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두마차시대란 무엇인가?

by dschoiword posted Dec 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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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세마차(Luttrell Psalter, 영국, 1300년 무렵 작품)

 

 

 쌍두마차시대란 무엇인가?

 

'쌍두마차시대'란 역사학도에게도 생소한 용어이다. 필자가 2012년에 저술, 출간한 책명이다. 쌍두마차(雙頭馬車)는 두 마리의 말이 하나의 마차를 이끄는 형상을 떠올린다. 어느 한 분야에서 주축이 되는 두 사람, 사물, 세력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세 서양사와 교회사는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시점(410)에서 동서방교회의 분리(1054) 사이는 교황과 황제, 교권과 제권이 충돌하고 야합하면서 하나의 종교사회-국가를 이끌었던 교황들과 황제들의 시대였다. 신학자, 성직자, 경건한 기독인들이 많았지만, 교황과 황제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실력자는 없다.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1989-2009 사이에 필자의 기독교사상사-역사신학-교회사 강의를 수강한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하리라 믿는다. 실타래처럼 복잡한 서양중세사중세교회사기독교사상사를 풀어 알기 쉽게 엮었다. 본문 내용과 관련된 컬러 그림, 사진, 지도를 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물관 진열장에 진열된 값진 골동품 같은 느낌을 준다.

 

아래는 <쌍두마차시대> 1쌍두마차의 세계를 옮긴 것이다. 책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와 논의하는 주제들의 개요를 소개한다. 각주 번호와 주석은 생략한다. 끝 부분에서 책의 차례를 소개한다.

 

1. 로마인, 게르만족 그리고 기독교

 

지중해 연안(沿岸)에 자리 잡은 로마제국은 주후 400년에 라틴어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천명했다. 아울러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국교로 선포했다. 모로코에서 시리아까지, 이집트에서 브리튼지역까지 뻗어있던 로마제국은 그 해를 기점으로 기독교제국(Christendom) 시대를 열었다.

 

로마인과 기독교는 새로운 제국을 만들었다. 이 제국의 통일성은 800년에 이르러 와해되었다. 5세기에,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고 있던 게르만족은 제국의 영토 안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7세기에는 모슬렘이 제국의 동쪽과 남쪽과 서쪽을 침략했다. 그들은 중국과 프랑크왕국의 변경까지 뻗어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의 통일성은 와해되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된 화려한 영광은 빛을 잃었다. 기독교신앙을 가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이 로마제국에서 떨어져 나가 모슬렘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비잔틴제국으로 일컫는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의 남동쪽으로 뻗어 나갔다. 서로마제국은 라틴어를, 동로마제국은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족의 침략과 제국의 통일성이 와해되자 교회도 수난을 당하고 갈등을 겪었다. ·서방교회는 1054년에 분열되었다. 서방교회는 광활한 땅을 가진 프랑크족과 결탁하여 공교(工巧)한 기독교사회를 만들어 냈다. 한편,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동유럽과 러시아로 뻗어나갔다. ·서방기독교는 서로 다른 전통을 발전시켰다. 서방교회는 교황제국을 꿈꾸며 세속권력을 장악했고, 동방교회는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지중해세계는 서방기독교, 동방기독교, 이슬람 권역으로 나뉘어 각각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켰다. 이 구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기독교인들과 모슬렘 사이의 반목과 적대감과 오해는 지중해 주변국들의 항구적 특징이 되었다. 종교 간의 증오심은 십자군전쟁과 오토만투르크족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지중해 연안 민족들 사이에 종교문제로 발생하는 갈등과 긴장이 그칠 날이 없었다. 1992-1995년에 일어난 보스니아전쟁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기독교와 이슬람만이 아니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서로 다른 신념과 문화 전통이 개입되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동일한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갈등관계였다. 1204년에는 서방교회의 군사들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여 동방기독인들을 학살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에 대한 적대감과 원한(怨恨)을 가지고 있다. 서방교회는 16세기에 이르러 독일, 스위스, 프랑스, 헝가리,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기독교 구도를 갖게 되었다. 서방교회의 텃밭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Protestant Church)라고 하는 원시형태의 기독교가 등장했다.

