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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르만다는 자살과 구원에 관한 아래의 견해와 동일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떠도는 글을 붙잡아 이곳에 저장하였습니다. 신원하 교수의 양해를 부탁합니다.

 

 

자살과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해석

 

신원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I.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교회의 신학 부재: 문제의식과 목적


  

자살은 기독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혐오스러운 죄로 취급됐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피조물이 자기 뜻에 따라 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런 죄를 지은 자살자의 장례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왔다. 기독교 신앙과 문화가 지배해왔던 서구 사회에서는 자살에 대해 엄격한 분위기가 근세까지 주도해왔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이 조금씩 퇴조하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자살자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교회도 세속화의 영향에 따라 이런 추세를 따라왔다.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최근 들어 자살자 수와 자살률이 급격히 늘면서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2010년 한 해 동안 1만 5천 56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한 셈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배 정도 증가했다. 특히 자살은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의 1위이고 40대 50대에서는 2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1)신자들의 자살도 늘어나면서 목회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당황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때론 중직자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본인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들과 교회에도 큰 고통을 안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가족들은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자살한 자는 지옥 간다’라는 통설로 말미암아 더욱 고통을 받곤 한다.


자살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소위 통설은 과연 어디서 기원했는가? 이것의 성경에서 말하는 근거는 있는가? 한국교회 중의 어느 교단이 이런 교리나 이에 관련한 신학적 입장 및 지침서를 만든 적이 있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통설은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 왔다. 구원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속한 것인데, 신학적 검증이 되지 않은 통설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교회와 신학자들이 게으르거나 책임 유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레먼스(James Clemons) 교수는 교회와 신자들이 자살문제로 고통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마치 낮잠 자듯이 이 문제에 소홀해 왔다고 따끔하게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 윤리학자들도 다른 윤리적 주제들에 비해 이 문제는 현저히 소홀하게 다루었음을 통계로 밝히기도 했다.2)

        

이 글은 이 통설이 과연 타당한지를 신학적으로 살펴보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교회에 신학적 지침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3) 먼저 자살에 관해 성경의 사례를 살펴보고 분석한다. 이어 교회의 이에 관한 주요 결정들과 시대의 대표적 신학자들의 사상을 검토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 통설의 근원이 될 교회와 신학자들의 사상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죄 교리를 다룰 것이다. 그 다음에 용서받지 못할 죄에 관련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자살과 구원의 관계를 검토하고 정리한 뒤, 이 결론을 통해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적 조언과 함께 목회적 돌봄에 필요한 과제를 제안할 것이다.

 

1) 김다슬, “어릴 땐 사고 중년기엔 자살, 작년 사망자 역대 최대” 「경향신문」 2011년 9월 9일자, 12. 자살율은 미국과 비교하면 3배이고, OECD 국가 가운데서 1위에 해당한다. 

2) James T. Clemons, "Suicide and Christian Moral Judgement" Christian Century 102 no.16 (May 8, 1985): 466. 

3) 최근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자살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신학자들도 이 주제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고 활발하게 연구결과를 내 놓기 시작했다.  최근 2-3년 동안에  이상원, 황봉환, 최영태, 김기현 등의 기독교 윤리 학자들이 이에 관한 좋은 논문들을 발표하고 출판했다. 이 논문들은  자살의 실태, 원인, 성격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분석 및 교회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였고, 모두 다 자살과 구원의 관계를 약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오직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그 주제에 관련된 것만을  신학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데에  논문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점에서 본 논문은 목적과 성격, 내용이 위 논문들과는  차이가 난다고  할 수있다.  최영태, “한국 사회에서 자살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고찰,” 「신학과 실천」 제 8권 (2010): 205-253; 이상원, “기독교 윤리적 측면에서의 자살” 「신학지남 」 298호 (2009년 봄): 54-80; 황봉환, “자살 문제에 대한 성경 및 신학적 논증과 예방적 대안,” 신학과 실천」제 7권 (2009): 129-158; 김기현, 『자살은 죄인가요?』 서울: 죠이선교회, 2010.


 

II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분석

 

성경에 등장하는 자살한 사람은 순서대로 아비멜렉(사 9:52-54), 삼손(삿16:23-28), 사울(삼상 31:1-6; 대상 10:13-4), 아히도벨 (삼하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마27:3-10; 행1:16-18).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살한 경우이고 다른 경우는 직접 자살한 경우이다.


A. 신, 구약의 사례

        

1. 삼손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은 불렛셋 사람들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그들이 다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 기둥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기둥을 무너뜨림으로 불렛셋 신당을 무너뜨리고 불렛셋 사람들을 죽이며 그와 함께 자신도 그 안에서 죽게 된다. 본문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삼손의 죽음은 자기의 두 눈을 뽑은 불렛셋 인에 대한 복수의 행위 또는 은 이스라엘을 압제한 불렛셋 민족에 대한 민족적 복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위임한 것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살자가 아니라”고 신학자 바르트는 해석하기도 한다.4) 어거스틴은, 삼손은 성령이 은밀하게 명령한 대로 행동한 것으로 보면서 자살과 구별하기도 했다.5) 이런 주요한 근거는 신약의 히브리서가 그를 아브라함, 모세와 나란히 구름과 같은 믿음의 인물들의 한 명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히11:32).

 

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4: The Doctrine of Creation (London: T & T Clark, 1961), 411. 

5) Augustine, The City of God, trans. by Henry Bettenson with intro. by John O'Mera (New York: Penguin Books, 1984), ch. 21 (p. 32).


2. 사울

 

불렛셋과의 전투에서 회복 불가능한 중상을 입게 된 사울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수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당번 병사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병사가 거절하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엎드려 목숨을 끊었다(삼상31:1-6). 성경은 사울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를 치신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대상10:13-14). 그런데 사울이 죽은 방식 자체나 그에 관련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소식을 아말렉 사람에게 전해들은 다윗은 옷을 찢으며 금식하며 애곡했고(삼하1:11-12), 사울의 생애를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는 내용을 비중 있게 기록하고 있다(삼하 1:17-27)장).


3. 아히도벨

 

아히도벨은 본래 다윗의 책사이었지만,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으로 쫓겨 가고 난 뒤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칠 방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압살롬이 자기의 모략을 받지 않고 오히려 후새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고향 집으로 돌아가, 신변을 정리한 뒤에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생을 마감한 방식에 관한 언급은 없고, 단지 그가 아버지의 묘에 묻혔다고 기록한다(삼하17:23).


