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by reformanda posted Feb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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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홀로 집에서 지내는 동안 <찬송가>(한국찬송가공회, 2006)에 담긴 노래들을 열심히 불렀다. 성경을 통독하듯이 찬송가를 큰 목소리로 통송했다. 찬송은 언제나 나에게 은혜 충만을 선물한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에 예배 찬송, 회중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찬송시가 있어 보인다. 한국의 진보계 기독교인들이 즐겨부르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찬송가 582)이성공회 성가집에도 수록되어 있다(568).

 

김재준 목사가 지은 이 찬송 시는 찬송가에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가 예배 중에 부를 회중 <찬송가>의 곡 선택을 정치적으로 하거나 탈기독교적인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선정하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교회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는 이 마당에 무슨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찬송가 타령'이냐는 질책이 있을 법하다. 예배 드리기가 자유로운 상황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은 성경과 신앙고백에 부합하는 예배와 찬송을 기뻐하신다.

 

1.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김재준 목사(1901-1987)가 작사하고 이동훈 선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암울한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새 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했다한국 진보계 기독교권의 큰 사랑을 받아 왔다.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 노래들 가운데서 진보계 개신교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1)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 간다

 

2)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작사자 김재준은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계 신학자이다. 1940 조선총독부 울타리 안에서 신사참배, 우상숭배를 마다하지 않고 충량유의한 황국(皇國)'교회사' (敎誨師) 양성이라는 목표로 시작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1953년에 독립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이끈 동력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제자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등 민중신학자들을 길러냈다

 

위 시의 제3절은 문익환 목사(1918-1994)가 지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구약신학자이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성경'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위 찬송가의 3절을 쓴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폭력에 저항하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는 1989년에 대한민국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 신학, 정치에 일관성을 유지해 왔다.

 

2. 문성모의 범주착각의 오류

 

독일에서 예배학과 음악학을 전공한 문성모 박사는 김재준의 위 노래 말을 치하한다. 장공 김재준의 찬송 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어둔 밤 마음에 잠겨 가사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 2017.3.)라는 글에서, 위 시에는 그의 신학사상이 함축적으로 엑기스처럼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아주 훌륭한 찬송임을 전제로 하는 말처럼 보인다.

 

문성모에 따르면, 위 노래는 김재준의 수평적 사랑을 통한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민족 교회는 김재준의 신학사상의 두 축이다이 둘은 하나이며영원한 순례를 위한 동반자이다위를 향하여 끝없이 열려 있는 길을 가는 순례의 사상”, “긍정을 향한 끝없는 변혁” 사상을 담고 있다.

 

문성모는 서울장신대학교 총장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교회음악 전문가다운 비평적 논의 대신 김재준의 삶의 족적을 위 노래 말에 대입하여 탁월성을 뒷받침하려고 시도한다'찬송 시' 찬송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인지, 회중찬송으로 적합한지, 이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다루지 않는다. 언급하지도 않는다.

 

문성모의 논증과 추리는 범주착각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한다. 특정인의 훌륭한 삶과 사상이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의 탁월성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김재준의 삶과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신학사상이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쓴 '찬송 시'가 반드시 훌륭한 찬송가이며 예배 시간에 부르기에 합당한 회중 찬송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친다. 찬송, 찬송가, <찬송가>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범주착각의 오류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오류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을 그렇다고 가정하고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오류이다. “신부님이 에이즈에 걸렸겠어?”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이 고작 만년필 한 개를 훔쳤겠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같이 착한 사람이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 “예쁜 버섯에 독이 들어 있을 리 만무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월북자가 지은 동요는 악하다" 식의 논증이다김재준의 노래 글의 가치를 그의 삶과 사상에서 찾으면 오류 판단을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이 글이 지적하는 것은 김재준의 삶이나 신학의 탁월성 여부가 아니라 문성모의 추론과 접근 방법이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장과 근거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작품의 위대성과  작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대부분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별개의 사안인 경우도 있다. 대부분 작품은 그 것의 작가의 삶을 담아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예컨대 존경받는 칼 바르트의 신학작품과 그가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던 삶 사이애는 괴리가 있다. 바르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바르트는 "샬롯떼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재2차 세계대전 동안의 폭력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는 보통 사람의 눈에 아주 자애롭고 자비로운 영웅으로 비쳐졌다고 한다. 찬송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위 '찬송 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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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찬송, 찬송가의 조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이 노래의 가사는 찬송 또는 찬송가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hymn)이 아니다.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찬송가'(hymnal songs)도 아니다. 교회신앙실천선교의 책임 등을 노래하는 복음송도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는 애국가 정도의 고백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찬송가>에 포함되거나 회중찬송으로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다.

