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의 개혁신학

by reformanda posted Jul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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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와 롤라즈 전도자들

 

존 위클리프의 개혁신학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후기 신앙운동과 신학자들이 놓은 주춧돌 위에 건축된 장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프랑스의 왈도,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얀 후스,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네덜란드 지역 베젤의 요한,17 독일북부의 베셀과 고흐 등이 종교개혁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도덕 개혁가 사보나롤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회의 의식과 교리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요청하고 나섰다. 고요한 방법으로 삶의 정화(淨化)를 추구한 독일 신비주의자들과 같지 않았다. 교리 개혁에는 무관심하고 교회법 체계의 개선에만 관심을 쏟은 행정가 집단과도 구별되었다. 위클리프와 그의 신학사상의 계승자들은 교리 개혁자들이었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새벽별,” “복음 박사라고 불렸다. 교리개혁에 이바지한 그의 신학사상은 네 가지로 집약된다. 주권, 성경, 교회, 성찬 주제이다. 지상의 지배권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온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될 때만 정당성을 가진다.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황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성찬식 축성 때 빵과 포도주가 변한다는 화체설은 미신이며 옳지 않다. 이러한 신학 발상은 로마교회의 체제와 구조를 허물 수 있는 강력한 도전이었다.

 

1. 주권

 

위클리프의 중심주제는 하나님만이 만물과 교회와 세상의 주인이라는 주권사상이다.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의미의 주인이 아니다. 하늘의 주께서 신적 은혜를 베풀면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주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은 다만 청지기일 뿐이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과 필연성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지상(地上)의 모든 주권들의 근거이다. 종교적 세속적 지배자는 만물의 지배권을 가진 하나님의 권한 가운데서 극히 일부분을 빌려왔다. 그러므로 올바른 권한,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된다.

 

위클리프에 따르면, 모든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된다.18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된다. 그렇지 않은 통치권은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아무리 합법적인 통치라도, 그 권위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통치자가 자기의 영역 확장을 목적으로 행사하는 지배권은 옳지 않다.19 이는 권한을 부여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권력을 가지는 교회권력은 정당하지 않으며 비합법적이라고 했다.

 

위클리프는 합법적 통치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주권(Lordship)과 지배권(Dominion)이라는 용어들을 도입했다. 옥스퍼드 사역 초기에 강의한 내용을 담아 펴낸 한계선(Determinatio, 1374), 하나님의 주권에 관하여(De dominio divinio, 1375),20 세속주권에 대하여(De civilio dominio, 1376)21가 이와 같은 사상을 담고 있다.

 

위클리프의 주권 사상은 주로 교황을 의식하고 있다. “시민적이거나 교회적인 모든 권한은 그 소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동안만 정당하게 지탱할 수 있다.”22 만일 교회의 주권자인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다시 말하자면, 기독인답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경우에 그 권한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없고, 세속 권력이 그것을 빼앗을 수도 있다.”23 그리스도는 교회에 세속적 과제들이 아니라 영적 사안에 제한하여 권세를 주었다. 위클리프의 이 주장은 파두아의 말시글리오와 오캄의 윌리엄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위클리프는 로마교회의 통탄할 취약점이 돈을 사랑함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제들과 탁발 수도사들이 일시적인 수입을 노리고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사실을 포착했다.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 때문에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고, 고백 신부봉사의 대가로 탐욕스럽게 돈을 청구한다. 자신들을 살찌우는 부적절한 토지로 그리스도의 법을 훼손한다. 부와 세상의 명예에 집착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악한 것은 경솔하게 그들을 믿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멸망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24 위클리프는 하나님께서 종교인들이 교회당과 수도원 건물 안에 숨어 있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25

 

위클리프의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De poteste pape, 1379)는 교황제 공격을 재개하고, 교황직을 규탄한다. 교황제도는 신적 터전 위에 있지 않다. 청빈한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교회의 타락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속권력이 교회에 거대한 부와 세력을 보장해 주자, 교회는 변질되고 부패했다. 국가가 성직자들의 수입에서 세금을 징수함은 정당하다. 성직자는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로 만족해야 한다. 가난에 대한 탁발 수도사들의 주장은 옳다. 황금으로 치장한 수도원과 교회당을 정당화 하는 성경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위클리프는 1378년에 시작된 교황을 둘러싼 교회 갈등과 경건하지 않은 성직자들의 행태에 환멸감을 느꼈다.