 

서양세계는 지중해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기독교신앙을 국가정책 차원에서 수용했다. 세속권력자가 교회권력자로부터 왕관 또는 제관을 받아쓰고, ‘황제라는 칭호를 받는 구도로 바뀌었다. 샤를마뉴(800)와 오토 1(962)는 교황으로부터 각각 황제의 관을 받아썼다. 황제는 성직자를 임명하고, 교회의 신학을 간섭했다. 교회는 세속권력자의 성직임명의 부당성을 천명하면서 수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속권력자를 지배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시기는 황제와 교황의 피 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이어졌다. 서양중세사회는 국가와 종교, 정치와 기독교가 하나로 결속된 종교사회였다. 황제와 교황, 제권(帝權)과 교권(敎權), 국가와 교회가 하나로 결속된 쌍두마차의 세계였다. 교회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다. 중세서양사와 중세교회사는 나눠지지 않는다. 같은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다.

 

4-5세기에 살았던 어거스틴, 제롬, 암브로시우스 등은 로마제국의 시민이었다. 그들이 다듬은 기독교 전통은 로마인의 사상과 습관과 언어(라틴어)와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후기에 세워진 대학에서 이루어진 학습은 주로 교부들이 남긴 문헌들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서양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이다. 이 학교는 법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법학공부는 유스티니안 황제가 만든 기독교로마법(Codex Justinianus)을 배우고 그것을 응용하는 학습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서양사중세교회사에는 로마제국과 기독교만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크족은 오늘날의 프랑스와 서부 독일 지역에서, 고트족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 지역에서 각각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모두 게르만족 문화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많은 것들을 로마에서 도입했다. 로마의 전통과 상징들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거대한 게르만족(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드족) 지역으로 파고들었다. 게르만족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가 되었다.

 

프랑크 족장 클로비스(Clovis)의 개종과 세례는 서양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신앙을 가졌던 불군디왕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클로비스는 아내의 설득 끝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선망하던 로마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클로비스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과 비슷한 인물이었다. 광활한 서유럽을 기독교권으로 몰고 갔고, 게르만족 사회를 기독교사회로 전환시켰다. 그가 마련한 터전에서 샤를마뉴는 재생(再生) 서로마제국을 등장시켰고, 오토 1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관(皇冠)을 받아썼다. 기독교와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의 융합은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거쳐 거대한 기독교왕국(Christendom)을 등장시켰다. 교황과 황제가 이끄는 기독교사회 곧 쌍두마차시대이다. 근년에 태동한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은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이 만든 옛 왕국의 재생이다.

 

 

Arch of constantine2.jpg

 

  사진: 콘스탄틴의 개선문( 로마, 315년 무렵 건축)

 

2. 시작과 끝

 

서양중세기는 언제 시작되었고 어디서 끝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일치된 답은 없다. 중세기 구분은 인위적이다. 어떤 학자는 천하를 통일시킨 황제 콘스탄틴이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313년을 그 시작으로 본다. 어떤 학자는 니케아공의회가 열린 325년을, 어떤 사람은 서고트족의 로마 침략이 있었던 410년을, 또 다른 사람은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가 사망한 476년을 그 시작으로 여긴다. 학계 일각에서는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교황제도의 발판을 구축한 590년을, 중세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600년을 그 출발기로 본다.

 

서양중세기의 마감시기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십자군원정시대가 열린 1095년에 마감된 것으로 보거나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투르크족에 의해 정복된 1453년에 종료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에 중세기가 마감되었다고 본다. 웨스트팔레아평화조약이 체결된 1648년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볼테르(F. M. Voltaire, 1694-1778)가 등장한 18세기에 마감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역사를 총체성 안에서 파악하고 역사학을 문화인류학의 하나로 이해하는 아날학파는 장기적 중세를 천명하면서 19세기에 이르러 중세기가 마감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영원한 도성으로 일컬어지는 로마가 게르만족의 일부인 서고트족에게 점령된 410년에서 시작하여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의 불길을 점화한 1517년까지를 중세기로 구분하고, 전편 쌍두마차시대어거스틴에서 동·서방교회의 분열까지를 다루고 후편 종교개혁전야십자군전쟁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탐색한다.

