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경해석학: 21세기 비전

by dschoiword posted Jun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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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경해석학: 21세기 비전

 

 

아래의 글은 한국개혁신학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 대회(2016.6.28., 온누리교회당)에서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가 강연한 내용이다. 롱맨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교에서 17년 동안 가르쳤고 웨스트몬트대학 으로 옮겨 로버트 건드리 성서학 교수로 18년째 가르치고 있다. 구약신학 전공자이며, 33권을 저술했다. 이 글은 백석대학교 김진규 교수(profjkkim@gmail.com)가 번역한 것이다. <뉴스앤조이>(2016.6.2.)에도 게재되었다.

      

 21세기를 위한 개혁주의 해석학

(Reformed Hermeneutics for the Twenty-First Century)

 

한국개혁신학회 20주년을 맞이하여 저를 강사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중요한 행사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해석학을 주제로 강연을 하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21세기 전반부의 개혁주의 해석학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해석학의 문제는 당연히 주요한 문제인데 이는 우리의 성경 본문 해석을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구약 교수로서 저의 초점은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해석의 목표

 

개혁주의 해석학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인식과 함께 시작한다는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해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침을 의도하고 있는 점은 모든 면에서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 아는 것은 해석의 임무 중에 한 부분입니다. 해석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과거 몇 십 년 동안 해석의 목표에 대한 질문은 많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성경은 어떤 문헌적 의사소통 행위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청중에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저자 텍스트 독자

      

의미는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 혹은 텍스트 자체에 혹은 독자에게 위치해 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세 가지 모두가 해석 작업의 일부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청중에게 의도한 메시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특히 성경을 위해 저자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또한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의 도출에 참여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개별 독자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문화, 교육, 경제, , 인종, 사회 경험 , 등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관점 때문에 텍스트의 어떤 양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것은 놓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읽기

      

그러나 모든 것은 결코 유실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읽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서구의, 백인이고, 유복하고, 개혁주의의, 높은 교육을 받은 독자인데, 다른 관점들의 해석에 귀 기울여 그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21세기 개혁주의 해석학을 위한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읽기 위해서 폭넓은 독법이 필요합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다른 관점들로부터 나오는 신학에 대해 읽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닫힌 마음으로 이를 읽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졸렬한 모조품이고 아주 비개혁주의적입니다.

      

수십 년 전에 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개혁신학의 특징 중에 하나는 개혁신학이 매우 지적이고, 넓은 마음을 가졌고,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최근 몇몇 개혁주의 학교들은 마차를 쳇바퀴 돌리듯이 돌면서 더 넓은 세상과의 교류를 거의 혹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복잡하게 하는 것: 저자, 본문, 독자

      

그러나 다시 우리의 목표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찾는 것인데, 우리는 본문을 면밀하게 읽음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경으로 말하자면 문제는 지금까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독자를 봅시다. 지금까지 저는 21세기에 있는 우리를 독자로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성경 본문의 의도된 일차적인 독자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쓰인 책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쓰인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개별 성경책은 당시의 구체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지 그 청중이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아무것도 아닌 "로마서"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이를 로마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포로기의 청중을 위해 쓰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인데, 이는 "왜 우리가 포로로 잡혀 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포로 후기에 쓰인 역대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역사와는 왜 다른 모양새인가에 대해 설명을 제공하는데, 역대기는 "우리는 과거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가 당시의 질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역사로서 진지하게 여기기  

구약성경을 "인지적 환경"에서 읽으라

      

성경이 동시대의 청중에게 쓰인 사실은 또 다른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해석학적 논점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먼저 "인지적 환경" 속에서 읽혀져야 합니다. 이는 중요한데, 모든 유형의 오류를 피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창조 기사에 관해서 말하자면 존 월턴(John Walton)은 이를 매우 잘 다룹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을 고대 근동의 다른 경쟁적인 창조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구약성경을 이러한 다른 인지적 환경 속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이 고대 근동의 문헌에 심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은 우가릿, 수메르, 아카드, 이집트 문헌과 함께 공유하는 모티프, 은유, 장르를 사용합니다. 구약성경을 잘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고대 근동의 맥락 속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개혁신학에 대해 말하자면 고대 근동 문헌 연구가 우리의 언약의 이해에 가져다준 모든 놀라운 통찰들을 생각하십시오. 20세기 중반 성경의 언약과 히타이트와 신앗시리아 봉신 계약 관계 대해 이룬 업적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 개혁주의 서클 안에서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요지는 계약의 유사성을 발견했을 때에야 비로소 언약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저의 요지는 우리의 이해가 깊어졌다는 점입니다.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의 "버리트"(언약)라는 용어의 적절하지만 일반적인 번역입니다. 이는 두 당사자 간의 법적인 조약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버리트가 한 특별한 유형의 법적인 조약이란 것을 압니다. 이는 큰 나라의 왕과 봉신 나라의 왕 사이의 조약 즉 계약을 가리킵니다.

