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교수와 한국교회의 칭의론 논쟁

by reformanda posted Apr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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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와 한국교회의 칭의론 논쟁

고경태 박사 (총신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교회당 정문에 게시한 95개 반박문(1517)은 교회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라고 했다. 칼빈은 이를 기독교 교리의 핵심 경첩(the main hinge on which religion)이라고 했다.

 

칼빈은 제네바를 다시 구교 곧 로마가톨릭교회로 전환시키려는 라스의 주교 추기경 사돌레토(Jacop Sadoleto)의 편지에 대한 반박문(1539)을 써서 신앙의 토대가 전통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밝혔다. 이 편지는 구교의 획책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루터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로마 교황주의 그룹은 트렌트회의(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를 개최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것이지만, 트렌트회의는 오직 은혜에 토대룰 둔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을 반대하는 교리 곧 믿음과 행위의 결합이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는 칭의 교리를 결정하고 선포했다.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운동의 일환인 트렌트회의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렌트와 볼로냐에서 여러 해 동안 회집되었다. 전쟁과 정치적 상황 때문에 3회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프로테스탄트운동에 대한 대응과 로마가톨릭교회의 효과적인 쇄신 방법을 논의했다. 로마가톨릭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적 주지들과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했다.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대립되는 성경, 정경, 성전(聖傳, 전통), 원죄, 칭의, 구원, 성찬, 미사, 성자숭배 등을 다루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유효성을 천명했다. 신학교 제도를 확립하여 각 교구가 사제 양성과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이 회의가 결정 선포한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칭의 교리이다.

 

구교(천주교, 로마가톨릭교회)는 조선 시대에 청나라를 거쳐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수많은 신자들이 생겨나고, 조선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로 많은 학자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프랑스는 이것을 빌미로 군대를 파송해서 조선의 강화도를 침략하고 점령했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처음으로 들어온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알렌이다. 미국인이며 의사이다. 1884년에 제중원 사역을 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제물포에 입국하여 선교 사역을 전개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에 장로회신학교(1901개교)를 세워 운영했고, 첫 졸업자(1907)를 목사로 안수했다. 장립을 받은 자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설립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12)를 설립했다. 이렇게 출범한 한국장로교회는 국권을 잃은 대한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구원론, 칭의론을 가르쳤다.

 

그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인 대한민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 있으며, 대한민국 기독교는 국가적으로 상당히 높은 위상을 갖고 있다. 타국에 많은 선교사들을 보낸다.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이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가 구원의 복음이 배제된 선교 활동에도 열성을 다한다. 부산에서 개최한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10차 총회(2013)는 프로테스탄트 칭의론 중심의 개종전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이라고 본다.

 

최덕성 박사(현 브니엘신학교 총장, 전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는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신학 활동을 해 온 신학자이다. WCC 부산 총회(2013) 개최 반대 운동에 학문적 근거를 제공했다. 시의성 있는 저작물인 <신학충돌>, <신학충돌 II>, <WCC 바로알라>, <WCC 무엇이 문제인가?>를 출간했다. 최덕성은 WCC 부산총회가 선포한 선교와 전도선언문: 함께 생명을 향하여를 분석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WCC의 선교개념에는 역사적인 기독교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리와 영원한 생명(zoe)이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특정 종교나 지역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진술을 함으로써 다른 종교들도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프로테스탄트 구원론 또는 칭의론 중심의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WCC에 가담하는 진보계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복음이 결여된 기독교 운동이며, 사실상 교황주의로 귀정’(歸正)하는 교회운동이라고 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지적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1031,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로마교회와 루터파교회가 의화(義化) 교리에 대해서 합의했다. 2006년 서울 금란교회에서 로마 교회와 감리교 간 의화 교리 공동선언을 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칭의’(稱義)의화라고 일컫는다.

 

부산에서 WCC 10차 총회가 열리고 서울 금란교회(감리교)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감리교회 간의 칭의론-의화론 공동선언이 만들어진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가톨릭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행사들이며, 1517년 종교개혁운동의 토대인 이신칭의 교리를 사실상 폐기시키는 행위들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다수 대형 개신교회들은 WCC 일치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WCC 부산총회 이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은 구교(천주교, 로마가톨릭교회)와 함께 신앙과직제위원회를 창립(2014.5.22.)하여, 교회의 단일화를 도모하고 있다. 천주교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교리들,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지니지 않았던 여러 가지 전통을 버릴 의사가 없는데 추진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교회의 일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가? 기독교의 존립이 달려 있는 핵심요체(hinge)인 이신칭의 교리일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해체 또는 해제하지 않고서는 트렌트회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은 트렌트회의에서 출발하여 제1차 바티칸 회의와 제2차 바티칸 회의를 거쳐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트렌트회의 칭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 로마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Anathema)를 선언했다.

 

이신칭의 교리는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오래 전에 무력화되었다. 독일의 종교사학파 견해와 영미의 새 관점학파 견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루터의 주장이 그릇되거나 미숙한, 당대의 해석에 제한되거나 부당한 해석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바른 교리라고 믿는 자들이 많다. 이신칭의 교리를 처음으로 천명한 독일의 루터파 교회가 포기한 이신칭의 교리를 한국의 보수계 신도들이 바른 진리, 옳은 교리라고 믿고 이를 보수, 변호하고 있음은 특기할만하다.

