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통

by reformanda posted Mar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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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전통


최덕성 교수의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 역서, <개혁주의 전통>,  역서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을 읽고/ 정일권 박사


최덕성 교수 : 창의적, 역동적, 동시대적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신학자


시작하는 말

 

본고는 고희(古稀)를 맞이하는 은사 최덕성 교수의 기념논총에 기고할 목적으로 쓴 글이다. 역사신학자 최덕성 박사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1989년부터 약 20년 동안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왔다. 개혁주의 신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왔다.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몇 편의 관련 논문들을 발표하고, 저명한 개혁주의 학자들의 글들을 여러 편 번역하여 출판했으며, 개혁주의 전통과 정신을 다룬 고전적인 저서들을 번역 출간했다.

 

최덕성 교수님(이하 존칭 생략)이 학문의 예봉을 날카롭게 갈고 닦은 고신대학교와 리폼드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M.Div., M.Ed.)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따른다. 그 후에 수학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sty, STM)와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Ph.D.)는 개혁주의 전통과 다른 역사를 가진 학교들이다.

 

최덕성은 고급 학문 과정에서 기독교사상사를 전공했다. 자신이 예일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에서 받은 학문 훈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신학적으로 누구인가를 면면히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했고, 정통신학 또는 개혁주의 신학의 장단점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앵글리칸, 감리교, 루터파, 침례파, 로마가톨릭교회 전통 등을 광범위 하게 접했고,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등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는 열매를 가져왔고, 특히 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답변의 글을 쓰고, 때로는 치열한 논쟁을 홀로 감내하는 저력과 지구력을 구축해 주었다고 한다.

 

최덕성은 자신이 예일대학교 신학부의 신학석사 학위 과정 공부와 에모리대학교 인문과학대학원의 철학박사 학위 과정을 거치면서도 개혁주의 신학 또는 정통신학에 대한 존경과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자신의 고집이 황소와 같다고 한다. 기독교 신학을 계통적으로 파악하는 전공 학업 과정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이 가진 탁월성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절대적 진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신학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이 학교들에서 내가 배우고 터득한 학문성과 지적 통합성(integrity)은 나로 하여금 내가 신학적으로 누구이며, 왜 개혁신학 전통이 중요성하며,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가를 간파하는 통찰력을 심어주었다.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신학 전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안목을 제공했다.”

 

최덕성은 임마누엘 칸트가 자신에게 강한 도전을 준 철학자이며, 칼 바르트가 더 강한 도전을 준 신학자라고 한다. 칸트와 바르트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한다. 칸트와 바르트를 극복했다고 한다. 칸트의 인식론을 일면 존중하고, ‘개혁주의 신학자칼 바르트의 가르침을 일면 존중하지만, 그 철학과 신학이 최종적인 대안이 아니라고 한다. 바르트의 성경관과 구원론이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최덕성은 신학과 신학의 역사를 계통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적으로 이해한다. 20세기의 신학자 바르트의 신학적 주지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유럽의 교회들이 사실상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신정통주의라고도 일컬어지는 바르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정통신학)을 어정쩡하게 결합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다가 반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수명을 다하고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개혁신학 관점으로 여러 권의 중량감 있는 방대한 저서들을 저술했다. 교회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채우는 주제들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성경관, 칭의론-구원론, 교황주의, 종교다원주의-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등에 관련된 저술활동으로 한국교회와 개혁주의 신학 정립에 이바지했다. 자신의 창의적 개혁주의 신학을 기본 틀(frame of reference)로 삼아 수행한 학문 작업을 한 결과들이다.

 

최덕성은 고착된 형태의 신학체계를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배격한다. 과거의 것을 수구하려는 배타적 경향을 거부한다. 이는 기독교사상사 전공자의 특징인 듯하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 진수, 특징들을 계통적으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 성경과 합리성에 입각하여 창의적으로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탁월성을 지니도록 적용한다.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더 나은 개혁주의 신학, 창의적이고 역동적이고 동시대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한다. 살아 움직이고 실효성 있는 창의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한다. 성경과 합리성에 부합하는 학문활동으로 교회의 필요를 채우고 있다.

 

최덕성은 교회가 원하거나 제기하는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신학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유명한다. 그가 저술한 여러 권의 책들은 모두 창의적 개혁신학의 특징들을 오롯이 담고 있다. 20여 권의 저작물들은 창의적 개혁신학을 기본 틀(frame of reference)로 삼은 학문 작업의 열매들이다. 근래에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이신칭의 교리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어 개혁주의 구원론을 충실히 대변했다. 바울신학자 김세윤 박사가 제시한 유보적 칭의론이 로마가톨릭교회 트렌트공의회(1547) 칭의론의 짝퉁임을 지적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회를 개최하여 널리 알렸다. 최덕성의 학업 과정과 왕성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학문활동 그리고 잇따르는 인간적인 고통과 역경 등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신학자 최덕성의 창의적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 규명하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본고는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최덕성의 몇 편의 논문들과 그가 수집, 번역, 간행한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문들 그리고 번역 출간한 책들을 중심으로 그의 창의적 개혁신학의 정체를 탐색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최덕성의 여러 저서들과 신학 작품들이 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들에 대한 연구는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놓으려 한다.