 

위클리프는 이 맥락에서 국왕에게 제국적 성직자직무 태만의 교회를 몰수할 책임이 있고 은혜의 사제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국왕이 교회의 머리일 수 있으며, 국가가 교회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발상은 중세 유럽의 사회적 구조를 재편성하는 엄청난 도전이다. 영국 왕실이 위클리프에게 우호적이었던 까닭을 엿볼 수 있게 한다.26 당시의 영국인들은 이 주장을 증오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이 사상은 헨리 8세 중심의 영국종교개혁과 오늘날까지도 세속 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로 존속하는 영국국교회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아비뇽 교황청은 프랑스왕국의 꼭두각시였다. 교회세 징수와 교황의 세속권력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겪고 있던 영국 왕실은 위클리프의 주장을 환영했다. 교황청은 위클리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세속 권력자들은 그를 환영했다. 위클리프가 주창하는 사상은 세속 권력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해당되기 때문에, 국가와 정부의 권력자들은 위클리프에 대한 지지를 서서히 철회했다. 국왕이 권력을 백성들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는 까닭이었다.

 

2. 성경

 

교황좌를 둘러싼 음모와 공의회운동은 유럽인들에게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 권위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이해를 확산시켰다. 어거스틴은 성경의 권위가 모든 지적 자료들에 비해 월등히 높음을 강조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이해에 관한 자신의 작품에서 계시된 진리와 차갑고 명료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이성의 양립이 어려움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로마교회가 두 명의 교황의 등장과 암투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내놓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하여(De veritate sacrae scripturae, 1378)는 로마의 교회제도에 성경적 기초가 부재함을 거칠게 지적했다. 세속 정부가 영국 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을 송두리째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27

 

위클리프에 따르면, 성경의 권위는 교황보다 더 높다. 성경은 모든 진리의 원천인 신적 이해라는 영원한 논리의 구현체다. 성경은 창조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의 주요원천이다. “모든 법, 모든 철학, 모든 논리, 모든 윤리가 성경 안에 들어있다.”28 피터 왈도와 왈도파 복음전도자들이 교황 권력보다 성경이 높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했으나 이를 학문적으로 정립하지는 않았다. 위클리프는 신앙과 행위의 최종 권위가 성경임을 지적으로 체계화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이 모든 인간 언어의 표본이며, 영원한 보편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제시되어 꽃피어야 한다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29 성경의 진리 이해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 번째 요소는 독자의 마음속에 성경이 품고 있는 영원한 진리를 조명하는 성령의 활동이다. 두 번째 요소는 어떻게 성경 속의 단어들이 영원한 진리를 말하는가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에 충분한 논리학과 문법을 배우는 학업이다. 기독인은 이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안에 있는 진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줄 또 다른 권위 있는중개자 곧 교황이나 전통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 전부는 인간 저자들의 적절성 증명에 어떠한 다른 저작들보다 절대적으로 큰 권위를 지닌다.”30

 

위클리프는 처음에는 교회의 전통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점차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한 시각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31 그는 교회의 타락을 혐오하면서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전통이나 종교 권위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준 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도록 준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기독교의 교리와 교회생활의 유일한 표준이다. 위클리프의 이 확신은 교황제도에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확신으로 연결된다.32

 

위클리프는 성경을 교회와 교황의 소유물로 보는 로마교회의 견해와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교회는 모든 택정(擇定)된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경은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야 한다.33 이 맥락에서 위클리프는 성경의 중요성과 백성들의 갈망을 채우는 자국어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영국 링컨의 감독 그로스테스트와 스콜라주의 철학자 오캄의 윌리엄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중요한 권위라는 사상을 펼쳤다. 위클리프는 성경이 전통이나 교회와 같은 여러 권위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지 않았다. 모든 권위들보다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거스틴, 제롬, 성인들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충족적이고 최상적이다”34라고 했다.

 

당시의 교회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했다. 성찬 중심의 예배는 라틴어로만 진행되었다. 단일성을 덕목으로 여긴 중세유럽 기독교사회는 라틴어가 유일 최고의 언어이며, 천국 공용어라고 믿었다. 새들도 라틴어로 노래하고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다수의 유럽인들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다. 이 때 위클리프는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의 메시지가 영국인의 마음에 스며들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려면 성경이 자국어로, 영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했다.

