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재 장로와 고전교회 이야기

by reformanda posted Dec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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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재 장로와 고전교회 이야기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동편 하동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하동포구 80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강의 동쪽이자 지리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하동은 경치가 아름다워 찾는 사람이 많다. 이곳에는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은 불망비, 송덕비, 추모비, 열녀비, 효자비, 공로비, 기념비 등이 많다.

 

기념비 가운데는 관리들이 자신의 이름을 빛내려고 백성을 강요하여 공로비, 기념비 등을 세우게 한 것들도 있다. 예컨대 조병갑은 대표적인 가렴주구 관리였다.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함으로써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그는 지방 유지들을 동원하여 억지로 자신의 송덕비를 세우게 했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인 송덕비가 있다. 걸인, 걸식 과객들이 한 사람의 은덕을 진심으로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도 있다.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홍평부락 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전참봉김공상재송덕비’(前參奉金公相才頌德碑)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송덕비는 1938년에 세워졌다. 비석에는 8행시 비문이 새겨져있다. 이것이 만들어진 때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하고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잔악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천인공노할 수탈행위가 거듭되었고, 백성들은 땅과 재산을 빼앗겼다. 걸인, 걸식과객들이 늘어났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하동 고전 사람 김상재(金相才, 1878-1950) 씨는 자기의 것을 가난한 나그네, 걸인, 이웃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재워주며 때로는 노자까지 주었다. 재산이 많거나 부유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도 가난했지만 더 가난한 이웃과 헐벗은 자들의 친구였다. 송덕비는 그의 은덕을 입은 걸인, 걸식 과객들이 돈을 모아 세웠다.

 

김상재가 추의추식(推衣推食) 광제한빈(廣濟寒貧), 입을 것을 주며 먹을 것을 주며 널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삶을 산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전교회의 장로로 봉사하가가 동족상잔의 전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기독교로 개종한지 3년 만에 세례를 받고 영수로 봉사하다가 19209월에 장로로 장립 받았으며, 1950  임종 시까지 교회를 섬겼다.

 

김상재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5:7)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훈으로 삼았다. 그 가르침을 문자대로 실천하였다. 그의 박애정신과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까지 감동시켰다.

 

김상재의 송덕비를 세운 걸인, 과객들은 비기독교인들이었다. 그는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 믿는 한 사람의 송덕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가 과연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딤전 3:7)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삶과 신앙의 모범은 고전교회의 신앙의 뿌리가 되었으며 지역선교와 신앙교육의 밑거름이 되었다.

 

걸인, 과객들이 자신들에게 은덕을 베푼 사람의 송덕비를 세우는 일은 흔하지 않다. 더욱이 비기독교인들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의 은덕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세계 기독교 2000년 역사에 걸인들이 한 기독교인의 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전례는 알려진 바 없다. 이러한 까닭 때문에 고전교회 장로, 전 참봉 김상재의 송덕비는 교회사적으로나 지역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김상재의 송덕비에 새겨진 8행 비문은 동방의 해 돋는 나라 하동 땅에서 일어난 한 편의 사도행전이다.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귀담아 듣고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웅변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생애

 

김상재는 구한말 섬진강변 악양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가 파란만장한 정치적 변혁과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조선 왕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개화당이 집권하면서 중전(왕비) 민 씨가 살해되고, 18941895년에는 남부지방에 서학에 반대하는 동학운동이 창궐하여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다. 또 외적들은 이 강토 위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1905년과 1906년에는 노일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득세한 일본은 총칼로 조선왕실을 위협하여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한일합방을 강요하여 침략행위에 항구적인 종지부를 찍으려했다.

 

1910년 어느 날, 조선은 나라를 빼앗겼다. 일제는 나라를 강탈당한 식민지 백성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창씨개명, 삭발, 일본어 사용,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이와 더불어 잔혹한 수탈, 징용, 박해를 가했다. 우리의 백성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계속 시달렸다.

이러한 비극과 참화의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룩처럼 번져갔다.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한국말로 번역되고, 평안도 솔래에서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가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모여들어 힘을 모아 하나의 한국장로교회를 세웠다.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1907년에 6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는가 하면 그 해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태동되었다.

 

1907,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대부흥운동을 맞이하였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부흥운동 후에는 극심한 박해가 따랐다. 1930년대에 강요된 신사참배, 동방요배로 민족의 자존심은 굴욕 당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이겨내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친일행위를 하는 등 여러 면에서 변질되었다.

 

그러나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는 남아있었다. 경남지방, 평안도지방,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펼쳐진 신사불참배운동은 짓밟혀도 피어나기만하는 민들레 같은 정결한 신앙의 뿌리에서 솟아올랐다.

 

김상재는 이 비극적 시대에 태어나 남해 금산과 광양만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동성(하동읍성으로 불림)을 품고 있는 양경산 아래 마을에서 살았다.

 

하동의 역사는 진시황제가 보낸 동남동녀 3천 명이 이곳에서 불사초를 찾다가 탐라국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김상재가 살았던 게아대 마을 건너편에는 유명한 왕비샘이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이 샘터에서 왕비 하동부인을 만났다고 한다.

 

왕건은 궁예의 장수로서 적들에게 쫓겨 소오산(현 금오산) 서편에 있는 신덕마을 입구의 한 우물가에서 허겁지겁 마실 물을 찾았다. 이 때 유씨 성을 가진 어느 규수가 그에게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을 바가지에 띄워 마시게 했다. 왕건은 이 규수의 영민한 행동과 아리따움에 매혹되어 왕위에 오른 후 그녀를 비()로 맞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설은 전남 나주지방에도 있어서 어느 정도 정확한 이야기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동성은 1417년에 축조되었다. 양경산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양경성이라고도 불려졌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성은 돌로 된 내성과 흙으로 된 외성 이중으로 축조되어 있고, 둘레가 1019, 높이가 17척이며, 성 안에는 우물이 다섯 개, 연못 하나가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이곳 하동 향교(현 양보지역)에서 수학한 초유사 김성일이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임금에게 일본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고 보고하였다. 조정은 그의 말을 듣고 불안해하는 백성들에게 임금님이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결정했으면 절대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인데 왜 걱정이냐라고 타일렀다. 사실 왜적의 침입은 조선임금의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조선은 왜적의 침략을 받았다.

 

김성일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용사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동안 하동 현감이었던 준해는 높은 벼슬을 탐내어 우리 백성들의 머리를 왜적들의 머리라고 속여 보고하였다가 임금 선조의 징벌을 받은 바 있다.

