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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의 칭의론


구원-칭의론 다시 생각하기/ 최갑종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는 “‘구원/칭의, 다시 생각하기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최근에 한국교회 안에 “‘구원/칭의에 관하여 매우 심각한 토론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 받은 자는 어떤 경우에서든 중도에 탈락하지 않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 심판을 거처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슬로건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슬로건은 잘못하면 기독교 복음을 값싼 복음, 기독교 신앙을 십자가와 제자도의 삶이 요구되지 않는 비윤리적 신앙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슬로건은 신앙과 삶을 분리시켜 개인이든 교회든 타락과 부패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2년 전 전 국민이 분노했던 세월호 참사의 주범인 구원파 교주 유병언과 그를 신봉하는 자들은, “한번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는 올바른 윤리적 삶을 살지 못해도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간다.”는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온갖 못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유병언은 세월호의 실제 주인이었지만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정작 배와 승객들의 안전관리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원파 신도였던 세월호 선원들도 배가 파선되었을 때 먼저 승객을 구조하여야 하는 기본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자신들만이 살겠다고 제일 먼저 탈출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최근에 전통적인 구원론에 관하여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한 때 영국교회의 주교였다가 지금은 영국 성 안드레 대학교 신약교수이며,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톰 라이트 박사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전통적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과는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첫 칭의/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최후 심판 때의 마지막 칭의/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설 때까지 성령의 인도 아래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인도 아래 바르게 살지 않았다면, 행위에 따라 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결국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 칭의에 있는 주장을 들어보면, 이 법정 판결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선언된다. 현재에서 이 판결은 오직 믿음에 기초하여 선언된다. 또한 성령이 이미 거주하는 사람 모두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그 날에도 선언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판결에 상응하여 미래의 판결이 일어날 것임을 보증해 준다. 그리고 미래의 판결이 성도들이 살아온 삶에 상응하여 주어질 것인데, 성령은 성도들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불어넣는다.”(340-341)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의 신약교수인 김세윤 박사 역시칭의와 성화에서 칭의는 두 측면, 마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이루어져가고 있는 이미의 현재적인 측면과, 장차 이루어질 완성을 기다라는 아직의 미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현재적인 이미의 칭의와 마지막 심판 때에 성령을 통해 살아온 우리의 전 삶을 기반으로 완성될 아직의 미래 칭의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믿음을 통하여 현재적 칭의를 받았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자는 최종적인 심판 때에 완성된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점에 칭의 된 모든 사람들은 결국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 중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답한다면, 칭의의 현재(‘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 단계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전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구원을 받았다 한들(10:9-10), 종말의 칭의/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264).

 

김세윤 박사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의 구원을 반대하고, 마치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비난한 자들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합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헛되이 믿어 타락/탈락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며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즉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믿음의 순종을 하여 의인으로 살도록 촉구하면서 그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교회가 후자를 등한시하면서 사도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이렇게 반쪽자리 복음으로 왜곡하여 가르쳤기에, 스스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살려는 삶(의인으로서의 삶)을 하지 않으면서 의인으로 자처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부패하여 세상의 조롱과 비난거리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2016617일자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특별인터뷰: 칭의론 논쟁, 김세윤 교수에게 듣는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과, “한번 구원에 참여한 자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이 없고 타락한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떤 견해가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한 번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은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으로부터 탈락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한다하더라도, 예수 믿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자는 최후 심판 때 탈락되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잠간 살펴봅시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 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구원이란,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최악의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기쁨으로 다시

 

