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장로회신학교, 총회직영 아니다

by reformanda posted Apr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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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로회신학교, 총회직영 아니다

 

총신대학교 사태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곤혹스럽다. 교회 직영 목회자 양성 신학대학원은 교회의 연장이다. 오랜 역사을 거치며 국가의 교회 지배를 거부해온 기독교 역사를 고려하면 있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는 총신대학교의 현 관선이사회 상태는 굴욕적이다. 현 상태를 초래한 것은 예장 합동의 내부 갈등이다.


교회 직영 대학이나 신학교의 갈등은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기독교의 신인도 향상을 저해한다. 더욱이 현대 정보통신 기술은 신속하게 소식을 광범위하게 전달하게 한다. 기독인과 교회의 허물을 확대 재생산하여 기독교 전체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 장기화 되고 있는 총신대학교 사태는 복음전도의 길을 가로막는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방해한다.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사역에는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보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기독교운동은 유럽기독교를 몰락시킨 주 원인 가운데 하나다. 현 총신대 사태는 한국 안에 반기독교운동이 횡행하고 복음전도가 어려워진 시점 한 복판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보호자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요셉은 정혼녀 마리아의 성령 임신을 신뢰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녀와 아기를 보호했다. 요셉의 그리스도 보호는 엄청난 신앙적 결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과 주의 몸인 교회를 보호하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절실하다. 옳다고 다 진리는 아니다. 길이라고 모두 통과해도 무방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기를 원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만사를 품위와 질서 있게(고전 14:40) 처리하는 것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전통을 지향하는 예장 합동과 총신대 사태는 성경의 가르침과 개혁주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복음전도와 한국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갈등을 조속히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해결하기 바란다.

 

교회 직영 신학교가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국가가 파송한 이사들의 통제를 받게 되면 교회의 바벨론포로 시대가 시작된다. 무신론자, 자유주의 신학자, 좌파, 승려, 무당도 신학교를 감독하고 지배하는 이사가 될 수 있다. 고신대학교가 10여 년 전에 의과대학과 병원을 둘러싸고 겪은 관선 이사 시대의 수치, 모멸감, 정신적 트라우마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총신대학교 교명을 바꾸라고 권하고 싶다. ‘총회신학교라는 명칭은 정치적이며 교권주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학교의 명칭이나 사람의 이름은 그 기관과 개인의 성향을 조장하고 촉진한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예장 합동과 총신대학교 운영자들은 교권과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이 기질, 성향은 총신(General Assembly Seminary)이라는 명칭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총회가 교회를 지배하고, 목사들이 총회를 장악하고 나아가신학교를 장악하는 권력 이미지를 물신 풍긴다.

 

의사가 병을 발견하면 시원(始原)부터 찾아 점검하고 치료한다. 총신대학교의 현 사태는 설립단계에서 정치적 성향을 자지고 시작했다. 총신대학교는 양심의 교사를 양성하는 선지학교다. 이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역사날조다. 설립연대 역사편찬과 졸업생 차수 계산에 정직하기를 바란다.

 

총신대학교는 자신의 설립연대를 1901년으로 표기한다. 졸업차수 표기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졸업생 차수부터 계산한다. 설립연도는 아무리 따져 거슬러 올라가도 1948년 그 이전은 아니다. 박형룡 박사가 서울 남산의 일본 조선신궁 건물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교에서 출범했다. 이 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1951년 무렵 총회신학교로 개편되었고, 1959년에 현재의 합동, 통합이 분열할 때, 현 총신대와 장신대로 갈라섰다.

 

남산의 장로회신학교는 출범부터 정치적인 성향과 윤리적인 결함들을 가지고 있었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을 채우지 않은 시점에, 그 학교의 신학생 절반가량과 함께 새로운 신학교를 세웠다. 정치적 행보에 앞장선 학생들이 박형룡의 비윤리적 행보를 부추겼을 수도 있지만, 박형룡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예장 고신은 목회자가 신자들을 데리고 나가 다른 교회를 세우면 목사직을 파면시킨다.

 

남산의 장로회신학교의 첫 졸업생은 그 학교에서 잠시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고려신학교에서 졸업을 했어야 하는 자들은 기독교 친일파 인사들과 손을 잡은 박형룡의 정치적 행보와 현실 타협적 처신을 따라 신설 학교로 옮겼다. 고려신학교에서 이탈한 이들은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19486월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제1회 졸업생이 됐다. 이 학교는 한 달 교육을 시키고 신학사(B.D.) 또는 지금의 목회학 석사(M.Div.) 과정에 해당하는 과정 졸업장을 주었다. 한 달 동안 공부하고 졸업장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지도자가 윤리적으로 건실했다면 고려신학교 학생들을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편입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사진(사진 1) 사진 중앙에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기념 1948700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날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사진의 중앙 좌편에 박형룡 교수가 있다. 김준곤(CCC), 박창환(장신대), 신복윤(합신대), 손두환(총신대), 정규오(광신대), 박영창(일본), 최석홍(총신대), 차남진(총신대)이 보인다. 박치순, 김억수, 송치호, 박중락, 하종관, 정희찬, 장세용, 박용한, 전상성, 조진곤, 엄무성, 이상덕, 이노수, 김두용, 정윤진 등 약 24명이 졸업했다. 정확한 명단과 졸업생 수는 장신대와 총신대의 졸업생 기록부에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위 졸업기념 사진은 남산의 장로회신학교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의 후신으로 출발하지 않았음을 명백하게 입증한다. 이 학교는 당시의 장로교 총회 인준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관계에서 우여곡절의 논쟁 끝에 개편되어 1951년에 총회신학교로 바뀌었다. 1959, 현재의 합동과 통합이 분열할 때, 현 총신대와 장신대로 갈라섰다.