 

1. 최덕성의 개혁주의 신학 이해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4편의 논문을 썼다. 개혁주의 신학에 관련된 저서들의 머리말과 옮긴이의 말 등에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들을 요점적으로 소개한다. 논문들은 고려신학대학원이 발간하는 교수논문집 <개혁신학과 교회>와 그의 편저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9)에 수록되어 있다. “개혁주의 전통과 창의적 신학 활동,” “개혁: 열 가지 스펙트럼,” “한국 개혁주의 신앙운동,”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등이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의 정의를 다룬 논문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 담아 출간했다. 존 리차드 드윗(리폼드신학교)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존 볼트(칼빈신학교)개혁주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프레드 클루스터(칼빈신학교)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존 리이스(유니온신학교-리치몬드)개혁주의 전통의 기풍,” 조지 마스든(칼빈대학교)미국 개혁주의 전통,” 얀 페인호프(네덜란드 자유대학교)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영성사,”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필라델피아제10장로교회 목사)개혁주의 신학의 미래,” 그리고 시애톤의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

 

최덕성의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그가 출간한 존 헤세링크의 <개혁주의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7)에 나타난다. 이 책은 필자가 고려신학대학원 재학 시절에 초역해 드린 것을 다듬어 출간한 것이다. 헤세링크는 개혁주의에 대한 풍문과 오해들을 조리 있게 간명하게 엮어 이를 바로 잡는 글로 개혁주의 전통의 트특징을 소개한다. 개혁주의라는 명칭, 신조와 신앙고백, 장로회 정치, 예전, 신학방법, 예정론, 인간능력, 율법--자유, 언약사상, 세상과 문화, 성령, 교회연합에 대한 오해를 다룬다. 이어서 개혁주의 전통의 진수: 특징과 강조점을 소개한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교리와 삶의 일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개혁신학의 특징으로 제시한다. 성경의 권위와 본질, 말씀과 성령의 상호관련성, 성경을 여는 열쇠: 언약을 논한다. 헤세링크의 이 책은 그의 스승이며 웨스턴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직의 전임자인 유진 오스헤이븐의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을 단순화, 대중화한 책이다.

 

최덕성은 유진 오스터헤이븐의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을 번역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리폼드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의 존 드윗 교수가 개설한 개혁주의 전통과목의 주 교재로 읽었다고 한다. 오스터헤이븐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미국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개혁교회(RCA)의 웨스턴신학교(그랜드래피즈, 미시간)의 조직신학 교수였다. 후임자 존 헤세링크 교수의 스승이며, 리폼드신학교의 존 드윗의 스승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한 헝가리개혁교회와 깊은 인연을 가진 분이다.

 

오스터헤이븐의 책은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품격 높은 저서이다. 1장은 종교개혁을 향한 갈망, 종교개혁의 성격, 종교개혁의 확산, 개혁파 종교개혁 지속적인 갱신의 필요성을 다룬다. 2장은 개혁교회, 교회의 보편성, 그리스도의 교회, 교회의 표지, 교회의 예배, 교회정치를 소개한다. 3장은 성경의 신인적(神人的) 특성,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통일성, 성경의 충족성, 성경의 자증성을 다룬다. 4장은 여호와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본성,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 삼중적인 의미를 논한다. 5장은 성령 안에서의 생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와 현세의 올바른 사용 그리스도의 모범 하나님의 율법 그리스도인의 소명 경건의 실천을 소개한다. 6장은 그리스도인과 사회질서, 그리스도인과 국가, 그리스도인과 교육을 다룬다. 7장은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을 소개한다.

 

최덕성은 리폼드신학교에서 오스터헤이븐의 책을 교재삼아 존 드윗 교수의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이 때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며,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그 꿈을 실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스터헤이븐이 최덕성의 개혁주의 신학 정체성 형성에 필요한 기본 통찰을 제공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스터헤이븐, 헤세링크, 드윗의 배후에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 전통과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 등의 개혁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2. 성경과 합리성

 

최덕성은 개혁주의또는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개혁주의 정통신학 또는 정통 개혁주의(Reformed Orthodoxy)는 성경과 지성에 호소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개혁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성경에 기초한 인간 이성의 합리적 활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경에 토대를 둔 건전하고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인 신학활동은 개혁신학 발전에 꼭 필요하단다.