 

기독교회는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의 멸망으로 새로운 장을 맞았다. 시대의 변화는 교회를 그 이전 세대가 알지 못한 새로운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에서 목회를 하면서 학문 활동에 열중했다. 그는 마감되는 옛 시대와 도래하는 새 시대의 중간에 살면서 두 시대를 연결시키는 교량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은 부패한 중세 말기의 교회를 성경적인 신앙고백공동체로 회복시킨 교회개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중세기 동안 꾸준히 발전해 오던 신앙운동의 연장이었다. 교회라는 제도 안에 갇힌 기독교를 해방시키려고 노력한 작은 신앙고백운동들의 매몰찬 결실이었다.

 

베를린에서 자동차를 몰고 서남쪽으로 1시간 반 정도 가면 종교개혁의 요람 비텐베르크에 이르게 된다. 이 작은 중세도시가 역사의 중심 무대에 등장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그곳에서 교회개혁의 횃불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양세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종교개혁운동은 중세인의 생활방식과 신학과 신앙을 혁신시켰다. 서양인의 감수성과 정신을 바꾸어 놓았다. 교회의 개념을 바꾸어 성직자계급이 아니라 신앙고백공동체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 이해하게 했다.

 

3. 어둠

 

중세인들은 중세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문명시대가 끝나고 야만인들이라고 불리는 이족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여러 면에서 퇴보하고 무지하고 낙후된 시대 정도로 알고 있었다.

 

15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로마문명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문예부흥기의 중간에 끼어있는 약 1천 년을 가리켜 처음으로 중세라고 일컬었다. 어느 학자는 1669년에 크리스토퍼 켈너(Christopher Kellner, 1634-1680)가 처음으로 중세를 사용했다고 한다. 켈너는 서양교회를 세 시대로 구분했다. 325년까지를 고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현대, 그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를 중세로 이름 지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중세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마 교황청 도서관 사서 지오바니 안드레아(Giovanni Andrea)였다. 1469년에, 그는 고대인들과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을 대비하면서 과학, 예술, 문학에서 빛을 발하던 두 찬란한 문명시대의 중간에 끼어있는 어두운 터널을 중세라고 일컬었다.

 

한편, 18세기와 19세기의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중세 1천년 동안 서양기독교사회에 사회적·문화적 진보가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그 시기를 인류문명의 휴식기로 인식했다. ‘중세,’ ‘중세인이라는 용어를 경멸의 의미로 사용했다. 과학의 진보가 없고, 삶은 원시적이며, 사회는 무질서와 도덕적 타락과 미신이 난무한 시기로 보았다.

 

중세 성직자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을 끼워 넣어 저승의 지도를 바꾸었다. 화체설교리를 체계화하고 마리아숭배교리를 강화했다. 또 성상숭배를 정통신앙의 행위로 여겼다. 이 시대의 용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교황청은 교회의 정책을 따르지 않거나 교회가 공적으로 표방한 교리를 신앙하지 않는 자들은 이단으로 규정하여 처단했다. 교권과 제권 사이의 투쟁과 야합이 그치지 않았다. 빈곤, 기근, 허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흑사병, 이단재판, 마녀사냥, 화형장의 불타는 장작더미는 사람들의 창의성과 비평적 사고를 기죽였다. 사람들은 미신적 신앙에 매료되었고 죽음의 공포로 떨었다.

 

중세서양사회는 국가와 교회가 하나로 결속된 거대한 종교집단으로 발전하여 교황과 황제가 좌충우돌 하며 그 종교사회를 이끌었다. 정치와 종교는 인간행위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서방세계(서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 교황청)만이 아니라 동방세계(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 동방교회)도 쌍두마차의 세계였다. 그러다가 서방은 교권이 서서히 제권을 지배하는 사회로, 동방은 제권이 교권을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서방교회는 교황제국(Republica Christiana) 건설에 몰두했다. 그 목적을 성취하려고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들을 만들어 냈다. 이것들은 불행하게도 기독교 신앙원리에 따른 것들이 아니라 그 당시의 세속 환경과 제국주의 발상과 호전성의 결과였다. 황제는 교권의 횡포를 막지 않고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에 대항하고 혈투를 벌였다. 기독교가 서양중세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교회가 천하를 지배했다.