 

바울신학자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는 한국교회 안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심각하게 흔들고 위태롭게 만든 위인이다. 김세윤의 칭의론이 지닌 허점을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의 정당성을 강력히 변호한 학자가 등장했다. 신학자 최덕성 박사이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에 공고하게 자리 잡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하면서 난해한 신학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0년대 한국교회 칭의론 논쟁은 김세윤의 칭의론 제기와 이에 대한 최덕성의 반박과 몇 차례의 걸쳐 진행된 칭의론 학술회로 이어진다. 최덕성은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적 합리적 정당성을 변호하는 신학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르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자기 시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 작업에 충실했다.

 

2. 1단계: 김세윤의 칭의론 반박

 

1)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한국교회는 대체로 보수적인 신앙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근본주의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근본주의와 개혁신학은 구분된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신앙, 신학운동이다. 보수적인 감리교도들도 근본주의 경향을 지닌 자들이 많다. 장로교회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며,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공동체이다. 장로교회 안의 근본주의는 성경무오 교리와 높은 성경 권위 교리를 천명하면서 이신칭의 교리를 진리로 고백하고 확신한다. 이신칭의 교리를 진리로 고백한다고 하여 근본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한국교회 칭의론 논쟁(2010년 대)은 김세윤 박사의 칭의와 성화(두란노, 2013)의 출판과 몇 차례에 걸친 칭의론 강연으로 시작되었다. 강연 일부가 유뷰트 동영상 시리즈로 공개되어 시청이 가능했다. 201510월 소망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복음을 주제로 칭의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이해돼야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칭의는 이미 이루어짐-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음의 구조 속에 있어 믿는 자로서의 첫 열매를 받은 것이지만, 그 온전한 수확은 종말에 유보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세윤은 어느 동영상 강의에서 종교개혁 칭의론이 자신의 칭의론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의 학자적 견해를 단순히 피력한 것이 아니라 그 칭의론에 대한 순교를 요구했다.

 

최덕성은 기독교사상사 전공자이며, 신약신학을 전공한 김세윤의 주장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행위구원 도식을 지닌 발언들을 무감각하게 하는 것을 보고 사태가 심각함을 느꼈다. 어느 날 밤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를 읽다가 유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다고 대목이었다. 당장 책의 개요를 파악하고 신학 에세이를 작성하여 <리포르만다>(201510.21.)에 실었고, <크리스천투데이>(2015.10.23.)에도 기고했다. 제목은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유보적 칭의라는 용어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김세윤의 칭의론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여 알려주었고, 당시에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상되어 있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최덕성이 최초로 김세윤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론이라고 명명하고, 그의 학문적 프레임을 소개한 것이다. 김세윤의 신학 프레임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종교개혁 신학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굳게 붙잡게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진 최덕성의 노력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진리를 수호하는 선한 결과를 도출했다.

최덕성은 종교개혁자들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고 보는 김세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로마가톨릭적인 구원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김세윤의 칭의론을 비평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한 뒤, 글의 끝부분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나의 신앙고백 (최덕성)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2:12)라고 말한다.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다투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다(2:14-15).

 

야고보서는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2:14,17, 26)라고 한다.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촉구 맥락의 메시지이다(2:15-16). 열매 없이 살아가는 믿는 자들의 실천을 강조한 말씀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여러 면에서 유감스럽다. 기독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없이 생기 없이 열정 없이 살아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복음전도자의 열정을 앗아간다. 교회부흥의 동력을 축소시킨다. 성령의 사역인 성도의 견인 진리를 팽개친다.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해석하려고 한다. 윤리와 실천을 구원과 칭의의 열쇠로 보는 그릇된 확신을 확대시킨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유보적 칭의론을 거부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5:1)고 선언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2: 1,5)고 한다.

 

나의 신앙을 짧게 고백하고 싶다. 나는 의롭다고 칭함 받은 죄인이다. 의인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숨을 거두어도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확신한다. 내가 맺은 의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전가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 때문이다. 나는 의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들, 나의 의, 의의 열매, 선행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는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사역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심판 날까지 굳건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단절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게 구원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글이 김세윤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기 바란다. 소모적인 논쟁·논의는 사양한다.

 

최덕성은 교의학자인 동시에 역사신학자이고, 김세윤은 신약신학을 전공하고 바울신학을 가르쳐왔다. 두 사람의 전공 분야가 다르고 미국과 한국이라는 거리 때문에 교점(交點)이 많지 않다. 그러나 종교개혁신학의 칭의론과 현대 신약신학계의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불꽃 튀기는 접전이 발생했다. 두 사람의 학문적 만남과 대결은 칭의론의 중요성과 핵심을 광범위하게 알렸다. 최덕성의 문제제기로 말미암아 그동안 인기를 끌어오던 김세윤의 학문적 영향력의 기세는 대폭 감쇄(減衰)되었다. 현재는 답보상태이다.

 

3. 2단계: 김영한과 최덕성의 칭의론 대화

 

최덕성이 주도하는 리포르만다는 20166월에 서울 삼성동 리포르만다홀에서 제5차 세미나를 칭의론 대화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김영한 교수(전 숭실대학교, 교의학)와 최덕성 박사의 구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마당이었다. 김영한의 주장과 최덕성 주장의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보여주었다. 브레드티비(BREADTV)는 이 행사를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방송했다.

