이 어렵다. 추정컨대 어느 분이 타이핑하여 사이버공간에 올린 것 같다. 원본과 이 텍스스의 일치성이 어느 정도 정확한가를 대조, 확인하지 않은 채 게시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 글의 핵심 요약은 최덕성, <정통신학과 경건>(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6)의 제10장 "오소서 창조자 성령이여!"(pp.296-324)에 수록되어 있다.

 

원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연구 보고서(1993)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I. 서론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42회 총회(1992.9.21-25)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제출한 성령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답변서1를 받고, 이것을 본 교단의 성령론으로 정립하기 위해 본 교수회로 하여금 1년간 더 연구하여 차기 총회에 보고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본 교수회는 이 연구 보고서를 총회에 제출하는 바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우리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늘 하나님으로 대하며 그 앞에 겸손함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임하여야 한다. 성령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그 활동에 신비로운 점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제에 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대 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어떤 어려운 성경 본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가진 형제들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신학적 틀이 일치하는 범위 내에서, 어떤 어렵고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본 연구 보고서는 성령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다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단에서 논란되고 있는 몇몇 주제들에 우리의 연구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성령감림에 대한 약속, 오순절 성령 강림의 성격, 성령강림과 교회와의 관계, 제자들과 성령, 성령세례와 중생, 신약교회의 확장과 성령, 성령세례와 충만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은사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성령강림의 약속

 

성경은 성령의 오심에 대해 여러 번 예언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오순절날과 그 이후의 성령으로의 세례를 내다보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 참고: 1:8; 3:16)라고 말했다. 세례 요한의 이 예언에 관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 (1:33)라고만 언급하고, 누구에게 세례를 주시는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인 예수님 그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14장-16장은 오순절 날에 오실 성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15:26),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예수님은 오순절 날이 이르기 며칠 전에(1:5),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언들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 사도행전 1: 12-2 :4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자가 맛디아를 포함한 열두 사도를 중심으로 한 약 120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과 여러 이방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말함을 듣고 놀라며 소동하였다(2:5-13). 베드로는 오순절 날의 이 기이한 역사를 즉각 선지자 요엘의 예언(2:28~32),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7~21)의 성취임을 선언하였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육체”(2:28; 2:17)가 이제는 그의 가르침과 증거로 말미암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곧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참조, 7:39; 16:7; 1:6-11)을 듣고 믿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 세상을 위한 세상의 구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2:31 32; 3:6; 1:29; 3:16~17; 4:42~ 12.:47 요일 2:2; 4:14).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신앙을 기초한 교회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으로 탄생한 이 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를 듣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민족만을 위한 구주가 아니라, 사마리아인과 모든 이방인들의 구주가 되셨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이르러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3:16; 요일 2:2).

 

2 오순절 성령강림

 

오순절 사건은 무엇보다도 일련의 구속사적 흐름 속에 일어난 사건이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연이어 일어난 사건으로서, 특히 그리스도의 승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많이 예언된 사실로서 승천 후 열흘 만에 일어난 구속사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구속사역의 객관적 성취를 이룬 것이라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미 이룬 객관적 구속사역을 주관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의 역사는 구원적용의 역사이며, 따라서 모든 구원 서정성령의 적용하시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1) 예언의 성취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에서 요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었었는데(2:28-32),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성취되었다고 베드로가 증거하였다(행  2:17-21). 또한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자기 뒤에 능력이 많으신 자가 오시는데 그가 성령으로 세례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3:11, 1:8, 3:16, 1:33).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의 승천 후 열흘 만에 성취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 이는 또한 요한복음 7:39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여기서 영광 받음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특히 승천을 포괄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영광 받음이 있기 전에는 역사하시는 그런 의미에서의 성령이 예수님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에는 아직 계시지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16장에 약속된 보혜사성령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면 받아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4:16, 26; 15:26; 16:6, 13~14). 특히 요한복음 16:7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보혜사성령이 오게 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따라서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것아버지께로 감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직접적이고도 최종적인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2:33 참조).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과 복음서의 예언의 성취로써 구속사의 큰 흐름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2) 교회의 탄생

 

오순절 성령강림은 또한 신약시대의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 물론 교회는 구약시대에도 있었고(7:38 참조),2 복음서에도 교회라는 단어가 나타나지만(16:18,18:17), 예수님의 완성도나 구속사역에 기초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즉 신약 시대의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강림에 의해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개혁 신학자들은 그 오순절 날을 교회의 생일로 보는데 있어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헤르만 바빙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교하면서, “이전에도 성령의 온갖 활동과 은사가 있었지만 오순절 날에야 비로소 성령은 교회를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계속적으로 성화시키시고 양육하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3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창조시에는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탄생시에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찬양하였다. 교회의 생일에는 그 교회 자신이 수많은 곡조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노래하였다라고 했다.4 그리고 후크마 교수도 기독교회의 생일, 곧 성령 시대의 시작이었다고 하였다.5

 

3) 새 시대의 시작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 시대의 시작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오순절 사건은 교회 시대의 시작(始作, beginning)이요 개막(開幕, opening)이며, 새 시대에로의 진입(進入, initiation)이다.