 

최덕성에 따르면, 개혁신학의 성경적·지성적 전통은 개혁주의 전통의 선구자이며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에서 시작되었다. 쯔빙글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이상으로 삼았다. 영적 실체와 하나님의 말씀을 물질과 감각적 호소 수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한 경향을 보였다. 쯔빙글리의 확신은 개혁주의 전통과 장로교회 신학의 대부인 존 칼빈의 그것과 대동소이 했다. 스콜라주의자 윌리엄 오캄의 전통을 따라 신적 계시를 신학의 원천으로 삼고, 성경 내용을 조직하고 연결을 짓는 동시에 합리적 이성활동을 개혁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이성의 시대인 17세기에 이르러 정통파 개혁주의 기독인들 곧 칼빈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이 신앙했고 가르쳤던 바를 더욱 합리적으로 체계화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칼빈주의 전통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과학방법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신학자는 과학자이며, 자연이 과학자의 자료로 사용되듯이 성경을 신학자의 유일한 연구 자료로 삼았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은 오직성경’(sola scriptura)은 본래 로마가톨릭 전통이 교회의 표지로 내세우는 권위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이 말은, 성경이 신학의 유일한 자료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학이란 진리의 보고인 성경으로부터 자료를 꺼내 자연과학자가 그러하듯이 과학방법론에 따라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으로 이해했다.

 

합리적인 사색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임마누엘 칸트로부터 시작된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두려워하면서 지성적 전통을 넘어서서 주지주의(Intellectualism, Rationalism)의 경향을 띠었다. 18세기의 칼빈주의자들은 신임할 만한 신학 체계를 세우고, 합리적 신앙 지식을 형성시키거나 강화하고, 이를 방어하고 해석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믿는 내용에 대한 지적 확실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지적 확실성이 결여된 신앙은 불가지론, 회의주의, 비과학적, 비합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무오성(Inerrancy) 교리는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최덕성은 이상의 역사적 통찰을 마친 뒤에 합리적 사색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혁주의 신학이 인간 사색에만 의존하는 사변적 신학을 경계한다고 지적한다. 잡다한 가치들로 장식된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만으로는 신적 진리에 관한 합리적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 육과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형성된 자연주의적 합리성(Naturalism)에 대항하여 그것들을 넘어서는 영적 차원, 신앙, 은총의 논리, 초자연적 세계(Supernaturalism)를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도()와 진리를 체계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을 중시하면서도 그 배후에는 강력한 합리적 이성적 동기를 갖고 있다고 역설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신앙 운동인 동시에 일면 합리적, 지적 활동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하여 같은 개혁주의 전통에 선 구 프린스턴신학과 웨스트민스터신학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전자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임을 강조하며 증거주의(Evidencialism) 견해를, 후자는 신앙적 지식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일을 부정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입장을 취한다.

 

최덕성은 이러한 개혁주의 전통의 변천이 개혁주의가 완성된 신학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늘에서 직접 떨어진 신학 체계가 아니다. 성경과 이성적 활동을 중요가게 여기면서 각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요구하는 지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신앙적,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제도화되고 화석화된 계급주의 교회제도를 박차고 성경적 기독교를 추구하며, 초자연주의와 신본주의 기초 위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왕성한 신학적 사색의 산물이다.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리체계이다. 성경에 비추어서 잘못된 것이 발견될 때는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수정할 자세를 갖고 있다. 개혁주의는 유한성과 타락으로 인한 인간 이성의 부패 가능성을 전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끊임없는 개혁을 요청해 오고 있다. 교회의 제도나 관습만의 개혁이 아니라 신학의 개혁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는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인 신학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 활동은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축척이 아니다. 여러 신학 영역의 기초 개념을 파악하고, 성경의 여러 사실들과 현상들의 관계를 규명하고, 원리와 법칙을 알아내어 현실과 관련지으며,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이를 응용하는 기술을 중시하는 학문 작업이다. 신학수업은 개미처럼 많은 정보나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체계화하고 관련짓고 타당성을 논하며 응용하는 작업이다. 신학 지식 탐구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통합적인 학습 과정이라고 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이 현장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용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다.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창의적 신학 활동은 교회의 문화적,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신학도는 인류가 겪고 있는 시대적인 격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다. 인류에게 큰 고통을 준 이데올로기적 냉전 체제가 종식을 맞고, 남북통일이 기대되는 동시에 인종이나 민족 간의 갈등과 분쟁은 오히려 더 격해지고 있다. 환경오염, 인종, 민족 분규, 마약, 인공지능 오용, 생명 공학, 유전자 조작, 윤리 부재 등의 위험성을 겪고 있다. 급격한 변화는 불가피하게 긴장, 갈등, 회의를 낳게 된다. 세대 간 격차의 골은 깊어가고, 문화적 갈등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변치 않는 복음과 변하는 문화 현장 사이에 서서 그 복음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항구성을 지닌 진리의 복음을 격변하는 삶의 현장에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의 현장 적응력을 언급하면서, 한국인 신학도가 목회현장의 한국적 정서를 파악하고 한국의 문화적 도구를 사용해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한식 요리를 하듯 응용해낼 복음전파와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버터와 치즈를 자료로 삼아 상술(商術) 정서와 이원론이라는 도구로 요리된 음식이 아니라, 농자천하대본(農者天下大本)과 한()이라는 정서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인 틀로 이해된 진리와 복음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

