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귀신 들렸나?

by dschoiword posted Nov 08,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세포.jpg



대통령이 귀신 들렸나?



대통령이 귀신 들렸나? 마음을 누그려뜨리고 차분히 생각할 때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중의 감정적 판단과 언론의 횡포에 농락당하게 된다. 무성한 비난 가운데서 무엇이 사실이며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성급한 판단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 자세가 요청된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약신학을 가르치는 김철홍 교수는 2016.11.7. "박근혜 대통령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발표했다. 신학교 언저리에조차 중세시대 마녀사냥에서나 들을 수 있는 괴담수준의 픽션(fiction)이 나돌고 있음을 지적한다. 냉철하고 예리하며 합리성이 돋보인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이다.


*


우리가 처한 영적 위기: “박근혜 대통령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지난 10월 30일 장신대 교직원 메일을 통해 “시국에 대한 교수 간담회” 초청장이 왔다. “최근 대한민국은 국가와 통치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마저 잃어버리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고 온 국민의 절망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 신앙공동체가 “그 어떤 정치적 위기보다도 심각한 영적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적혀 있었다. 1차로 11월 2일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를, 2차로 11월 3일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전우택교수를 초청하여 교수간담회가 열렸다. “현 정국에 대한 사회적 위기를 바르게 진단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자는 취지의 교수 간담회였으므로 최근 단기 우울증에 빠져있었던 나는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두 차례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 가까운 실망이었다. 나는 그 초청장에서 “영적 위기”라는 말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영적 분별을 통한 시대적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고민”하자는 초청사의 “영적 분별”이란 말을 읽으면서도, “영적”이란 말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다. 1차 간담회를 마치면서 임성빈 총장이 다음 간담회 강연은 “영적인 부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때에도 조차 나는 그 말의 깊은 함의(含意)를 다 깨닫지 못했다. 결국 2차 간담회에서 전우택 교수의 강연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초청장이, 그리고 임성빈 총장이 왜 “영적 위기,” “영적 분별,” “영적인 부분”이란 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씨의 사교집단에 가입하였고 영적으로 악한 영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주장이었다.
집단정신병 전문가로 자신을 소개한 전우택 교수는 발제의 서두에서 자신이 오늘 하는 말은 “주관적 추측”에 근거한 것이며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의 실망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천명하는 그 순간부터, 요즘 온갖 추측성 음해 기사를 쓰고, 방송 보도까지 하고 나서 결국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태도를 가진 언론사 기자, 방송국 앵커의 모습과 그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과 전문의 전우택 교수의 추측은 아래와 같다:


(1) 박근혜 대통령은 어린 나이에 청와대에 들어감에 따라 다른 일반인처럼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면서 사회성을 발전시키는 성장과정이 결여되어 일반인보다 사회성이 부족할 것으로 추측된다.


(2)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의존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이며 20대 초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심으로, 그리고 27세 경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심으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현상이 나타나 따뜻한 인간관계를 제공하는 사교집단에 가입하게 될 개연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3)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지인(知人)들이 자신을 못 본체 하는 경험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 생겨났을 것이고, 이것은 결국 기성종교가 자신의 상처(trauma)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 대목까지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장기간 인간의 정신적 질병과 정서적 장애를 연구하고 치료해온 전문가로서의 추측이고, 어느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겪은 것과 같은 불행한 가정사를 겪는다면 그 정도의 심리적 장애가 생길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이므로 그의 말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격장애, 인격장애, 신경증과 같은 단어들이 나오고, 슬슬 최태민 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대통령의 영적 상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급기야 “입신”(入神) “영적 현상”이란 말이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사교집단에 가입했다”는 말이 나오고,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 나오더니 급기야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의 외치(外治)를 맡고 책임총리가 내치(內治)를 맡기로 하는 여당의 개혁안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만약 북한이 쳐들어오면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은 대통령이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전우택 교수가 차라리 대통령이 내치를 맡고 총리가 외치를 맡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교수들이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이 말을 진담으로 받아야 할지 농담으로 받아야 할지 나로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나 저명한 정신의학자일 뿐 아니라 기독교싱크탱크를 자처하는 한반도평화연구원(이사장 김지철 목사, 부원장 임성빈)의 원장이기도 한 전우택 교수의 고견(高見)이므로 나같은 범부(凡夫)가 이 말을 농담으로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혜안(慧眼)에 비친 박근혜 대통령의 영적 상태에 대한 평가는 나의 깊은 묵상을 요구했다. 그럼 묵상을 시작해보자. 나의 묵상은 출발하자마자 그의 주장의 문제점들에 걸려 넘어진다.