 

신약시대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기는 어렵다. 대개는 예수님의 탄생을 주요 기점으로 보며 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며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승천을 신구약의 분수령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또한 객관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완성이며 본격적 복음전파의 시작이며 교회 시대의 개막인 오순절을 하나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또 오심을 통하여 새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성령이 부어졌을 때에 그것의 충만한 성격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 곧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에 기초한 본격적인 복음전파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성령강림과 교회

 

1) 예루살렘교회와 신약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당시에는 사마리아나 안디옥 등지에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교회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12사도를 중심한 약 120명의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로부터 파송되었거나 흩어진 자들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믿은 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에 속하는 한 사건이다. 그것은 주님의 초림, 대속적인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과 같은 사건이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의 발생은 단회적이나 그날에 임했던 성령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임하신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이루어질 복음전파를 위해 교회는 성령을 받았다. 따라서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 사건은 단순히 각 개인 신자들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 사건이다. 12사도와 약 120명의 각 개인 신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건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개개인보다 12명으로 구성된 사도들교회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12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약 120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최초의 신약적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부활의 주님,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완전한 신약교회를 탄생시켰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목적은 신약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한 것뿐인가? 누가복음 24:49위로부터의 능력을입히울 때까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즉 오순절 성령강림을 위해 이 성에 유하라고 말하고 사도행전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성경구절들은 복음증거의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해 성령이 임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복음증거의 능력주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증거의 능력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것은 방언, 신유, 축사(귀신을 쫓아 냄), 예언 등의 2의 차원 높은 체험이었는가?

 

아니다. 오순절 날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권능은 부활의 주님은 힘 있게 증거할 수 있는 확신과 힘이다. 이 권능은 전도자에게 주어지는 과시적이거나 마술적인 은사가 아니라 확산 가운데서 외칠 수 있는 힘, 복음전파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능력이다. 이 능력은 물론 은사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의 관심과 강조를 복음의 내용보다 은사들에 둘 때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자들은 12사도들과 약 120명의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개개인이면서도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의하여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최초의 신약교회였다. 성령강림 사건은 신약교회를 탄생시켰고, 새로운 시대를 도래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히 차원 높은 경험을 주기 위한 반복적 사건이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원사적인 단회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날에 임했던 성령은 계속적으로 임하고 계신다. 성령에 의한 복음전파의 능력도 계속되고 있다.

 

2) 성령 오심의 반복성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반복되는가?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은 계속적으로 임하는가? 예수님은 그의 고별사(14-16)에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보내실 오순절 성령을 여러 차례 강조하여 말씀하신 바 있다. 그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17:20) 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이 기도는 사도들을 통하여 앞으로 세워질 미래의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통하여 듣고 믿는역사를 거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복음(10:39~43)을 전했을 때, 이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렸다(10:44; 11:17).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우리가 유대 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 13)고 말했다. 그는 처음 사도가 전했던 말씀을 고린도교회가 듣고 믿었을 때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13). 사도 요한도 역시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이 성령을 이미 받아 주 안에 거하고 있음을 다시 깨우쳐 주고 있다(요일 3:24; 4:13).

 

이상의 경우를 보면,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십자가의 도”(고전 1:18-19; 1:16)를 전파하고 증거함으로써,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계속 임하셨다(10:17).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와 전파는 성령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땅 위의 모든 교회는 사도적 복음, 곧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계속적인 전파와 증거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2:20, 참고, 16:18; 21:14).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신 사건은 그것이 구속사의 사건들 중 하나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동일 차원의 사건이 또 다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구원의 복음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와 개인에게 계속하여 적용되어 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순절에 임했던 그 성령은 주님께서 오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임하실 것이다. “성령의 오심이나 성령의 주심은 말씀 전파와 함께 반복될 것이다.

 

4. 제자들과 성령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편에서 보면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그들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오순절의 성령은 과거의 제자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인격, 신앙, 지식, 태도, 활동, 사역 등에 있어서 능력 있는 사도들로 일신시켰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획기적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오순절 성령 강림의 특징 및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과 후의 제자들을 서로 비교하여,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 제자들의 신앙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과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미리 말씀했을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다 이루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그 사건들을 바로 믿고 이해했던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중요한 사건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 자체와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12제자 중 베드로는 한 때, 주님에 대한 훌륭한 고백을 한 후 (16:16), “내 아버지께서 네게 알게 해 주었다” “네가 복이 있도다고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곧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16:23)는 충격적인 경고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사실 베드로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몸을 바치려고 열심히 따랐던 제자가 또 있었던가? 베드로의 어떤 내용, 어떤 태도가 사단적이었던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그의 구속사적 계획을 제자들에게 밝히셨다. 그가 곧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했을 때, 베드로가 이를 듣고 적극적으로 가로막았던 것이다(16:22). 베드로의 행위는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실 일련의 구속 사역들을 방해하는 일이 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스승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인 동정과 열정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그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베드로의 무지와 오해는 매우 컸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또한 빈 무덤을 직접 확인하며, 부활의 주님을 보고 손으로 만지며 음성을 듣고도, 그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부활의 주님에 대한 태도는 매우 회의적이었고, 아직은 증거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사복음서 전체가 모두 이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28:16-17; 16:11-14; 24:33-43; 20:9). 심지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에 직접 들어가 보고, 돌이 과연 소문대로 옮겨졌음과 빈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기는 했으나(20:8), 아직도 주님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했다(20:9).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 본 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라는 바른 고백을 하고도 그 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던 것이다(21:1-3).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강림 후의 제자들은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그 성령의 충만한 지배를 받고서 사도로서의 공적인 증거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모두10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믿고 확신했으며 구약 성경을 즉시 인용하면서 무리를 향해 담대히 증거하고(2:33,36) 또한 가르칠 수(2:42)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 보다 큰 것도 할 것”(14:12)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16:7)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오순절에 강림 하신 성령님을 통하여 장차 사도들이 주님의 하신 모든 말씀대로 어떻게 능력 있게 활동해 나갈 것인가를 미리 알려 주신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 이후의 사도들의 놀라운 복음 활동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14:26)의 능력을 힘입었을 때 사도들은 믿음과 확신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증거자가 될 수 있었다.