 

고전교회 인근에는 하동 정 씨의 본가가 있다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을 편찬했고 고려사를 감수하였던 정인지는 세조가 조카의 보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른 후, 왕이 유교를 제쳐두고 불교를 숭상하자 이에 분노하여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어전에서 국왕을 향해 내가 자네에게 언제 그렇게 가르쳤는가?” 하며 호통치고 이곳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김상재는 게아대 마을에 살았다. ‘게아대란 이 마을의 생김새가 게의 입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하동성 입구에는 배다리장터가까이에 있다. 엿새 만에 하루씩 열리는 장이 이곳에 서면 남해, 진주, 삼천포, 사천, 구례, 순천, 여수, 광양 등지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기미년에는 이 지역에서도 거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총칼 앞에 주먹으로 대항하던 이곳 사람들은 극심한 수난을 당했다. 하동, 특히 고전은 이처럼 역사의 의분과 민족혼의 맥박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동시에 진리의 빛, 구원의 복음이 필요했던 곳이었다.

 

김해 김 씨 문중에서 태어난 김상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이고 편모 밑에서 자랐다. 특출한 지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한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다. 사람들은 그를 김 참봉이라고 불렀다. ‘참봉이란 조선시대의 말단 관직으로서 돈영부, 봉상시, 사응원, 내의원, 군기시, 혜빈시, 군자감, 제용감, 사직서, 혜민서, 전옥서, 오부 및 능원에서 일을 하는 종9품 벼슬이다. 대한제국 황제가 주는 말단 직급이었다.

 

한말 말단 관직인 종9품의 벼슬을 가진 김상재가 무슨 직무를 위한 참봉인가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고종의 칙명장에 따르면 능원지기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 말로는 그가 특출한 기동력으로 서울과 하동을 내왕하였으며 서울의 대신들이 하동에는 너밖에 없느냐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일종의 행정 전령 직을 수행한 직책을 맡았던 것 같다. 당시 평민들에게는 참봉이라는 벼슬조차 선망의 대상이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참봉 직은 엿장수를 통해서도 살 수 있었다. 망국대부인 일제 치하의 조선 귀족들이 고종의 분묘의식을 둘러싸고 미증유의 협잡 극을 연출한 적이 있다. 국상 때 영위를 종묘에 모시는 분묘의식이 있을 때는 서민들 중에서 여사군을 뽑아 무관인 여사대장 밑에서 영어나 부수 수레를 끌고 가게하고 의식이 끝나면 참봉 등 작위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전례를 이용하여 귀족들은 차비원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 첩지를 헤아릴 수 없이 남발하여 팔아먹었다. 껍데기뿐인 참봉첩지 종이 한 장을, 어리석은 백성들은 국왕이 내리는 마지막 벼슬이라며 돈을 주고 다투어 매입하는 희비극이 자주 벌어졌던 것이다. 김상재가 서울을 자주 내왕하던 때는 이러한 작태가 한창인 시절이었다.

 

김상재는 그가 서울과 하동을 열심히 내왕하던 무렵인 광무 9(1906) 5월에 고종황제로부터 정3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의 종친, 의빈, 문관의 품계이다. 당상관은 정3품인 명성대부, 봉순대부, 통정대부, 절충장군 이상의 관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품계였다.

 

김상재가 어떻게 종9(참봉)에서 정3(통정대부)으로, 하루 만에 무려 12품을 뛰어 오르는 파격적인 진급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현재의 9급 공무원이 어느 날 갑자기 장관직에 오른 것과 같다. 고종황제가 발부한 칙명장은 그가 받는 품계의 근거를 명시하고 있다. “영능의 주용 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감독이 문서를 올려 이 사람의 품계를 올려주자고 하는 요청에 따라 이에 허락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무리 명예 품계였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승급은 건국공신에게조차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김상재 자신도 어떻게 통정대부 품계를 받았는가에 대해 말한 바가 없다. 그가 관직에 있을 무렵,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운동이 더욱 과격해지고 성난 혁명군은 가렴주구를 일삼은 관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김상재도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했다. 혁명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섬진강변 개나리 꽃밭 뒤에 숨어들어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가 관직을 버리고 보금자리와 조상들의 선영을 하동성이 있는 고전으로 옮긴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벼슬과 품격을 중시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공손히 대했다. 김상재 씨의 삶의 위대함은 그가 참봉이나 통정대부라는 작위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입문

 

고전면 고하리 ‘게아대 마을에는 김성진 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보부상이었다. 김상재는 김성진의 친구가 되어 그를 따라 봇짐을 짊어지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과자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행상으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는 배다리시장에서 포목점을 경영하였다. 또 이 지역에 많은 땅을 소유한 여수 사람 지주 김한식 씨의 고방지기 일도 맡았다. 김상재는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해주고 소작료에 준하는 곡식을 받아 주인에게 배로 실어 보냈다.  이러한 연유로 김상재가 제법 넉넉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지만 부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동읍 시장에 행상 차 가던 김성진 씨는 노상에서 전도인 이봉은 씨를 만나 동행하다가 길 동무가 되었고,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기독신자가 되었다. 노상전도의 열매는 당시의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고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봉은은 경남노회 진주시찰에 속한 전도인, 권서인으로 호주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봉은은 삼천포교회에서 시무한 정봉조 목사의 장인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진주 봉래동에 주거지를 두고서 바라를 걸머지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마태복음’ ‘마가복음’ 쪽복음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전도하는 불붙는 전도자였다. 전도를 하다가 구타당하고 돌에 얻어맞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이봉은은 섬진강변 마을 신방촌에서 전도하다가 바라에서 붉은 책자의 전도책자를 꺼내 지나가는 말탄 왜경에게 불쑥 내밀었다.

 

예수 믿으시오하는 그의 고함소리에 놀란 말이 거칠게 뛰는 바람에 왜경은 말에서 떨어졌다. 성난 왜경은 일본도를 빼들고 그를 내려치려고 하였다. 당시는 왜경이 조선인 한 명쯤 죽이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전도자는 도망가지 않고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하나님, 전도하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도우소서저 왜경 예수 믿게 하소서.”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본 왜경은 통역관에게 무엇이라 중얼대느냐?” 하고 물었다. “당신이 빨리 나으라고 가미사마께 기도하고 있소. 전도하려다가 실수했다고 하오라는 통역관의 말을 들은 왜경은 칼을 집어넣고 기도하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 잘 가라고 하였다.

 

김상재는 김성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고 흔쾌히 기독교 복음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한 마을에 기독신자 두 가정이 생겼다. 이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수일, 박동기 씨에게 전도하였다.

 

게아대 사람들은 김상재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190838일이었다.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라고 일컫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아직도 한창이었던 시기에, 고전교회는 게아대 마을 한 사랑방에서 태동했다.

 

고전교회는 자생한 교회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록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록은 고전교회의 설립에 관한 언급이 없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게아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스스로 시작한 교회였다. 이 점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솔래교회가 조선인들에 의해 스스로 세워진 것과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가 학문적인 동기로 공부를 하던 조선인 유생들에 의해 세워진 것과 꼭 같다.

 

고전교회는 19111월 배다리장터 부근 사람들이 내왕에 편리한 곳에 있는 한문서당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김상재가 영수로, 김성진, 박수일, 박동기가 집사로 임직되고, 40명의 교인이 회집하였다.