 

신약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것을 단순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성경을 완전하고 진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분별력을 열어주실 때처럼 우리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가르쳐준다.”35

 

영어 번역 성경의 필요성을 일깨운 위클리프의 주장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교회개혁 그 자체였다. 탁발 복음전도자 피터 왈도가 프랑스어 성경을 번역하게 하고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펼친 것처럼, 위클리프는 성경 영어 번역을 독려했다.

 

위클리프는 라틴어판 벌가타 성경의 영역에 이바지했다.36 영어 성경을 읽는 평신도들은 사제들보다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했다. 성경 영어 번역의 꿈은 윌리엄 틴데일 등 추종자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자국어 성경은 롤라드파와 후스파 신앙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후기 기독교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고, 최종 권위라는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어지는 교회개혁운동의 주지였다.

 

4. 교회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증대되는 영국인들의 혐오감을 의식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성경의 권위에 관한 신학저작물을 내놓은 그 해에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 1378)를 펴냈다. 교회를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계급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가시적이며 이상적인 실체로 여겼다. 교회를 가시적 조직체와 불가시적 영적 실체로 나누었다. 이 관점에는 어거스틴의 교회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위클리프에 따르면, 가시적 교회에는 성도와 죄인, 택함을 받은 자와 버려진 자가 함께 있다. 그러나 불가시적 교회 곧 참 교회는 유형적인 계급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교회는 구원받도록 택정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무형의 몸이다. 우주의 터전이 놓이기 전에 예정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교회 곧 불가시적인 우주적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 누가 예정을 받은 사람인지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시적인 교회가 세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죽어 하늘에 있는 성도들로 구성된 승리한 교회, 예정 받은 자들로 구성된 이 땅 위의 전투적인 교회, 연옥에 있는 자들로 구성된 잠자는 교회다.

 

위클리프는 실재론 철학 사상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마음속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보았다.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에는 선택을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는 바 그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자들의 경건한 삶과 순종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타인의 복지에 힘쓰고 이기적이지 않은 헌신으로 나타난다. 누가 선택 받는 자인지, 구원을 받은 자인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기독인은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위클리프는 목회자가 반드시 덕스러운 행동으로 자기의 신도들을 교화시켜야만 한다. 그래야만 신도들이 목회자처럼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37고 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구원에 해당하는 자인지 아닌지는 삶의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비록 가장 높은 직위인 교황조차 구원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교황이 선택을 받은 자에 해당하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간다.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을 보고 선택 여부를 짐작할 수 있다.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교황일지라도 예정의 은총 아래 있지 않으며,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위클리프는 당시의 교황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38 교황도 하나님의 구원과 무관할 수 있다고 하는 이 파격적인 사상은 로마교회와 날선 대립각을 세웠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사제들에게 사면(赦免) 권한이 주어져 있다고 하는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사제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함은 거짓 주장이다. 그것은 교황이나 사제가 베풀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모든 죄에는 해당된 형벌이 따른다. 아무도 형벌을 면제받을 수 없다. ‘고백성사에 시행하는 사면 제도와 교회의 면죄부 제도는 교황이 만든 창고에 남아도는 공로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만이 사면의 은혜를 베풀 수 있다. 하나님도 만족함 없이는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교황이 면죄권, 사면권을 소유했다면 마구잡이로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39

 

위클리프의 교회관은 여러 명의 교황들의 난립으로 말미암아 추락된 교황의 이미지와 교회의 권위 그리고 스콜라주의 실재론 철학과 연관되어 있다. 참 교회를 불가시적인 신앙고백공동체로 보는 성경적 교회관은 가시적 조직체를 절대시하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조화를 이룰 수 없고, 공존, 병존도 불가능했다.

 

4. 성찬

 

위클리프의 성찬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교황 인노센트 3세의 지도 아래서, 4차 라테란공의회(1215)는 성찬식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화체설을 공식교리로 선언했다.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향하여 사제가 축성축복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빵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환된다.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 때 실제로 본질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바뀐다고 했다.