 

2) 이방인에 대한 태도

 

역사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인의 사마리아인과 그 거주지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매우 경멸적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4:9). 오순절 이전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 대한 제자들의 분명한 그리고 직접적인 태도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는,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말씀하셨다(10:5). 그러나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복음 확장의 단계적 차원으로(예루살렘온 유대사마리아땅 끝: 1:8) 이해되어야 한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들에도 들어가지 말고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날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눅 9:51-56), 사마리아 지역 안에서 여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바로 메시야임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4:1~42). “저를 믿는 자마다영생을 얻게 된다는 이 복음(3:16),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8)는 말씀에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고 확장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전, 제자들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과는 달리 매우 소극적이었다(4:27). 때로는 저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9:54). 비록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지나감을 거절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9:54)라고 예수님께서 간청한 것은 놀랄만한 태도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간구를 거절하셨다(9:55).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의 태도와 활동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났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는 정식으로 두 사도를 파송했는데, 곧 베드로 와 요한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에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이다. 한 때, “불을 명하여 멸하기를 소원했던 사도 요한이 이제는 그 곳에 들어가 그 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하게 된 것이다(8:14-16). 오순절의 성령은, 베드로의 발걸음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으로 옮기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이다(10:17-43). 그 후, 주께서는 사도 바울을 불러 성령으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그의 이름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성령의 능력은 사도들로 하여금 종족과 지역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비로소 모든 족속”(28:19)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일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3) 사역의 초점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 이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 과 부활의 사실과 그 구속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마가복음 16:14,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그의 제자들의 무지와 완악한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저 회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의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 일러라.”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증거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의 증거자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불가능 한 것을 주께서는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가능케 하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요, 뜻이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완전한 지배와 인도 아래서 베드로는 여러 차례 담대히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설교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건이 중심이 되어 있음을 유의할 수 있다(2:14-16; 3:11-26; 4:8-12; 10:34-43). 그는 구두 형태”(oral form)로 뿐만 아니라, “기록형태”(written form)로서도,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의 설교의 주제였다(벧전 1:3-4; 2:21-25; 3:18-22. 참고, 벧후 3:2). 베드로는 오순절 이전에는, 한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죽음과 부 활을 크게 오해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책망받기도 했으나, 후에 그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이를 분명히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이렇게 고백하여 영원히 기록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벧전 3:18).

 

사도 요한(요일 1:7)과 바울(고전 15:1-58) 역시 동일한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일관되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일관되게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의 초점으로 하여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전과 후의 제자들에 대한 차이점을 비교할 때, 물론 이적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역사를 주제로 다룰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적을 행함에 있어서는 오순절 전후의 근 본적인 차이를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오순절 전에도 주 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와 모든 병과 믿t한 것을 고치는놀라운 권능을 부여받았다(3:15; 6: 7; 10; 9:1-2). 오순절 직후에도 역시 사도들은 놀라운 이적들을 친히 행했던 것이다(3:10; 9:32-35, 36-42 ). 그러나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초자연적 이적 행위에 대한 언급 초대 교회 복음전파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며, 그 대신 여러 가지 시험을 인내함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희생이 많이 여러 가지 시험을 인내함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희생이 많이 강조되어 있다(벧전 1:6-7; 4:12-19).

 

예수님은 그의 사역 초기에 12제자를 직접 부르셨고(10:12; 3:13- 15; 6:13-16),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을(가룟유다를 제외한) 영원한 사도로 임명하여(20:21; 1:2), 특별한 날인 오순절에 공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후, 십자가와 부 활, 승천에 대한 현장 목격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 사역을 실제로 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사도취임식혹은 신약교회 창립식과 같은 것이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사건과 그 의미를 믿고 확신하는 데서 나타났고, 이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어떠한 고난과 핍박 앞에서도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인종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이를 전파하고 확장하는데서 특정 지워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교회가 복 음 활동을 할 때.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고 필요로 하실 때, 놀라운 기이한 역사도 기도와 말씀 순종을 통해(14:13; 15:16; 16:23; 딤후 4:18) 나타나게 된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친히 영광을 받으신다(16:14).

 

5. 성령세례와 중생

 

1) 성령세례의 의미

 

신약 성경에 명사로 된 성령세례란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동사로 된 성령으로 세례주다”(3:11, 1:8, 3:16, 1:33) 또는 성령으로 세례받다”(1:8, 11:16, 고전 12:13)라는 표현이 일곱 번 나타난다. 이 중에서 고린도전서 12:13에서만 과거의 사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미래의 약속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이 후자의 경우에 성령으로 세례주다라는 말이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대비되고 있고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례 요한이 자기 후에 오실 능력이 많으신 이에 대하여 나는 물로 세례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주실 것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성령과 관련하여 사용된 세례라는 말은 원래 물세례의 개념에서 파생되어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례주다의 의미를 어의적으로 살펴볼 때 이는 원래 담그다, 잠그다”(to dip, to plunge )를 뜻하는 것으로서, “물에 빠져 죽다”; “(배가) 침몰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몰려들었다고 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한 잠에 잠겼다” “술에 취하였다할 때에도 사용되었고, “빛을 잔뜩 젊어졌다등의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례주다의 개념은 그 단어 안에 풍성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성령으로 세례주다란 표현은 성령을 주다”(11;13, 3:24)라는 사실에 대한 비유적 아는 단순히 사실 그 자체를 기술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그것에다 풍성함"의 의미가 첨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을 부어주다라는 표현도 풍성함의 의미가 들어있는 비유적 표현이다(2:18, 2:33, 3:6, 참조 롬 5:5).