4. 시므리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신하였던 시므리는 왕를 모반하여 살해하고 다르사에서 왕이 되어 7일 동안 등극했다. 당시 전쟁 중에 있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자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군대 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옹립하고, 그를 공격하려고 왕궁으로 향했다(왕상 18:15-17). 이 소식을 들은 시므리는 왕궁의 경비초소로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았다(18절). 본문에 따르면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범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9절). 그런데 본문은 그 죽은 방식 자체에 대해서나, 그것이 그의 죄와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5, 가룟유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는 예수를 넘겨주고 난 뒤 후회하고 현실을 돌이킬 수 없음을 자책하며 은30을 성소에 던진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27:3-5). 성경은 유다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죽음으로(행1:18), “제 곳으로 갔[다]"(행1:25)고 기록해 놓고 있다.


6. 아비멜렉(사 9:52-54)

 

아비멜렉은 간접적으로 자살한 인물이다. 그는 여룹바알 즉 기드온의 첩에서 난 아들로서 왕이 되기 위해 자기 모계 친족 및 백성들을 꾀어 이복동생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3년간 왕으로 통치하다가 반역을 꾀한 무리들을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여인이 망대 위에서 아래로 던진 맷돌을 맞고 머리가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죽게 되었다. 그는 여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기 싫어 병사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병사의 칼에 죽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들에게 죽여 그의 아버지에게 악을 범한 것에 대해 아비멜렉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B. 관찰과 분석


위의 여섯 자살 사건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면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 언급된 자살은 어떤 것도 우호적인 표현으로 묘사된 것은 없고, 특히 어려운 시기에 탈출구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방편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6) 오히려 삼손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아비멜렉, 사울의 죽음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말하고, 아히도벨과 시므리는 다 “제 주인을 반역한”(왕하9:31) 인물로 취급되었고,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둘째, 그럼에도 그들의 자살을 다룬 본문은 자살 행위 자체 즉 죽음 방식에 대해 흥미롭게도 침묵하고 있으며 어떠한 명시적 가치판단을 내려놓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사울의 경우, 그것이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주석을 붙여 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는 형식과 인과 관계가 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의 죽음을 영예롭게 만들어 주는 다윗의 조사를 길게 다루고 있다. 아히도벨의 경우도 그가 아비의 묘에 묻혔다는 기록을 남김으로 당시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죽음을 저주했거나 수치스럽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게 한다.


셋째, 모든 자살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나온 반응이었다. 사울과 시므리는 적의 손에 죽게 될 경우, 아비멜렉 여인에게 부상당해 죽게 될 위기, 아히도벨은 거부당한 섭섭함과 심한 체면손상의 상태에서 나온 반응이었다.7)


넷째, 이들이 자살을 구원과 관련시켜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룟유다에 관련한 본문에서조차 비록 그가 “제 곳으로 갔[다]“고 했지만 그것이 그의 자살 행위와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지 않다.

 

6) Eugene Merill, "Suicide and the Concept of Death in the Old Testament," in Suicide: A Christian Response, eds Timothy Demy & Gary Stewart (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8), 324. 

7) Merill, "Suicide and the Concept of Death in the Old Testament," 324.


 

III. 자살에 대한 교회사적 이해


A. 교회사적인 흐름과 주요 결정

 

기독교회의 자살에 대한 견해를 살피기 위해 기독교회가 세워진 동시대 그 지역의 문화와 사상이 자살에 대한 어떠한 견해를 가졌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427-347 B.C.) 죽음은 영혼이 감옥과 같은 육체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영혼은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임의로 생명을 끊어 영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도 삶이 통제되지 못할 정도의 병이나 견딜 수 없는 수치나 극도의 고통에 직면할 경우, 사람은 일종의 강력한 강박감 아래서 행동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살은 이해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닌 상태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끊는 것은 “나태하고 인간답지 못한 비겁한” 행동으로 보았다.8)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인간다운 삶과 덕목을 갖추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자살은 사람들의 안녕과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를 해치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시민들의 조화롭고 통합된 삶을 살기 위해는 지혜, 절제, 정의와 아울러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용기란 비겁과 만용을 피하고 그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가난의 고통 혹은 다양한 번민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끊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고, 용기 있는 사람은 고통 앞에서도 가난이나 고통을 정면으로 대면한다고 말한다.9) 그러기에 이런 덕목이 통합된 삶을 살고 또 추구하는 자는 자살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8) Plato, Laws, bk 1X, 883c-d. in Michael Uhlmann, "From Plato to Kant" in Last Right: Assisted Suicide and Euthanasis Debated, ed. Uhlmann (Grand Rapids, Mich.: Eerdmans Company, 1998), 18에서 재인용. 

9) Aristotle, Ethica Nicomachea,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 옮김,『니코마코스 윤리학』 (서울: 이제이북스, 2006), 3권 7장 13(1116a).

        