      

텍스트의 최종 형태를 해석하기

    

스트는 어떻습니까? 텍스트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아주 소수의 구약성경 책만이 한 개인이 한 번에 기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JEDP이론과 같은 어떤 역사비평적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역사비평은 나중에 더 다룹니다). 그러나 토라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견해조차도 텍스트에 대한 통시적 발전을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가 그냥 단순하게 모든 말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자가 "강 건너"(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요단강 동편 지역에 있는 강을 건너라는 뜻이다)에서 발생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편집적인 요소를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구전이나 기록된 자료로 사용된 창세기의 톨레도트(계보; , 세대들 혹은 후손들)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책의 모든 말을 한 번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주전 605(36:1)에 나온 제본뿐만 아니라 나중에 예레미야의 생에 중에 여러 제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예를 수없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가 성경의 책들이 저술된 역사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브레버드 차일즈가 비록 그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되는데, 교회에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책의 최종 형태를 말하는 것이지 추론의 과정에 의해 정확한 형태가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상상 속의 이전의 형태가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개혁주의 해석학의 원리는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성경의 최종 형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최종 형태가 한 사람 이상이 수반된 저작 과정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성경을 문학(문헌)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장르는 독서 전략을 촉발시킨다.

      

그러면 어떻게 최종 형태의 텍스트를 연구할까요? 우리는 장르로 시작합니다. 장르는 물론 많은 유사점들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저작의 맥락 속에서 개별 문헌 저작들을 연구합니다. 독서에 있어서 장르 확인 효과의 탁월한 실례가 이렇게 시작하는 아가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1:2-4)

      

주후 100년 랍비 아키바를 포함해서 성경 해석 역사의 초기부터 19세기까지 아가서는 알레고리로 읽혀졌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알레고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나타내는 남자와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여자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여자(이스라엘)는 남자(하나님)에게 그녀를 그의 침실로 데려가도록 요청하는데, 이는 알레고리의 논리에 따르면 약속의 땅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 1:2-4는 이집트로부터 출애굽을 묘사합니다.

      

오늘날 아가서를 이런 식으로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극소수일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19세기 이래로 아가서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사랑의 시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장르 확인의 변화가 일어난 주된 이유 중에 하나는 19세기에 고대 이집트의 사랑의 시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아가서를 이러한 인지적 환경 가운데서 연구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개혁주의 해석학은 성경 본문에 대한 올바른 확인이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장르 확인은 성경 본문이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는 우리의 성경 무오 교리에서 말하듯이 성경은 가르치려고 의도하는 바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를 방어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정말 대부분의 해석의 논쟁은 장르 확인과 함께 시작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역사인가, 신화인가, 비유인가, 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사"라고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 1-11장은 과거에 대한 정보를 주도록 의도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전체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톨레도트 공식과 봐브-연속법(waw-consecutive)의 사용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도록 밀고 갑니다.).

      

그러나 일단 결론에 도달하면 아직 끝나지 않습니다. 텍스트가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의도합니까? 결국 여기에 수많은 명백한 비유적 언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과 오리겐의 시기로부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날들이 비유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4일까지 해와 달과 별들이 없었는데 창조의 날들이 문자적인 날들이라고 누가 그렇게도 어리석어서 믿겠는가!"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 견해를 논쟁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새로운 창세기 주석에 창세기 1-2장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도록 의도하셨지 어떻게 그분께서 창조하셨는지를 가르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문체의 관례를 알라: 과묵한 해설자

      

