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설교의 회복

by dschoiword posted Nov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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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어야 할 전도 설교 / 페이스북에 떠도는 글을 옮겨옴

 


오늘 우리 시대는 급속도록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우리 시대는 복음을 필요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교회 강단을 통해서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힘든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소위 포스트 모던으로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성은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킨 나머지 현대인들은 더 이상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의 징후가 더욱 신속하게 우리 시대의 불신의 이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의 명제를 담은 복음의 메시지에 무감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함 존스톤(Graham Johnston)은 오늘날 우리의 주일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평균 청중들조차도 많은 설교자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포스트 모던화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1) 호주의 성공회 목사인 피터 코르니(Peter Corney)는 우리가 현대인의 자리에 입장에 서서 작업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과 효율적으로 교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한다. (2) 따라서 이 시대에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전도설교의 회복은 교회의 미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었다.


A. 전도설교가 회복되어야 할 이유

 

1. 성서적 요청이다.

성서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메시지에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4복음서 중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은 그 시작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고 선포하는 것으로 복음서의 무대를 열어 보인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전한 바는 복음이었으며 그는 이 복음을 듣는 청중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셨다(막 1:14-15). 우리는 후일 바울 사도의 구체적인 설교의 전형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예외 없이 그의 설교의 심장은 복음이신 그리스도였고, 따라서 그의 설교는 복음 전도적(evangelistic)이며,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니”(행전 17:2-4)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케리그마는 곧 복음이고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대에 전도설교를 회복한다는 의미는 곧 오늘의 설교가 본래의 성경적 설교로 복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시대적 요청이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시대는 포스트 모던적 세속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의 거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시대이다. 성공과 돈은 현대의 새로운 구원이 되었고 복음은 더 이상 현대인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인기 품목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의 진정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그 필요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는 생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죄와 죽음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초대 교회의 청중들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하시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들은 “--마음에 찔려--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부르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각성케 하심이 있기 전에 초대 교회의 신실한 사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고(행전 2:14-36)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전 2:37) 회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대 정신에 눈이 멀고 귀가 닫혀 예수가 주이심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책임은 더욱 막중한 것이다.


3. 교회적 요청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3). 그렇다면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고, 교회의 지체들은 주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 미션을 감당하는 가장 중요한 한 방편이 설교라면 교회가 선포하는 설교의 초첨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2장에서 자신이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것을 고백하며(골 1:23), 그가 또한 교회의 일꾼이 된 이유를 “--그를 전파하여 각각의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골1:28)고 말한다. 이 구절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의 설교에는 당연히 각 사람을 권하고 세우기 위한 양육의 메시지가 포함될 수 있으나 이런 사역의 전제는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후속조처(follow-up)로서의 요청이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복음 전도적 교회‘(evangelistic church)의 비전에 미달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오직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전도설교 사역에 실패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B. 전도설교가 희귀한 신화적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특히 한국 교회내에 전도설교가 보편적이 되지 못하고 전도 설교는 일년에 한 두 차례의 특별 전도축제 기간이나 총동원 전도주일 등에 국한되고 대부분의 설교는 목회적 필요에 의한 설교, 그리고 윤리적 설교로 채워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실제로 필자가 섬기고 있는 한미준(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한국 갤럽 리서치에 의뢰하여 조사한 2005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교회 개신교인 중 전도를 경험한 통계는 26.4% 미만에 그치고 있다.(3)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전도를 경험 못한 이유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대다수가 전도를 강조하지 않거나 전도 설교를 등한히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매년 주최하는 설교 클리닉에서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전도설교 회수를 물어보면 전체 주일 설교 중 전도설교는 불과 10% 전후로 대답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전도설교가 한국 교회 강단에서 희귀한 설교가 되어 버렸을까? 거기에는 전도설교를 둘러싼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몇 가지 신화적 신념체계들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 성도의 영적 성숙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가 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과연 영적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 먼저 정의될 필요가 있다. 영적 성숙의 조건에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애정이 배제될 수 있단 말인가? 주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그들에게 기대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람 낚는 어부 됨’이 아니었던가(마태 4:19). 전도설교가 우리를 진정한 제자가 되도록 도울 수 있다면 오히려 전도설교는 성도의 진정한 영적 성숙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2. 차원이 낮은 초보적인 설교이다.