 

고전교회는 3년 후에 유생들이 많이 사는 댕밑 마을(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당 아랫마을이라는 뜻, 현 성평) 가까운 곳 가마소라는 시냇가로 교회당을 옮겼다. 가마소는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시냇물을 건너다가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 교회당을 세운 것은 양반세도가 도도한 이 유림 마을을 복음화하기 위해서였다.

 

새 교회당은 당시로 보아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면사무소나 경찰서가 양철지붕 건물이었을 때, 교회당은 덩실한 기와집이었다. 쳐다만 보아도 위압적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고전교회가 건너 편 지역의 현재의 장소로 옮겨 세워져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1970년대에 벽돌건물 새 예배당을 지은 뒤에 구 건물은 현재까지도 친교실과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마소의 새 예배당 건축비의 큰 몫은 신덕마을의 김장환 씨가 충당하였다. 그는 나라 살림이 매우 어려운 시절에도 넥타이를 매고 진주, 부산의 중심가를 활보하던 부자였다. 신덕마을에서 주막을 경영하여 많은 재산을 모은 그의 할머니로부터 유산을 받았던 것이다. 김장환이 교회당 건축을 위해 재산의 일부를 내 놓은 것도 김상재의 전도의 결실이었다. 김장환은 그에게서 감화를 받았다. 김장환이 거액을 교회건축에 헌금한 것을 보면 그도 예수를 믿어 고전교회 구성원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전교회는 개화교육을 위해 명신학교라는 여자 교육기관을 운영하였다. 교사들은 호주 선교사들에게서 신교육을 받은 들였다. 매자마을 정숙원 씨의 모친 최금순 여사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얼마 뒤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학교가 고전초등학교로 탈바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자생으로 설립된 고전교회는 10년 동안을 스스로 꾸려나갔다. 처음부터 자전, 자치, 자립하는 교회로 출발했다. 점차 진주에 자리를 잡은 호주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가끔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1918년부터는 선교사, 목사들이 정규적으로 순회 방문하여 지도하였다. 초대 순회 선교사는 권닝함(Frank W. Cunningham) 목사였다(1918. 4~1921. 9). 이어서 안란애(1922. 3~1924. 5), 예원배(1924. 6~1925. 2) 선교사, 그 다음 한 해 동안은 한익동 목사가 순회목사로 각각 사역했다(1925. 2~11).

 

그 후 김도식 목사가 10년 동안 사역하였고(1925. 11~1935. 11), 그 다음은 박중환 목사가 교회 담임을 맡았다(1937. 5~ 1939. 11). 그는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호주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그 후에 정태인(1937. 11~1942. 1), 김상세(1942. 5~1943. 5), 이영환 그리고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한 고산대작(1943. 7~1944. 9) 씨가 각각 시무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김상재 장로의 신앙에 감화를 받고 자란 이 교회 출신 정순국 전도사가 교회를 돌보았다(1946. 11~1953. 4).

 

고전교회는 그 지역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기관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기독교 선교사들과 그들이 전해 주는 복음과 세계의 동향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고전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냉대는 극심했다. ‘야소개교인,‘ ‘서학쟁이,’ ‘양귀숭배자라고 비난하였다. 유교적 관습에 젖어 공자왈 맹자왈하던 식자층은 야소교가 제사를 드리지 않는 무리, 천륜을 무시하는 서학의 동류이며, 야만적인 종교라 하여 조소하였다.

 

유생들은 주자사상만이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타종교는 매우 배타적으로 대했다. 둘러앉아 우리 시조나 한 수 하세말하면서 공자 왈 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화를 주느니라라고 읊조렸다. ‘야소교명심보감, 삼강오륜, 주자십회(朱子十悔)를 능가할 선한 가르침이 있겠느냐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비웃고, 천대하였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냉대는 동학혁명으로 한층 더 가중되었다. 고전교회가 세워지기 수년 전, 동학교도 일백여 명이 전봉준의 수하인물인 박정주의 지도하에 하동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수년 후에는 하동의 동학당수 여장현이 이끌던 7백 명의 동학무리가 거세게 이 지역을 휘몰아쳐 갔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이들을 두려워했으나 내심 동정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서학(천주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신흥서학으로 알려진 개신교도 서학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고전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냉대 가운데서도 천국복음을 전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사람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했다. ‘하나님 생일즉 성탄일에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떡과 선물을 나눠주었다. ‘도둑예수 믿는 자도 많았다. ‘야소교를 천박한 종교로 보는 어른들이나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교회를 찾아 예수를 믿는 아낙들이었다.

 

신앙생활

 

김상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항상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의 입에서는 입술의 낙헌제즉 찬송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찬송을 열정적으로 불렀다. 찬송을 부를 때는 대개 확신과 감격에 차 눈물을 글썽였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니,” “하늘가는 밝은 길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등을 애창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관한 찬송가를 자주 불렀다. 김상재와 고전교회 성도들이 가장 자주 즐겨 부른 찬송은 아래와 같다.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주만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후렴]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나의 갈 길이 사납고 위험하나

항상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가네(후렴).

 

주의 보좌에 천사들 둘러서서

우리 구주를 높이어 찬양하네(후렴).

 

예언자들과 왕들도 반열대로

금길 따라서 나아와 찬송하리(후렴).

 

우리 모두 다 그 반열 뒤 따르며

함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리라(후렴).

 

김상재가 위 찬송을 부를 때는 감격과 흥분으로 얼굴이 불그스럼하게 되었다. 고전교회 교인들은 그가 진지하고 뜨겁게 찬송하는 것을 쳐다만 보아도 은혜가 되었다고 한다. 고전교회는 그 뒤에도 이 찬송을 애창했다. 필자는 이 찬송을 고전교회의 주제찬송으로 삼는 것을 권하는 바이다.

 

김상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항상 그 분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길을 가도, 일을 해도, 쉬는 시간에도 늘 하나님과 대화하였다. 자주 신음하듯 여호와여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다. “주여라는 말로 시작하는 묵상 기도는 그의 생활의 중요한 한 단면이었다.

 

김상재는 신앙생활 초기에 새벽마다 인근 산에서 기도하였다. 예배당이 생긴 후에는 호롱불을 켜 들고 교회당으로 찾아가 기도하였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자녀들을 불러 모아 가정예배를 드렸다.

 

김상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주일에는 포목점을 열지 않았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 날에는 쉬게 하였다. 간혹 사람들이 장사에 관하여 논의하러 주일에 자기 집으로 찾아오면 그는 그들을 피해 산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가버렸다.

 

김상재는 토요일에 모를 심다가 해가 저물면 즉각 중단하고 월요일에 그 작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주일이면 마당 앞 채소밭의 채소도 뜯지 못하게 하고, 손수건도 빨지 못하게 했다. 머슴들이 주일 아침에 물깽이를 들고 들판에 나가기라도 하면 꾸중하였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특징이었던 청교도적인 계율과 삶의 모습이 그의 어깨에 서려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다.