 

김영한은 자신이 <크리스천투데이>에 두세 차례에 걸쳐 기고한 칭의론 관련 논문들을 발제문으로 삼아 대화를 시작했다.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칭의가 완전하고 영구적이지만, 성경은 칭의의 종말론적 완성을 요구한다. 둘째는, 성경이 신자들의 구원 상실 또는 칭의 사실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김영한은 김세윤의 칭의론과 최덕성의 이에 대한 칭의론 논쟁을 소개하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종교개혁적 칭의론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서야 한다는 종말론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칭의는 행위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전가된 것이다. 반복적이 아니라 단회적 사건이다. 칭의가 먼저이고 다음이 성화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통합체이다, 칭의가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을 요구한다고 했다. 김세윤 주장의 장점은 영적 하나님의 통치 차원을 잘 드러내고, 정통교리가 가진 구원론적 안일성을 지적하며, 종말론적 지평을 노정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적 유보개념에 오해의 소지가 있고, 칭의와 성화는 병행체이기보다는 성화가 칭의의 결실인 점을 간과한다고 했다.

 

김영한은 최덕성이 종교개혁적 정통주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고, 유보적 칭의론이 가진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평했다. 반면, 견인교리에만 의존하여 성도의 경성과 자기 성찰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고, 은혜 교리에 안주하여 종말론적 심판의 긴박성을 놓치고 있다고 했다. 종말 때의 칭의는 처음 받은 칭의와 같은 것인 동시에 완성이며 재확인이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칭의는 종말론적 유보라기보다는 종말론적 완성을 요구한다고 말했다(김영한,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1),”<크리스천투데이> (2016.5.11.)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 (II) <크리스천투데이> (2016.5.23.).

 

한편, 최덕성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서로의 견해를 허심탄회 비평적으로 논의하는 일이 쉽지 않다. 원수 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남의 이론, 주장을 비판하는 하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도 김영한 박사가 리포르만다가 주최하는 칭의론 대화에 응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말하고, 질문을 하는 것으로 발제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을 선물로 구셨다. 이 구원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선물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 자신의 선행이 결합된 합작품인가?

 

최덕성은 로마가톨릭교회의 트렌트공의회(1545-1563)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고, 인간의 선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라고 선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의 이신칭의 진리에 충실했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며,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오늘의 화두는 신약신학자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이다. 김세윤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주장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이신칭의가 틀렸다고 본다. 김세윤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단회적, 선언적 판단이 아니다. 그는 칭의를 하나님 나라의 틀 안에서 실천해야 할 선행, 윤리적 과업에 관련시킨다.(<칭의와 성화>, 두란노서원, 2013).

 

김세윤은 자신의 유보적 칭의론을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을 완성할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 칭의론이 자신의 새 칭의론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이신칭의는 미완성이라고 본다.

 

김세윤의 칭의론의 핵심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구원받은 자라도 행위에 따라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김세윤은 신자에게 선행이 없으면 칭의를 상실한다고 본다. 윤리와 순종이라는 신자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한다고 말한다.

 

김세윤은 칭의가 심판대에 서는 날까지 유보된다고 한다. 결국 구원은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행의 합작품으로 보는 로마가톨릭교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최덕성은 이러한 김세윤의 이론을 '유보적 칭의론'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리포르만다와 크리스천투데이 기고 글)을 발제문으로 소개했다. 후학들의 연구를 위해 아래에 전문을 소개한다.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역설한다.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칭의론이 종교개혁을 완성할 복음이라고 한다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을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의의 열매와 관련시켜 소개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한 말을 언론사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김세윤은 500년 전에 외쳤던 마르틴 루터의 의문을 떠올린다. "기독인이 어느 정도로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김세윤에 따르면 믿음만으로는 의롭다는 칭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과 함께 의의 열매를 맺어야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면서 외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김세윤에게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1) 새 관점

 

김세윤이 저술한 <칭의와 성화>(서울: 두란노서원, 2013)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울의 칭의론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제한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자 샌더스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의 유대교를 연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그들의 선택을 지탱시켰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 순종하면 상 또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벌을 준다. 율법은 속죄의 수단들이다. 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회복시켜 준다. 율법에 대한 순종, 속죄, 또는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샌더스가 제시한 위 명제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는 종교이다. 유대교는 은혜언약이 율법준수를 요구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했다고 한다. 바울은 배타주의 구원론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자독자적인 칭의론을 전개하면서 유대교를 비방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종교인 유대교를 의도적으로 율법주의적 공로종교로 왜곡시킨 결과라고 한다.

 

바울연구가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론을 이방선교의 맥락에서, 이방인들의 믿음을 정당화 하려는 동기와 선교라는 차원에서 전개한 구원 교리라고 본다. 이들의 새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저질러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고 있고,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유대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유대인들을 환대하려는 시대정신의 결과이다.

 

김세윤은 위 새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거의 기저에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축소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위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현대 위 학자들의 노력으로 유대교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칭의와 성화 곧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한다.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에 집착한 탓으로 법정적 의미를 무시한다. 동시에 전통적인 칭의론은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김세윤은 이 두 관점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톰 라이트의 통합 방식에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는다. 칭의를 의인이 되었다는 법정적, 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71-72, 74, 81).

 

2)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에게 칭의는 무죄선언 곧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슈바이쳐가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에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칭의론만 붙든 탓이라고 본다. 전통적 구원론은 칭의의 현재적 의미를 망각하고, 윤리 또는 의로운 삶을 무시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김세윤은 이러한 구도에서 칭의가 종말 때까지 유보되었다고 강조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뜻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관계 곧 순종 안에 있기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칭의와 성화, 172-173). 성화는 하나님께 바쳐지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 현재 단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핵심 전제는 예수 믿는 자,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라도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칭의의 현재 요소는 성화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탈락한다. 과거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10:9-10), 종말의 칭의 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주장한다(칭의와 성화, 192, 264).