 

3. 개혁주의 신학의 간극(間隙)

 

개혁주의 신학은 활력을 가지고 있는가? 최덕성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무오한 성경에 포함된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신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에 일치하는 신앙과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만 진정한 개혁주의가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개혁주의는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확신해야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기독교 원리를 알아내며 모든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보는 일을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신학의 범위에 대한 이해도 천차만별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전통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는 코넬리우스 반틸을 참 개혁주의 신학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의 넓은 폭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그는 아마도 오스트헤이븐의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과 헤세링크의 <개혁주의 전통>으로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에서 합리적 타당성을 찾으려는 것 같다. 그는 헤세링크의 책을 소개하면서, 개혁주의 전통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는데 일조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헤세링크의 주장의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제시하는 개혁신학의 특징들이 개혁주의 전통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헤세링크는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을 해명하면서 특징들을 설명한다. 특히 열 번째 오해를 다룬 세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적이 된다는 것은 문화, 경제, 정치와 같은 이른바 세속적 영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며 오직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오해를 반박한다. 헤세링크는 아브라함 카이퍼 전통의 신칼빈주의 전통의 보편적인 개념인 문화적 명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강조를 분석한다. 이 전형적인 개혁주의의 관심이 스코틀랜드 신학자 토마스 토랜스(Thomas F. Torrance)에 의해서는 좀 다른 양상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토랜스의 개혁주의적 관심사는 신학과 자연과학, 신학과 광범위한 제 학문 분야와의 관계 문제라는 것이다. 최덕성은 이 맥락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열린신학, 신본주의 신학,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개혁주의는 폐쇄적인 신학이 아니라 열린 신학이다. 인본주의적 신학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신학이며, 인간을 높이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학이다. [...] 역사성, 보편성, 세계성을 띤 신학이다. 개혁주의는 창의적 신학활동을 추구한다. 고착된 어떤 형태의 사상 유형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남을 개혁하기를 바라면서 자기는 개혁하지 않는 사이비 개혁주의를 배격한다. 성경 말씀에 따라서 항상 스스로 개혁되기를 원하는 신학이다.”

 

최덕성은 개혁주의 전통과 창의적 신학활동이라는 논문에서 칼빈주의 전통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과학방법론에 의해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렇기에 신학자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최덕성 교수에 의하면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강력한 합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은 신앙 운동인 동시에 합리적, 지적 활동의 산물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은 이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전자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임을 강조하며 증거주의(Evidencialism) 견해를, 후자는 신앙적 지식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일을 부정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견해를 취한다. 반복반복반복

 

최덕성은 개혁주의 전통의 이러한 변천은 개혁주의 신학이 완성된 신학 체계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개혁주의는 하늘에서 직접 떨어진 신학 체계가 아니다. 성경과 이성적 활동을 중시하면서 각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요구하는 지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신앙적,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 개혁주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리체계이다. 성경에 비추어서 잘못된 것이 발견될 때에는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수정할 자세를 갖고 있다. 개혁주의는 유한성과 타락으로 인한 인간 이성의 부패 가능성을 전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끊임없는 개혁을 요청해 오고 있다고 한다.

 

최덕성은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인 신학 활동은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창의적 신학 활동은 교회의 문화적,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변치 않는 복음과 변하는 문화 현장 사이에 서서 그 복음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5. 개혁주의와 보수주의

 

최덕성 교수는 개혁주의와 보수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한다. “개혁주의는 한국에서 보수주의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지적하고, 이 둘을 구분한다. ‘개혁주의는 한국교회 안에서 한 동안 보수주의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반발의 표현이지만, 사물, 신념, 사상에 대한 태도와 경향성을 뜻하기도 한다. 보수주의는 수구적 멘탈리티를 동반한다. 변화와 갱신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그것을 악마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복음의 학문적, 선교적, 문화적 사명을 경시하고, 옛 것에 집착하고, 옛 영광을 자랑하며 옛것만을 고수하려고 한다. 때로는 서양 신학의 비복음적인 문화 요소도 진리로 여기며 이를 보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영원한 진리와 이해된 진리를 동일하게 여긴다. 버터와 치즈 맛을 정통으로 여기며 김치와 된장 맛을 악마처럼 여긴다.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적 발상, 백인우월주의적 성경 이해도 하늘에서 떨어진 진리로 여긴다고 한다.