 

김상재의 집에서 얼마간 머슴으로 일했던 사람이 있었다. 김상재는 주일에 일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일하지 않고 남의 밥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경우가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서 몰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 해가지고 살그머니 집 뒷켠에 부려 놓았다. 김상재는 묵직한 그 나무 짐을 보고 그를 나무랐다. “안식일에는 남종이나 여종이나 내 집에 거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주인의 이 같은 신앙적 열성에 감동을 받은 그 노동자는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얼마 후 머슴 일을 그만 두고 배다리 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상권을 쥐었다. 나중에 영수로 임직을 받아 장로 김상재와 함께 고전교회를 섬겼다.

 

김상재는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렸다. 자녀들이 전해 주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믿으라고 하기보다는 삶에서 직접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언젠가 한 번은 불행한 일로 파혼한 맏아들이 진주에서 공부하면서 어느 젊은 여성과 가까이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그 소문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직접 가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른 것은 아마도 그 젊은 여성이 방정(方正)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자 김상재는 아들을 데리고 한적한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바지를 걷어 올리고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피가 터지도록 모질게 내리쳤다. 아들은 그제야 잘못했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고 하면서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이 아들은 나중에 주기철 목사 문중의 주길선 씨와 결혼하고 진교교회 교역자로 시무하면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재학 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상재의 막내아들 김병기 씨는 성년이 되어 중병을 앓은 적이 있다. 양약, 조약, 한약 등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만 3년이나 지속된 이 병에는 백약이 무효였다. 아들이 점점 쇠약해져 드디어 죽게 될 위험한 지경이 되자 그는 병원에나 한 번 더 데려가 보자며 아들을 데리고 진주를 향해 출발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기도하고 싶어 솔밭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하나님, 이 아이를 데려가시든지 살려 주시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러나 할 수만 있거든 살려주소서.” 조용했지만 애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자 아들의 건강은 즉각 회복되었다.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찬미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고전교회 전도사 김결소 씨는 신유은사가 있었던 기독인이었다.  기도로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그는 고무신을 신고서도 하루에 50리 길을 걸어 다니며 전도하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백련, 바닷가 마을 진목, 산악 마을 양보, 산약재의 요람 산청 등을 두루 다니며 병마와 귀신을 쫓아냈다. 그녀 앞에서 귀신들이 고함을 지르며 떠나갔다.

 

고전교회의 역사에는 그 후에도 귀신을 내쫓는 일이 자주 있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 보통신자들이 기도할 때에 마귀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이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필자도 두어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교회봉사

 

김상재는 지성을 다해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다. 장로로서 목회자를 모시는 일에서부터 그러하였다. 목사관이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선교사, 순회목사, 담임목사들이 그의 사랑방에서 숙식을 하였다. 목회자의 사례를 지불할 날이 되면 진교에 있는 금융조합에 가서 깨끗한 지폐를 바꾸어 왔다. 깨끗한 창호지에 단정히 싸서 옷을 단정히 입고 무릎을 꿇고 정중히 건네 드렸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액수가 많지 않을 때는 자신의 돈을 보태어 드리기도 했다. 교역자를 섬기는 그의 이러한 자세는 고전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고전교회에서 봉사한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10년 이상 장기간 목회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전교회의 이러한 전통에는 교역자를 지성을 다해 섬기는 김상재 장로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상재가 극진히 대접한 목회자 중에는 나중에 타락해버린 목사도 있었다. 박중환 목사는 평양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호주에서 신학을 수학한 인테리목사였다. 귀국하여 고전에서 2년 반 동안 담임목회자로 사역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목회사역을 하지 않고 통영군수가 되었다.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던 덕분에 출세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버린 채 술과 담배와 세상살이에 파묻혀 살다가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고 한다.

 

김상재는 평신도 설교자로 교회를 섬기기도 하였다. 순회목사가 오지 않을 때는 장로, 영수, 집사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다. 김상재의 설교에는 감화력이 있었다. 막내아들 김병기 씨의 아내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편을 잡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기철 목사 아래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가끔 고전교회를 방문하여 시아버지의 설교를 듣곤 했는데 시아버지의 설교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못지않은 은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상재의 설교는 경험담이나 간증식이 아니라 성경본문을 풀어 설명하는 식이었다. 학식은 국한문 성경을 겨우 읽을 정도였으나 그가 설교할 때는 성령에 사로잡혀 외쳤다. “성경대로 믿고 복 받자, 예수를 의지하면 천당에 간다. 인생은 한 번 오면 한 번 가야 한다. 날 위해 예비한 영원한 낙원에 가자, 거기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영광 중에 살자.” 목소리는 고저가 또렷했다. 그가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부자 나사로이야기는 항상 감동적이었으며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다.

 

김상재는 곽안련, 밀의두, 도의명, 허화 선교사가 공동 번역한 신약주석을 애용하였다. 조선야소교서회가 1922년 출판한 이 단권 신약주석은 총 1578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는 이 주석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구절들에 밑줄을 많이 쳐놓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을 진술하는 구절들에도 밑줄을 그어놓은 것을 보면 그의 관심과 당시 교회의 관심이 어떤 류의 주제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광복 전의 고전교회의 설교는 기독론, 구원론, 내세론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었고, 계율주의적이었다. 사신(邪神) 우상을 섬기지 말라,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 도덕적으로 깨끗이 살라,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 제물을 먹지 말라, 일장기 보고 절하지 말라, 불신혼인을 하지 말라 등의 내용도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말씀만큼 자주 선포된 주제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 년에 두 차례 열리는 부흥회는 인근 지역교회들의 교우들이 찾아와 교우 집에서 민박하며 은혜를 받는 ‘천국잔치였다.

 

김상재가 장로로 시무하던 시절의 고전교회 교인들에게는 눈물이 많았다. 이약신 목사가 부흥회 강사로 초빙 되었을 때, 청년 정순국 씨는 그의 은혜로운 설교와 명료한 강의에 감복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이약신 목사와 함께 배다리에서 명교까지 10여리 길을 걸어가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상재의 기동력은 대단했다. 경남노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1백리 길을 온 종일 걸었을 정도였다. 그는 장로고시를 마산에서 치렀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 고전에서 종일 걸어서 진주까지 갔고, 진주에서 마산행 열차를 탔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경남노회 고시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그러한 정성만으로도 장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도활동

 

고전 주민으로서 김상재의 전도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전도의 사람이었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교회가자,”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영생을 얻는다고 권했다. 사람들은 연장자가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혜롭고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시대였다. 민도(民度)가 높지 않은 시대였기에 복음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거나 설득시키지 않고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전도가 되었다고 한다.

 

김상재는 전도의 최선의 방법이 생활로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전도하고자 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전도였으며, 그의 전도가 곧 자신의 생활이었다. 그 시대에는 기독신자가 옷을 단정히 입고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전도가 되었다.

 

김상재는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교회에 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피워도 좋으니 우선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어보라고 권했다. 때로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호주 선교사들을 앞세워 고전교회 교인들과 함께 배다리시장에서 노방전도를 하였다. 식자층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위에서 속량제물로 죽으신 그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승천하셨고,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창조자, 구원자를 예배하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도리이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조리 있게 소개하였다.