첫 번째 문제는 전우택 교수가 자신이 그런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귀신들림과 같은 영적 현상은 사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신학생들에게 누가 귀신들린 사람을 데려오더라도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逐鬼, exorcism)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문제가 정신적 질병 때문인지 아니면 귀신의 빙의(憑依) 때문인지 목회자가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정신적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에게서 귀신을 쫓아주겠다”고 하면서 축귀를 하면 그 사람의 정신적 질병이 오히려 더 악화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일단 그 사람을 귀신들림의 현상에 대해 이해를 갖고 있으며 신앙을 갖고 있는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야 한다. 정신과 의사는 각종 심리 테스트를 한 뒤 그의 심리상태가 도저히 심리학,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에 비로소 귀신들림의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즉, 정신과 전문의가 “A라는 사람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려면 먼저 심리 테스트를 하고 그 분석 결과를 놓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전우택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과 주치의도 아니고, 대통령에게 그런 테스트를 한 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결론에 쉽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놀랍다. 전우택 교수는 심리 테스트 없이도 타인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영적 분별의 은사”를 갖고 있다는 것인가? 최소한 “최순실 저녁 메뉴로 곰탕 거의 다 비워”라는 특종기사가 전달하는 사실(fact)만큼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근거해 강연을 했어야 하지 않은가?


두 번째 문제는 테스트를 한 뒤 설사 그런 결과가 나왔다 하더라도 심리치료사(psychiatrist)에게는 그가 지켜야 할 의학적 직업윤리(professional medical ethics)라는 것이 있다. 그 환자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제3자에게 그 환자의 상태에 관해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물며 테스트도 하지 않은 사람의 심리적 상태에 관해 공개 강연의 자리에서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진단(professional diagnosis)을 공개한다는 것은 매우 전문가답지 못한 행동(unprofessional behavior)이며, 사이비 전문가(pseudo-professional)가 보여주는 행동이다. 더구나 그 논의의 대상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전우택 교수가 임성빈 총장과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 잡담(雜談)을 나누었다면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수간담회는 사적인 자리가 아니다. 총장이 장신대 모든 교직원들을 소집했고 그가 초청한 강사가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전우택 교수가 대통령에 대한 신성모독죄를 지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개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전문 의학적 폭력(professional medical violence)을 저질렀기 때문에 비판한다. “A가 귀신에 들렸다”는 말은 영적 전쟁의 언어들을 동원해서 사람에게 꼬리표를 다는 행동(spiritual labeling)이며, 이것은 일반 교회에서도 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왜 장신대 교직원들이 중세시대 마녀사냥에서나 들을 수 있는 괴담수준의 픽션(fiction)을 들어야만 하는가? 왜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로 하여금 이렇게 품위 없는 토론을 하게 만드는가?


나는 그 강연 후 질문대답 시간에 위와 같은 취지의 말을 간단히 한 바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일반 대학에서 했어도 문제가 될 터인데, 심지어 장신대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간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영적 상태에 관해 신문사 기자들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영적 문제에 전문가가 아닌 그들이 선정적 주장을 펴는 것과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것 사이에는 말의 무게에 많은 차이가 있다. 하물며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장신대 교수들이 대통령의 영적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한 무게가 있다.


동양철학의 대가로 자처하는 한신대 김용옥 교수가 한복 두루마리를 입고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무당춤을 춘 것”이라고 떠드는 것과 장신대 교수들이 하는 말은 그 무게가 다르다. 대통령이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임성빈 총장은 지금 그 방향으로 장신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책임이 전우택 교수에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임성빈 총장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했을 뿐이다.


임성빈 총장이 개인적으로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건 그것은 그의 자유이므로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총장이기 때문에 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견해를 장신대 교직원에게 강요할 자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2차 간담회 광고는 “부득이한 사유로 참석이 어려운 분”은 교학처 직원에게 신고하고 결석하라고 했으므로 강제성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는 정치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3년 전 학교에서 심각한 윤리적 비행을 저지른 S교수를 내가 징계위원회에 고발하고 그를 학교 규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나에게 수차례 “이런 문제를 이사회가 알게 되면 장차 교수회가 이사회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면서 내가 고발을 취하할 것을 요청했다.