 

그 외에도 성령을 주다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성령을 공급하다란 단어도 사용되고 있는데(3:5, 참조, 1:19), 이 단어도 넉넉히, 풍성히 주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벧후 1:11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되 신약 시대에는 풍성히 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똑같은 사실이 우리가 성령을 받는 측면에서 관찰될 때에는 성령으로 세례받다”(1:5, 11:16, 고전 12;13) 또는 성령을 받다”(7:39, 8:15,17,19)로 표현되고 있다. 후자가 단순히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면 전자는 역시 풍성함의 개념이 포함된 말이다. 이와 같이 풍성함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표현으로는 또 성령을 마시다”(고전 12:13)가 있다. 그 외에도 성령의 오심 또는 임하심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으로 “(성령이) 임하시다”(1:8) 또는 오시다”(19:6)가 있으며, 그 현상을 생생하게, 현장감 있게 표현한 것으로는 “(성령이) 떨어지다”(8:16, 10:44, 11:15)가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성령 주심또는 성령 받음에는 여러 다양한 표현이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기록자의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그때그때 각각 다른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성령 주심(또는 받음)”에 있어서 풍성함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 들이 여럿 있는데, 이는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께서(구약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7:38-39 참조). 이런 여러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가 성령세례이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사역에 대비되는 능력이 많으신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차용된 표현인데, 또한 풍성함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어서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성령 주심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한 용어로 인식되어 신약에서 많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2) 중생의 의미

 

중생”(重生)이란 명사 표현은 신약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다(19:28, 3:5).12 그리고 동사로 된 표현으로서 중생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다시 나다”(3:3), “물과 성령으로 나다”(3:5), “하나님께로서 나다”(1:13), “거듭나게 하다”(벧전1:3), “거듭나다”(벧전 1:23) 등이 있다.13 디도서 3:5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여, 중생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고, 이는 곧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6절에 서는 “[곧 이]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것을 말하고 있고, 7절에서 그 목적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어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야고보서 1:18에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하며, 베드로전서 1:23에서 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이로 보건대 중생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육에 속했던 자연적 인간이 변화를 받아 근본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하며, 마치 아기가 태어나듯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하여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주권적 은혜의 사역이다. 따라서 중생은 칭의 생명에 이르는 회개, 예수를 구조로 영접하는 믿음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사건이다. , 중생이란 성도의 신앙생활의 시초에 놓인 시초적(始初的), 진입적(進入的) 사건이다.

 

3) 둘 사이의 일반적 관계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도 원칙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 받음은 율법을 지켜서 획득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곧 믿음을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의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14), 또한 고린도전서 2:12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한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곧 성령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 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할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 없다. 타락한 죄인의 본성에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그 자체 안에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도움 받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영뿐이시다(고전 2:11).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 절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은혜의 객관적 수여라면 성령이 죄인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완악한 마음을 감동, 감화하여 그 십자가를 믿게 하시는 역사는 은혜의 주관적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이 후자의 은혜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죄인이 성령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은혜를 효력 있게 하는 은혜또는 은혜를 은혜답게 하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을 받음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는 말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발상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일으키는 사건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요,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초에 있는 사건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신앙생활의 공통분모요 기본전제이며 이것이 없이는 더 이상의 대화와 설득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2:3에서는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고, 이어 13절에서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8:15에서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하였으며, 로마서 8:9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따라서 성령세례란 죄인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로 중생케 하시고 예수를 주로 믿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신앙생활의 시초에 놓인 사건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8:9, 고전 3:16), 우리와 더불어 사시며”(5:25),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14:16). 이런 점에서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것이라고 한다(고전 3:16, 6:19). 하나님의 아들을 시인하는 자(곧 모든 성도)에게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거한다(요일 2: 20). 그러나 경건치 않은 자, 기롱(識弄)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성령은 없는 자들이다(19).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늘 성령을 자기 몸에 가지고(모시고) 있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다(8:9).

 

그러므로 성령세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등은 칭의, 회심과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신앙생활을 가능케 하고 시작케 하는 시초적, 진입적 사건으로서 중생과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사실 성령세례와 중생은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은 것으로서 사람이 성령을 받음으로 중생하게 되고 중생하기 위해서는 성령 받음이 필요하다. 이 둘은 같은 시점의 동일 사건을 가리키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란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음으로 육적인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이 마치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하여 붙은 말이요, 성령세례란 사람이 중생할 때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가능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중생이란 변화에 초점을 둔 말이요, 성령세례란 은혜에 초점을 둔 말이다.