 

보수주의적 사고는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신학 활동을 방해한다. 개혁을 싫어한다. 맹목적으로 조상들의 관습과 정신성에 종속되고 자신들을 게토(ghetto)화 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 망딸리떼는 창백하고 경직된 신학도를 만든다. 창의적인 사색이나 역동적인 신학연구나 목회활동을 적으로 여기며 성경에 기초한 신학의 발전을 두려워한다. 열려진 시대가 적합한 새로운 선교 활동에도 관심이 없다.

 

보수주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앙해 왔던 성경적인 가르침을 보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부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에서 보수주의의 훌륭한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교회 개혁과 창의적인 신학 활동 또는 목회 활동을 방해하는 수구적 정신으로 무장한 보수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개혁주의와 보수주의는 등식 관계가 아니다.

 

최덕성은 유비쿼터스(Ubiquitous)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개혁주의 전통 노선의 신학도들은 창백한 노인성(老人性)의 껍질 안에 웅크리고 앉아 옛적 같기를 구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이상적인 신학도는 현실을 직시하고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날마다 개혁하며, 새롭게 되어야 하며, 발전해 나간다. 통합된 진리 체계인 개혁신학과 그 지성적 전통을 더욱 빛내고 발전시키고 전수한다. 목회 현장에 그리고 문화 현장에 토착화 되는 성경에 기초한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신학활동을 한다..

 

최덕성은 개혁주의와 보수주의는 등식화될 수 없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늘을 사는 개혁주의 신학도들은 창백한 노인성의 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옛적 같기를 구하고 있을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성경 가르침 안에서 날마다 개혁하며 새롭게 되어야 하며,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통합된 진리 체계인 개혁주의와 그 지성적 전통을 더욱 빛내고 발전시키고 전수하고 우리의 목회 현장에 그리고 문화 현장에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신학활동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6. 개혁주의 신학은 활력이 있는가?

 

최덕성은 개혁신학의 활력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개혁주의 전통이 과연 활기를 가지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자신이 1994년 화란 암스테르담 근교에서 개최된 보수 진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학회모임인 국제신학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ngress, 1994) 학술대회에 참여한 경험을 언급한다.

 

한국에서 최덕성과 손봉호 교수가 대표로 참여한 이 학술대회에는 개혁신학을 어떤 방법으로 활성화할 것인가를 다각도로 논의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실존적 상황의 중재자로서의 신학자의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교회들은 대체로 복음전도의 열정이 식었고, 교회 바깥에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으며 신학교 지원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기에 이 활력과 역동성에 의구심을 가져다준다는데 한 목소리를 냈다.

 

개혁주의 전통이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과 세상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해서로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따라서 변화하는 목회 현장에 대한 적응력과 탁월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개혁주의 매너지름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국제신학회 참여자들이 의견을 같이한 것은 신학 활동이 성경의 내용을 조직화하고 그 권위를 재확인하는 일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적응력과 탁월성을 가질 수 있는 학문 활동이 될 때 비로소 활력을 가질 수 있다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이 모임은 시종일관 개혁주의 교회가 주지주의적 혹은 스콜라주의적인 경향을 탈피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한다. 최덕성은 이 대회가 개혁주의 신학이 어떤 고착된 틀에 갇혀있는 사상체계가 아니라 성경과 종교개혁 신학의 조망 아래 삶의 실존적 현장에서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으로 거듭 발전해 가고 개혁해 나가는 신학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적고 있다.

 

최덕성은 이 대회에서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The Identity of Reformed Theology in Korea)이라는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한국교회의 해방 10년사를 개혁주이 신학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교회의 과거사 청산과 참회고백과 권징 시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문이라고 한다.

 

7. 문화명령, 일반은총, 창조신앙

 

최덕성은 리폼드신학교에서 존 리차드 드윗 교수에게서 개혁주의 교의학을 배웠다. 드윗은 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긍정적 견해를 다룬다. 개혁주의 신앙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긍정적 견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개혁신학자들이라고 모두 문화적 명령개념에 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거나 자유롭고 수월하게 말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최선의 개혁주의 신앙 전통은 세상의 형태와 문화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물론 세상에 동화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칼빈 그 자신에게서 이것을 강하게 볼 수 있는데, 칼빈의 관심은 제네바에서의 복음선포 보다도 훨씬 폭넓었다. 물론 말씀선포의 사역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사회와 국가의 생활 전반에 걸쳐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베르너 크루쉐의는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 진영 안에서의 일반은총과 문화적 명령에 대한 내부논쟁이 있었음을 언급한다.일반은총이라는 말을 통해서 칼빈은 타락한 인간을 인간으로서 죄악 가운데서도 그들의 인간적 질서들 안에서 구원을 향해 보존하시는 보존자 되신 하나님의 행위와 그로부터 (그리고 영원한 아들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행위로 이해한다.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개혁주의신학번역총서로 출간된 책 중 하나로, 필자가 번역한 것이며,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고전 중 하나로 평가받는 책이다.