그런데 예수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 고대 헬라와 로마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형태로 번성한 스토아 사상은 자살에 대해 유연하고 관용적인 입장을 가졌다. 스토아 사상은 순환론적 우주관 즉 우주는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되는 곳이고,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 우주는 소멸하면서 다시 생성되고 그 이전 존재로 반복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 영혼의 불멸과 같은 것은 믿지 않고 이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어 버리고 우주의 영과 연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생명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이것은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즉 생과 죽음에 무정념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아주 자연에 따라 사는 삶인데, 삶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지점에 이를 경우, 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이성적인 본성에 맞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적에 포로로 잡힌 장군이 수모를 피하려고, 조국에 대한 충성으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끊는 영웅적인 자살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참을 수 없는 무료함, 그리고 극심한 질병 때문에 목숨을 끊는 비 영웅적 자살은, 모두 더 이상 자연에 따른 삶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위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교회는 태동하였지만, 교회는 유대교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고, 자살에 관용적이고 때로는 정당화하는 로마 스토아 사상을 신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살에 대한 교회의 신학을 세워나갔다. 어거스틴은 자살을 심각한 도덕적 신학적 주제로 삼아 취급하고 이를 정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분명한 자살에 대한 신학과 입장은 이후 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세 교회는 자살에 대한 주요한 결정을 내려 교리법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 첫째로 533년 오르레앙(Orleans)에서 열린 2차 오르레앙 공의회에서는 사제는 사형당해 죽은 자들에 대해서 미사를 드려도 되지만, 자살하여 죽은 자들을 위해서 진혼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드리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자살한 자는 엄청난 죄로 처형당한 자들보다 더 악한 자로 취급된 것이다.10) 둘째로 이후 약 30년이 지난 561년, 1차 브라가 공의회(Council of Braga)는 교회의 미사 때 자살한 자들을 위한 어떤 추념과 같은 순서를 금지했고, 성시교독과 성가를 부르는 장례가 허락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11) 셋째로 693년 톨레도(Toledo) 공의회에서는 자살 미수자들이라도 그 죄책을 물어 2개월 동안 성도의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성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렸다.12) 교회가 교회법으로 이것을 명시화 한 흐름은 이후 교회법학자이며 교황이었던 니콜라스 1세(Nocholas 1)의 서신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866년에 니콜라스1세는 불가리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서신을 통해 자살자들에게 결코 교회가 베푸는 장례의식과 남이 인식할 수 있는 경내 묘지에 장사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13) 이런 결정과 문서들은 자살자에 대한 교회장을 허락하지 않는 관습을 더 곤고히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고 그 흐름은 거의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다.14)

 

10)Alexander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82. 

11)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183. 

12)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185. 

13)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268-9. 

14)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186.


 

B. 교회역사와 신학자들


 1.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자살에 대해 관용적인 당시 로마 지식인의 문화와 경향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하면서 이에 대해 신학적인 입장을 확고히 세운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살 자체보다는 죽음의 방식, 그를 대하는 내적인 태도와 품위를 더 문제시 하고 중시하면서 영웅적인 자살을 두둔했지만, 어거스틴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성경에 믿음의 족장, 선지자, 사도, 그리고 제자들은, 적에게 포로 잡혀가고, 구금당하고, 능욕을 받고, 견딜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당했지만 그 누구도 그 수욕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런 목적으로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중대한 죄악으로 보았다.15) 그는 강간을 당한 뒤 자기의 불명예를 참을 수 없어 목숨을 끊은 로마의 여인을 예를 들면서 비록 이 여인이 그것으로 자신이 간음자가 아닌 순수한 피해자였음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예를 지키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행동으로 취급했다.16) 악을 벗어나기 위해 더 큰 악을 행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7) 어거스틴은 그는 성경은 악과 고통을 피하거나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을 불허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6계명은 9계명과 달리 “네 이웃”이라는 수식어가 없는데 이것은 이 명령이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하는 명령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2. 아퀴나스

 

중세 교회가 단계적으로 자살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정하고 가르쳐 온 흐름가운데 아퀴나스의 이에 대한 교리는 더욱 교회의 일정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 1권 20장에서 언급한 것을 기반으로 자살은 자기살인에 해당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고 세 가지 이유로 자기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죽임, 즉 살인에 해당하는 죄라고 규정한다.18)

        

첫째, 모든 것들은 자연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를 지키려고 하며, 자기를 무너뜨리려는 것에 대해 어떻게든 저항한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본성(혹은 자연)의 성향과 자비 즉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 자비를 거스르는 것”이다.19) 이런 이유는 자살은 "자연법과 사랑에 역행하는“ (being contrary to the naturel law and to charity)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대죄(a mortal sin)일 수밖에 없다.

        

둘째, 각 부분은 전체에 속해 있듯이 모든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러기에 자살은 공동체에 상처를 가하는 잘못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고, 그래서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종속되어 있다(신32:39). 인간은 오직 그것을 받을 뿐이지 스스로 종식시킬 권리는 없다. 그래서 자살은 하나님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다.20)

        

이처럼 아퀴나스는 자살이란 본인, 공동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치명적인 죄로 보았는데 이런 그의 신학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어거스틴 신학과 성경의 관점에서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을 중죄에 규정한 그의 신학은 중세 교회의 입장을 확고히 굳히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3. Luther

 

루터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만큼 자살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내 놓지는 않았다. 그는 신자들에게도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때로 우울함이 자살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21) 루터는 그의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방화를 통해 많은 인명을 죽이고 또 그 안에서 자신이 죽는 일은 그 사람에게 사탄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22)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루터는 자살을 다분히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탄의 힘에 장악되어 저지르는 죄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신자에게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염려내지 두려움을 일으켜 우울하게 만들고 절망감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때론 자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23)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보다는 외부의 힘 즉 사탄에 사로잡혀 자살로 이르게 된다고 보았기에 루터는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것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로 단정 짓지는 않았다. “나는 자살한 사람들은 확실히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살한 것은 죽기를 강력히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의 힘에 장악되어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나무가 숲이 우거진 으슥한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24)

                

 4. 칼빈

 

칼빈은 그의 방대한 양의 주석, 교리문답, 십계명 강해, 그리고 기독교 강요 등의 저작과 문서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도 자살을 주요 주제로 삼아 다루지 않았다. 오직 성경강해를 해 가는 가운데 사울의 죽음과 아히도벨의 자살에 관한 부분을 설교하면서, 그 두 설교문에서 자살을 취급했을 뿐이다.25)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살에 대한 가르침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인간이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면 살아야 하지만, 이생을 떠나야 할 때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이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 파수를 서야 하듯이, 인간도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늘 행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보면서, 자살을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러기에 그것은 교만(hubris)에서 나오는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살을 어거스틴처럼 자기 살해로 보면서 이것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26) 그는 고난의 순간에 있어서도 끝까지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신자는 가져야 하는데, 자살은 바로 이 기독교의 최고의 덕인 믿음에 역행하는 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영웅적 죽음조차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수치, 고문, 불행을 피하기 위한 자살도 정당화될 수 없기에, 사울의 죽음도 또 다른 죄를 첨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5. John Wesley

 

웨슬리는 자살을 사회 기강과 관련해서 다루었지만 이것을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사유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살을 자기 살해(self-murder)하는 죄로 확고히 간주하면서 이것에 대해 교회가 더 엄히 제재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당시 18세기 말 당시 영국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자살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영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경건하지 않고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살이 더 많다고 생각했지만, 아울러 영국법이 Gregorian 왕조부터 우울증이거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한 자살은 처벌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자살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스파르타 시대에 자살한 자들의 시체를 벌거벗겨 거리에 매어 달자, 자살이 줄어들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영국도 좀 더 엄격하게 자살자들을 처형하도록 법제화해야 하고, 그래서 그들을 사슬에 묶어 거리에 매달게 되면 자살은 훨씬 줄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27) 물론 교회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는 죄인 자살에 대해 더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 Augustine, The City of God, bk, 1, ch. 22 (p. 33). 