 

물론 중생과 성령세례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그것은 중생이란 말이 오순절 전에도 사용되고 있으며(1:13, 3:3,5, 참조, 18:10),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3:3,5)에 비추어 보아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만, 성령세례란 말은 오순절 전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미래의 약속의 형태로 나타나고 오순절 이후에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단어 의 사용 범위의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오순절을 맞이한(넓은 의미) 제자들에겐 이 둘의 불일치와 아울러 좀더 설명을 요하는데, 이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4)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기 이전에 이미 중생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며(16:16),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9:28),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10:20).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하나님을 알았고 또 믿었다고 했으며(14: 1,7), 또한 그들은 이미 목욕한 고로 발만 씻으면 된다고 했다(13:10). 따라서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중생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복음서에서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모두 미래의 약속으로 되어 있다. 사도행전 1:5에서도 여전히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러나 몇 날이 못 되어 이루어질 약속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오순절 날에 성령이 약 백 이십 성도에게 강림하였는데(2:1-3), 여기서 세례란 말은 사용되지 않았어도 사도행전 1:5과 관련하여 그들이 받은 것은 성령세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결과로 곧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2:4). 따라서 이들에겐 성령세례와 중생이 일치하지 않으며, 먼저 중생한 후에 나중에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이 된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는 단지 예수님의 열 한 제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약 백 이십 명의 제자들에게 모두 해당되며, 더 나아가서는 이 외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오순절 이후에 성령을 받아 기독교회에 가입하였을 모든 사람에게 다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역사하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천지 창조 시에도 함께 역사하셨고(1:2), 구약시대에도 여러 모양, 여러 방법으로 역사하셨으며(27:18, 3:10, 6:34, 11:29, 14:6,19, 15:14, 삼상 10:10, 16:13, 19:20, 51: 10-11, 4:8-9:18, 4:1,14, 10:21, 3:34. 참조, 10:38). 그리고 세례 요한과 여러 다른 사람들과 제제들에게도(1:15, 41, 67, 2:27, 10:20, 14:17)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들에게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의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 것인가? 이들의 경우엔 이것이 두 번째 체험이었다고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이것이 꼭 두 번째체 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세 번째혹은 네 번째체험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스무 번째혹은 일흔 번째의 체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많은 전기(轉機)”기복”(起伏)이 있으며 밀물썰물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수하느냐에 따라 몇 번째냐 하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 받은 것은 중생 후체험이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오순절 날에 성령 받은 것이 중생 후 체험이었다는 것은 특별한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외적인것이었다기 보다도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시대전이적(時代轉移的) 사건

 

오순절 전의 제자들은 아직 온전한신약 시대에 속해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 이 전에 살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믿고 따르기는 하였지만 오순절 전에는 아직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죽음-부활-승천을 토대로 해서 주어질 보혜사 성령은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의 시 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것이다.

 

이처럼 약속된 오순절 성령강림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순절 전의 제자들의 상황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여러 역사와 활동에 참여 하였으면서도 마지막 교회 시대에 부어질 그 성령은 아직 받지 못하고 기다리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약속된 메시야를 전혀 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친히 듣고 따라다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던 것들을 그들은 보고 들음으로 복이 있었으며(13:16-17),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24:49; 1:58).


따라서 우리는 구약 시애에서 신약 시대에로의 점진적 전이”(漸進的 轉移, gradual transition)를 보게 되며, 그 과정에서 서로 겹치는 오버랩”(overlap) 현상을 보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로를 당하고 있으며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는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지만(11:12, 16:16),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해야만 하며 아버지의 약속 하신 성령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사건은 그들의 생에 있어서 소위 두 번째의 체험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신구약 과도기에서 온전한 신약 시대,” 교회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 전이적(時代轉移的)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 전이적 현상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시기에만 일어난다. 곧 두 시대를 겹쳐 산 사람에게 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며, 새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2) 새 출발의 전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신약 교회의 회원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순절 전의 제자 들은 앞으로 탄생할 시약 교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3년 동안 예수님에 의해 훈련받고 준비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의 사역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대체로 가르침복음전파, 그리고 병고침이라고 할 수 있다(4;23, 9:35). 하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이 3년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영속적인 단체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곧 교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제일 큰 목적은 교회 창설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시는 일이었다. 이 일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했는데,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객관적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완성된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1:13에 보면 제자들의 명단이 다시 나오는데 이 것은 마태복음 10:2(3:16-19, 눅 ?:14-16)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3년간의 훈련 과정을 거쳐 통과한 사람들의 명단이며(가룟 유다의 이름이 빠져 있음에 유의하라), 곧 탄생하게 될 신약 교회 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사람들의 명단이다(베드로-요한-야고보의 순서에 유의하고 14절에 예수님의 아우들도 언급되어 있음을 주목하라).

 

그리하여 드디어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창설됨과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교회에 회원으로 정식 가입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 창설을 위한 일종의 준비 위원들로서 훈련받고 있었던 것이며 아직 교회의 정식 회원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전에 이미 중생했었고 또 중생했어야만 했던 것은 그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창설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16:18, 2:20, 21:14). 따라서 오순절 전에 존재했던 제자들의 특별한 지위는 교회 공동체의 창설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과도기적현상이었으며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당연한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날의 성령 받은 사건을 새 출발로 보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이 직접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11:15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사건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여기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을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강림과 비교하고 있으며 그것을 처음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왜 처음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베드로가 오순절 날을 새로운 시작으로, “새로운 출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의 시작인가? 신약 시대의 교회의 시작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출발이요 본격적인 복음전파의 시초이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그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너희에게도 주셨으니"(11:17). 여기서 베드로는 왜 오순절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전에는 그리스도를 아예 믿지 않았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자 들이 오순절 전에 이미 거듭났다면 그들은 그 때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순절 날에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 출발을 의미한다. 그전 의 것은 준비 기간으로 여기고 오순절 날부터 신약 교회의 출발로, 정식으로 신약 교회에 가입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날로, 그리고 본격적인 복음전파의 시작의 날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총회에서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회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15:8)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에게와 같이라는 것은 오순절 날 성령 받은 사건을 가리킨다. 즉 이방인이 성령 받은 사건을 설명할 때 베드로는 그들이 오순절 날에성령 받은 사건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고 있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것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 받은 것을 중요한 전기로, 새 출발의 전기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능력 있는 복음전파의 시작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 결과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복음의 능력 있는 증인이 되었다. , 제자들의 준비와 새 출발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 곧 그들을 복음의 능력 있는 증인으로 삼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1:8에 잘 나타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1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주 제이며 사도행전의 기록들은 실제로 이 예언이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의 세 례를 받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제자들은 이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확장되어 갔다. 이러한 복음전파와 교회 확장을 위한 성령의 사역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무리가 사도들을 중심한 약 120명의 무리였던 것이다.