장르 외에 개혁주의 해석학은 또한 고대의 히브리 내러티브와 산문체의 문학적 관습에 대해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제가 1980년도에 처음 구약 연구 분야에 입문했을 때 로버트 올터(Robert Alter)와 다른 사람들은 1세기 이상 동안 통시적 역사비평의 사랑을 받은 학자들에게 문학적 접근의 중요성에 대해 막 상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문화와 모든 시기는 이야기를 말하거나 시를 쓸 때는 다르게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은 올터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현대문학처럼 읽는다면 잘못입니다. 학자들이 구약의 내러티브를 마치 서구 문학처럼 읽을 때 (벨하우젠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모세오경에 의도된 자료를 구분하기 위해서 벨하우젠이 사용한 기준은 독일식이지 고대 근동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중어와 이중 이름들은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데, 다른 자료들을 조잡하게 끌어 모은 결과라기보다는 이들은 종종 내러티브에 중요성을 지닙니다. 족장이 부인의 신분을 속이는 이야기가 세 번 나오는 데는 내러티브의 목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이 사라를 이집트로 데리고 갈 때 사라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데, 창세기 20장에는 그가 그녀를 그랄로 데리고 가면서 두 번째 거짓말을 할 때, 그가 아직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정말 그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한 것을 인정합니다!). 나중에 이삭이 리브가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 때(26),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히브리 시와 내러티브의 관습을 열거하기에 시간이 부족하기에 제가 히브리 산문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큰 깨달음을 주는 것 한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히브리 이야기들은 거의 항상 이름을 밝히지 않은 3인칭 해설자의 관점에서 진술됩니다.

      

이 해설자는 공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비밀리에 된 것도 또한 묘사합니다. 문예적 연구에 있어서 이를 전지적 해설이라고 칭합니다. 이런 해설이 세속 문헌에도 발견되지만, 성경과 같은 거룩한 문서에서 이와 같은 해설은 신적인 관점에서 이야기가 되는 인상을 준다고 올터가 말한 것이 옳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전지적 해설자는 과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그는 말하기보다는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는 특히 사실인데, 평가뿐만 아니라 인물의 동기의 견지에서 현대 독자들을 종종 좌절시킵니다.

      

동기의 견지에서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의 예를 들자면,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송아지 신전을 향해 대언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 이야기꾼이 무엇이 어떤 인물을 동기화했는지 우리에게 알리는 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야기가 의도한 메시지에서 빗나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참 선지자라는 사실이 명백한데,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점과 여로보암의 손이 마르게 하고 제단이 쪼개지는 표적이 그의 말과 함께 동반된 점을 볼 때 그렇습니다(신명기 13장과 18장에 나오는 선지자의 규정을 보세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하나님의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실을 곧 알게 됩니다. 그는 남쪽 선지자였는데, 그가 유다로 돌아올 때까지 어떤 것도 먹지 말도록 말씀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옳게도 여로보암이 궁전에 돌아가서 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한 "늙은 선지자"가 그를 데리고 가는데, 그는 말하기를 그가 하늘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는데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젊은 선지자가 그와 함께 집에 가서 식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젊은 선지자는 그렇게 했는데, 그러나 식사 중에 늙은 선지자가 일어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다고 규탄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선지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자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현대 독자로서 이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도대체 무엇이 늙은 선지자로 하여금 젊은 선지자를 이렇게 유혹하도록 만들었는지 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으로 빗나가게 된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열왕기는 왜 유다가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선지자의 규정을 포함해서 신명기의 관점에서 유다의 역사를 평가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젊은 선지자는 늙은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즉시 알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젊은 선지자가 이전에 받았던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배가 고팠고 먹고 싶어서 원래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어려운 메시지보다 늙은 선지자의 즐거운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젊은 선지자는 회개라는 어려운 일로 유다를 부르시는 말씀보다 즐거운 말을 하는 선지자의 말을 쉽게 듣는 이스라엘처럼 행동했습니다.

      

제가 든 두 번째 실례는 평가의 영역에 있어서 내러티브의 과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해설자는 이야기의 인물의 행동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전형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면밀하게 보는 읽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창세기 34장은 좋은 실례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겜의 족장에 의한 디나의 강간과 관련이 있는데, 그는 강간 후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디나의 형제인 레위와 시므온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와의 결혼 협상에 야곱과 동참합니다.

      

대응책으로 레위와 시므온은 그들의 가족들이 함께 결합되려면 그 도성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외관상 세겜의 디나에 대한 욕망이 너무나 강해 그는 동의했고 이어서 사람들과 얘기해서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리라는 점에 호소함으로써 동의하게 했습니다. 결국 만약 결혼이 성사되면 "그들의 가축과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모든 다른 짐승들"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34:23). 야곱의 가족으로서는 그들이 그 땅에서 살 수 있고, 그곳에서 장사할 수 있고, 재산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10).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모두 압니다. 대규모의 할례 이후에 남자들이 약할 때, 레위와 시므온은 도성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대량 학살합니다.