 

퀴퍼(H. Kuiper)는 일반은총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 곧 일반은총의 인정된 발견자를 칼빈으로 묘사한다.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은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에 와서 그 체계의미(Systembedeutung)를 얻게 된다.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은 거의 카이퍼와 바빙크에 의해 출범된 신학의 쉬볼렛(Schibboleth, 누구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 약속된 표시)가 되게 되었다. 이러한 네덜란드 신학자들의 입장에 의하면 이러한 칼빈주의자들의 위대한 교의”(E. Doumergue)를 거쳐 처음으로 최종적으로 자연과 은총의 중세적 이원론이 극복되게 되었다. 루터가 새로운 이원론을 수립했다면 - 물론 루터의 (물론 심하게 몰이해된) 두 왕국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면서 - 칼빈은 일반은총론을 통해서 자연적인 것의 영역 자체를 은총의 영역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에클레시아와 폴리스, 교회와 문화 양자 모두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을 통해서 행동하시는데, 전자의 경우는 특별한 방식으로, 후자의 경우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일하신다. 신앙 속에서, 하지만 또한 법률과 질서 속에서, 행복과 복지 속에, 민족의 영웅적 용기 속에, 학문과 예술 속에서, 민족을 부하게 하는 기업가의 정신 속에서, 즉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작용하는데, 그 곳에서는 구원하는 의미로, 여기서는 보존하는 의미로 작용하신다.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령의 일반적 작용과 특별한 작용들이, -구원적인(nicht-rettende) 은총과 구원적인 은총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 은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발전될 수 있는 삶의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특별은총이 일반은총을 그 전재와 근거로 필요로 하게끔 두 은총의 관계를 설정하고, 일반은총이 구원하는 은총이 작용할 수 있도록 조건들을 가능케 하는 기능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독립적이고 그 자체 안에 의미충만한 목적인 하나님영광의 증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칼빈에게서도 발견했다고 퀴퍼(H. Kuiper)의 분석한다.

 

신칼빈주의적 일반은총론은 칼빈을 소견이 좁고, 세계 경시적이며, 학문적 대적이며, 예술을 무시하며, 단지 피안성에만 향해진 신학자로서 생각하는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이해할만 하기도 하다. 미래적 삶에 대한 명상(meditatio futurae vitae)과 현재적 삶에 대한 경시(contemptus praesentis vitae)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이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타락한 세계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떤 다른, 하나님에 대해서 독립적인 주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악에 물든 인간에게 파괴로부터 보존하기 위해서 질서들과 선물들을 주셨다는 사실과 인간이 이 세상적인 질서들과 모든 자신의 동료인간적인 관련성들 속에서도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으며 어떤 삶의 영역에서든지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기할 수 없는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옳다.

 

타락한 인류의 이러한 신적인 보존됨(Bewahrt-Werden)과 선물-주어짐(Beschenkt-Werden)을 은총으로 일컬을 때, 여기서 은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은혜는 구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러한 은혜로부터 보존된 모든 것들이 - 여기서 참되고” “올바르고그리고 선한것으로 간주된 모든 것이 - 인간의 죄악의 괄호 안에 그리고 인간의 죄악 아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말해져야 한다. 여기서 언급된 신학이 너무도 자주 거의 비변증법적으로(undialektisch) 일반은총을 이 세상의 모든 선하고, 참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위한 설명원리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고대교회의 변증가들이 씨앗으로 심겨진 로고스”(logos spermatikos) 개념을 가지고 말한 것과 같이, 어떤 경우에도 자연적 종교성과 하나님에 대한인식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일반은총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 속에는 타락한 인류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영이 박탈당한 인류가 완전한 영적인 정신착란(Umnachtung)으로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 성령의 도움이 결여되어서 고아가 되어서 서로에게 내맡겨진 인류가 파괴적인 무정부 상태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들의 자아중심적인 의지가 완전한 분출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 그 반대로 경이로운 인간 정신의 형성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그리하여 참된 것유용한 것이있게 되었다는 것), 인간이 질서가 잡힌 공동체 속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 (“올바른 것이 있다는 것), 희생정신과 덕스러움이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선한 것이존재한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 자체로 설명될 수 없고, 설명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는 오직 은총만이 작용할 수 있다. 모든 이러한 선한 것들은 모든 선의 유일한 원천(unicus omnium bonorum fons)인 성령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모든 진리, 지혜 그리고 통찰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샘솟으며, 모든 선한 것들과 모든 덕목들도 이 샘물로부터 나와서 흐른다.