 

6. 신약교회의 확장과 성령

 

1) 사마리아 성령강림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고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8:4-13). 그런데도 그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다(8:4-17). 이들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기 전에 이미 중생 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하는 것은 사실, 본문의 초점이 아니며 누가의 주된 관심사도 아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볼 때 본문의 사건은 오순절 날에 탄생한 신약교회가 확장, 발전되어가는 과정 의 사건이었다. 곧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신약교회에 가입“(加入) 또는 편입“(編入)하는 사건이 본문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이 이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 이전에 중생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선 중생 후 성령세례를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부득불 다루지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사도들이 도착하기 이전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은 마술쟁이 시몬에게서 나타나는 것처럼 다분히 이적적 신앙이었으며, 따라서 올바른 신앙에 이르지 못하였고 중생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와서 기도할 때 중생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본다.


다른 하나 는 성령받기 이전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인정 하는 것으로, 마술쟁이 시몬과 같은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의 신앙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보고 그들이 중생하였음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그리고서 그들이 나중에 성령을 받은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성령이 아니라 기독교회에 가입할 때 주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보는 견해이다. 우리는 이 두 견해에 대해서는 같은 신앙과 신학 안에서의 주석상의 차이로 보고 서로 용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첫 번째 견해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두 번째 견해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자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기 이전에 이미 중생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들은 많이 있다.14 빌립의 전도를 받고 믿고 세례 받은 사람들 중에는 마술장이 시몬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위 주장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술장이 시몬과 같은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 단 몇이라도 참 믿음에 이르렀다면 여전히 중생 후에 성령을 받는 문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가 기술하고 있는 이 본문은 시몬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된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사마리아에 크게 일어났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서 이것을 쉽사리 선 중생 후 성령세례로 도식화하는 것은 잘못이 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된 의도는 사도행전 1:8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마리아도 이제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이제 사마리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사마리아의 신자들은 왜 중생 후에 성령을 받았을까? 그것은 사마리아의 역사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에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연고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방시 되었고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4:9 참조). 이러한 오랜 반목 때문에 자칫하면 사마리아의 교회가 따로 독자적으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성령주심을 연기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 전에는 그들에게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다”(16)는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요한복음 7:39과 같은 의미에서 오순절 날에 강림하셔서 대 교회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런 의미의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의 120 성도들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성령을 주심으로(17), 그들도 이제 오순절 날에 탄생하여 발전되어가는 초대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편입하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받기 이전의 사마리아 신자들의 상태와 지위는 어떠했을까? 그들이 성령의 역사와 전혀 무관했다고 볼 수 없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도 성령의 역사요 큰 기쁨이 있는 것도 성령 의 열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성령의 역 샤에 참여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치 오순절 전의 제자들이 처해 있었던 지위와 비슷하며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지위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는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오순절 날에 이미 임하여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적용 면에서는 사도들의 기도 이전에는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그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확장, 발전해 나가고 있는 초대교회에 가입, 편입됨으로써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초대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 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2)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사건도 위와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고넬료는 이방인 백부장으로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2, 22).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할 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바 되었다(2-4, 31). 따라서 그가 기도하고 섬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여호와하나님이었지 다른 신이 아니었음 이런 점에서 그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심기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고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

 

베드로가 보냄을 받아서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34~43),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44).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따지자면 중생 후에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에서 선 중생 후 성령세례를 도식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도 개인적 적용 면에서는 아직도 구약시대의 성도들 의 지위와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제 신약시대의 교회에 가입하게 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은 성령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받은 것과 같은 성령이었다(11:15-17).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동일한 성령을 주어서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15 :8-9, 고전 12:13, 4:4 참조). 그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에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게 된 것(10:45),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기독교회에 가입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실을 참석한 사람들에게 분명 히 알리고자 하는 의미와, 또한 그들이 받은 성령이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과 동일함을 증거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것은(48) 그들이 이제 신약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된 것을 공표하는 외적 의식인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이제 이방인들까지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계속해 꾀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에베소의 제자들

 

사도행전 19:1~7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띠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 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2). 물론 이 말은 일반적 의미에서 성령의 존재나 역사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로서 그가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그런 일반적 의미에서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라,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강림하셨던 것과 같은 성령곧 예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 그런 의미의 성경에 대해 전혀 듣지도 못했다는 뜻이다(7:39 참조).