 

김세윤의 신학에는 성령의 내주동행 역사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의 믿음을 끝까지 구원받는 단계까지 유지시켜 준다는 진리를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세윤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지받지 못할지 알 수 없다. 심판대에 설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유보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선한 행위를 가진 자만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수반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점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칭의를 무시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으로 본다(칭의와 성화, 177).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열매 곧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던 구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구원에 합당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김세윤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 구도와 불일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은혜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개인의 성화나 공덕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른다.

 

3) 나무와 열매

 

전통적 구원론, 칭의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죄 용서받음과 더불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때기독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에 진입하고, 천국시민이 된다. 예수 믿는 자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된다. 천국 시민권은 믿을 때 받는다. 시민은 국가의 호적부에 이름이 등재된 자이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한다.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

 

칭의는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한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미래의 죄들을 용서받을 법적 근거이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2: 1-10). 믿을 그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103:12).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의 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는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진정한 기독인은 열매를 맺는다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법적, 단회적 사건이다.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뜻한다.

 

성화는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칭한 자를 동시에 성화로 인도한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성화 없는 칭의칭의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인은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 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4) 질문

 

김세윤에게 묻고 싶다. 첫째, 비기독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여 개종, 회심하도록 인도해 본 적이 있는가? 복음을 제시하여 몇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했는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 회심자, 개종자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구원을 받을 지 받지 못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습니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예수 믿는 자 곧 기독인이 어느 정도의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자신의 의의 열매나 선행이나 윤리의 실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셋째김세윤이 말하는 칭의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성화 곧 윤리적 행위인가? 선행 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 아닌가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할 판결을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는 현재 완료형 사건이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는 자 가운데 의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구원받는 참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칭의를 선물로 받지 못한 탓이다. 심리적 현상, 분위기 탓, 망상, 오해, 마귀의 궤계, 환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수 믿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김세윤이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지난 500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수로 존중되어 왔다. ‘율법에 부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강조해 왔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이 가져온 신앙의 왜곡에 대한 거친 반발, 지나친 반발이었다고 한다. 의의 열매 곧 선한 행위를 가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신의 칭의론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완성해야 한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교인들을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무율법적인 혼란을 야기하므로, 우리 시대의 칭의론은 종교개혁 시대의 칭의론과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에 행함이 부족한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과 칭의를 인간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김세윤의 주장은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성화의 결여나 결핍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칭의 진리를 뒤바꾸면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 되고만다.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1조와 벨직신앙고백서 제2조에 표현된 전통적 칭의 교리가 강하게 외쳐지는 곳마다 교회가 생명력 있게 왕성해지고 성장하고 부흥했다. 칭의 교리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대속 진리, 은혜의 복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윤리적 결함은 칭의 교리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진리와 전통적 칭의론을 확실하게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우리를 구원한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지 우리가 맺은 의의 열매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한 것은 인간의 율법준수와 행위 때문이 아니다. (최덕성은 잎에서 소개한 나의 신앙고백을 여기에 덧붙인다).

 

3. 3단계: 김세윤 칭의론의 근원 탐구

 

최덕성은 역사신학과 교의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학문성을 지니고 있는 신학자이다.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유감을 쓰는 동안 그 사상이 로마가톨릭 구원관이라는 것을 직감하고서 연구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역사신학자, 교의학자다운 통찰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신학 에세이 발표로 그치지 않고 김세윤의 신학의 근원을 탐색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최덕성은 김세윤 칭의론의 연원(淵源)을 추정하는 논문을 완성하여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2016.10.1., 총신대) 35차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최덕성의 학술논문의 제목은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관련하여이다.

 

이 날 논평은 라은성 박사(총신대학교 교회사 교수)가 맡았다. 라은성은 자신도 트렌트공의회 문서를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최덕성이 그것을 김세윤의 칭의론의 뿌리로 보는 통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평했다. 최덕성의 논문은 신학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덕성의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관련하여는 트렌트 회의에 대항한 칼빈의 해독문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칼빈은 1547년 트렌트의 의화교령(Decretum de justificatione, 1547)에 대해서 해독문(antidotum, 1547)”을 발표했다. 트렌트회의의 칭의론은 로마라톨릭교회의 가톨릭교회교리서(1997)에 고스란히 수용되어 있고, 현재도 변함없이 중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개혁이 거의 정착될 무렵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종교개혁운동 신학에 대항할 이론 수립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긴 공회의를 열었다. 그것이 트렌트회의(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이다. 최덕성은 1997년에 출간된 로마가톨릭교회의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와 트렌트회의 문서에 포함된 칭의론 내용이 일치함을 먼저 확인했다. 트렌트회의는 정경 목록, 칭의, 성례 등 종교개혁운동의 주장들을 모두 부정하는 반()종교개혁신학을 확립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트렌트 회의 뒤에 많은 회의를 개최했지만, 트렌트의 결정을 변개하지 않고 유지한다.

 

트렌트회의는 15471월 칭의교리(의화교리)를 발표했다. 최덕성은 칭의교령 법규 9항 부분이 모든 개신교를 파문하고 저주(anathema)를 선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천주교가 이단인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천주교가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개신교회는 공적으로 천주교를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들은 불특정한 표현으로 천주교회를 거짓교회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표지를 준수하지 않는 교회,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 성례를 바르게 거행하지 않는 교회를 거짓교회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덕성은 트렌트회의 칭의교령에서 개신교 전체를 저주받을 단체로 결정한 것을 밝혀낸다. 천주교는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면서도 그 이단과 교류하고 아우르는 가슴 큰 형님, 집나간 말썽꾸러기를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자랑한다.