      

야곱은 정신을 잃고 화를 냅니다. 그는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레위와 시므온의 행동에 대한 야곱의 느낌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저자와 가장 가까운 관점을 갖고 있는 해설자는 어떻습니까?

     

비록 미묘한 것이지만 저는 해설자가 이 문제에 대해 레위와 시므온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결국 해설자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통제하는데, 히브리 해설자는 종종 대화를 제시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 그는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야곱에게 주지 않고 레위와 시므온에게 줍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1)라고 말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왜 해설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형제들 편에 서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이런 식으로 했더라면 그는 자기 가족을 지역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시켜 버렸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인정하시지 않으셨을 것인데, 왜냐하면 선택된 가족은 죄악된 가나안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해석의 원리는 우리는 독자로서 히브리 내러티브와 시적인 문체의 문예적 관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 해설자가 이야기의 표현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앎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의 예를 들었습니다. 시의 견지에서 이는 대구법, 이미지, 부차적인 시적인 장치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문학적 성격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계속하기보다는 역사와 문학 다음으로 3번째 주요 주제를 다룰 차례인데, 이는 신학입니다.

      

구약성경을 신학으로 진지하게 다루기

      

결국 신학은 성경적 메시지의 심장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 피조물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다시 이는 깊고도 멀리 영향을 주는 주제입니다. 저는 21세기 개혁주의 해석학에 관한 몇 가지 논점을 단순히 강조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제적 역사나 정치적 역사나 군사적 역사가 아니라, 신학적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신학적 역사는 창조와 타락에 대한 묘사와 함께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 피조물들과 화해를 열정적으로 도모하심에 따라 이미 [창세기] 3장의 중간에서 구원의 역사가 되어 버립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서 지속되고 신약성경으로 계속됩니다. 한편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이야기에서 구원의 성취를 선언하지만,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과 영적인 악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그리스도 재림 시까지 '이미와 아직 아닌'(already-not yet)의 구원입니다.

      

환언하면 구원의 이야기는 계시록 20장까지 계속 되는데, 완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마지막 두 장(21-22)에서 이루어집니다. 비록 성경의 묵시론 부분은 이 완성을 확실히 예기하지만 말입니다.

 

개혁주의 해석학은 언약이란 성경적 개념의 중요성을 항상 인식해 왔고 마땅히 그렇게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언약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노아, 이어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예레미야 31:31-34에서 예기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언약들을 성취합니다.

      

여기서 언약의 성경적 개념이 해석자로서 우리에게 던지는 모든 질문들을 다룰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 언약의 개념에 대한 개혁신학의 강렬한 관심을 긍정하면서도 언약에 너무나 심취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많은 다른 은유들을 보지 못하는데 대해서도 경고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어떻게 언약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해가 조약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은유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유일한 은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수의 은유들

      

과연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다수의 은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고 계신 왕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그의 아내 이스라엘과 결혼 관계를 맺고 계시는 남편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그의 양을 안내하고, 돌보고, 보호하시는 목자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악의 세력과 대항해서 전쟁으로 인도하시는 전사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소수의 성경 구절들에서는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또 다른 소수의 구절들 속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의 백성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여성의 은유를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의 학생들에게 말하는 지혜 여인이라고 불리는 교사요, 그녀는 자기 학생들에게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요청합니다.

      

이들 은유 각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다른 면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들 은유들의 의미를 완전히 캘 수 없는데, 왕적인 은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결혼 은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해 갖고 있는 친밀하고 독점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목자의 은유는 말한 대로 그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인도, 보호, 공급하심을 강조합니다. 전사의 은유는 또한 재판장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역할을 강조합니다. 부모의 은유는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과 관심을 또한 강조합니다. 지혜 여인의 이미지는 또한 친밀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교사로서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강조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신학적 은유들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든든하고 균형 있는 이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언약의 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단지 멀리 계시고 명령하시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약의 은유를 잊고 긍휼을 강조하는 은유들을 강조하면 지나치게 친근한 하나님의 관점을 아마 발전시키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은유로 계시하시는데 이유는 자신께서 너무나 위대하셔서 은유(하나님을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비교하는 것)가 자신의 성품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관계 속의 하나님

      