 

김상재 씨의 전도는 집요하고 구체적이었으며 끈질겼다. 1백 호의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생들이 많이 사는 댕밑 마을이 복음화 되면 다른 이웃 마을을 복음화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현 성평 마을을 복음화 하기 위한 전도기간을 10년으로 정하고, 매주 토요일 하루를 이 마을에서 전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그는 10년을 하루같이 기도하면서 전도하였다. 전도하다가 마을의 사랑방에서 밤을 지새울 때도 많았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동네 아낙들은 우물가에서 보리쌀을 씻고 있다가 그가 오는 것을 보고서 오늘도 야소쟁이 김 참봉 왔다고 수군댔다.

 

양반의식에 집착한 댕밑 마을 사람들은 김상재를 깔보았다. 조실부모하고 편모 밑에 자라서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조상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불륜지도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를 깔보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인품, 장대한 기골, 무언의 덕행 앞에 꼼짝하지 못했다.

 

김상재의 10년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댕밑 마을의 단 한 영혼도 건지지 못했다. 작정했던 10년이 마감되는 날, 결실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던 그는 가마소라고 하는 냇가의 바위 위에 서서 댕밑 마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화 있을 진저 고라신아 벳세다야, 완악한 댕밑아, 내가 차라리 두로와 시돈, 다른 마을에 가서 10년을 이같이 전도하였다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으련만, 원통하도다.” 지팡이를 휘둘러 바위를 내리치며 통곡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얼마 후 이 마을의 한 청년이 예수를 믿었다. 유교적 기개를 가진 청년 최우용 씨는 야소교당,’ ‘서양사당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김상재에게 붙들려 여러 차례 복음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으나 거절했다.

 

어느 주일 아침, 최우용은 야소교당을 구경하고 싶어 길을 나섰다. 교회당 안은 남녀칠세부동석 관습에 따라 남녀 석 중간에 휘장이 쳐져 있었다. 예배당을 구경하고 집으로 가려던 최우용은 일련의 영음(靈音)을 들었다. “우용아, 우용아.”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는데 자기를 부르는 그 음성이 또 들려왔다. 그는 대답했다. “, 누구십니까?” “나는 예수다. 나를 믿으라. 지체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은 그는 그때로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예수를 믿었다.

 

청년 최우용은 매사에 투철했다. 믿음생활과 교회봉사에도 열심이었다. ‘야소교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맏형으로부터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았다. 모진 박해를 받았다. 주일에는 온종일 방안에 갇혀 먹지 못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려고 토요일에 가출을 했다가 예배를 마치고 밤에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온 즉시로 또다시 흠씬 매를 맞았다. 그는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으며, 집사로서 고전교회를 섬겼다. 가끔씩 설교를 하기도 했다. 박중환 목사가 시무했던 시절 전후 기간이었다. 그는 고전 지역사회에서 최 박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댕밑 마을에 살던 최윤환 씨(전 서울 성산교회 장로)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연유도 김상재와 관련이 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최윤환의 부친은 시신을 김완용 목사의 본가 부근 김상재 소유의 산에 몰래 매장했다. 풍수쟁이가 그곳이 자손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최적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땅 주인에게 미리 알리면 매장을 허락해 줄 리 만무하기 때문에 밤중에 몰래 매장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최윤환 부자(父子)는 땅 주인 김상재를 찾아가 사실을 고백하고 이해를 구했다.

 

이 때 김상재는 부드러운 태도로 그들을 대하며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묘지가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복 받는 길은 예수 믿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김상재 씨의 끈질기고 품위 있는 전도에 감탄한 최윤환의 부친은 아들에게 교회에 나가라고 권했다. 최윤환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고라신과 벳세다같이 완고하던 댕밑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많이 나왔다. 광복 후 고전교회를 담임 목회한 정순국 목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그는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고전교회를 담임하다가 진주 성남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은퇴했다. 그는 김상재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기독신자가 되어 돌아온 최상환 씨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댕밑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최경환, 최규환, 최성환 형제가 그들이었다. 최경환은 고전교회에서, 최규환과 최성환 형제는 부산에서 모두 장로로 임직하여 교회를 봉사했다. 최경환은 본래 최우용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고전교회에 출석을 하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다. 일본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혈족 최상환에게서 복음을 자세히 설명들었으며 모종의 성령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강위상 목사와 정상문 목사도 댕밑 마을 출신 목회자들이다. 목사 최재건, 정규채, 최재록, 정성주, 정성일, 최재율 씨도  모두 이 마을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정순영 장로와 그의 아들 정승채 장로와 정민채 장로도 이 마을 출신이다. ‘댕밑 마을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한 김상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김상재는 후일 그가 10년 댕밑 마을 전도 기간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그 마을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던 일을 생각하며 전도는 사람이 하지만 영혼을 건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복음의 씨는 내가 뿌렸으나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미쳐 몰랐다라며 부끄러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전도하였다. 그는 복음의 씨를 뿌려 놓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른바 칼빈주의적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김상재의 영향 아래서 고전교회는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가 되었다. 진정, 전도(현 고남), 양보, 우복, 갈사 등지에 각각 교회를 세우고 횡천, 대야, 청암, 노량에 세워진 교회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고전교회의 선교방법은 딸기선교법’(Strawberry Mission Method)의 형태였다. 딸기의 줄기 하나가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리면 거기서 서너 개의 다른 줄기가 생기고 뻗어나가 각각 자리를 잡아 잎과 뿌리와 줄기를 내고 또 다시 확산되는 방법으로 선교했다.

 

필자는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 미국인 신내리 선교사로에게서 전도학을 배웠다. 그 과목의 과제로 고전교회와 딸기선교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동방요배 신사참배 반대

 

일제는 한국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한민족에게 강요하였다. 평양에 있던 장로회신학교는 이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폐교되었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배워 돌아온 자들은 대개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친일적인 인사 김재준 목사는 황국에 충성하는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동 신학대학원)를 세웠다.

 

다수의 신자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시끄럽게 되지 않으려고 변절의 방법을 택했다. 교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전 약 5분 동안 교회당 안에 모셔놓은신사를 향해 절했다. 예배와 경의의 표시로 손뼉을 치고 기도문을 외웠다. 목사들은 부산의 송도바다에서, 서울의 한강에서, 대구의 수성 못 등 전국의 강이나 바다에서 일본 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예식은 신도사제가 집행하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신사불참배운동)은 경남지역에서부터 조직적으로 퍼져나갔다. 경남에서는 한상동을 중심으로, 평양에서는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봉천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제1, 2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일제에 맞섰다. 반면에 당시의 교회는 신사참배권유운동, 시국인식운동을 펼치며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 안이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의료진에 의해 독약으로 순교 당했다고 한다. 남해의 최상림 목사, 하동의 이현속 장로도 순교하였다. 만주지역에서도 여러 명이 순교하였다.