또 하나의 전도설교를 기피하게 하는 신화는 전도설교가 초보설교라는 생각이다. 그러면 가장 고급한 진보된 설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주님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마태 28:19-20에 나타난 마지막 전도 명령을 가르쳐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 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지상 명령을 성취하기 위한 전도설교가 초보적인 낮은 차원의 설교로 격하되는 것이 타당한 생각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3.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접근 방식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도자의 이미지를 떠 올릴 때 거리 한 모퉁이나 기차역 광장, 혹은 전차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의 영상을 지우지 못한다. 이런 극단적인 전도자의 이미지는 오늘처럼 급변하는 정보-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회귀 현상으로 착각될 만하다. 그러나 메시지는 불변하지만 방법은 시대의 옷을 입을 필요를 인식하는 상식을 수용할 줄 안다면 새 시대의 접근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새 이미지의 창조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4. 전도 집회나 행사에만 필요한 설교이다.

도대체 왜 전도설교가 전도 집회용이나 행사용으로 전락되어야 한단 말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전도나 전도설교는 특별한 이벤트에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쳤단 말인가? 그렇다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설교가 가장 보편적인 설교로 회복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한국 교회 강단의 진정한 복음적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C. 전도설교가 희귀한 진정한 이유

 그렇다면 오늘의 강단에 전도설교가 희귀한 진정한 이유들은 무엇일까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마도 아래의 네 가지 요소들은 통계상으로 증명되기는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추론되거나 목회 현장에 만연하고 있는 의식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징후들로서 오늘의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의식의 반전과 적절한 대처를 필요로 하는 영역들이라고 하겠다.


1. 전도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의 결핍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는 복음 전도의 첫째 원리는 복음 전도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확신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 우리가 만일 성경적 설교의 본질이 전도설교요, 전도는 사역의 우선순위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복음 전도적 요소가 강조되지 않을 수 있으며 전도설교가 우리의 강단설교에서 가장 자리로 밀려 나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결국 오늘의 목회자 혹은 설교자들에게 전도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다고 밖에 달리 추정할 수 없다.

 

2. 전도 설교의 방법론에 대한 훈련의 결핍

 실제로 필자가 행하는 설교 클리닉에서 목회자들은 가장 어려운 설교 유형으로 전도설교를 들고 있다.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지적되는 이유는 그런 설교를 준비해 본 경험이나 방법론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분명한 필요(know what)를 인식하지만 어떻게라는 방법론(know why)에 대한 훈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좀 더 담대한 복음 전도의 필요성을 인지한다면 신학 훈련에서부터 이런 전도설교의 신학과 기술로 무장 될 필요가 있다.

 

3. 불신의 영혼을 직면함에 대한 두려움

 전도에 은사 받은 사람은 존재하지만 다 이상의 긴장이 필요 없는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도의 모든 현장은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당시의 대표적인 세속 도시 고린도에서 전도하며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오늘의 전도자들에게도 동일한 부담이 존재하며 이 부담의 정체는 결국 불신의 영혼들을 직면하는 두려움인 것이다.

 

4. 영혼의 구령을 방해하는 사단의 간계

 하나님과 성도의 대적인 마귀는 전략의 대가이다. 그는 자연인의 일상적 능력이나 지혜만으로 다루기에는 벅찬 상대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입으라”(엡6:11)고 권면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간계라는 단어의 원어는 ‘methodeias'이다. 그는 실로 다양한 속임수를 사용하여 회심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사단의 전략이 전도 설교를 막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 아니겠는가.


D. 전도설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내용적인 요소

 유명한 C.H.다드(Dodd)는 “사도적 설교와 그것의 발전”(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에서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설교를 다음과 같은 6가지로 요약한다 : 1) 성취의 때의 도래, 2)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3) 메시아의 새 이스라엘의 머리되심, 4)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의 표지로서의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 5)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6) 케리그마의 응답으로서의 회개와 죄사함과 구원의 약속(5) 오늘의 전도 설교에서 변함없이 강조 되어야 할 것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인 된 인간의 보편적인 비참함

 복음이 진정한 해답의 복음, 치유의 복음으로 들려지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실존의 정직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한 보편적인 비참함이라면 이 현존에 대한 각성 없이 어떤 영혼도 예수를 구주로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은 전도설교가 출발하는 선험적인 컨텍스트인 것이다.

 

2.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시고(요한 3:16) 그에게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신다(사30:18). 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증언처럼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며(요한 1:14) 우리는 그의 충만한데서 죄인들이 진정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은혜의 주이시다(요한 1:16).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복음의 핵심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고전 15:1-4).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언이며, 그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참 인간이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참 하나님으로 선포되신 분이시다(롬 1:2-4). “예수는 우리의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선포된 그분 예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 받고, 그분의 부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실이야 말로 복음의 진수인 것이다.