그 때 나는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문제다. 왜 임교수는 이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가? 그렇게 정치가 중요하면 정치하러 가시라”고 말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전공은 기독교 정치가 아니라 기독교 윤리다. 결국 그는 정치계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이제 학교 안으로 정치적 이슈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도 영적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치장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하려는 야비한 시도를 꿈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적 전쟁의 신학을 정치에 영역에 도입하려는 그의 야무진 시도는 신학적 대참사(grand theological disaster)로 끝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전우택 교수 강연을 들은 뒤 임성빈 총장이 그에게 “마치 예언자의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취임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임총장이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앞으로 3년 11개월이 걱정이다. 과연 이런 총장에게 내치(內治)는 물론이고 외치(外治)를 다 맡겨도 괜찮은 것인지, 이미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장신대의 학부, 신대원, 대학원의 교육과정을 이제라도 개혁하여 미래의 스마트 스쿨(smart school)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놓을 수 있을 것인지, 또 다시 장신대가 4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이런 연유로 “최근” 나는 임성빈 총장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마저 잃어버리는 헌정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나의 “절망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실망의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고 그에게 있다.


이미 두 차례의 간담회에서 장신대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는 발언이 나왔고, 이번에도 그 주장은 역사신학 교수들 입에서 나왔다. 작년 이맘때 역사교과서 성명서를 냈으므로, 매년 가을이 되면 성명서 병이 도지는 모앙이다. 성명서를 내는 것이 취미인지, 성명서를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짜릿한 쾌감을 주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성명서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고 나에게는 그들의 불치병을 치료한 묘약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명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해 장신대에 온 것이 아닐까?


나는 그들이 개인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이번에도 “장신대 교수 일동”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려고 한다면 분명히 말한다. 나는 반대다. 메일로 성명서 초안을 보내고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받아서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명으로 성명서를 내길 바란다. 이후로 성명서 때문에 또 교수간담회를 소집하지 않기를 바란다(내 삶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성명서를 향한 그들의 끝없는 갈증과 허기가 과연 이번 한 번의 성명서로 채워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 최순실 부녀와 같은 사람과 가까이 지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며칠 전 본 교단 출신으로 페루 선교사로 평생 일하시고 얼마 전 은퇴하여 다시 페루로 돌아간 황윤일 선교사가 2016년 10월 29일에 인터넷에 올린 글(http://blog.daum.net/bk1981/17445)을 읽게 되었다. “신학교에 찾아온 한 여성, 그리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1980년 학기 초, 광나루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 교정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니, 소형 자동차에서 어느 한 처자가 내렸는데, 신학생들이 그 자동차를 둘러싸고 그 처자를 향해 소동을 벌리며 고함치는 소리였다. 그 전 해,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고, 그 신학교에 이십대 처자가 홀로 신학교를 찾았다. 그가 바로 박근혜 현 대통령이다. 양 부모를 다 총탄으로 잃고 홀로 된 미혼의 처자가 찾아왔을 신학교, 어디 몸을 숨기거나 의탁할만한 곳을 찾아서 왔을 신학교, 왜 그녀가 하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선택하여 왔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감싸 줄 구석은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신학교를 찾지 않았겠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장로회신학대학교 안에는 그 외로운 영혼의 처자에게 내어 줄 어떤 자리도 없었다. 본인을 포함하여 정치바람을 탄 학교, 학생들 어느 누구도 그 애처로운 처지에 함께 눈물을 흘려주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부끄럽다. 아마도, 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때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한국교회가 함께 맞아주고 눈물 흘려주었다면, 최 아무개와, 듣자하니 박수무당 수준의 목사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깊은 관계까지 안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이제 본인은 비록 은퇴하였으나, 나의 적을 둔 교단을 향해, 아니 자칭 높은 수준의 종교단체들을 향해 한마디 한다면, 대국적 정치도 좋고 어떤 앙가스망도 좋으나 애처롭고 외로운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시던 주님의 말씀은 잊지 말자는 말이다. 자비하신 주님께 부끄럽고 죄송하다."