 

위클리프는 배교에 대하여(De apostasia)성찬론에 대하여(De eucharistia)에서 로마교회를 비판한다. 이는 1379년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성찬론화체설은 합리적이지 않고, 미신을 조장하며, 성육신 원칙에 저촉된다고 한다.40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화체설에 따르면 빵이 빵이기를 그만두는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변환이 일어나려면 대상이 필요하다. 만일 빵의 본질이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시작된다면 사물을 사물 그대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자연지식의 확실성이 붕괴된다. “어떻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물체 XX의 인식가능한 부수적 성질인 다른 Y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41

 

실재론 철학을 선호한 위클리프는 화체설이 가현설(假現說)과 대동소이하다고 보았다. 가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으로 오셨음을 부인한다. 화체설은 이와 마찬가지로 주께서 참 물질인 빵과 포도주에 임재함을 부인한다. 위클리프는 축사 후에도 빵은 여전히 빵이고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라고 했다. 빵과 포도주의 입자가 전멸하고(annihilate)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완전히 바뀐다고 함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했을 때 신성의 임재가 인성을 파괴하지 않음과 같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빵 속에 실제로 임재하지만 빵의 본질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비적인 형태로 성찬에 임재하므로 빵은 살로 변하지 않는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께서 성례에 현존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빵과 포도주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적이고 실재적이다.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성례적 현존은 사제의 권면이나 능력이 아니라 참여하는 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성례 때 그리스도는 물이나 다른 액체와 섞은 잔 안에 계시지 않고, 공기 중에 계시지도 않는다. 다만 영혼 안에 현저하게 계신다. 성례식 끝에 그리스도는 영혼 안에 계신다.”42

 

위클리프는 화체설의 근거를 조사하여 그것이 성경에서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권위 남용의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성찬에 관한 논의 전체에서 현대 박사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은유적 해석의 차이를 막무가내로 다룬다고 그들을 꾸짖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론에 따라 화체설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비평적 신학자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여 온 성찬 교리를 배척했다. 성찬식 때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사제의 축성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로 변환된다고 믿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 로마교회의 의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체설에 기초한 성찬 미사이다. 위클리프는 경건하지 않은 사제가 집례하는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음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위클리프의 성찬론은 로마교회가 서 있는 미신적인 토대를 단번에 쓸어버렸다.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작성한 위클리프의 죄목 15개 가운데 3개는 화체설을 부인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수도사들과 귀족들은 위클리프의 성찬 교리에 등을 돌렸다. 옥스퍼드의 학자들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규모의 학자 그룹만이 그의 주장을 환영했다. 대학 당국은 1381년에 그의 성찬론을 이단사상으로 규정했다. “지진공의회로 알려진 불랙프레아공의회(1382)도 이단 사설이라고 하여 정죄했다.43

 

콘스탄츠공의회(1415)는 위클리프가 뇌일혈로 사망한 20년 뒤에 그가 제시한 200여 개의 주지들을 이단시하고 그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했다. 그의 사상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보헤미아의 얀 후스를 정죄하고 화형에 처했다. 영국교회는 교회 부속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위클리프의 유골을 파내어 화형하고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그가 저술한 책들을 거룩한 땅 밖으로 내팽개치라”44고 명했다.

 

맺음말: 비평적 개혁신학자

 

창의적인 눈을 가진 비평적 신학자는 종종 교회로부터 반감을 산다. 교회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신학자를 이단자로 정죄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왕따시켜 매장하기도 한다. 위클리프는 교회로부터 지속적인 미움을 받았다. 중세 유럽사회 구조를 개혁할 거대한 진리들을 성경에서 찾아내고 지성적으로 제시하여 개혁과 변화의 위기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왕실 봉사 사역을 마치고 옥스퍼드로 복직하여 연구와 강의에 종사하다가 1381년에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보상으로 받은 루터워드(Lutterworth) 교구에서 저술에 몰두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다가 1384년에 세상을 떠났다. 루터워드 교구는 황실이 그의 왕실 봉사에 대한 대가로 하사한 개인 소유의 교구였다. 상당히 많은 돈을 받고 그것을 수입이 적은 다른 교구와 교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의 교회 관례는 위클리프도 교구의 수입으로 옥스퍼드에서 생활을 하고, 교구를 매매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모순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영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의 개혁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화체설을 부정하고, 교황제도를 비판하며, 사제의 사면 권한과 면죄부 제도를 배척하고, 수도회 폐지를 부르짖던 위클리프의 이상은 15세기의 후스파 교회 개혁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위클리프가 자신의 신학적 통찰에 힘입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출현을 예견했더라면 두려움 때문에 소신 피력을 포기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성경적 진리에 충실한 신학은 어느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위클리프의 지성과 학문적 업적은 교회개혁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이단자 위클리프는 시대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시대를 만들어나간 신앙의 거장이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62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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