 

이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3). 그들은 아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성령도 받지 못하였었다. 이틀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 유대 지역을 떠났거나 또는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요한의 제 자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던 관계로 오랫동안 오순절 성령강림 소식을 듣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으며, 아직도 성령과 불로 세례주시는 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설명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세례를 받음으로 그들은 오순절 날에 탄생하여 발전하고 있는 초대 기독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5).16 이어서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는데(6), 이것은 그들에게 외적 입교의 식에 상응하는 내적 내용이 주어졌음을 뜻한다.17 그리고 그때에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부수적 현상이 따른 것은 이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곧 이 사건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기독교회가 접수”(接受), “영입“(迎入)하 는 사건이요 그들이 요한의 제자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적”(移籍)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구약과도기에서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 날 수 있는 특수한 사건이다. 곧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만 일어날 수 있는 과도기적 사건이다. 객관적으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이미 일어나고 신약교회 안에서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구시대의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 진 게 아니었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신지 약 이십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세례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으며, 약속된 그리스도와 성령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바울의 설명을 듣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신약시대의 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편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순절 날 탄생한 신약교회는 요한의 제자들도 흡수, 영입하여 계속적으로 확장, 발전되어갔던 것이다.

 

4) 그 이후의 신자들과 성령

 

이러한 특수한 몇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성령받음과 중생은 일 치하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폼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으며(고전 12:13),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고전 12:3). 또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고 선언하고 있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8:15), 갈라디아 지역의 성도들을 향 하여는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하여 성령받음이 이신청의와 같은 차원의 은혜에 속 하는 것임과 신앙생활의 시초에 일어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3:2-5).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는 그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도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음을 말하며, 이 성령은 곧 우리의 기업의 보증임을 말하고 있다(1:13,14). , “성령받음은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 받은바 성령이 곧 우리의 구원을 인치는것이며, “보증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후 1:21,22 참조).

 

이처럼 성령받음은 오순절 이후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며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이후에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 불리고 있다(고전 3:16, 6:19). 이런 점에서 성령세례와 중생은 서로 일치하는 시점의 사건이며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오순절 날 당일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3천명의 무리에게서 이미 성령 세례와 중생의 일치를 볼 수 있으며, 이어서 계속적으로 회심하여 초대교회에 가입하는 수많은 무리들에게서 우리는 이 둘 사이 의 일치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수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예 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과도기적 현상을 우리가 다시 체험할 수 없으며, 신약교회의 초기에 일어날 수 있는 몇몇 특수한 현상 틀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7.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에 의해 강력하게 지배되고 주관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는 금지 다음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직역하면 성령으로 [계속] 충만해져라”)라 고 명령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이란 믿는 자가 또 무엇을 받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성령을 받은 자가 그 내주하시는 성령의 지배를 더욱 강력하게 받으며 그 주권 하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생기는 일상적 현상으로는 주께 찬송함과 범사에 감사함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함이다(5:19-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일어난다(3:16-17). 따라서 성령 충만말씀 충만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세례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단회적, 시초적 현상임에 반해 성령충만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속적 또는 반복적 현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아울러 성령으로 세례받을 것이다”(약속) 또는 성령으로 세례받았다”(사실)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만 성령으로 세례받으라”(명령)라는 표현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위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반복적이거나 지속적인 경우엔 성령의 충만이란 용어가 단회적이고 시초적인 경우엔 성령의 세례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세례받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2:4)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으며, 필요한 경우에 다시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6:3,5, 7:55, 11:24) 또는 지속적인 동작(13:52)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는 기독교 교회에의 입교 의식인 물세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 받음,” 성령세례가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내용이라면 물세례는 그 사실의 외적 표현이요 공적 고백이다. , 마음으로 믿는 바를 입으로 시인하며 공적으로 고백하여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며 인정받는 것이다. 따라서 물세례의 시초성, 진입성의 개념과 보조를 맞추어 신앙생활의 시초적 사건에는 세례란 말이, 그 이후의 지속적, 반복적 사건에는 충만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능력 있는 복음전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성령 충만이며,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반복적인 성령 충만이 가능한 근거는 그 이전의 단회적인 성령세례와 그에 따른 지속적인 성령의 내주에 있다.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또 강력 히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날도 믿는 자들의 마음 깊은 곳 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시며(7:38),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여러 은혜와 은사를 주시며 우리에게 복음 전파를 위 한 능력을 주신다.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여 거듭나게 하시며 중생과 동시에 그 안에 들어가 내주하시며 그 사람을 성화시키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이 내재하신다면 왜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오늘날은 강력히 역사하지 않는다거나 은혜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며 죄와 타협하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자만하고 나태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11:9-13). 따라서 우리는 말씀 중심의 참된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단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온 세계에서 크게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단 의 출발이었고 기본정신이며 오늘날도 우리 모두가 사모하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바이다.

 

8. 성령의 은사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는 용어는, 벧전 4:10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서신에만 16회 사용되고 있다.18 주 하나님께서는 은사 문제를 계시하실 때,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악자였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1:1~7; 1:1; 딤전 1:13~15)을 통해 이를 설명하셨다. “은사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을 뜻한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겸손히 봉사하도록 하신데 있다. 그러므로 받는 사람의 편에서 정욕에 따라 마음대로 얻어 내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전적으로 주시는 편의 주권적 기뻐하심에 따라 나타나게 된다. 또한 성령 의 인도에 따른 전체의 건전한 생활과 관련시켜 각 은사가 다루어져야 되며, 전체의 생활과 분리시켜 별개의 기능적 혹은 기교적, 마술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다루게 될 때, 이미 그것은 기독교적 은사라고 할 수 없게 된다. 그와 같은 것은, 오히려 교회를 해치는 위험한 일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은혜가 성령에 의하여 성도들에게 다양하고 구체적이며 특별하게 나타나는 것이 은사이다.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타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다(2:11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 은혜의 가장 큰 선물이시며, 성령은 이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게 하신다 (고전 12:3).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은혜의 선물이며 그 분을 믿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바울은 은혜를 때때로 은사로도 표현하기도 한다(5:15 이하; 6:23). 로마서 12, 고린도전서 12장 등에서는 교회의 내외적 삶에서 나타나는 영적 섬김의 기능들을 특별히 은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은사들은 성도 개개인들에게 주어졌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은사이다. 각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은사까지도 선물로 받는다(벧전 4:10).