 

트렌트 회의의 문서가 발표되자마자, 칼빈은 곧바로 반박문(anti-toxic)을 발표했다. 교회 안에 스며들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긴박감을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쓴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최덕성 박사는 칼빈이 트렌트회의 독소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 내용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풀어서 소개한다. 트렌트회의의 독을 방어하고 우리 안에 침투한 독을 해독시킬 수 있게 한다. 몇몇 연구자들이 트렌트회의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덕성처럼 트렌트회의 법령(의화 부분)’ 원전과 칼빈의 해독문원전을 대조하면서 전개한 사람은 없었다.

 

트렌트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 공의회이다. 종교개혁운동이 개혁한 중세교회 1천 년의 신학을 오히려 재정립했다. 트렌트회의 법령은 바르게 제시한 종교개혁 신학을 거꾸로 개혁한 회의의 결과물이였다. 결국 트렌트회의는 문제점으로 가득 찬 신학주제들을 교회의 권위로 체계화하고 공인했다.

 

최덕성이 지적한 것들 가운데서 독특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트렌트회의는 물세례를 의화 곧 칭의의 도구인(道具因)으로 선언했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칭의의 수단이라고 했다. 트렌트회의가 물세례를 의화의 수단으로 제시한 반면에 칼빈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외형적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2) 칭의교령 7장은 칭의에 성화를 포함시키고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한 반면에 칼빈은 칭의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주어진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으로 제시했다. (3) 칭의교령 7장은 믿음에 행함을 첨가시키는 반면에 칼빈은 신인협력이론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4) 칭의교령 9장은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제시하는 반면에 칼빈은 구원의 확신, 확증을 강조했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에서 결정한 의화교령에 대한 칼빈의 해독문의 논거들이 이상하게도 김세윤의 칭의론 요점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새 관점학파의 주장과도 유사했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의 의화교령과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을 비교했고, 동일하다는 논지의 논문을 작성했다. 논문 초두와 결론 부분에서 김세윤과 새 관점학파에 대해 간명히 언급한다. 김세윤과 새관점학파의 주장이 반()종교개혁 공의회로 열린 트렌트회의의 칭의교령을 답습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최덕성의 위 논문은 한국교회의 칭의론 이해에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종교개혁 칭의론과 트렌트회의 칭의론이 동일한지 않으며,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이 불일치함을 알려준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 칭의론에 대한 칼빈의 변호가 가장 명확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서방교회가 신교와 구교로 나뉜 사건의 핵심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칭의론이 존재한다. 김세윤과 새 관점학파는 트렌트회의의 칭이론을 답습, 반복하고, 최덕성 자신의 칭의론은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 논문은 단순명료하면서도 매우 웅변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독자로 하여금 두 신학 진영 중 한 편을 택하도록 촉구하고 설득한다.

 

최덕성의 위 논문은 칭의론 자체를 논의한 것이 아니라 트렌트회의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을 대조하여 상호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복잡한 논리를 단순화시켜 제시한다. 트렌트회의의 칭의교령도 복잡하고, 칼빈의 해독문도 매우 복잡하다. 최덕성의 탁월성은 뛰어난 리딩 다이제스트능력에서 발휘된다. 독자들로 하여금 두 신학 체계를 명료하게 이해하게 한다. 한국교회로 하여금 칭의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각을 제시해 준다. 한국교회가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의 차이, 김세윤과 최덕성의 칭의론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한 탓으로 실수를 했다고 핑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가 결정하고 선포한 칭의론이 현재도 로마가톨릭교회의 유효한 교리로 수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개신교 진영에는 여러 종류의 칭의 이해가 있다고 하면서, 김세윤의 칭의론과 새관점학파의 칭의론 그리고 트렌트회의의 칭의론이 궤를 같이한다고 한다. 김세윤과 새 관점학파의 칭의 이해가 확산되면서 종교개혁신학의 모토인 솔리 피데(sola fide)’ ‘솔라 그라치아(sola gratia)’가 점차 밀려나고 위협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교회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트렌트회의의 칭의 이해를 따르는 것인가, 루터와 칼빈이 역설한 바울의 칭의론을 따를 것인가? 트렌트회의의 칭의 이해와 거의 다르지 않는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종교개혁의 칭의 이해를 따를 것인가믿음과 인간의 행함을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칭의론을 따를 것인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음을 믿고 고백할 것인가? 전자는 인간을 구원의 주체로 여겨 강조하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죄의 전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중요하게 여긴다.

 

3. 4단계: ‘리포라만다칭의론 학술회

 

최덕성은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 6회 학술회(2016.12.12.,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서울 종로)에서 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이 학술회는 종교개혁 칭의론인가, 새관점칭의론인가?”라는 주제로 열렸다. 천광진 목사(리포르만다 상임연구원)새 관점학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칼빈의 칭의론, 김철홍 박사(장신대)루터의 칭의론을 둘러싼 논쟁: 루터가 실수한 것인가, 새 관점이 실수한 것인가?”, 그리고 최덕성 박사가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를 발표했다. 라은성 박사(총신대)가 종합적으로 논평했다. 200여 명이 참석하여 청취했고, 다수가 토론에 참여했다.

 

리포르만다 칭의론 학술회는 1주일 앞서 개최된 미래교회포럼의 칭의론 세미나에 맞대응하려고 기획된 행사라는 인상을 준다.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은 예장 고신교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목사들이 주도하는 모임이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이 후원하고 운영하는 <코람데오닷컴>바울의 이신칭의에 회의적인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 오다가 2016616일에 김세윤의 칭의론을 답습하는 최갑종 교수(백석대)의 글을 게재했다.