 

'찬송'(Hymn)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찬미의 노래이다하나님께 올리는 직접적 찬미이다.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영혼의 노래이다. 대부분 <찬송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찬송가'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노래이다. 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고 기독교 교리-신학에 부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찬송가>에는 성경적교리적신학적 검증 과정을 거쳐 확인된 것들이 수록된다. 모범적인 찬송시는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과 목적을 담고 있다

 

개혁파 교회 전통의 유산 가운데 하나는 시편에 곡을 붙인 '시편 찬송'이다. 찬송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찬송 시의 인본적인 요소들을 경계하던 신학자 존 칼빈 시대의 제네바 지역 개혁교회가 불렀던 찬송은 당대의 곡에 시편의 아름다운 시들을 붙인 것이다. 그러한 찬송가 중의 하나가 '제네바 시편송'(Genevan Psalter)이. 성경의 시에 중세기 동안 교회가 불러 온 '그레고리안 찬트'의 음조와 비슷한 멜로디를 수반하고 있다.

 

나는 한국의 장로교회 토양에서 자라나 영국국교회(성공회), 루터파 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동방정교회 예배 음악을 두루 접했다. 흑인영가와 트로트를 연상시키는 기도원의 뽕짝조 예배 음악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유형의 예배 음악을 폭넓게 접했다. 필자는 종종 복음송(gospel songs)을 즐겨 부른다. 6세기에 만들어진 '그레고리안 찬트'도 즐겨 듣는다. 시편에 곡을 붙여 찬송하는 '시편 찬송'을 존중한다. 

 

복음성가로 일컬어지는 현대 교회음악(CCM)은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 찬송, 찬송가의 멜로디는 진리와 고백을 담는 그릇이고 다소간 당대 문화의 변화를 따르므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대 교회 음악 가운데는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운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곡들이 있다. 필자는 드럼, 기타, 피아노, 키보드 등을 일시에 사용하여 예배 참석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音惡)에 거부감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현대교회음악과 함께 춤추며 노래한다. 춤추며 찬양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넌 뒤 구원받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춤추며 찬양했다. 여러 가지 악기 연주와 함께 큰 소리로 찬양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며, 현금을 뜯고 피리를 불며 찬미하여라"( 150:3-4). 출애급 당시의 찬양 춤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몸동작이었다.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기쁨에 충만하여 몸과 입술로 찬미를 올린 것이다.

 

신약성경은 악기 연주와 춤을 병행하는 찬양이나 예배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세기 말의 타볼파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견해를 가진 교회들은 춤은 커녕 예배 중 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신약성경에 그러한 모범이 없으며, 그렇게 하라고 하는 적극적인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찬송을  지속적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오늘날의 교회 안의 젊은이들은 음악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감동을 받은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음악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수단인가? 악기 연주, 노래, 춤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고 기쁨이나 격앙된 감정에 도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시도는 환영할 만하지 않다. 교회 음악에서 조차 우리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가르침에 따름이 바람직하다. 

 

4. <찬송가>, 회중 찬송 모음집

 

우리가 예배 때 사용하는 <찬송가>(Hymn Book)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세기 수도사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1091-1153)가 작곡한 "구주를 생각만 해도"(85장) 등 3곡을 포함하여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미국의 부흥운동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찬송가>는 하나님께 올리는 한국교회의 회중 찬송 모음집이다. 개인의 삶이나 민중신학, 해방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을 선전하는 노래집이 아니다. 민중예찬 또는 인본주의 신념을 노래하거나 인간을 칭송하는 노래집이 아니다인간위인, 황제, 민중, 민족, 나라 따위를 찬양하는 노래 책이 아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토착신학, 상황신학, '좌파' 정치신학 추종자들이 김재준의 위 시를 찬송가에 포함시키는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불가능하다. 나의 주장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아니라 감정적인 반발에 앞서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와 찬송에 대한 신앙고백적 규명이 요구된다.

 

구약성경은 "찬송"을 151, 신약성경은 48회 언급한다.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송의 대상으로 삼는다어거스틴은 시편 148편을 주석하면서 찬송을 정의하기를 찬송이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만일 하나님이 없이 다른 무엇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톨레도공의회(633) “찬송은 세 가지 요소 곧 노래, 높임,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다고 정의했다이러한 조건을 갖춘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찬송을 기쁘게 받는다고 했다. 

 

6. 우미유가바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일제말기 한국교회들이 매 주일 예배 중에 불렀던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를 떠올리게 한다. 1937년에 작곡된 일제의 국민계몽용 '애국송'인 일본 가곡이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노래이다

 

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뒤는 돌아보지 않겠다”(海行かばづくかばね山行かばむす屍大君へにこそなめみはせじ).