 

교회는 침략과 혼란과 기근의 시대의 한 복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교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세력이 막강해지자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금전적 이익을 얻으려고 애썼고 권력을 추구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 곧 사랑과 성령의 역사는 무시했다. 교회는 이단자들만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도 박해했다. 로마교회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까닭으로 순수한 신앙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형했다. 서방교회는 차츰 기독교회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변질되었다. 교권을 가진 자들은 교회를 장악하고서 순수한 신앙인들을 제도화된 교회 밖으로 몰아냈다. 교회의 주객이 전도되었다. 권력자들은 교권과 종교재판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달성했다.

 

4.

 

어두운 중세 사회에도 숭고한 신앙을 가진 수많은 기독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도와 금욕생활을 하면서 신앙과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거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형제, 정든 고향을 떠나 복음전도 현장에 나섰다. 가난하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었다. 탁발 수도사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

 

수도원운동은 제도와 교권의 틀에 갇혀있는 서양중세인들의 신앙과 영적 갈망을 대변했다. 수도사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바라보았다.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을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인간 삶의 가장 고귀한 일로 여겼다. 프랜시스파 수도사들은 어거스틴이 표방한 정통신학을 추구했다. 도미니크파 수도사들은 세속철학에 개방적이었으며, 중세기 형태의 신신학인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토대를 둔 스콜라주의 신학을 수용했다.

 

수도원운동은 서양중세인의 영적, 지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수도원은 다수의 학자들을 배출했다. 큰 도시마다 대학들이 설립되고, 교수직은 대부분 수도사들이 맡았다. 수도사 출신 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진리 규명에 힘썼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를 저술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대속사역을 담당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킨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수도사들은 성경을 연구했다. 종일 성경을 옮겨 쓰고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했다. 수도사들의 성경연구는 종교개혁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극심한 어둠 가운데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영롱하게 빛나던 수많은 광명들이 있었다. 중세 기독인들의 용기, 열정, 헌신, 봉사, 지적갈망, 탐구열은 중세 대중의 신앙 열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들은 불가사의한 예술을 꽃피웠으며, 하늘을 향해 치솟은 종탑을 가진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당들을 세웠다. 직조기계, 공산품을 만들고 성채, 도시, 대학, 수도원을 건축했다.

 

중세인들의 감수성은 굶주림과 공포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과 역병의 횡포로 말미암아 고통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신에 빠졌고, 인간존재의 신비에 대한 이성의 한계를 인식했다.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주종(主從) 관계와 복종이 강요되는 봉건사회에서도 진리가 무엇이며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중세기적 정신성에서 벗어나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교회개혁을 향한 움직임은 교회의 심장부에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주변사람들(Dissenters)이 이끌었다. 어느 누구도 이들의 신앙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신비주의, 공의회운동, 국가주의, 인문주의는 교회개혁운동을 재촉했다. 왈도파 사람들, 존 위클리프, 롤라즈 무리들, 얀 후스,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타볼파 사람들, 후스파 사람들은 성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교회제도의 구조적 모순, 교권의 횡포, 성직자의 화려한 위선, 신학자의 영리한 음모에 항거했다. 성경적 진리를 따랐고, 순수하게 살았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부정, 부패, 불신앙적 요소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하려고 한 신실한 증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이 운동은 중세기 동안에 꾸준히 발전하다가 때가 이르매마침내 그 골격을 드러냈다. ‘종교개혁이라는 장려한 영적 건축물은 개혁정신을 가진 수많은 중세인들의 땀과 고통과 희생을 발판으로 건축되었다.

 

중세기독교의 역사는 희망을 준 사람들의 무용담과 실망을 준 사람들의 추문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21세기 현대인의 신앙과 진리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세교회의 명암(明暗)과 영욕(榮辱)과 성쇠(盛衰)는 오늘날 교회를 지도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값진 유산이다. 올바른 신앙으로 안내하는 항구적인 거울이며 교회개혁의 길라잡이다.

 

최덕성/  쌍두마차시대, pp.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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