 

최갑종은 김세윤이 되풀이하는 한국교회의 구원파적 구원론을 비판적으로 언급하고서 이것이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한다. 톰 라이트의 새 꽌점 칭의론과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을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최갑종은 믿음에 의한 현재적 칭의 곧 구원은 최후 심판에서의 최종적인 칭의 곧 구원이라는 구도의 칭의론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한 수용할 수 있다는 전제를 붙인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한 현재적 칭의 곧 구원최후 심판에서의 성령에 의한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칭의 곧 구원이라는 도식을 가진 교리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지지하는 견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양쪽이 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양면의 가르침을 만든 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신학적, 목회적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갑종은 이신칭의 중심의 종교개혁 칭의론과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을 모두 다 말하고 있다고 본다. 최갑종의 견해가 개혁신학 진영에서 이단사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코람데오닷컴>은 칭송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이신칭의와 교회를 무너트리는 이신칭의의 문제를 상정하고 토론하고 있는 바, ‘우리의 토론에 귀한 방향을 제시해 주셔서감사하다는 소개말을 덧붙인다.

 

<코람데오닷컴> 운영자 정주채 목사(코닷 운영자)2018824, 이신칭의 교리를 재론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정당성을 언급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신칭의를 비판적으로 재론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지의 이 글은 한국교회의 칭의론 논쟁의 배경, 동기, 흐름, 특징을 담고 있다.

 

정주채는 애독자 이보민 교수가 당시에 <코람데오닷컴>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고 미래교회포럼이 주도하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요긴한 충고를 해 준 데 감사한다고 하면서, 충고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신칭의 교리가 새롭게 논란의 대상이 된 정황을 언급하면서 이 교리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주채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을 심각히 변질시켰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교리주의에 빠진 탓이다. 다이나믹한 생명력을 가진 복음을 교리라는 틀 속에 가두어 변론과 비판과 정죄의 도구로 만들어 왔다. 종교개혁의 아이콘과 같았던 이신칭의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거나 금기시하는 것은 도그마티즘이다. 교리주의에 빠진 신학자들은 신학을 화석화하고 종종 특정 교리를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판단하고 시금석처럼 받들고 있다. 이신칭의 교리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주채는 한국교회 안에는 값싼 은혜가 활개 치고 있다고 한다. 교리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말씀보다 논리를 앞세우는 잘못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변증하려 하지 말라. 신학과 교리는 정연한 논리는 이해와 확신에 도움을 주지만 성경말씀을 교리 속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교리에는 생명이 없어도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이신칭의 교리를 토론하다보면 그 동안 믿어왔던 교리가 왜곡되거나 잘못 적용되었음이 밝혀질 수도 있다고 한다.

 

미래교회포럼의 칭의론 세미나의 주제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였다. 이신칭의 교리에 냉소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주제에서 교회의 타락을 도래시킨 이신칭의를 버리고 그 자리에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을 대체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미나는 2016125()-6()에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과 인근의 연동교회에서 개최되었디/ 300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이틀 동안 주강사 김세윤의 발표를 6시간 동안 경청했다.

 

한편, 최덕성 중심의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는 그로부터 1주일 뒤 한국교회회백주년기념관에서 종교개혁 칭의론인가, 새관점칭의론인가?”라는 주제의 학술회를 개최했다. 변질되는 한국교회의 구원론을 바르게 세울 목적으로 기획된 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장 고신의 신학 흐름에 급제동이 걸고 미래교회포럼 칭의론 세미나에 맞서는 학술회였다.

 

리포르만다는 최덕성의 주도로 2010년에 결성되어 개혁신학과 하나님나라 확장, 영혼 선점(先占)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고백하는 학자들이 열린 대화를 추구하는 학술단체이다. 이 학술회로 말미암아 <코람데오닷컴>과 미래교회포럼 시도한 이신칭의 교리 개진(Deformation)은 무력화(無力化)되었다. 예장 고신 총회(2017)는 교단 안의 변질되고 있는 신학적 기류를 간파하고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이신칭의에 대한 교수회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최덕성이 리포르만다 칭의론 학술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에서 발표한 같은 논문이었다. 요지는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 칭의론의 짝퉁이라는 것이었다. BREADTV는 이날 학술행사를 동영상으로 방송했다. 최덕성이 이날 말한 내용은 한국교회의 칭의론 논쟁의 개요를 담고 있다. 다음은 이 연설의 전문이다. 기록으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문건이기에 전문을 수록한다.

한국교회 최대의 신학적 화두는 칭의론이다. 종교개혁 칭의론과 바울에 대한 새관점 칭의론 사이 신학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앞둔 시점에 벌어진 칭의론 충돌의 중심에는,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 신약신학)유보적 칭의론이 자리 잡고 있다.

 

새 관점 칭의론을 수용한 김세윤은 저서 <칭의와 성화(2013)>와 동영상 강의, 그리고 2016125일과 6일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주제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6시간 칭의론 강연에서,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구원의 확실 불가능성을 역설했다. 윤리적 실천을 통한 칭의의 완성을 주창했다.