16) Augustine, The City of God, bk, 1, ch. 19 (p. 30-31) 

17) Augustine, The City of God, bk. 1, ch. 25 (p. 36) 

18) St.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Translated by Fathers of English Dominican Province (Benzinger Bros. Edition, 1947), II-II, Q 64, art. 4 (p. 2165). 

19) Ibid, “Suicide is contrary to the inclination of nature, and to charity whereby every man should  love himself.” 

20) 로마 가톨릭 신학자 O'connell은 이 점에서 자살은 내재적인 악으로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생명을 취하는 것도 하나님의 특권에 속한 것인데, 이것을 인간이 취하려고 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Timothy E. O'connell, Principles For A Catholic Morality. Revised Edi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Publishers, 1990), 188. 

21) Dietrich Bonhoeffer, Ethick,  손규태 이신건, 오성현 옮김,『윤리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39, 240n. 

22) Luther's Works, vol 50: Letters, edited and translated by Gottfred G Grodel (Philadelphia: , Fortress, 1975), 215. 자살을 마귀의 선동 및 작용과 연결시켜 이해한 것은 이미 693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만들 교회법에 나와 있다. 자살을 시도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처방과 조처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마귀의 선동과 연결시켜 놓고 있다. 루터가 이것을 참고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 185, 191. 

23) Jeffrey Watts, Choosing Death: Suicide and Calvinism in Early Modern Geneva (Kirksville, MO: Truman State University Press, 2001), 10. 

24) Luther's Works, vol 54: Table Talks, ed. and trans by Theodore G. Tappert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67), 29. 

25) Jeffrey R. Watt, "Calvin on Suicide" in Church History, 66 no 3 (1997): 464. 

26) Watt, "Calvin on Suicide", 466. 

27)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XIII: Letters, third Editi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8), 481

 

 

IV. 자살, 대죄, 그리고 영원한 저주에 관한 교회의 교리


 A. 용서받지 못할 죄로서의 자살 인식의 흐름

 

교회사를 통해 간단히 살펴본 결과 자살이 구원받지 못하는 죄라는 통설은 중세 교회와 로카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교회법과 교리에 크게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561년 브라가 공의회에서 교회는 자살한 자에 대한 기도해 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 기도가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즉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866년 교황 니콜라스 1세가 자살한 자의 장례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내는 가운데, 자살은 사탄의 사주로 말미암은 것임을 명시했는데, 그것은 자살자의 영혼은 당연히 사탄이 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8) 중세 교회의 영향을 받은 대문호 단테의 문학작품 신곡이 자살자의 상태를 묘사한 것도 이런 인식을 심화하게 했다. 단테에 따르면 자살한 자들은 9개 층으로 구성된 지옥에서 마귀가 있는 9번째 층에 가장 가까운 7번째 층에서 비참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로 영혼이 던져져 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를 내 던졌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 날을 맞아도 육체를 입을 수 없고, 결국 그 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인 채로. 그곳에서 숲이 되어 통곡하며 지낸다.29) 단테는 살인자들보다 자살자를 사탄에 더 가까운 곳에 배치해 둠으로 자살이 더 중한 죄라는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12세기 교회의 대 신학자인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가르쳤던 것은 그런 인식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결정들과 교리들을 통해 자살하면 지옥가게 된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 잡고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이와는 달리, 교회법이나 교리 문답을 통해 자살에 대한 공적 입장을 가르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에 대해 그의 편지와 대화 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자살자들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살이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생각을 계승했기에 자살을 강하게 정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원과 연결시켜 정죄하지는 않았다. 웨슬레는 자살한 자들이 더 큰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경종을 가해야 한다고 자살을 심하게 정죄했지만, 그도 이것을 영원한 저주와 연관시켜 말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시켜 다루면서, 피조물이 교만하고 월권적인 죄로 취급해 왔다. 이처럼 개신교회에는 이 둘의 관계에 공적 결정이나 교리를 제정하지 않았지만, 개신교회 안에도 중세이후로 교회에 계속 내려오던 이 통설이 계속 자리잡아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28) Murray, Suicide in the Middle Ages: The Curse on Self-Murder, 191. 

29) Dante Ahligieri, La Dibina Commedia, 한형곤 옮김,『신곡』 (서울: 도서출판 서해문집, 2005), 149-151.

         

 

B. 대죄(mortal sin)교리와 자살

 

자살에 관한 통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죄의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를 원죄(originla sin)와 본죄(자범죄, actual sins)로 나누고, 죄의 성격과 심각성에 따라 대죄(mortal sin)와 소죄로 구분하여 이해해 왔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분류한 바 있는데, 이것이 통설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죄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grave matters)임을 알고도(full knowledge) 의지적(deliberate consent)으로 범하는 죄이다.30) 심각한 문제에 해당되는 것은 십계명을 통해 이미 구분되어 있으며, 행동의 죄 된 성격과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이 대죄가 되는 것이다. 소죄는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데, 자기가 범하는 그 죄의 성격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고의가 없이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31)

       

대죄를 범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자비(God's charity)와 긍휼을 그들의 심령에서 파괴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을 상실하게 한다.32)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고 관계가 단절된다. 그렇기에 대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고해 성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고해성사는 대죄를 지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임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새로 역사하게 하고, 성화시키는 은혜를 회복하게 한다.33) 만약 고해 성사를 통해 회개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나라로터 배제되고 "지옥의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 of hell)에 처하게 된다.34)

        

이런 로마 교회의 대죄 교리의 빛에서 본다면 대죄로 취급된 자살은 마땅히 고해성사를 통한 화목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적으로 자살하는 자는 그 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할 수 없고, 결국 자살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교회 내에서 내려오는 통설은 로마 교회의 자살 이해와 밀접한 연관 하에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0)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econd Edition. Libreria Editrice Vaticana, 1857-59 

31)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62. 