 

김상재도 신사참배 문제로 여러 번 하동경찰서로 붙들려갔다. 그러나 그가 이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거나 수감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다. 강압을 이지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신사참배를 멀리 하였다는 사실이다. 교인들에게 신사에 참배하지 못하게 했고, 동방요배도 못하게 했다.

 

최상림 집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고전교회의 담임목사 고산대작 씨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는 글자를 강단 위 벽에 크게 써 붙이고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전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하라고 교인들에게 명령했다. 그 무렵 고전교회당의 강단은 동쪽에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이 교회를 담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동방요배, 신사참배가 국가의례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고전교회 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신에게도 절할 수 없다며 담임 목사 말을 따르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권위’(국가의 지시)위에 있는 권위’(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을 때 위에 있는 권위에 따라 살고자 했다.

 

1938,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회집되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솔선수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하겠다고 결의하였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만 묻고 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안건을 처리해 버렸다. 회의장 안에는 사복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부선 선교사 등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하는 안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붙잡혀 갔다. 교회는 신사참배결정에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출교시켰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파면되거나 목회직을 박탈되거나 교회와 노회로부터 축출되었다. 목회자 가족들은 사택에서 쫓겨났다.

 

김상재는 경남노회가 제27회 총회에 파송한 총대였다. 그가 총회 총대로 선출된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록은 그가 불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 마산, 진주 등에서 회집되던 노회에는 그토록 열심히 참석하던 그가 평양이 거리상 멀기 때문에 불참한 것 같지는 않다. 그 해 총회가 모이기 전에 왜경은 전국에서 선정된 총대들을 사전에 경찰서로 불러들여 신사참배가결안을 통과시키는 일에 협조하도록 지시했다. 김상재는 이것을 보고 총회에서 일어날 일련의 사태를 예견하였고 그래서 불참했을 수도 있다.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신사참배와 더불어 점차 일본식 황국기독교혹은 신도기독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친일분자,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교권을 쥐었고, 교파들은 통합되어 일본기독교단의 부속기구로 전락했다. 일제는 그리스도의 왕권, 하나님의 나라, 재림과 종말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며 찬송가 중에서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왕권, 재림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교회는 헌금을 모아 군위문단을 만들어 찾아갔고, 위문횟수가 많음을 자랑했다. 여러 가지 병기들과 조선장로회기라는 가미가제 특공대 용 비행기를 헌납하기까지 하였다. 교회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기도회를 자주 열었다. 당시 교회는 일본 천황의 지붕아래 천하를 지배하고자 했던 군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신도국가주의(Shito Nationalism)의 도구가 되었다. 변절 또는 훼절한 교회가 아니라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한 배교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고전교회 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황국화를 반대하며 김상재 장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렇게 되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담임목사와 그것을 반대하는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팽배하게 되었다. 친일적인 담임목사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교인들은 장로 김상재를 따랐다. 교인들은 교회 출석을 거부함으로써 신사참배, 동방요배, 그리고 친일파 목사의 그릇된 지도와 배교적 가르침에 항거했다.

 

김상재는 그 무렵 얼마 동안 통영에 있는 막내아들 집에 머물렀다. 담임목사 고산대작 씨는 부임한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함께 예배할 성도들이 없었고, 헌금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떠난 것으로 보인다.

 

해방이 되자 기독교인들의 우상수배와 친일 과거사 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경남노회(현재의 부산, 울산 지역 포함) 안의 갈들이 표면화 되었다. 친일 변절 전력자들은 김길창 목사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들은 여전히 경남노회의 교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즉각 친일행각을 적극적으로 하던 옷을 벗고 어느 날 갑자기 애국자로 변신하였다.

 

출옥성도들은 변절자들을 향해 일정기간의 공적 참회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친일, 배교, 변절 경력자들은 그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라고 몰아 붙였다. 노회원들이 출옥한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려고 하자 김길창 목사의 수하에 있던 박성애 목사가 똥오줌 통을 교회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xx들아, 신사참배한 우리나 아니한 너희나 다를 바가 무엇이냐, 의인인 체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하고서는 그 안에 담긴 오물을 노회원들을 향해 뿌렸다. 친일파 앞잡이가 오물을 거룩한 성회에 뿌렸던 것이다. 친일파 인사들이 광복 후에도 얼마나 극성스러웠는가를 보여주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 전력자들은 각 분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행세했다. 이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변절자, 친일파 인사들이 교권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은 결국 과거서 청산, 우상숭배의 죄 참회고백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 곧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고문당하다가 출옥했던 신자들을 장로교단 밖으로 내몰았다.

 

교권을 장악한 친일전력자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제1차 분열, 즉 고신분열을 만들어냈다. 회개하지 않은 변절자, 배교자들은 개혁주의 교회관과 신앙고백에 따라 신앙의 정통, 생활의 순결을 위한 참회의 필요성을 말하던 출옥성도들을 교단 밖으로 몰아냈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을 독선주의자로, 분리주의자로 몰아 붙였다.

 

고전교회 장로 김상재는 양 쪽 그룹 모임에 다 참석해 보았다. 친일변절자 그룹의 사람들은 수완이 좋은 정치적인 거물들이었다. 그러나 김상재는 그들의 신앙생활에 진실성이 없고 너무 정치적이라고 느꼈다. 한편 그는 고라파,’ ‘고래파로 따돌림 당하던 한상동 목사 중심의 모임에도 참석해 보았다. 그들에게서 일사각오로 예수를 바르게 믿어 보려는 진실성을 엿볼 수 있었다. 뜨거운 기도와 회개의 모습을 보았다.

 

1948년 어느 날, 김상재는 남해에서 회집된 경남노회의 어느 모임(경남노회 진주시찰 모임으로 여겨짐)에 참석했다가 두 그룹이 다투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 정순국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최상선의 증언에 따르면 김상재는 공산당원에게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았다. 그가 사망한 것은 1950년이다. 최상선의 증언이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김상재의 죽음이 위 경남노회 안의 갈등과 어느 정도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고전교회는 장로교단 분열 후 줄곧 고신고단에 소속되었다. 그 배후에는 김상재의 영향이 크다. 정순국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김상재로부터 고려파의 신앙 노선을 배워 알았다고 한다.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정순국은 고전교회를 담임하면서 이 교회가 고신교단에 남아 있도록 지도하였다. 고전교회는 한국동란 전후로 강렬한 부흥운동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제3단계의 역사적 발전 시대를 맞게 된다.

 

광제한빈

 

김상재의 삶에서 두드러진 것은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본 일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의 끝없는 박애활동 때문이었다. 한민족 전체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기에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아이를 낳고도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정이 많았던 시절에 그는 미역과 생선을 사들고 가서 해산한 자들을 찾아갔다. 그것으로 해복구완을 하도록 했다.

 

새로 이사 온 가정에도 필요한 것들을 다소 마련해 주었다. 과부들이 사는 집에는 고무신이나 댕기를 마루에 몰래 갖다 놓았다. 그는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이웃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졌다. 물질로만 이웃을 도운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큰 형님,’ ‘큰 오라버니,’ ‘친정아버지같은 따뜻함도 있었다.

