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나?

by dschoiword posted Feb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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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나?

 

중세 유럽인들은 불안감과 두려움의 도가니 속에 살았다반문화반노동 정신은 조악(粗惡)한 기술봉건제도의 구조적 모순그리고 빈곤을 선사했다호구(糊口)가 불가능했으며생존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중세기는 굶주림의 천지였고배고픔에 대한 강박관념의 시대였다빵에 대한 기적 이야기가 사람들의 상상력과 신앙심을 증대시켰다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기적보다 갈리리 호수변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훨씬 더 인기 있었다이 시대의 기적 이야기들은 대부분 빵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궁핍한 가운데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등의 내용이었다. “풍요의 나라”(The Land of Cackaygne)에 대한 꿈은 13세기 문학의 중심 주제였다이 무렵의 왕국의 실록은 배고픔을 다루는 작품과 성자들의 전기와 전설을 많이 담고 있다.

 

자연재해는 기아에 허덕이는 중세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예측이 불가능한 재앙은 흉작가뭄홍수와 더불어 찾아왔다일기불순은 식량부족을 낳았고물가를 폭등시켰다물가폭등은 빈약한 영양으로 인한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몰고 왔다비축된 식량은 거의 없었고농지의 생산성이 낮았다자연과 동물들에 의한 곡식의 피해도 컸다쥐는 식량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다쥐들이 밀밭을 휩쓸어 식량부족 상태를 가져왔다피리를 불어 마을의 쥐를 퇴치했던 독일의 전설적 인물이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메뚜기의 침입도 무시할 수 없었다재앙은 2, 3혹은 4년마다 반복되었다재앙의 주기가 빠를 수록 지옥 같은 악순환이 계속되었다중세천지는 공포로 가득 찼다농민들은 흉작과 재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클루니수도원 수도사로서 당대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남긴 랄프 글라베르(Ralph Glaber)는 1032년과 1034년 사이에 그가 겪었던 재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근이 그 포악성을 떨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거의 전 인류가 소멸될까 하여 두려워했다열악한 환경조건 때문에 파종을 제때에 할 수 없었고특히 홍수 때문에 곡식을 거둘 방도가 없었다땅을 파고 파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3년 동안 비가 와서 땅이 흠뻑 젖어 있었다수확철에는 잡초와 독보리들이 밭 표면을 온통 뒤덮었다간혹 식량을 파는 사람들이 있는데그들은 마음대로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했다사람들은 야생동물과 새를 잡아먹었으며극심한 기아 때문에 온갖 종류의 썩은 고기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먹기 시작했다죽음을 면하기 위해 초근과 수초를 먹는 사람도 있었다당시 사람들 사이에 만연했던 도착적(倒錯的)인 이야기를 들으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슬프도다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극심한 기아로 인해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여행자들은 자신보다 더 건장한 사람들에게 유괴되는 일이 흔했고그들은 사지가 절단되어 불에 구워져 다른 사람들의 먹이가 되었다기근을 모면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도중에 환대를 받게 된 사람들은 자신을 환대해 준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어 먹이로 이용되었다많은 사람들이 과일이나 계란으로 아이들을 꼬여 으슥한 곳으로 대려다가 탐욕스럽게 잡아먹었다시체들이 도처에서 도굴되어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이용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찰흙을 파서 밀기울에 섞어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얼굴은 영양실조로 인해 창백하고 앙상했다피부는 고창병으로 축 늘어졌다굶주림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늑대들은 시체들을 먹었다시체가 뒤죽박죽 쌓였다발끝에 걸리는 것이 시체였다.

 

1221년에서 1280년 사이 몰아닥친 자연재앙은 더 극심한 기근을 가져다주었다농작물이 생산되지 않거나 냉동되었다식량과 생활필수품의 부족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고초근목피로 연명했다대 기근은 1314년과 1317년에도 찾아왔다폭우과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극심한 기근은 빈자들을 방문하고 부자들은 피해갔다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타격을 받았다그들의 신체가 극심한 굶주림 때문에 귀족들에 비해 허약했기 때문이다이러한 와중에서 교회는 기근을 해결할 방책을 세우는 대신에 그것을 인간타락의 결과로 해석했다.

 

불공평한 시대에 찾아온 공평한 것이 있었다흑사병은 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사람들을 삼켰다. 1348년에 들이닥쳐 수많은 농민들과 귀족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그 결과로 경작지 대부분은 황무지가 되어버렸고영주들은 농지를 노동력이 적게 드는 목축지로 전환했다아비뇽에서는 하루 동안에 1320명이 사망했다교황이 파악한 바로는 그 다음 날에 400명 이상이 죽었다수많은 수도사들이 희생당했다사순절 기간에 358명의 탁발수도사들이 사망했다몬트펠라수도회의 140명의 탁발수도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다만 7명이었다막달레나수도회의 160명의 수도사 가운데서 다만 7명이마르세이레스수도회의 150명의 수도사 가운데서는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아비뇽에서 죽은 갈멜수도회 수도사는 166명이었다그들의 주검은 서로서로 집단 살해한 것처럼 보였다탁발수도사들이 특히 많이 희생된 것은 섭취한 음식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중세기는 조악한 음식의 세계였다사람들은 가축이 먹는 사료를 먹었고영양실조에 걸려 질병에 노출되었다호밀에 생긴 깜부기가 일으키는 맥각병(Ergotism)이 유난히 심했다이 균은 몸속에 파고 들어가 사지를 석탄처럼 까맣게 태웠다. 1090, 1094, 1109, 1235년에 기승을 부렸다썩은 사지를 절단하고 목숨만 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안트완비에누아(St. Antoine en Viennois)수도원은 맥각병을 고쳤다는 어느 죽은 성자의 유골이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했다1차 십자군원정(1096)에 나선 사람들은 대다수 허기진 사람들이었다독일과 프랑스 지역 출신 농민들은 기왕 죽을 바에 거룩한 일을 위해 죽자고 하여 지원했다.