32)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61. 

33)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6 

34)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61. 그러나 소죄는 하나님의 자비를 약화시키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기에 개인적 회개를 통해 회복할 수 있고 그래서 반드시 고해성사를 거칠 필요도 없다.


 

V.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신학

 

구약성경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살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기에 사형에 처하도록 엄중히 명하고 있지만(창9:6), 모든 살인을 다 사형에 처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모세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쳐 죽였고, 다윗은 살인을 교사해서 간접적으로 살인했다. 물론 그들은 그 행위로 상당한 값을 치렀지만 결국 용서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자기 살인이라 불리는 자살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A. 회개와 구원의 관계

 

그것은 자살은 다른 살인행위와 달리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은 죄라는 생각이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생각의 주요한 단초를 제공한 가장 오래된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가룟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의 목숨을 끊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죄를 가중시켰을 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든 것이 그가 하나님의 긍휼의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파괴적 가책이 발동하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기회"(chance of a saving repentance)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35) 또 같은 책에서 그는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위한 기회를 남겨놓지 않는 악한 행위[자살]하는 것을 보다는 낮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36)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이어졌고 대죄를 범했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지만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살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인식은 중세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의 신자들 그것도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단지 ‘사제를 통한’ 이라는 구절이 없어지고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에 자살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회개하지 못한 죄이기에 용서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개신교회는 회개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행위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다. 중대한 죄를 짓고 비록 회개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이 택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받은 바 그 아들됨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만약 지은 모든 죄에 대해 회개해야만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면 이것은 자칫 행위 구원과 공로사상으로 미끌어질 위험을 안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K는 사업체가 부도나는 순간을 넘기기 위해 꽤 오랫동안 갚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절친한 친구P에게 곧 갚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친구의 보증을 받아 거액을 대출받아 썼다. 결국 P는 K를 위해 보증을 선 것 때문에 사업체와 가정이 파탄났고, 비관하여 자살하게 되었다. 그러면  고의적 사기를 범한 K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고 하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K는 의도적으로 8계명과 9계명을 어긴 상태이고 친구를 죽음에 빠뜨린 죄을 지었고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단정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는 충분하지 못하다. 구원은 특정한 죄의 회개 여부에 결코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자살한 자는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메릴 교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는 이런 것에 제한받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구약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든다.37) 살인했고 범죄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확신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그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노래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그 증거로 제시하며, 언약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특정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고 보았다.

 

35) Augustine, The City of God, bk 1. ch. 17 (p. 27). 

36) Ibid. ch. 25 (p. 36). 

37) Merill, "Suicide and the Concept of Death in the Old Testament," 325.


 

B. 성령훼방죄와 자살

 

성경에 기록된 유일하게 사함을 받지 못할 죄는 오직 “성령을 훼방한 죄”(the blasphemy against the Spirit)(마12:31; 막3:28-29; 눅12:10)밖에 없다. 예수님이 직접 바리새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권위 있는 신약학자 카슨(D.A. Carson)은 이 죄는 신약의 히브리서의 구절 및 신약의 제반사항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진리를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대속의 죽음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히6:4-6; 10:26, 29).38)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일들과 능력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즉 사탄을 힘입어서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마12:22-24)은 이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화란 교의학자 벌카우어(G.C. Berkouwer)는 바라새인들이 귀신들이 쫓겨나는 일과 같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하나님이 나라와 성령의 권능이 예수를 통해 나타나고 계시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예수의 메시야사역을 사탄의 대리자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석했다.39) 교의학자 바빙크(Herman Bavinck)에 따르면, 이것은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미워하고 거부하는 “사탄적인 자세”(demonic posture)와 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40) 그런데 후크마(Anthony Hoekma) 교수는 여기에 이 죄의 특징을 하나 더 관찰해서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 기사(막3:28-30)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처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계속적"(continually)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30절의 ‘말하다’(elegon) 동사가 미완료(imperfect tense) 시제로 나타난 것을 지적한다.41)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목도한 바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역사를 거부하고 모독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살이 성령에 대항하는 죄라고 볼 수 있는가? 삶의 어느 순간에 약함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구름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을 성령을 훼방한 죄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42) 그렇게 말하기에 그 어떤 신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죄의 핵심 성격은 1)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아 알고 있음에도, 2)계속적으로 일관되게, 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그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다.43) 이 성격의 틀에서 조명해 볼 때 일반적으로 현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살이 이와 같은 죄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그 행동은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거부한 죄로 연결한다는 것은 꽤나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자가 구원 얻는 믿음을 부인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 내세, 구원 등도 없다고 주장하며,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이기에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차원에서 자살을 택한다면 그것은 이 죄에 해당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자살이 과연 일상의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할 개연성이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극심한 생활고, 참을 수 없는 육체의 고통, 정신적 우울감, 또는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다툼 등의 문제로 한 극단적인 행동 즉 자살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38)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Matthew & Mark,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10), 337. 

39) G.C. Berkouwer, Sin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1971), 340. 

40)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abridged in one volume, ed. John Bol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11), 379. 

41) Anthony Hoek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1986), 183. 

42)http://www.desiringgod.org/resource-library/sermons/funeral-meditation-for-a-christian-who-commited-suicide-1981 

43) Bavinck, 380.

 

 

VI. 개혁 신학적 검토: 성도의 견인 교리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고백하는 교리 가운데 진실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Saints)교리가 있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자살 문제를 보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안경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7장에 수록되어 있는 이 교리는 (1)참된 신자는 전적으로 종국적으로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2) 그들은 확실히 끝까지 견디게 되고, (3) 이 확실성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르친다.44) 1절은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용납하고 성령으로 효력있게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한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은혜의 상태에서 세상 끝날까지 확실하게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45) 이 내용은 한번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결코 탈락될 수 없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통해 자살자를 들여다 볼 때, 자살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구원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핵심은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작정에 있기 때문이다.

         

2절에서 성도의 견인은 “그들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자유롭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그의 선택 작정의 불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그들 속에 내주해 있는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내주, 그리고 은혜 언약의 성격에 질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웨신, 17장 2항). 이것이 근거하는 주요 구절인 로마서 8장 29절 30은 이에 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성도의 견인은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주체자가 하나님이 시고 그 하나님의 선택의 작성에서 말미암음을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그런즉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이나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롬8:38-39).