 

최덕성이 번역 소개한 존 볼트의 개혁주의란 무엇을 뜻하는가?”는 주목할 내용을 담고 있다. 볼트는 삼위일체적 기독교와 성부 하나님과 창조의 우선적 역할에 대해서 강조한다. 즉 삼위일체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개혁주의는 성부 하나님과 창조의 우선됨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볼트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에 속한 각 사역의 차이점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분석한다. “성부 하나님은 모든 활동의 시작이고 만물의 원천이자 근원이고 성자 하나님은 만물의 지혜와 모사여서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신 자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볼트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칼빈은 인용하면서 개혁주의의 삼위일체 신학이 성부로부터 시작하는 바, 이는 중요한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창조가 구원에 우선하며, 구원은 창조로부터의 도피나 상승이 아니라, 창조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볼트는 개혁주의자는 비전에 있어서 보편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세상의 삶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은 전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볼트는 칼빈주의 전통의 지배적인 원리는 구원론적인 이신득의가 아니라, 우주론적이며 넓은 의미의 가시적이거나 불가시적인 모든 영역들과 나라들 가운에 있는, 전 우주를 다스리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이다고 한다.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권위자 크루쉐도 이러한 성격의 칼빈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칼빈은 성령 사역의 세 가지 영역들을 구분한다. 이들 구분하는 영역들은 세 가지 동심원처럼 관계를 가진다. 가장 넓은 원은 그 질서를 가진 모든 창조세계와 무의식적인 동물적 삶을 포용한다. 두 번째의 보다 좁은 원은 그 역사적인 형태들을 가진 인류의 이성적 삶을 포용한다. 그리고 가장 안쪽의 원은 선택받은 자들의 영적인 삶의 영역이다. 바깥 원들은 그것에 의해 감싸지고 있는 안쪽의 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는 인류를 위해, 인류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활동하시는 분은 한 분의 성령이시기에, 자연, 역사 그리고 구원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서로 관련된다. 이 인상적으로 전개된 개념들을 볼 때, 칼빈이 통일된 시스템’(unitary system)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크루쉐는 성령과 우주과 관련된 카오스의 예방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부와 영원한 말씀의 영으로서 성령은 세계 창조에 참여하신다. 영원한 말씀인 성자를 통해서 세계는 창조되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한 성부의 이 창조자 활동은 작용되기 위해서(wirksam), 곧 또다시 없어 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작용(Kraftwirkung)이 필요하다. 창조자에 의해 그의 말씀을 통해서 무로부터 부름을 받은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능력으로 이 파괴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무로 되돌아가게 된다”(si...Dominus spiritum substrahat, omnia in nihilum rediguntur).

 

크루쉐의 이 글은 하나님의 창조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지만, 그것을 오늘 우리가 보는 잘 형성되고 아름답게 꾸며진 우주로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불러내었다. 텅빈 하늘과 카오스적인 땅이었다(inane coeli et terrae chaos). 무로부터의 세계 재료들의 이 창조는 진정한 창조행위다; 왜냐하면 바라(bara)는 칼빈에 의해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배타적인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의 창조사역에서의 모든 다른 하나님의 행위들은 - 모든 생육과정을 통해서 항상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인 인간 영혼의 창조를 제외하고서는 - 이 근본적인 창조(creare)와는 달리 형성(formare)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들로 인한 결과는 없다.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덕성이 번역하여 출간한 오스티헤이븐의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적절하게 잘 표현한다. 벨직신앙고백서에는 교회에 대한 첫 조항을 보편적인 교회에 관하여”(De Ecclesia Catholica)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오스티헤이븐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따른 교회의 성격에 대한 광범위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교호의 보편성(Catholicity)이라는 관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7. 다종교적 다문화적 상황과 개혁주의 신학

 

필자는 신학대학 시절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철학과 헤르만 도예벨트의 기독교 철학에 심취했다. 신학대학원에서 20세기 현대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썼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진행된 신학박사 학위과정에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문화론에 깊이 천착했다. 그 이유는 최덕성이 지향하는 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한 희망과 기대때문이었다.

 

신학대학 2학년 학생 시절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철학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저술한 네덜란드어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대학교는 카이퍼가 설립한 학교이며, 르네 지라르에게 최초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대학이다.

 

필자는 개혁주의 전통이 강조하는 문화적 명령의 전통에서 동시대적이고 현대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과 역동성을 위해 우리 시대의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평가받는 르네 지라르의 문화이론을 연구했다. 현대 고등종교와 동아시아 종교, 특히 힌두교와 불교연구에서 최초로 붓다가 은폐된 희생염소(scapegoat)이라는 것을 밝혔다. 불교 권에서는 신화의 수수께끼 속에서 은폐되어있는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 mechanism)이 폭로되지 못한 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모두 개혁주의 신학의 보다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문화사역 곧 선교사역을 위한 작업이었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이 20세기 후반에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의 공격 앞에서 수세적 자세로 몰려서 게토화된 신학을 벗어나서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 대화적, 소통적 태도로 현대 인문학과 철학을 연구하면서도 정통주의를 복권시키고자 했다.