 

중세인들을 괴롭힌 질병은 여러 가지이다한센씨병종양탄저병궤양종창암종병습진단독(Saint-Sylvain), 궤양성 혹은 결핵성 연주창(Scrofula or Ulcers)이 괴롭혔다맹인꼽추절름발이중풍환자가 많았다갑상선 환자무도병간질병광란자정신이상자미치광이도 많았다치통복통구루병(Colic)을 앓는 사람도 많았다질병은 중세인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극대화시켰다.

 

교회는 질병의 횡포에 무력했다미신적 치료술을 배척할 것인지 아니면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서 머뭇거렸다신자들은 질 나쁜 음식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렸고그러한 육체는 환영(幻影)을 보는 등 정신적 질환을 겪었다그러한 상태에서 출현한 천사악마성자성모가 인기를 끌었다화체설연옥교리공로구원 사상이 호감을 주었다허약한 육체는 그 교리들을 중세기적으로 지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무비판적 정신은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중세사회는 식량을 비축분배하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공권력이 무능했던 탓으로 식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수학한 곡물을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수송할 수 있는 도로나 행정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노상강도나 해적들이 들끓었고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관세와 통행세를 징수하는 소영주들이 괴롭했다식량수송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수송기술과 설비도 부족했다가끔 풍년이 찾아왔지만 곡식을 보관할 창고가 없었다. 1259년경에는 생산된 곡식보다 그것을 담는 그릇 값이 더 비쌌다.

 

그 무렵탁발수도사들은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젊은이들이 걸식하고 다녀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건장한 신체를 가진 거지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월리암 생타무르(William de St. Amour)와 장 드 묑(Jean de Meung)은 만연한 노동 경시 풍조를 탄식했다.

 

화폐경제의 재등장과 극심한 물가상승은 중세인의 불안과 공포를 가중시켰다중세서양의 인구는 10세기말에서 14세기 중엽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다인구가 증가하고 재난이 강타하는 가운데서도 농업생산임금물질생활은 약간의 진보를 보였다화폐경제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화폐는 경제적 힘의 상징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힘의 상징이었다군주들이 금화를 주조한 것도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화폐경제의 발전은 화폐에 대한 민중의 증오심을 증폭시켰다초기 화폐 경제는 부르주아계급과 교회영주들에게만 이익이 되었다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억압의 요소였다. 13세기말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 점진적인 교체가 이루어지자 세금이 현물에서 화폐로 바뀌었다거둬들인 화폐는 급속한 물가상승으로 인해 영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봉건제도에 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인구증가로 보유 토지를 분할해야 했다소농들은 소멸되고부농들은 영주의 예속민이 되었다예속민이 아닌 자들은 거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일부 소영주들도 가난한 자가 되었다토지의 생산성이 낮고 식구가 많은 농경사회에서 빚을 진다는 것은 큰 타격이었다많은 농민들이 고리대금업자의 신세를 졌으며결국 거지로 전락했다.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은 상인이었다도시의 발전은 화폐경제를 활성화시키면서 부르주아계급을 등장시켰다경제적 힘을 토지가 아닌 화폐에 기초를 둔 계급이 출현한 것이다상인은 고리대금업 외에도 농작물을 매점매석하여 돈을 벌었다그렇게 번 돈으로 귀족의 지위를 매입했다중세인들은 부르주아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치를 떨었다.

 

정치적사회적 어두운 그림자는 중세인의 정신상태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며 신앙에 의존했다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안정된 세계를 동경했다도래할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의 비율보다 낮다는 말을 두려워했다.

 

13세기에 프랜시스수도회 수도사 베르톨드 레겐스버그(Berthold Regensburg)는 선택된 자와 저주받을 자의 비율을 산정했다노아시대의 홍수를 예를 들면서 그 때 죽은 자들의 수와 노아가족의 수의 비율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의 수와 구원받을 사람의 수의 비율과 동일하다고 했다이 주장은 안전피난처영생을 갈구하던 중세인들의 가슴에 호소력 있게 파고들었다그 결과로사람들은 먼저 구원을 받기 위해 앞 다투어 재물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지옥에 대한 공포는 현세적 불안의 연장이었고연옥교리를 잘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불안에 대한 교회의 처방은 교회라고 하는 집단 속에서 연대의식을 갖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신앙으로 승화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그 결과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추구할 수 없는 안정을 수도원에서 찾고자 했다저승에서 안정을 소유하기 위해 이승의 덧없는 재물들을 교회나 수도원에 갖다 바쳤다이러한 까닭으로 교회와 수도원은 엄청나게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가난하고 굶주리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교회는 웅장한 교회당들을 건축했고수도원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1348년경흑사병(Pest)이 만연하자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물을 넣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여러 곳에서 유태인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당했다불안하고 공포스런 사회는 유태인을 희생제물로 삼았다교회는 극악무도한 폭력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간 전염병 확산에 교회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최덕성, <종교개혁전야>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 168-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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