 

김세윤은 위 논의에서 "종교개혁 이후 500년 동안, 특히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어진 성경연구는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까?" 라는 말로 자신과 새 관점 칭의론을 강변한다. "칼빈이 신학을 완성했습니까?" 하고 항의한다. 500년 전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이 자신의 새 관점 칭의론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전통, 구도, 관점, 전제와 무관하지 않다. 새 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은 정통신학의 결과가 아니라 탈기독교적 자유주의 신학, 종교사학파, 유태인의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현대주의 신학자의 사상 등 불건전한 신학들의 결집이다. 역사적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가르침이 아니다.

 

김세윤의 칭의론을 접하면, 두 개의 그림언어가 떠오른다. 첫째는 '짝퉁(imitation)'이고, 둘째는 '개악(Deformation)'이다.

 

수학에 맞줄임,’ 곧 약분(約分)이라는 것이 있다.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사상을 축약하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 곧 행위구원에 이른다. 하나님 은혜로 칭의가 주입, 시작됐지만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완성해야 종말의 심판대에서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칭의의 완성이라는 개념은 구원의 탈락 가능성, 구원의 확신 불가능성, 관계적 칭의론, 유보적 칭의론으로 연결된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현대 로마가톨릭교회가 교리로 공식 수납되는 트렌트공의회(1547)의 칭의론과 다르지 않다. 이 공의회는 루터와 루터파의 이신칭의를 정죄하고, 프로테스탄트들을 이단자로 간주하여 파문하려 회집됐다.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고, 물세례를 칭의의 도구인으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주입된 의가 수평적 차원에서 계속 '의화(義化)'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 안에 주입되고 내재하는 능력으로 점진적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는 일종의 행위구원론을 천명했다.

 

발제 논문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10가지 소제목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의 결과인가? '세례성사'는 칭의의 수단인가? 칭의를 위한 인간의 준비가 필요한가? 칭의는 성화에 포함되는가? 행함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가? 칭의는 윤리실천으로 완성되는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가? 칭의가 계명준수, 윤리실천으로 성취되는가? 인내가 우리를 칭의의 완성으로 인도하는가? 고해성사가 상실한 칭의를 회복시키는가? 이 질문들은 새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이 지닌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트렌트공의회(1547)는 위 열 가지 질문들에 모두 라고 답한다김세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나, 논리적으로 아니오라고 할 수 없는 구조를 유지한다. 구원과 칭의가 고해성사로 회복된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라는 답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마련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김세윤의 칭의론과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은 거의 일치한다. 칭의와 고해성사를 관련시키는 부분 외에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트렌트공의회가 열리던 당대의 신학자 요한 칼빈은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에 대한 해독문을 신속히 저술하여 당대의 교회가 요구하는 질문에 정확한 답을 제공했다. 이신칭의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이 성경적이고 합리적임을 설파했다. 칼빈의 해독문은 김세윤을 포함한 새 관점 칭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나 다름없다. 종교개혁 운동 당시의 칭의론은 그 위에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요체 조항으로 이해됐다. 프로테스탄트 그룹과 로마가톨릭을 첨예하게 가르는 대척점이며 양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 조항이었다.

 

김세윤은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라는 신학 공식을 동원하여 유보적 칭의론을 정당화한다. 신학자들이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 설명에 도입하는 이 개념을,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에 대입시켜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칭의와 성화의 동일성 주장에 적용한다.

 

이 신학 공식 곧 이미와 아직 아니를 칭의론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칭의가 불완전한 것이 되고, 칭의를 윤리적 행위로 완성시켜야 얻어지는 무엇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칭의를 미완성의 불완전한 실체로 여기게 된다. '이미와 아직 아니'를 구원의 서정에 언급되는 무시간적 구원의 순서 모두에 적용하지 않고 칭의에만 적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효력 있는 부름, 회심, 중생, 양자됨도 심판대에서 최종 판결이 나는가?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공식을 구원의 여러 국면들 가운데 칭의에만 적용하는가?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칭의의 윤리적 완성 등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칭의가 단번에 이뤄지지 않고 선언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 아니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어린이는 성숙 과정을 거친 뒤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출생하면서 이미 완전한 사람이듯, 칭의도 이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김세윤은 성경을 윤리 실천의 결여라는 콘텍스트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유보적 칭의론은 견해 차이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사안이다. 김세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론, 이신칭의, 종교개혁 칭의론은 미완성이며 불완전하다. 그는 구원과 칭의의 공로 일부를 인간에게 돌리고, 윤리 결핍의 원인과 해결책을 칭의론에서 찾는다.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완전성과 전능성에 대한 도전이다. 신성모독이다.

 

개혁신학은 성경, 합리성, 성령의 역사를 기본 축으로 수행된다, 신학은 성경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전체의 틀 안에서 부분을 이해하고, 부분을 전체와 관련지어 이해한다. 종교개혁 칭의론을 개혁하려는 김세윤의 시도는 성경에 충실한 듯 보인다. 그러나 치밀한 연구 속에 아름드리 논리적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논리를 뛰어넘어 역설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가 아니다. 이단 집단과 사이비 기독교 단체들도 성경에 호소한다. 나무는 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김세윤의 칭의론과 로마가톨릭 칭의론은 거의 같다. 짝퉁이다. 짝퉁은, 같으면서도 완전히 똑같지 않다. 새 관점은 프로테스탄트교회를, 김세윤은 한국교회를 로마가톨릭화하려고 한다. 김세윤의 칭의론이 1547년의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은 우연인가, 의도적인가? 새 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의 그릇됨은 로마가톨릭 칭의론과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나아가 기독교의 진리체계를 와해시키는 탓이다.

