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튤립(TULIP)이 주는 기쁨

by reformanda posted Feb 14, 2020
Extra Form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abd48fc2574b2b7f243010c9ed5e888.jpg



새 튤립(TULIP)이 주는 기쁨


David Mathis, The Doctrines of Graciousness: Five More Points for Young Calvinists


최근 개혁신학이 다시 각광을 받으며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스스로가 주장하는 신학에 어울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칼빈주의 신학에 부합한 신앙의 덕목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TULIP(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 Un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ement, Irresistible grace, and Perseverance of the saints)에 짝을 이루는 또 다른 TULIP을 제안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열매 맺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전적 겸손(T: Total Humility)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위의 두 구절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했다(“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성경이 다루고 있는 위대한 주제는 이처럼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를 돌보며 세워 주신다는 내용이다(눅 1:48, 52; 14:11; 18:14; 약 4:10; 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춰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기이한 영광을 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칼빈주의의 핵심이자 정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내재하는 죄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식을 왜곡시켜 우리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마 18:4).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겸손한 왕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건장하고 멋진 준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 마 21:5).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빌 2:3)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 뉴턴(John Newt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야 할 칼빈주의가 악의와 분노와 경멸이 가득한 논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과연 당신이 신봉하는 칼빈주의는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무조건적 친절(U: Unconditional Kindness)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친절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하찮은 덕목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 사도행전은 친절을 베푼 작은 행동들을 의미 있게 소개하고 있다(행 10:33; 24:4; 27:3; 28:2). 그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고후 6:6; 골 3:12; 딛 2:5). 이렇듯 모든 성도들은 “서로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엡 4:32). 교회에서 공인된 지도자라면 더욱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 친절은 성령의 열매일 뿐 아니라(갈 5:22),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고전 13:4).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절한 성품을 함양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눅 6:35). 그처럼 인자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 5:45). 더 나아가 그 인자하심은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만들기도 한다(롬 2:4).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을 통해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롬 11:22).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딛 3:4), 또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계획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엡 2:7),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가 타인의 삶 속으로도 흘러가도록 기도한다. 따라서 ‘인색한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


제한 비판(L: Limited Criticism)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중략]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


우리는 ‘4대 강령주의자’(four-pointer)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참고로 4대 강령주의자란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제한 속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 교리만을 수용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는 비판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간혹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세부적인 논점을 짚어 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다툼을 일삼아야 하는 건 아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투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성도들에 대해 책망해야 할 때가 있다(눅 17:3; 딤전 5:20; 딛 1:9, 13; 2:15). 이때 목회자는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딤후 2: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종을 부리듯 회심한 성도들을 대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그들을 대하며 권고했다(고전 4:14). 그 결과 때로는 눈물로 훈계했으며(행 20:31),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그런 자세로 성도들을 대하라고 요구했다(살전 5:12, 14).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사랑 가운데 서로의 잘못을 친절하게 고쳐 주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골 3:16).


이때 우리의 비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또한 그 목적은 언제나 상대방을 세우는 데 있지 넘어뜨리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후 13:10). 그러니 날카로우면서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담대하면서도 친절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다가가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잘못을 짚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가급적 제한해야 한다.


불가항력적 공손(I: Irresistible Graciousness)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


이 구절은 젊은 칼빈주의자가 귀를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놀랍게도 ‘항상’이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든,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릇된 문제에 맞서 싸울 때에든, 항상 은혜 가운데 말을 하려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게 잘못을 알려 주거나 또는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때에도 은혜 가운데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말을 하는 태도 자체가 공손한지 불손한지를 한번 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영광스러운 ‘은혜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타인에게는 불손한 태도로 말을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토록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라면, 자신이 정말로 그 은혜 가운데 말하고 있는지도 신경 써야 한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다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눅 4:22).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볼 때도,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말할 만큼 공손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시 45:2).


만일 우리가 은혜 가운데 공손히 말한다면, 5대 강령을 둘러싼 논쟁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게 될지 모른다. 바울은 은혜로운 말을 할 때 뒤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혔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참음 속의 인내(P: Perseverance in Patience)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관해 묘사한 첫 번째 속성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고전 13:4). 또한 그는 인내야말로 자신의 사역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여겼다(고후 6:6; 12:12 딤후 3:10).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라고 반복해서 권했다(살전 5:14; 딤후 2:24; 4:2). 심지어 디모데 후서 4장 2절에서는 단순히 참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래” 참으라고 명했다.


분명 우리의 신학이 점점 더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갖출수록, 우리의 삶도 점점 더 인내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인내를 보여 주신 위대한 모델이기 때문이다(롬 2:4; 9:22; 벧전 3:20; 벧후 3:15). 그래서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 1:16).


감출 수 없는 기쁨


훌륭한 신학이 그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비방을 받는다면, 이는 얼마나 큰 수치겠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으로 혹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용기를 내야 한다(빌 1:6; 2:13).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울은 기도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바로 이러한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혹 우리는 아무 기쁨도 없이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기쁨을 드러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온유한 태도는 둘 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에 따라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을 때,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실 것이다(빌 3:15). 이때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바로 그 사역에 참여할 수가 있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Doctrines of Graciousness: Five More Points for Young Calvinists

번역: 장성우


 (@davidcmathis) is executive editor for desiringGod.org and pastor at Cities Church in Minneapolis/St. Paul. He is a husband, father of four, and author of Habits of Grace: Enjoying Jesus through the Spiritual Disciplines.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