 

구한말에는 누더기를 걸친 걸인들과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걸식하는 과객들이 많았다. 이 걸식 과객들은 망해 버린 나라의 운명과 빈곤을 탄식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떠돌아 다녔다. 집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거지들이었다. 이들은 걸식하면서도 체통과 풍류를 소중하게 생각한 그 시대의 걸인들이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민담, 야사, 미담, 추문 등도 전달해 주었다.

 

배다리 장날에는 많은 걸식 과객들이 모여 들었다. 해가 저물고 배가 고프면 이들은 여보게 김 참봉 집으로 가세하면서 김상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스도인 장로 김상재는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일일이 보살펴 주었다. 때로는 노자까지 주었다. 포목장사를 하던 그는 광목, 무명베에 솜을 넣어 만든 겨울 옷, 여름이면 여름옷을 한 벌씩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다. 그는 열두 칸 대궐에 살았던 부자가 아니었다. 남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구제하였던 것이다.

 

김상재의 집에는 끼니때마다 두세 명의 ‘객식구가 있었다. 그의 문전에는 평일에도 걸식 과객, 걸인들이 줄을 이었다. 식사 때가 되면 밥상에 앉기 전에 대문 앞에 나가 배고픈 행인들이 있는가 확인한 후에 식사를 했다. 자신이 굶는 한이 있더라도 배고픈 과객들은 먹이고자 했고, 자기 밥상에 과객들보다 반찬이 한 가지라도 더 많으면 화를 내곤 했다. ‘장 종지기’(작은 간장그릇) 하나라도 걸식하는 자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소죽을 끓이면서 따뜻하게 불을 지핀 큼직한 사랑방에 걸식과객들을 쉬게 하고 재웠다.

 

마흔 살에 예수를 믿은 후부터 일흔 한 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김상재의 추의추식 광제한빈(推衣推食 廣濟寒貧, ‘입을 것을 주며 먹을 것을 주며 널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의 삶은 계속되었다.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는 고아 세 명을 데려다가 딸로 입적시켜 키워 시집보내는가 하면,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떠는 걸인들을 보면 입던 옷을 벗어 주었다. 마당에서 도리깨로 콩 타작을 하다가 걸인들이 오면 한복판의 가장 좋은 콩을 떠주었다. 이삭 줍는 사람들에게 볏단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김상재가 추의추식 광제한빈의 삶을 살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성품은 천성적으로 어질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준다는 명심보감 첫 글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질고 배웠고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쉽게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 그 곳에, 어질고 배우고 가진 자가 어디 그 뿐이었으랴! 앞에서 지적한 대로 김상재는 구중궁궐에 사는 갑부가 아니었다. 그저 남보다 조금 여유가 더 있었을 뿐이다.

 

김상재의 그러한 박애활동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가훈을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로 정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 5:42)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긍휼히 여기는 자”(마태 5:7)로 살고자 했다. 이 가훈을 자녀들에게도 철저히 가르쳤다.

 

그의 아들 김병기 씨는 부친의 박애정신이 자녀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서 형이 교육계에 뛰어든 것도, 자신이 농학을 공부하고 농민운동 계몽운동에 앞장선 것도 그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김상재는 조건 없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갚고자 했다. 그의 광제한빈의 사랑실천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있었다. 그는 민족은 있어도 나라가 없는 백성, 도탄에 빠진 이웃을 돌보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김상재가 선행을 베푼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세상의 어떤 보상을 기대하여 구제에 열성을 다한 것도 아니다. 자기과시를 위한 섬김도 아니었다. 복음전도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했던 것이다. 그는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6:3~4)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상재의 추의추식 광제한빈의 사랑은 널리 알려졌다. 기독신자, 비기독신자를 막론하고 그의 어질고 자비로움을 칭송하였다. “외인들”(딤전 3:7)이 그의 선함을 칭송하였다.

 

장로 김상재에 대한 이 같은 칭송은 이 지역 복음전도화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의 고전교회의 지위는 아주 특별하다. 유림과 비기독교 신자들도 교회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풍습은 장로 김상재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병자년(1938) 유월, 그의 추의추식, 광제한빈의 사랑에 감동한 걸인, 길손, 걸식과객들은 정성스럽게 얻어모은 돈으로 그의 은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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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참봉김공상재송덕비(前參奉金公相才頌德碑)

 

걸식과객들이 돈을 모아 세운 이 비석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현 비석의 머리 부분은 본래 없었던 것으로 자녀들이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 볼품없는 비석은 그 볼품없다는 까닭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볼품 없음은 걸인들이 세웠기 때문이다. 걸인들의 마음을 담은 김상재에 대한 송덕문은 사언구(四言句) 8행 운문체(韻文體) 비명(碑銘)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天生此人 萬有其仁(천생차인 만유기인)

推衣推食 廣濟寒貧(추의추식 광제한빈

)積善之家 歲代興昌(적선지가 세대흥창)

名振四海 萬口誦新(명진사해 만구송신)

 

하늘이 이 사람을 내시매만방에 인자함을 베풀었도다.

입을 것을 주며 먹을 것을 주며널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도다.

적선하는 집안세세대대로 흥창하리라

그 이름이 온 세상에 떨쳐만인의 칭송이 새로워지리라

 

비석의 모퉁이에는 “옛 부터 아는 자들, 왕래하던 손들 세웠다고 적혀있다. 걸인들이 돈을 모아 장로의 송덕비를 세운 교회사에 찾아 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던 천생차인, 만유기인 김상재, 그는 전 참봉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독신자로서, 자신의 주(Lord)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추구한 예수의 제자로서 그러했던 것이다.

 

김상재의 묘는 고전에서 하동으로 넘어 가는 길목 갈록재에 자리 잡고 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종 장로 김상재의 무덤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3품 통정대부 김상재지묘혹은 전 참봉 종 9품 김상재지묘로 새겨있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김상재가 살던 시대는 관직과 품계를 중시하고 재물의 정도로 사람을 측정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인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 장로 김상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녀들에게 그러한 그의 내용의 묘비문을 새길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상재는 부인 김상수 씨 사이에서 슬하에 34녀를 두었다.

 

고전교회의 신앙뿌리

 

하동 땅 고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구가 많지 않다. 산업화, 도시화를 겪은 지금은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된 지역이다. 고전교회는 많은 교역자들과 장로들과 교회봉사자들을 배출했다. 이 교회가 배출한 교역자들 중 현재 생존해 있는 목사는 약 30명이다.

 

강기택 강위상 김성진 김성재 김완용 김완일 김종규 김종만 김진태 박덕생 박영출 이관호 이우석 정규채 정명운 정명채 정순국 정상문 정주성 정주채 정재기 정재완 정찬수 최명식 최덕성 최성실 최재건 최재록 하재성

 

고전교회에서 신앙을 익혀 외지에서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의 수는 목사의 수를 훨씬 넘어선다.