 

바울과 개혁신학 관점에서 보면 새 관점, 김세윤 그리고 로마가톨릭 칭의론은 '다른 복음'이다.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주권, 은혜, 구원의 위대성을 인간의 행위로 대체하려는 발상이다. 복음전도를 방해한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학파의 주장은 탈정통적 배경을 지녔고, 루터의 칭의론이 타당하며, 새 관점 칭의론을 수용하는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 칭의론의 짝퉁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반()종교개혁 사상이다. 새 관점과 김세윤이 강조하는 개혁(Reformation)이 실상은 개악(Deformation)이다.

 

트렌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한 공의회로, 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 일컬어진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대응과 가톨릭교회의 효과적인 쇄신 방법을 논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신학적 주지들과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 파문했다. 칭의 논의는 1546622일에 시작했고, 칭의교령은 1547113일에 발표했다. 트렌트공의회 칭의로은 1547년에 채택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칭의(稱義)의화(義化)’라고 일컫는다. 로마가톨릭교회 칭의 개념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드러내는 용어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사용하는 '칭의'는 하나님이 칭의의 주체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轉嫁)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천주교회가 사용하는 의화가 인간 안에 주입되고 내재하는 능력으로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진행됨을 의미한다. ‘()’은 실체의 변형이 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고, ‘()’는 성화를 포함하는 진행 과정을 의미한다.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독자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임을 고려하여, ‘칭의로 변환하여 일관되게 표기한다.

 

4. 4단계: 이신칭의 교리 확립을 향한 정진

 

리포르만다 제8차 학술회(2017.5.1.)는 브레드티비 스튜디오(부산)에서 다시 고민해 보는 칭의론이라는 주제의 학술회를 개최했다. 이날 황현조 박사(미국 코네티컷한인교회 목사)는 칭의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목사) 이신칭의 즉각성을 발표했다. 고경태 박사(현 총신대 교수)는 혼돈에 빠진 이신칭의 논쟁에 연연하지 말고 불신자에 대한 복음 전도에 매진하자고 했다. 이날 최덕성은 전통적 종교개혁 칭의론이 타당하다는 요지로 강연을 했다.

 

부산 국제금융센터 부근에 소재한 브레드티비 스튜디오는 세계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최덕성은 이곳에서 신학강의를 영상으로 전환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유유미션을 설립하고, 복음전문방송을 위한 BREADTV(www.breadtv.net)를 개통했다.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오늘날의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신학강의공급선교 시스템을 구축했다.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방송이다.

 

2010년대 한국교회 칭의론 논쟁은 최덕성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신칭의 교리 변호는 효과적이었다. 이신칭의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론을 대체되는 것을 막았다. 새관점학파의 칭의론은 점점 확산되고 있지만, 김세윤의 칭의론은 소강상태로 진입했다. 독자들은 항상 새로운 이해를 탐닉한다. 이 과정에서 그릇된 것을 옳은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기도 한다. 구관이 명관인 경우가 있다. 머물러 있는 진리는 퇴색하므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최덕성은 공격에 대항, 방어, 변론, 응전하는 과업에 충실했다. 자기 시대의 교회의 과제에 뛰어들었다.

 

5. 나가는 말

 

이신칭의와 칭의론에 관한 책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독자들이 질식할 정도로 많다. 최덕성 박사는 간명한 칭의론 에세이와 논점이 너무도 분명하고 단순한 논문으로 김세윤의 칭의론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물리치게 했으며, 역사적 기독교의 칭의론의 합리적, 성경적 타당성을 방어했다.

 

최덕성은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채우려는 동기를 가진 신학자이다. 한국교회가 이신칭의 진리를 허무는 위협에 직면했을 때, 기독교 교리의 핵심요체의 중요성과 타당성을 효과적으로 변호하여 자기 시대의 교회가 요청하는 과제서 성공적으로 답했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에 대항했고, 제동을 걸었다. 김세윤의 칭의론을 유보적 칭의라는 용어를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으로 그 칭의론이 가진 모순과 비합리적인 특성을 널리 알렸다.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혼돈 상태에 있던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했다.

 

한국교회는 최덕성 덕분에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이 하나님을 불완전한 신으로 여기며 결과적으로 행위구원이라는 도식에 빠지는 사실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 존재하는 칭의론에 대한 가장 명료한 대조적 이해는 트렌트회의 의화 교리와 칼빈의 해독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주제에 대한 최덕성 박사의 시의성(時宜性) 있는 학문적 노력 덕분에 칭의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믿음을 분명하게 가지게 되었다.

 

진리를 쌓는 일에는 오랜 기간이 걸리지만 그 진리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진리를 파수하는 파수꾼이 졸지 않고 지킨다면 진리의 기둥은 언제나 건재할 것이다. 이신칭의, 칭의에 관한 도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독자들이 질식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최덕성의 칭의론 에세이와 트렌트회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 반박문에 대한 논문은 간명한 방식으로 칭의가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김세윤의 칭의론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최덕성의 칭의론 작업은 한국교회에 준 큰 선물이다.

 

최덕성은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작업을 해 온 신학자이다. 고희의 나이에도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독창적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조만간 <신사참배거부운동>이라는 방대한 책과 <예루살렘과 로마: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정리한 초대교회사> 그리고 <임진왜란과 세스페데스>이라는 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는 책들인지 궁금하다.

 

최덕성 박사는 한 시대의 진리의 파수꾼으로 효과적으로 진리를 방어하고, 다음 세대에 진리 체계를 전수한 신학자의 사명을 당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이어받아 보존하며 주의 교회를 효과적으로 섬기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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