르네 지라느는 2015년 겨울에 타계했다. 2005불멸40인이라 불리는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프랑스 학술원)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인간과학의 새로운 다윈”(nouveau Darwin des sciences humaines)으로 평가되었다. 미국의 베론(Robert Barron) 주교는 마녀사냥의 텍스트로서의 신화의 수수께끼를 풀고 십자가의 승리를 인문학적으로 논증한 지라르가 20세기와 21세기 세계교회에 공헌한 바가 너무 크기에 지라르를 21세기의 교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이 예수도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같은 신화라고 주장하기 위해 켈수스를 인용하는데, 켈수스는 예수도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켈수스 이후로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공격하는 주장을 지라르가 신화의 수수께끼를 해독함으로 결정적으로 반박했다. 추후 상술하겠지만, 지라르 자신도 켈수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왜 예수가 디오니소스, 오시리스, 이시스와 같은 신화가 아닌가를 논증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지라르를 인문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2015년 미국 경제전문주간지 포브스(Forbes)는 지라르 추모 언론보도에서 지라르를 "사회과학의 아인슈타인"으로 평가했다. 즉 아인슈타인처럼 지라르는 다양한 학문분야가 통합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종교학 그리고 경제학까지도 통합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체계를 창조했다.

 

독일어권에서는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평가한다. 독일 유력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당대의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 지라르를 신들은 잔인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Die Götter sind grausam. Aber Gott ist gut: René Girard rettet das Christentum)라고 소개한다. 지라르는 신화의 수수께끼를 해독한 자신의 연구로 결과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한 후 인문학의 주류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외치는 대학자다. 지라르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2부의 제목은 신화의 수수께끼이다. 3부의 제목은 십자가의 승리이다.

 

오스트리아 주요 일간지 디프레세(Die Presse)의 보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라르에 의하면 기독교는 신화의 계몽”(Aufklärung der Mythologie)이며, 신화가 은폐하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계몽이기도 하다. 신화가 집단폭력의 수동적인 반영이라면, 유대-기독교는 희생양과 모방적이고 폭력적인 군중을 만들어내는 집단 장치에 대한 적극적인 폭로이다. 지라르는 자신의 인문학적 연구를 통해서 기독교 정통 신학을 복권시키려고 한다. “나의 작업은 십자가의 인류학을 위한 하나의 노력이며, 이는 정통 신학을 복원시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지라르는 자신의 모든 연구들은 십자가의 인류학을 제시함으로 신학자들을 돕는 것에 헌신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8. 마무리 말

 

최덕성은 개혁주의 신학을 덧없는 인간 사상에 머물지 않는 진리체계라고 한다. 그가 지향하는 창의적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과 이성적 활동을 중시하면서 각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이 요구하는 지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신앙적,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 현대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과 새로운 역동성을 위해서는 왕성한 사색과 역동적인 신학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최덕성은 개혁신학에 관한 중요한 글들을 쓰고, 논문들을 번역하고, 두 권의 책을 번역 출간하여 한국의 개혁주의신학 발전에 뚜렷이 이바지했다. 특정 논문들과 책들을 선택하여 한글로 번역하고 책으로 출간한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일치하거나 크게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덕성은 개혁신학, 개혁주의 전통이 성경과 합리성에 가장 충실하며 균형 잡힌 신앙노선이라고 확신한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료 교수들이 이런 저런 형태로 그의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자극했다고 한다. 개혁신학을 폄론하고 빈정대고 부정적인 호기심을 갖게 하는 이상한 풍토에서 꾸준히 역사적 개혁신학의 중요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부터 2009년 사이에 개설한 개혁주의 전통과목 수강자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동일한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덕성이 남긴 다수의 신학 저서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개혁주의 신학 관점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세상을 봉사하는 신앙과 세계관 형성이 이바지한 것이 분명하다.

 

최덕성은 개혁주의또는 개혁주의 신학으로 번역되고 있는 리폼드’(Reformed)라는 용어를 분석하는 글에서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지닌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 단어를 개혁주의로 번역하면 개혁+주의’(Reform+ism)가 되어 인간 사상인 주의에 지나지 않는 무엇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개혁파라고 옮기면 ’()가 주는 파당적인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개혁신학이라 옮기면 리폼드가 가진 전통이라는 개념이 감추어진다. ‘정통 개혁주의로 번역하면 개혁주의를 17세기 칼빈주의에 제한하는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은 문제점에도 개혁신학’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옮길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최덕성의 창의적 개혁신학은 영혼구원과 교회교육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화적,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면에서도 필수적이다. 다종교적이고 다문화적인 상황 속에 있는 한국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에서도 본고가 강조하는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바라기는 필자의 르네 지라르 연구도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과 역동성에 미력하나마 일조하기를 기대해 본다.

    

정일권 박사 (전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초빙교수, 교의학, Ph.D. Innsbrook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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