 

강기삼 김두석 김병기 김순구 김완식 김완호 김우곤 김종석 김종철 박천수 변이만 신봉도 이성희 임병수 이재룡 정귀영 정권채 정계현 정순영 정식현 정승채 정우채 정유근 정진우 최경환 최규환 최성환 최복수 최윤환 최재식 하수용 하종용 

 

이것은 필자가 1992년에 집계한 것이다. 그 직후에 황일성은 목사로 황우수, 황영식, 오현기, 이평석, 정회돈, 최덕순, 정민채 등이 장로로 임직을 받아 봉사하고 있다. 고전교회가 조사한 최근 자료들에 따르면 고전교회는 약 52명의 장로를 배출했다고 한다.

 

고전교회가 몇 사람의 학자와 신학자들을 배출한 것도 큰 특징이다. 최재건 박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이며, 교회사 전공자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를 받았다. 최덕성 박사는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에모리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하재성 박사는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칼빈신학교에서 석사, 밴더빌드대학교 철학박사를 받았다.

 

설교학을 전공한 최재율 박사는 총신대학교와 칼빈대학교에서 석사, 서더런뱁티스트신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최재호 박사는 부산대학교에서 종교개혁사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부산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브니엘고등학교 교장을 맡았다. 최재운, 최재호는 고전교회 출신 장로들의 자제들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목사, 장로, 신학자라고 하여 일반신자보다 더 위대하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 부산, 진주 등지에서 집사, 권사, 일반신자로서 전국에 산재하여 교회를 봉사하는 고전교회 출신 성도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들을 일일이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목회자 아내로 봉사하는 고전교회 출신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한국기독교백년’(화보)에 따르면 고전교회는 해방 후부터 약 4,500명의 교인들을 양육하여 도시교회에 보급하였다고 한다. 고전이라는 지역은 발전이 되지 않아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도시화의 물결 아래서 고전교회는 도시교회들에 성도들을 공급하는 교회’(supplying church)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지리산 자락의 시골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교회가 이처럼 많은 신자, 교회봉사자, 신학자들을 배출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김상재와 같은 훌륭한 신앙 선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최경환 장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교회든지 개척당시의 교회 인물들이 모범을 보여야 후대에도 교회가 잘 될 수 있다. 고전교회는 김상재 장로가 터를 잘 닦아 놓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교회가 되었다. 교역자를 대하는 태도, 기도, 생활, 찬송 부르는 모습에서조차 그는 과연 복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김상재 장로의 신앙과 삶은 고전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뿌리이며, 모델이며, 지역 선교의 밑거름이다.

 

고전교회 성도들은 교회를 섬기는 일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 전통, 즉 신앙적 풍토에서 자랐다. 김상재의 삶과 봉사생활에서 두드러지게 엿보이는 이 전통은 그 이후의 고전교회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의 아날학파는 역사가 정치가나 위인들의 이야기에 치중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보통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에 중요성을 준다. 김상재는 위대한 삶을 산 보통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충실했고,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다. 신행일치의 사람이었다. 비기독교인들, 가난한 자들, 한을 가진 민초들은 그러한 김상재를 천생차인, 만유기인, 추의추사, 광제한빈의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였다.

 

하동포구 80리 동편지역에서 걸인, 걸식과객들이 한 기독교인 덕을 기리기 위해 쓴 8행 비문은 한편의 사도행전이다. 비기독교인 걸인 과객들이 쓴 이 짧은 사도행전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곳 사람들의 삶과 신앙의 교훈이 될 것이다. 성령의 사람 김상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움직였던 그리스도의 상(Icon) 장로 김상재, 그의 삶의 역사는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 놓을 만한 자랑스러운 이야기이다.

 

자동차로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가다가 섬진강을 건너기 전 하동교차로에서 내려 우회전하면 고전면 사무소와 배다리 시장 쪽으로 간다.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약 5분 자동차로 가면, 산등성이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왼손 편(홍평 마을 뒤편) 길가에 허수룩 하게 서 있는 전참봉김공상재송덕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쪽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김상재의 삶이 서려 있는 하동성과 고전면민 독립운동기념비배다리 시장이 나온다. 거기서 바라다 보이는 아담한 빨간 벽돌 예배당이 김상재 장로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고 충성했던 고전교회의 예배당이다.

 

덧붙임 글 

 

1. 기독교 역사에 걸인들이 돈을 모아 교회의 장로 송덕비나 기념비를 만들어준 일은 없다. 교회사를 전공한 최재건 박사(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나 기독교사상사(교의학과 역사신학)를 전공한 필자가 아는 바로는 그런 전례가 없다. 김상재 송덕비와 그의 신앙흔적과 고전교회 이야기는 탁월한 교회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2. 고전교회의 현재의 예배당(위 그림)은 1970년대 초에 건축한 것이다. 서부경남에서 찾아보기 드물게 벽돌 건물로 정성껏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지은 시기는 일제 수탈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뒤국민소득이 연평균 미화 100달러 정도였을 때였다. 북한보다 더 못 살던 시절에 건축한 예배당이다. 신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성을 다하여 직접 건축하였다. 고전교회 신도들의 신앙적 열정과 정성이 담긴 건물이다. 교회당 건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앙의 한 표현이다. 김상재 장로 이야기는 그의 사후에 고전교회당을  지어올린 고전교회 구성원들의 신앙을 다소나마 엿보게 한다.

 

3. 존경받는 인물에 대한 역사기록은 자칫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가 될 위험이 높다. 성인열전은 개인을 미화시키고 신화화 하는 경향이 크다. 이 글은 구전, 증언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하기오그래피 성격이 완벽히 배제된 글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에모리대학교 대학원에서 '하기오그래피'(역사철학과 기술론)을 공부한 바 있다. 그러한 특징을 최소화 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이 글을 집필했다. 김상재 장로의 이웃집에 살던 필자의 부친 최우용과 모친 정순말의 증언을 기초자료로 삼았다. 몇 년 동안 김상재와 함께 고전교회를 섬긴 최경환 장로, 여러 신도들의 증언, 김상재의 아들과 손자, 손녀들의 증언을 듣고 비평적으로 소화하고 아래의 참고도서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글이다.

 

4. 참고문헌과 자료는 다음과 같다. 고종황제의 칙명장 (광무 95),  조선왕조실록,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전교회 당회록,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록(1908~1945), 이제규  하동군사(하동군 발행, 1977),  하동읍 50년사(하동읍 발행, 1990),  마을의 유래 및 사적전설(하동문화원, 1986),  동국여지승람,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록,  용사일기,  The Minutes of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The Korea Mission Field,  한국기독교 100년 화보,  신약주석(The Conference Commentary of the New Testament).

 

5. 위 글은 <월간고신>(199210월호와 11월호)에 게재되었다.  '고전교회100년사'(2007), 최덕성, <교황신드롬>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4), <부산-경남교회사 연구>(2008)에도 게재되어 있다. 하동문화정신사라는 책에 게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글쓴이: 최덕성 박사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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