 

은사를 언급함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신자 됨의 시초인 믿음을 먼저 말하고 나서 뒤이어 은사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2:3; 고전 12:3). 즉 그는 믿음을 언급하고 난 뒤에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회원들이 각각 지체됨을 지적하면서 은사들을 나열한다(12:5; 고전 7:7; 12:11). 이것은 그 은사 들이 수행되는 장소가 일차적으로 교회임을 뜻한다. 은사들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림에 있다(2:47; 고전 14: 25). 은사들은 교회와 회중들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고전 12: 7; 14:4,5,17; 4:12-16). 은사들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나아가서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고전 14:22 이하).

 

바울이 언급하는 은사들을 보면,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품(12:6-8), 믿음, 신유, 능력행함,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직, 서로 도움(고전 12:9, 10, 28, 4:10) 등이다. 이 목록에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평범한 것들도 있고, 방언이나 신유처럼 이목을 집중시키는 은사들도 있다.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 즉 과시적인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은사가 없다거나 은사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교회가 존속하는 한, 교회는 은사공동체로 존속할 것이다.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는 없어질 수 없다. 성령께서 교회를 종말론적 좌소로 정하신 이후,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 성령 때문에 각양 은사들로 충만할 것이며, 그 은사들은 원칙적으로 존속될 것이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모든 은사들이 사도 시대처럼 계속된다 고 단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특히 예언의 은사에 관한 한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완성된 성경을 가진 오늘날의 신자들이 교회의 터인 사도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고대교회의 몬타누스파들, 종교개혁기의 계시주의적 재세례파, 19세기말의 미국의 종말론자들, 그리고 오늘날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다미선교회가 한 결같이 예언과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하고 있다. “예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들이 오늘도 계속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제2, 3의 성경을 요청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계시적 예언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서 신비로운 영적 지각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도들로 하여금 김은 영적세계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고 계심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교하는 형태로는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행하셨던 이적들과 교회의 터인 사도들이 행했던 은사들을 모범적으로나 혹은 문자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느 은사라도 사도들처럼 직권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3:5~6). 우리는 중보자도 교회의 터도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권능이나 사도들에게 주신 은사들과 구분된다. 정경(Canon)19을 기록할 만한 권위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일한 차원의 성질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활하신 예는 일에 필요한 성령의 선물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령께서 오늘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은사들을 주실 뿐 아니라 활용하고 계신다. 특히 복음이 선교지에서 처음으로 전파 되거나 교회가 위기나 난국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성령께서는 이적들과 여러 은사들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며 지켜주신다.

 

어떤 은사들이 실제로 교회와 목회 현장에서 나타난다고 하여, “모든 은사들은 지금도 성령의 주권에 따라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은사에 관한 성경의 다양한 교훈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이기심과 영적 교만에 대한 경계를 경히 여기며, 성경보다는 경험을 중시하 는 과오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교회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라고 주장되는 것 중에는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도리어 파괴하는 사단의 역사도 많기 때문이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일부 은사들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계속적을 나타난다고 단언하거나 주어진다고 확언할 수 없다. 은사들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인위적으로 주어지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들은 성령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므로 허용적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주어질 수 있다.

 

은사들은 교회의 표지가 아니다. 교회의 성쇠는 은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달려 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교회가 간구할 때 성령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여러 은사들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은사들의 부재가 교회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현대 교회가 무능력하고 침체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열광적이거나 과시적인 은사들의 부재보다는 참된 복음 설교의 부재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철저한 순종의 부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교회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고 능력 있게 설교되며, 우리가 그대로 살고 있는가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은사를 부각시키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성령 충만한 삶, 성화를 위한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2:31; 14:1). 고린도전서 12:3에서는 보다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한다. 바울이 이미 12장에서 여러 은사들을 언급한 것을 고려하면, 이 권면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큰 은사들은 사랑(13)과 예언의 은사(14)이다. 우리가 기도로 어떤 은사를 간구할 수 있으나(고전 14:13), 모든 은사들 이전에 위 두 은사들을 먼저 사모함이 마땅하다. 교회를 세우는 데는 특별히 이 은사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 14:6 참조).

 

무분별한 성령운동과 은사운동들이 보여주듯이, 교회의 질서를 깨거나 특정은사나 또는 그것에 입각한 은사 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의 교훈에 위배된다(고전 14:40). 이러한 운동은 특별한 몇 가지 은사만을 주장함으로써 은사의 풍성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주권적 자유를 제한하며 교회를 단조롭게 만들뿐 아니라 특정 은사를 얻기 위한 인위적 방법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모든 은사들을 강조함으로써 경험(체험)을 극도로 중시하는 오순절주의적 도식을 공식화하려는 것은 교회사에서 나타났던 여러 광신적 성령운동을 견제 없이 도입하자는 말이다. 이러한 무분별한 사도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도리어 해칠 수 있다.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