        

이 성도의 견인교리의 빛에서 본다면, 자살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란과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자유 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도 없고, 또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나 공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이 견인교리는 잘 정리해 준다.

         

사람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택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살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그를 자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반 신자들이나 목회자로부터 간혹 들을 수 있는 유추적 주장이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웨신 17장 3절은 이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대답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의 세력과 자신들을 견인하게 하는 방편을 소홀히 함으로 죄에 빠지며 한동안 그 죄에 머물기도 한다....." 성도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언제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신자들도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그것 때문에 일시적 심판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46) 이것은 마치 구약의 언약의 백성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비록 언약백성이 율법을 일시적으로 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효화하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의 신실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47)

        

선택된 자라 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약하게 될 때 극단적인 죄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것이 그가 선택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도 성도들이 육체의 약함과 부패함 때문에 또는 사탄의 유혹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여러 잘못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여타 죄와는 달리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성격의 중대한 죄일 뿐이다. 평소 매우 경건하게 살며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살아온 신자가 과연 6계명을 범할 수 있을까? 드물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윗도 6계명과 7계명을 범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자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부패성으로 자살과 같은 심한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성도가 자살과 같은 엄청난 죄악을 범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심과 주권적 사랑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로운 자들의 죄를 위해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들, 소외된 많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손으로 생을 접은 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의 효력과 범위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8: 39)

 

44) G.I.Williamso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For Study Class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5), 126. 

45)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 17, 1. 이 교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46)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 17, 3. 

47) Stanley Grenz, The Moral Quest, 신원하 역,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서울: IVP, 2001), 124.


 

VII 나가면서: 바른 교리로 말미암는 목회적 안내와 돌봄


A. 결론적 요약

 

삶의 순간에서 정신적 우울증이 원인이 된 예도 있지만 그 외의 다양한 이유로 이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싫어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할 때, 사람들은 자살을 결행할 수 있고 또 하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을 취할 본래적 권리가 없는데도 자기가 자유를 무한하게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동시에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학자 오코넬은 이 성격 때문에 자살은 내재적으로 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 교회와 신학자들은 자살을 가장 심한 죄로 간주했고, 경계해 왔다. 이 점은 오늘도 변함없다. 그렇지만 자살한 사람이 반드시 영원한 저주에 처하는 것이 아니다. 자살자는 자살하는 순간 죄를 회개하지도 못하고 죽지만, 하나님은 개별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과정 전체로 그 사람을 판단하신다. 자살을 범하는 그 인생의 한순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48) 인생이 비록 하나님을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조차도 벗어나려고 하는 행동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막거나 무효화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자살이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통설은 개혁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B. 목회적 돌봄을 위한 제언

 

자살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유족과 남은 교회도 꽤 오랫동안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이런 자들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통설을 바르게 잡고 그것이 근거가 없음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행여나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통설을 사용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에서 말미암는 것이라는 교리를 평소 좀 더 분명하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특히 유족들에게는 이 교리를 바르게 심어주면서, 진심으로 위로와 소망을 심어 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작정 안에서 살다가 간 사람이라면 여전히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작정 안에 있을 것임을 확신시켜 줘야 할 노릇이다.

        

그렇지만  목회자는 자살이 구원 여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시간에 드러내놓고 언급하거나 설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도 그렇게 권고했는데 그런 설교는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49) 특별히 분별력이 약한 청소년들과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는 더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시간에 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고귀함,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그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아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족들과 남은 성도들에 대한 목회적 돌봄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것은 자살자의 장례 문제이다. 목사와 교회는 이것에 대해 좀 전향적으로 고민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여기에 대해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구 교회법은 자살한 자의 장례를 완전히 금했으나 새 교회법은 장례식을 거행했을 때 공공적 추문이 될 수 있을 그런 죄인들에 한해서 장례를 금지하고 있다.50)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장례식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남은 자들과 유족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던 어거스틴의 생각을 깊이 새기면서, 교회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개 교회나 아니면 상회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고민하고 씨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48) Gilbert Meilaender, Bioethics: A Primer for Christian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 2006), 57. 

49) Luther's Works, vol 54: Table Talks, 29.   

50) K.H. Peschke, Christian Ethics: Moral Theology in the Light of Vatican II, 김창훈 옮김, 『그리스도교윤리학』 제 2권  (서울: 분도출판사 1992), 345.

 

신원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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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종수 2016.06.08 10:23
    [ 자살한 사람이 반드시 영원한 저주에 처하는 것이 아니다. 자살자는 자살하는 순간 죄를 회개하지도 못하고 죽지만, 하나님은 개별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삶의 과정 전체로 그 사람을 판단하신다.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하는데 어째 고신에서 교수로 그냥 두는지 이해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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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6.06.10 21:26
    크리스찬의 자살과 구원 논쟁
     
    기사입력 2016-06-10 오후 8:51:00 | 최종수정 2016-06-10 20:51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은 얻는다는 것이 영생 보장보험이 약속되어 있는 말씀이다.(요3;16) 구원 받은 자의 자살 행위가 구원의 변수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행위 구원을 테스트하는 문제는 접근자체가 오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거짓 신자의 자살이든 뭐든 그 믿음이 거짓이기 때문에 구원과의 관계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고 전제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자” 거듭난자 라고 단정을 하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이론의 여지 또한 없다. “성도가 자살해도 구원 전선에는 이상이 없다. 아니다 이상이 있다.” 아직도 팽팽한 접전이 진행 중이다.

    I. 성도가 자살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견해

    신원하 교수(고신신대원,윤리학)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개혁 신학적 연구”에서“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변수(變數)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자살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이나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자유 의지적으로 자살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는 것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자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선택의 작정을 변경할 수 없다. 작정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자살과 하나님의 자유의지의 산물인 구원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성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언제나 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신자들도 언제든지 사탄의 유혹과 육신의 약함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죄들을 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내주하는 은총이 무효화되거나 궁극적으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중죄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죄도 구원과 관계해서는 여타 죄와 다를 바 없다. 신자가 자살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 통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정적 칭의 선언인 이신칭의의 교리, 즉 이미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속가(贖價)가 지불되었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으며, 자살 죄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상원 교수(조직신학)는 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자살에 대한 입장 정리 세미나에서 광의적인 자살 개념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자살은 크게 동기나 목적이 선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피하지 않는 행동,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 예로 신앙과 죽음의 기로에서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 몸을 던져 병사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 승선허용인원을 넘어 다른 전쟁포로들을 태우고 몸을 던진 군목 등”을 제시했다.