당시 27세의 나이의 박근혜양은 장신대 기독교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등교할 때마다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소동을 일으켰고 얼마 후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가 위의 내용을 2차 간담회에서 언급하자 여러 교수들이 다양한 견해를 피력했다. H교수는 장신대의 부끄러운 역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질까 걱정된다는 말을 했다. 부끄러우므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나는 역사를 미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부끄러운 역사는 그 부끄러운 채로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Y교수는 기독교교육과 선배교수에게 직접 들은 말을 전했다. 박근혜양이 학생들의 반대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둔 것이 아니라 수업 자체에 흥미를 갖지 못해서 그만 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 아무 문제없는 것일까? 역사학과 교수들은 당시 학생들의 심정을 자신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정말 그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것이다. 그 개인이 독재자의 딸이건, 아니면 나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우리는 모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한다. 민주화 세력은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싸워왔다. 박근혜양이 학생으로서 갖고 있는 수업권(受業權)은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그녀의 권리였다. 자유민주주의는 나의 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자유로운 선택과 법적 권리를 내가 인정할 때 시작된다. 집단이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그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갖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인민민주주의라는 집단주의 이념이 가르치는 태도며, 바로 인민재판의 멘탈리티다. 나도 역시 그 당시에 장신대 교정에 있었다면 박근혜양을 비난하는 것에 앞장섰을 것이다. 그러나 35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당시 나의 생각은 천박하기(vulgar) 짝이 없다. 당시에 내가 추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나는 집단주의의 광기(狂氣)에 나 자신을 팔아넘겼었다. 그런데 왜 역사신학 교수들은 1980년에 그들이 가졌던 생각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이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말로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집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보는 집단주의 지배체제다.


만약 2016년 장신대 교정에 다시 “소형 자동차에서 어느 한 처자가” 내린다면 지금의 장신 공동체는 그 처자에게 안전한 인생의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마 그때보다 더 잔인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면도칼로 얼굴을 찢고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니는 홍위병들의 즉석 재판이 열릴 분위기다. 어디 감히 무당이 신학교에 발을 들이냐고 쫓아낼 기세다. 내가 지금 집단주의의 독재를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난 무서운 생각이 든다.


박근혜 양은 당시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학교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 발생한 불행한 일들에 대한 종교적 해답을 찾아 구도자(求道者, seeker)로 찾아온 것 같다. 그러나 진리를 찾으려는 그녀의 영적 순례는 중단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때 만약 그녀가 진리를 향한 순례를 하도록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최태민, 최순실 같은 사람과 엮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일이다. 황윤일 선교사가 지적하는 “정치바람을 탄 학교,” “정치바람을 탄 학생들”은 35년 동안 이 학교를 떠나지 않고 있다. 정말 지겹다. 대체 언제까지 신학교에서 성명서 내자는 교수들의 선동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를 드린다 해도 그 한 영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면 우리의 구도자 예배는 위선이다.


복음은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것이다. 복음은 좌파도 우파도 모두 다 죄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복음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만이 우리의 구원이며, 인간의 나라가, 인간의 정부가, 국회가, 법원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 그 어떤 정부도 정의로운 정부는 없고,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통령, 국회의원, 법관도 없다고 말한다. 복음은 비록 영적인 장신대 교수들이 거국내각이 아니라, 거룩(?) 내각을 구성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물며 한 장의 성명서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현실 정치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정치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좌와 우로 나누어져서 싸운다면 종교의 사회통합 기능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식의 관점을 우리가 먼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가 사회통합의 역할을 하려면 항상 좌파건 우파건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며, 우리 모두가 다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사회가 둘로 나누어져서 서로 해법이 없는 대결로 나아갈 때 기독교는 좌와 우를 넘어서서 전체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함으로 사회가 다시 대화와 통합의 길로 가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좌우 정치 이념 논쟁을 우리 스스로가 넘어설 때 가능하다.


우리 신앙공동체가 “그 어떤 정치적 위기보다도 심각한 영적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교수간담회 초청장의 문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영적 위기는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생긴 위기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추어 신학자다. 현재의 영적인 위기는 장신대 교수들, 학생들, 우리 스스로가 오래 전에 만들었고 지금까지 우리가 스스로 빠져있는 덫이다. 영적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 위기의 본질이다. 나는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신학적이고 영적인 위기가 그 어떤 정치적 위기보다 우리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신학교는 이미 세속 정치판처럼 되어가고 있고, 목회자 후보생인 신학생들은 거리의 투사들이 되어가고 있고, 교수들은 정치 선동가들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평범한 성경신학자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모든 일에 옳다고 스스로 확신하지 않는다. 나도 죄인이고, 나도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장신 공동체의 학생들, 교수들, 교직원들 모두 우리가 왜 이 학교에 모여 있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주기를 부탁한다.


2016년 11월 7일

김철홍 (장신대 신약학 교수)


(페이스북에서 옮김, 저자의 게재 허락을 기다리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