 

한국교회는 일제말기에 여러 해 동안 나라의 임금 곧 일왕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겠다고 '찬송'했다. 교회가 주일 예배 중에 '우미유가바'라는 이름의 '애국송'을 합창했다. 한국교회 예배당에서 우미유가바가 합창되는 동안 조선의 젊은이들은 악랄한 일제의 '대동아전' 전선으로 끌려갔다. 날라오는 총알의 뱡탄막이가 되었.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몰아 태펑양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와  일제의 '우미유가바'의 역사적 배경은 다르다. 그러나 같은 점들이 많다. 모두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아니며, 국민계몽용 노래 또는 애국송이며, 예배 중에 부르는 찬송이나 노래로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찬송가>에 수록되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은 신학적 검증을 거친다.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듯하다. 예장 합동 제73회 총회(1988)는 찬송가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이 곡(통일찬송가 261)을 교단 산하 교회들이 부르지 않도록 했다. 2008예장 합동만이 아니라 예장 통합 인사들까지도 이의 제기했으나,  <찬송가> 편집 위원회는 이를 무시하고 이 곡을 또 다시 찬송가에 수록했다. 찬불가를 작곡한 나운영 장로의 곡은 삭제하고, 찬송, 찬송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김재준의 위 노래 글을 담아 발행했다. 진실성과 정직성에 반하는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으로 보인다.

 

6. 금주가

 

한 때 찬송가에 포함되었지만 찬송가답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의 <찬송가> 편집에서 탈락된 것으로 추정되는 곡들이 있다. 대표적인 '찬송'은 금주가”(1917)이다. 이것은 국민 계몽, 조선 젊은이 선도용 노래였다기독교사회운동 맥락에서 만들어졌다이 노래의 작시 작곡자 임배세는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감리교인이다. 이 곡은 1923년에 청년찬송가, 1931년에 신정찬송가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합동으로 만든 합동찬송가(1949)에 포함되었다가 1963년에 출간된 개편찬송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사회의 뿌리 깊은 조상신 숭배악습허례허식축첩음주흡연 등의 폐해를 고치려고 청빈금연금주 등을 강조했다일제치하의 기독교절제운동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고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동기로 예배주일성수효도순결근면정직-도박-아편 금지 등을 생활강령으로 제시했다. 국민계몽용으로 만들어진 금주가가 찬송가에 포함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마지막 절은 “천부”(heavenly father)'국가'를 언급한다. 전자는 창조자 하나님이고 후자 곧 '국가'는 일제 (日帝)를 지칭하는지 일제에 병합된 속국 대한제국(1897-1910)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사라졌고, 대일본제국에 병합되었다. '우리 나라'의 이름은 대일본제국이었다.  일제의 어용 조선 국왕은 1945년 일제가 패방할 때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에 수립하면서 대한이라는 국호를 다시 사용했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취지였다. 1948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같은 이름을 계승했다. 

 

금주가(1917)의 '국가'는 대한제국이 아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한제국은 1910년에 외교권 박탈당하고 국가 기능을 상실했다. 그렇다면 금주가가 언급하는 '나라'의 명칭은 무엇인가? 일제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민중의 의식에는 자신들의 '국가'가 조선 왕실과 더불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노래에 등장하는 '나라'는 민족 구성원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나라를 지칭하는 것을 수도 있어 보인다. 후렴의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가 이를 암시한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2) 팽가망신 될 독주는 빛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태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마시지 마라 그 술,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한국교회 최초의 <찬양가>(1894)의 4장은 "주 하나님 찬미"(讚美主帝)이다. 이 노래 말은 당시의 기독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찬미가>(1905) 14장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로 시작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애국가 가사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자의 보호를 소망하는 믿음을 담고 있다. 위 두 곡도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에 발간된 찬송가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7. 맺으면서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민족사랑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담은 노래 글이다. 일종의 민중예찬가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칭송한다. 하나님 찬미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위 '찬송 시'가 함량미달이거나 수준이 낮다고 폄하하고 있지 않다. 찬송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예배 중에 부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으며 또한 <찬송가>에 수록함이 부당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찬송가는 아무 곡이나 시를 담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들의 모음집이다. 회중이 예배 중에 이 민중예찬가를 합창함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며, 신성모독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교회 정신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순전한 신앙, 진실된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 찬송가를 정성을 다하여 부르기를 희망한다.

 

 

최덕성 박사 (브레드유니버시티 대표. 현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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