    이어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 경제적 부담에 의한 자살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며 인간의 생명을 상실시킬 만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화가 결정된다는판단은 다시 로마 카톨릭의 행위구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신칭의론과 행위론이 충돌을 일으킬 경우 이신칭의론이 앞서야 한다. 이런 해석학적 원리를 포기하고 그 구절들을 받아들여 해석하면 얼마든지 중세시대 로마가톨릭 행위구원론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II. 구원 받은 믿음은 자살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부정적인 견해

    이한수 교수(신약신학)는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만을 강조해 왔다.” “구원은 처음부터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이나 행위와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귀성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범죄행위다. 신자들의 자살 행위는 이러한 복음의 근본 교훈을 거스르고 그것에 도전하는 불신앙 행위”라고 지적하고 “성경이 자살에 대해 명시적으로 구원이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성경의 일적인 교훈들에 기초해서 판단할 때 신자들의 자살은 그들이 경험한 구원의 은혜의 상태와 부합하지 않는다.”

    박혜근 교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성경이 자살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 단정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선언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하다. “히틀러, 김일성 성경의 가르침을 보자면 어떤 운명에 처했을 지는 물어볼 필요 없이 명확한 것 아닌가? 구원받은 신자라면 자살 충동을 느낄 수는 있어도 자살을 결행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자살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굉장히 방임적이라고 비판하고 이런 주장은 은혜의 교리에 근거해서 자살 죄도 용서받을 죄의 리스트가운데 하나로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의 교리에만 근거해서 어떤 동기의 형태든 자살을 구원론적으로 논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 “성경은 자살이 배교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은혜의 교리에 따라 단순히 용서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살은 구원의 여부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잭 케보키안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살하려는 사람이 어떤 심리적 상태에 이르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종교적인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자살인 것”이라고 일갈하였다.

    III. 신원하 교수의 주장에 대한 신호섭 교수의 비판

    1.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근거가 없다”는 주장에 관한 반박 - 물론 성경에는 타인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자가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이 없듯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살인죄를 범할 때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 역시 없다. 이로 볼 때, 신 교수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혁교회가 주창해 온 삼위일체 교리 역시 성경에는 명시적 구절이 없으나 그러한 사상은 성경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살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면 자살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명시적인 성경 구절은 어디에 있는지 되묻고 싶다. 나아가 명시적인 구절이 없다 해서 자살이라는 대죄(mortal sin)를 다른 여타 죄와 동일하게 보는 것’ 역시 정당한지 묻고 싶다. 타인의 생명을 제거하는 살인죄와 자신의 생명을 제거하는 살인죄를 동등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또한 신 교수의 말대로 자살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과연 자살한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인지, 또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자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제거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역시 신 교수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생명에 관한 권리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교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은 안락사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와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위임 받은 자일뿐이다. 더욱이 신자에게 있어서 생명은 구속의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과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을 볼 때 그가 과연 택자였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마귀요,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을 뻔 했던 인물이라고 정죄하셨다(요6:70)

    2. “자살은 다른 행위와 달리 그 죄를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는 한국교회의 입장이 자칫 ‘행위로 인한 구원’ 또는 공로 사상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게 되고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에 관한 반박 - 만일 신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이제 회개의 효용 가치는 용도폐기처분 되어야 할 것이다. 회개와 죄에 대한 인식이 신뢰하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는 신앙보다 선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그것이 중생과 더불어 발생하는 회심이든 더 나아가 회심 이후의 성화과정에서의 끊임없는 회개이든지 관계없이 회개는 중생 받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물론 회개의 행위가 구원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게 되어 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천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사도 요한의 엄중한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계 21:27). 사도 바울 역시 아무도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히 12:14).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정 가운데 있어서 중생과 구원을 체험하고 성화되어 천국에 입성한 자를 가리켜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 “흠이 없는 자들"(계 14:5)이라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자살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천성에 들어갈 담대한 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신 교수는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택자와 유기자를 정했다는 ‘예정 교리’와 구원으로 택함 받은 성도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견지해왔다”며 “이러한 견인 교리에 비춰 볼 때,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과 위험이나 칼과 마찬가지로…’ 등의 말씀처럼 자살이라 하더라도 결코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고 교리적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가 인용한 로마서 8장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위해 살다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환난과 위험이나 칼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는 36절 말씀을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여기에 ‘자살’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 누구의 지지도 받을 수 없는 극단적인 논리의 비약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주경학적으로도 나아가 신학적으로도 전혀 앞뒤가 어울리지 않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3. “자살은 성령 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물론 신 교수는 성령훼방죄의 핵심 성격을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라고 옳게 진술했다. 반박 - 그러나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성령 훼방죄는 “증거와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성령의 증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러한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가리켜 “자신들의 영혼의 복리와 미래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무관심”이라고 잘 서술했다. 신 교수가 잘 밝힌 바와 같이 루터는 자살을 가리켜 “사탄의 힘에 사로잡혀 목숨을 끊은 것”이라 했다. 루터는 그것이 저주에 이르는 죄는 아니라 했지만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과연 자신의 영혼의 복리와 미래의 삶에 대해 절대로 무관심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고전 3:16~17)?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의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어느 정도의 증거와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금번 신원하 교수의 자살에 대한 입장 발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2011년에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목회자들을 향해서는 자살과 구원이 관계없다는 걸 너무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금번 강연을 통해 신 교수가 사탄에게 자살을 충동질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자살의 문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 또는 “가지 않는다"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며,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교제하는 신자는 절대로 자기를 살인하는 자살을 할 수 없다" 또는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로 접근해야 말 문제이다. 하나님의 택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며 거룩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야 한다(갈5:22~23). 그는 비록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신설한 신앙인으로 살다가 기근이나 칼이나 위험을 만나도 심지어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살아야 할 하나님의 택자이기 때문이다(겔 16:1~13).

    IV.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가 어떻게 남용(濫用)되고 있는가?