이런 은유들이 모두 관계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정말 성경에 충실한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관계적으로만 말하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하나님은 관계가 필요치 않음이 사실이지만(소위 말하는 자존성의 교리), 성경은 하나님을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시는 분으로 계시합니다. 이들 은유는 또한 전폭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종종 말씀하신다는 것이 사실이지만(소위 의인화와 신인 동감 동정설),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묘사는 우리 인간의 감정이 하나님의 감정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그가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무감정의 교리(doctrine of apathia)를 지지하지 않는데, 이를 하나님께서 감정을 갖고 계시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웨스턴신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토드 빌링스(Todd Billings)가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무감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꽤 성경적인 사상을 방어하는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의 감정은 멋대로 하거나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 구약성경의 중심과 목표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이제] 성경의 신학적 연구라는 탐구에 있어서 두 번째 중요한 논점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는 쉬운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실제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이후 그러나 그의 승천 이전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을 올바로 읽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두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이 두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 그렇게 낙심하고 혼란되어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렇게도 큰 희망을 걸었던 분이 방금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인데 그런데 그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이 있었다고 그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중요한데 잘 들어 보세요.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4:25-27).

      

조금 후에 예수님은 더 많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24:44-45).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본질적인 해석학적 원리로 인도합니다. 구약성경을 읽는 기독교인 독자는 구약의 본문을 그리스도의 오심의 견지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성경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중요한 논점에 관한 몇 가지 논평

      

본문을 "인지적 환경" 속에서 읽는 것에 대한 이전의 논점을 상기시키자면 우리는 먼저 구약성경을 이러한 옛날 맥락 속에서 읽는 데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원래의 저자와 원래의 독자의 위치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브레버드 차일즈(Brevard Childs)가 소위 말한 구약성경의 구분된 증언을 놓칠 수 있습니다.

      

[원래 저자와 독자는] 자신들의 말에 대한 충만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 저자의 의식적인 의도에 포함된 것보다 더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가 존재합니다. 신약성경은 종종 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에게서 이를 볼 수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비록 신약에 나타나지만 그는 구약 형()과 같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옳게도 메시아를 쭉정이를 불태우고 썩은 나무를 잘라 내는 분의 오심으로 선포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의 충만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 요한은 자신이 엉뚱한 사람에게 세례 준 것이 아닌지 염려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불태우는 것이나 도끼로 자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11). 바꾸어 말하자면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이 두 부분으로 구성된 사건임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신약의 묵시 부분이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님 초림이 아니라 재림 시에 재판장으로 오실 겁니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레그 빌(Greg Beale)보다 피터 엔즈(Peter Enns)에 대체로 동의하는데, 그레그 빌은 구약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미래의 성취를 의식적인 의도로 (비록 그것이 그의 "인지적 주변적 비전" 속에서이긴 하지만) 항상 갖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에 인용된 많은 구약 본문들에 대한 편견 없는 해석을 통해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발생한 이후에야 구약성경이 예수님과 같은 메시아를 고대한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라고 제안한 것은 피터 엔즈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기억하십시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들은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구약성경은 예수님과 같은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2) 구약성경을 십자가와 부활의 견지에서 읽는 것이 우리의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만들고 확장시킵니다.

      

더 많은 것은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지만, 제 생각엔 개혁주의 해석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여기에 인용하면서 요약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자신을 우리의 시공간의 역사로 들어오시는 분으로 계시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의 역사적 맥락 즉 "인지적 환경" 속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대 근동의 언어, 문화, 문학에 대한 학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러한 원래 청중의 언어와 문체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원래 저자와 독자들의 옛날 장르와 문체에 정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자신을 그의 역사적 행위와 관계의 은유를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은유들 중에 하나나 둘이 아니라 모두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들 은유들은 철저히 관계적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배우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4. 구약성경 전체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성경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지하게 여겨야 하고, 어떻게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마지막 말: 기도와 성령 충만한 해석

     

이제 모든 것을 말한 후에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을 남겨 두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삼위의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 요청하면서 기도 속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씨라고 합니다. 이는 성장과 변화의 잠재력입니다.

      

그러나 이는 마법과 같은 과정이 아니기에, 그냥 읽는다고 승산이 없습니다. 씨를 좋은 토양에 심어야만 하는데, 이는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난도질해서 안 되고, 성경이 우리를 해부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위에 서서는 안 되고, 성경이 우리 위에 서게 해야 합니다.

      

번역 /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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