 

현 총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관계자들은 어느 시점에 은근슬쩍 자신들의 학교가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설립연대와 졸업생 차수를 계승하는 형태로 역사를 개조했다. 언제, 누가, ,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를 바꾸었는지 궁금하다. 총신대와 장신대가 발행한 백년사들도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상당히 노력했지만 이 중요한 역사개조의 정당성을 밝히거나 역사날조를 변명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평양에는 1940년에 친일파 목사들이 주도하여 세운 신학교가 있었다. 평양신학교, 일명 채필근신학교다. 일본신도주의와 결탁하여 세워지고 교회사(敎誨師)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그리스도의 왕중왕 되심을 부정하고 성경을 편집하고 역사적 기독교와 정통 신앙을 일본민족주의기독교신앙으로 개종시키는 하는, 사실상 배교하도록 가르치는 선생을 훈련하는 학교였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는 같은 해에 같은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부근에서 출발했다.

 

평양신학교는 당시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운 직영 신학교였다. 1940년에 설립되면서 같은 도시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 소유권자에게 학교 건물 사용 허락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스스로 폐교하는 학교가 신사참배, 우상숭배에 솔선수범하고 배교하는 교단과 그 신학교에 건물을 양도하거나 사용하게 할 까닭이 없었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는 별개의 학교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1941) 기념사진(사진 2)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위 두 학교의 역사를 병합하여 자기 학교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기까지의 평양신학교 곧 해방 직후 공산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신학교의 역사도 자신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시대학교가 자신들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한 학교라고 주장할만한 역사적, 합리적, 이론적 근거가 없다. 민족침탈, 광복, 동족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사건들과 정황을 고려해도 평양에 있던 학교와 광복 후 서울에 세워진 두 학교를 연결시킬 타당한 고리가 없다. 역사기술은 우물쭈물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날조된 역사를 묵인하는 기독교는 사회적인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다.

 

박아론 박사(전 총신대 교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과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교묘하게 관련시킨다.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음으로써 박형룡은 옛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계승이라는 명분을 충족... 실로 놀랍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나의 아버지 박형룡>, 2014, 214)고 감탄한다. 박형룡이 시작한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총회가 직영신학교로 인준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최근, 어느 교회사학도는 총신대학교가 총회의 직영학교일 때 존재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위 박아론의 궁색한 역사왜곡, 사실호도를 주장의 근거로 도입한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총회의 인준을 받은 총회직영 신학교였다는 것이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가 아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인준한 직영 학교가 아니었다. 장로회선교공의회가 소유하고 경영하는 학교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평양신학교가 같은 도시의 장로회신학교 소유권자에게 건물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총회는 양도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1912 설립)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편입(1944)되면서 해체되었다.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합동 총회는 사실상 광복 후에 조직된 새로운 장로 교단이다.

 

광복 후 만들어진 새 교단이 박형룡이 세운 남산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한 것과 1944년에 해체된 옛 교단이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 인준은 별개의 사안이다. 박아론은 후자가 전자를 계승했다는 근거로 총회의 직영신학교 인준을 끌어와 설명한다. 박아론의 논점일탈의 오류, 범주착각의 오류, 허위주장은 계승의 근거 없음을 반증한다. ‘계승의 근거 만들기에 목말라하는 모습이다.

 

총신대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처럼 자신의 역사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설립에서 시작하고, 1938년에 폐교한 학교를 정통으로 계승한 것으로 편찬하여 기술한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평양신학교(1940)를 자신의 역사에 포함시킨다. <총신대학교백년사>는 총신대대학교와 평양신학교가 무관다고 간주하여 채필근신학교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에서 배제한다. 1939년부터 1947년까지의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를 배제하면, 9년이 모자라는 데도 이를 포함시켜 100주년이 되는 2001년에 성대히고 다채로운 기념행사들을 가졌다.

 

나는 예장 합동이라는 교단을 사랑하고 총신대학교를 귀하게 여긴다. 장자교단, 정통성을 가진 교단,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학교라는 근거 없는 선전 때문이 아니다. 교단의 규모가 크기 때문도 아니다. 그 안에 신앙고백공동체 안에 구원의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구속한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부패를 고백하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신학적 노선 때문이기도 하다.

 

몸의 일부가 아프면 전체가 고통을 받는다. 총신대학교 사태는 복음전도와 교회의 발전을 저해, 방해한다. 한국교회에 피해를 준다. 개혁주의 전통에 부합하는 품위와 질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차제에 근원으로 돌아가 총신 설립의 윤리적 결함, 설립연도와 졸업차수 등 역사날조에 대한 회개와 반성 그리고 교명 바꾸기 등은 총신대학교와 예장 합동도 어쩔 수 없이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자각과 더불어 사태 해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구성원들이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인정하고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사태를 신속히 해결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개혁교회는 리포르만다(REFORMANDA) 곧 지속적인 개혁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다. 정확한 근거와 학문 형식을 갖춘 반론을 기대한다.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위대한 이단자들>,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와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위 글은 총신대학교가 관선이사체제로 개편되는 시점에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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