    현대 신학자들은 소위 육욕적(肉慾的)인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고백들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本質的)인 믿음의 고백으로 간주(看做)하여 구원의 정의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성도의 견인” 이라는 교리의 남용은 한번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불순종(不順從)이나 엄청난 불신의 적대행위(敵對行爲)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한 신자가 타락을 하여 믿지 않는 불신자(不信者) 상태로 떨어지고, 심지어 무신론자(無神論者),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을 받았고, 여전히 중생자가 된다. 만약 당신이 한번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이 만약 그 믿음을 부정할지라도 당신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신학이다. 한번 그리스도를 고백한 믿음 때문에 그가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고는 한갓 속임수에 불과하다.(마10:33,딤후2;12)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보증(天國保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도의 진실하고 거짓 없는 의지의 믿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완전히, 최종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바로 신실한 성도들은 생명(生命)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은혜(恩惠) 안에 견디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만약 일시적(一時的)으로 한동안 견디기 어려운 죄에 떨어 진다해도 결코 완전히 그 믿음을 단념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전혀 책임질 줄 모르는 자동기계(自動機械,Automated teller machine)들처럼 무관심(無關心)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도덕적 책임자(責任者)로서 인간 본연의 삶의 한 방편에 행복 추구 또는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현상을 유지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인내하거나, 재정비될 수 있게 관계 한다“라고 하였다.

    언젠가 한번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더라도 현재 주님을 대항하는 쪽으로 계속 돌아서 있다면 그들은 결코 진실로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성경이 자증(自證)한다. 사도요한은 기록하기를 “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1요2;19)라고 하였다. 어떤 위인이 일단 배교자(背敎者)가 되어버렸다면 과거 그 사람의 신앙 간증이 아무리 확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신앙의 질(質)이 가룟유다처럼 위선적(僞善的)이었고, 위조(僞造)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 것뿐이다. 하나님은 “능히 너희를 보호(保護)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가운데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24) 라고 하였다.

    들어가며

    구원받은 믿음이 과연 자살과 양립할 수 있는가?

    위의 논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살과 구원 문제는 가룟유다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결론은 언제나 각자 몫이다. 자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목회적 배려(牧會的 配慮)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신불신(信不信)간에 어려움이나 슬픔을 당한 가족에게 어떻게 배려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할 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화(聖化)의 마지막 단계의 열매가 견인(堅忍)의 은혜와는 전혀 무관한 불신(不信)이든, 심지어 전향자이든,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일지라도 행위구원(行爲救援)이 아닌 은혜 칭의 용서 구원(恩惠救援) 패키지 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다“ ”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주장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마치 수학공식(數學公式)처럼 말한다면,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남용(Abuse)하거나 심각하게 왜곡(distortion)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칭의(稱義, justification, 또는 용서)와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전후나 원인과 결과라는 측면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격으로 결코 따로 분리하여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行爲)와 구원(救援) 문제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도 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표는 달았지만 그의 열매(義의 열매, 칭의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영적 분별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그대로이다. (마7:16,약2:26)

    그리스도인은 어떤 면에서 주님만 따라가는 앵무새이다. 우리 주님이 싫어하면 싫어하고 좋아한다면 좋아하고 미워한다면 미워해야하고, 정죄(定罪)한다면 마땅히 정죄(定罪)해야 한다. “ 악은 어떤 모양(模樣)이라도 버리라”(살전5:22) 했다면 버려야만 한다. 그 믿음이 건강한 믿음인지, 아니면 진실치 못한 가룟유다과인지 분별(分別)하려하지 않고, 자살 그 인간적인 현상(現狀), 구원문제에 집착하여 외적(外的)으로 교회에 등록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만 달았으면 자살이든 뭐든 구원에 이상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이신칭의의 신학논증으로 인해 행여라도 교회 안에 자살자가 만연하는 사태가 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해 참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떠나다 고기뱃속에 던져졌던 요나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든지, “ 내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Sheol)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요2:2)라고 고백한다.

    의인 욥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욥30:26) 재물과 가족을 다 잃는 온갖 고난이 와도, 친구들이 다 버려도, 하나님의 응답이 눈에 보이지 아니해도 인생의 걸음걸이를 다 세시는 주권자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승리하였다. “그 후에 욥이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期限)이 차서 죽었더라”(욥42:17)라고 기록한다.

    가룟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바울도 역시 엄청난 핍박과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며 결코 生命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生命의 복음을 위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더 사모하며 자신들의 생애를 불태웠다.

    오늘날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갑갑하고,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가? 세상 풍조(風潮)대로 따라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滿足)하고 감사(感謝)하는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성도든, 목회자든 선교사든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망, 우울증, 알 수 없는 많은 정신 질환이 만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매순간순간을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간다.

    참된 믿음, 참된 회개(회심)의 여부는 입술이나 지식, 이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열매로 나타난다.(요15:5) 이것이 세례 요한식 표현으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눅3:8)이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갈5:22~23)라고 하였다. 성령의 첫 열매 사랑은 어떤 하늘에 있는 이상적이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기 몸부터, 건강한 육체로 관리하는 일( Body Stewardship)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상상하기도 싫지만 어떤 이유에서이건 어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인생의 열매, 즉 성화의 열매가 ”자살”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어떻게 받으실 것인가?

    자기의 어떤 유익과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을 3년간 따라다녔던 거짓 제자의 대표브렌드 가룟유다의 자살 사건은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경고로 주신 산교육 교재(敎材)이다. 자살자의 그 순간, 마지막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살자가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처럼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살자!”로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더 이상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 순간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주의 은혜를 입었다면 아마,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참고문헌>
    1. 신원하,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자살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개혁 신학적 연구”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4666

    2. 예장 합동 총회신학부, 자살에 대한 입장 정리 세미나,
    이상원교수, 이한수교수, 박혜근교수, http://m.newspower.co.kr/a.html?uid=13317

    3. 신호섭,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신학적 근거가 없다는 신원하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 론”,
    http://www.cwch.co.kr/xe/board01/47763

    4. 가룟 유다의 수수께끼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0

    5. 연이은 기독교인 자살은 가롯 유다 신드롬인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494

    6.자살자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http://newspower.co.kr/sub_read.html?uid=12751

    7. John F. MacArthur, Jr, “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He Condemns a Hardened
    Heart“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6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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