4.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

 신학자 알란 스트리트(R.Alan Streett)는 “복음 선포와 초청이 없는 어떤 설교도 신약적 스타일의 설교는 아니다”(6)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 초청의 핵심은 회개와 믿음이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설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였다. 사도행전 20:21에 의하면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며,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공적 초청의 형태와 방법은 얼마든지 다양 할 수 있지만 모든 전도설교는 죄에 대한 회개와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현대적인 언어 사용과 현대적인 상황의 재구성의 필요

 이 마지막 요소는 선행하는 네가지 만큼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설교자는 시대의 산물이었고 그들은 모두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다. 그가 사용하신 많은 이야기와 비유들은 그 시대의 기준에서 볼 때 첨예하게 시대적이고 시장적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쉽고 정확하게 이야기의 핵심을 알아들었다. 존 스타트(John Stott)는 모든 설교는 결국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고 하였다.(7) 우리 시대의 상황으로 우리의 언어로 전달된 복음을 통해서 현대인들은 다시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설교는 좀 더 쉽게 귀납법적으로 청중들 자신의 언어로 청중의 전 존재로 침투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E. 전도설교의 회복이 초래하는 유익

 전도 설교의 회복이 초래하는 유익은 막대하다. 이 유익은 전도자 자신과 전도 공동체인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에 기여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위임을 받았으며(마태6:9-13), 또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위임을 받은 제자들이고, 이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마태28:18-20) 예수께서는 친히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24:14)고 증거하셨다.


1. 설교자의 정체성을 실현한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구별된 존재들이다. 그중에서도 말씀을 위탁받은 전도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위임받은 자들이 아닌가.(딤후4:2) 바울은 그가 위탁받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고전9:16)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열면서 그는 이미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바로 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을 고백하지 않았는가.(롬1:1)그러므로 복음 설교자들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이요, 자기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2. 전도 공동체가 형성되어진다.

교회는 에클레시아(ekklesia) 곧 세상으로'부터'(out of, from) ‘불러냄을 받은 공동체’(called ones)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교회가 소극적인 성결 지킴이로 머물러 섬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는 다시 세상 한 복판‘으로’(into) 보내심을 받는 자들이다. 주 예수님은 유명한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문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나(요한17:16)그러나 그는 동시에 세상으로 보내어진 존재(요한17:18)라고 기도하셨다. 교회가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하는 순간 교회는 세상에서 분리된 게토(ghetto)화를 면할수 없게 된다. 교회는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하나, 동시에 도피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다하는 전도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3. 하나님 나라 확장의 비전에 동참한다.

존 스타드 목사는 그의 명저 ‘전도하지 않는 죄’(Our guilty silence)의 목차에서 복음 전도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전도의 대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복음전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였다.(8) 여기에 만일 하나를 더 첨부한다면 복음전도의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만하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고(마가1:15), 마태복음 13장에서 그가 무리들과 제자들과 가장 의미 심장하게 나눈 설교의 주제는 “천국은 마치--”라는 표현으로 나누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에 도달하며 최후까지 전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였다.(행전28:31)

 

래미쉬 리챠드(Ramesh Richard)는 복음 설교를 포기한 설교자들을 ‘탕자 설교자들’(Prodigal preachers)이라고 부른다.(9) 그는 우리 모두가 비록 전문적인 복음 전도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을 지라도 우리의 모든 강단 설교는 복음 전도적(preach evangelistically)이어야 하며, 그것은 심지어 우리가 양육 설교를 할 때에라도 그래야 한다고 도전한다.(10) 우리의 강단에서 전도 설교가 회복되는 그날 우리는 초대 교회의 부흥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평양 대 부흥의 재현도 기대하게 될 만하다. 왜냐하면 복음 설교만이 영혼들을 각성시키고 에스겔 골짜기같이 오늘 우리 시대의 골짜기에 버려진 무수한 영혼들을 거대한 군대로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1)Graham Johnston, Preaching to a Postmodern World(Baker Books,2001),p.16
2)Ibid.
3)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두란노,2005),p.173
4)루이스 드룬몬드,현대 전도학 서설,변은수 옮김(성광 문화사,1981),p.134
5)Michael Green,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1970),p.60
6)R.Alan Streett, The Effective Invitation(Fleming H.Revell Company,1984),p.37
7)John Stott, Between Two Worlds(Erdmans,1982),책의 제목
8)존 스타드, 전도하지 않는 죄(Our Guilty Silence), 김 영배 역(예수교 문서 선교회,1979), 책의 목차
9)Ramesh Richard, Preparing Evangelistic Sermons(Baker Books,2005),p.243
10)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