맞이하여 그를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 기쁨의 잔치를 베푸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한복음 3:16은 구원을 설명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그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7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용서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예수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또 골로새서 1:13에서 바울은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은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를 거기서 건저 내어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로 옮겨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은 구원을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린 것으로 말하면서, 2-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성경은 구원’(‘칭의도 마찬가지 이지만)과 관련하여 때로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이미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지금 구원을 누리거나 이루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장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8:24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에베소서 2:8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이 예수 믿는 자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5: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하면서, 구원이 지금 주어지고 있는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구원은 장차 주어질 미래의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5:9-10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하면서 구원이 미래에 주어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역시 디모데전서 4:16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하면서 구원이 장차 미래에 주어질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이 때로는 이미 주어진 과거형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이미 주어진 과거형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때, 곧 종말에 오신 예수님께서(1:2; 4:4), 인류가 종말에 갖게 될 그 죽음과 부활을,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앞당겨 지신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종말론적인 구원사건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점과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30에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현재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이루신 종말론적인 구원사건의 모든 축복을 우리가 일순간에 다 누려 즉시 예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지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18에서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계속 진행되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미래형으로 설명되는 이유는, 장차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과 모든 사탄의 악을 징벌하신 다음, 비로소 우리가 최후 심판 이후 누리게 될 최종적인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구원이 3중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래의 질문에 돌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은 구원은 최후 심판 때까지 여전히 유효하여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첫 구원은 믿음으로 은혜로 받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우리의 선행과 삶에 따라 됩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말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저명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어느 한쪽만을 지지하지 않고 양면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은 분명히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좌우 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며, 이 구원을 하나님께서 최후까지 붙들어 주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2: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면서,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23-2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면서,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면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 이하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얼마나 안전하고 확실한지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성경은 다른 곳에서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 때,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어떤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영생의 축복을 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5장에 있는 열 처녀 비유”(1-13), “달란트 비유”(14-30), “양과 염소의 비유”(31-44) 등은, 최후 심판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나, 주인의 명을 어긴 한 달란트 받은 종이나, 사랑의 선행을 보여주지 못한 왼편에 있는 자들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하여 영벌에 처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7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할 그 날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계시록도 여러 곳에서(2:23, 18:6; 20:11-15; 22:12)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몇몇 구절을 찾아보면, 로마서 2:6-10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에서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판결하여 선을 행한 자는 영생으로, 악을 행한 자는 영벌을 내리실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 역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면서, 신자 역시 최후 심판에서 그 행한 것을 따라 심판 받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면서, 부도덕한 일을 자행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문제와 관련하려 양면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곳에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거룩한 삶이 없는 자는 최후 심판 때 최종적인 구원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 양 면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선 만일 믿음에 의한, 은혜에 의한 구원에 관한 말씀들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자신이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신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은 지푸라기 보다 못한 것에 불과한데 어떻게 우리의 삶에 근거하여 최종적인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치명적인 암에 걸려 오늘 내일 임종을 기다리다가 예수를 믿게 된 자의 경우, 그는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반대로 만일 성경이 최후 심판 때 우리의 행위에 따라 판결을 받는다는 말씀이 없고, 한번 구원을 받은 자는 무슨 일을 하든 탈락하지 않고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대로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책망하거나 경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너무나 쉽게, 그리고 조급하게 양자가 서로 모순된다고 단정하거나, 아니면 양자를 조화시킴으로써 양자의 강조점을 동시에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선택교리처럼 성경에는 평행선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그것을 억지로 조화시키기보다도 그러한 상이(相異)한 가르침이 나타나는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성경 저자의 강조점에 먼저 귀를 기울인 다음,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순을 느끼는 것은 우리 일뿐, 양면의 교훈을 주는 사도 바울 자신은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자의 본문들이 나타나는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서신에서 신자의 행위와 영생/구원을 연결시키는 본문은, 주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고 권면하는 문맥 가운데 자주 나타납니다. 반면에 신자의 행위와 의/구원을 분리시키는 본문은, 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문맥가운데 자주 나타납니다. 전자는 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신자의 삶을 교훈하는 명령법의 문맥에서, 후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주어지는 신자의 신분 문제를 밝히는 직설법의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만일 신자의 삶을 강조하는 본문을, 믿음과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본문에 비추어 이해할 경우, 그 본문의 명령법적 힘은 죽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믿음과 은혜에 칭의와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직설법의 성경본문을, 신자의 삶을 강조하는 명령법적 본문에 비추어 해석하면, 직설법 본문의 강조와 힘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문과 문맥의 차이를 외면하고, 양자를 서로 모순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아니면 획일적으로 서로 조화시키려하면, 저자가 각 본문에서 전달하려고하는 강조와 의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해석자는 양자를 모순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조화시키기 전에, 오직 그 본문과 문맥에서 저자의 의도와 강조점을 찾는데 주력하여야 합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무시간적인 신학적 논문이 아니고,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 처해 있는 교회공동체에 그들의 정황과 관련되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자의 믿음과 선행이 서로 모순되거나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본문들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는 1:5와 로마서를 마감하는 16:27에서 순종을 가져오는 믿음, 갈라디아서 5:6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관해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믿음이 결코 우리의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이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그에게 있어서 의와 구원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 가야할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그가 종종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1:17), “신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2:12), “신자는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5:5), “신자는 의롭게 될 것이다”(3:30; 2:16)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의와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직설법의 문맥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포함하여 그 어떤 인간의 공로나 선행을 배제하고, 설사 그것이 성령을 통한 선행이라고 할지라도,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이나, 한 사람의 자질이나 덕의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요,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동시에 신자의 삶을 말하는 명령법의 문맥에서는 순종의 믿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없이는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와 구원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니며, 신자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이 양자를 인위적으로 쉽게 조화시킬 수도 없고, 조화시켜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양자를 조화시키려할 경우 두 가지를 다 놓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후자를 강조한다하더라도 바울의 가르침을 행위구원론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순종,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사랑의 삶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고전 15:10; 3:27; 2:13).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선행과 삶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임을 강조한다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성경본문의 뒷받침을 받는다하더라도, 마치 성경 전체가, 혹은 사도 바울이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의 칭의/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심판을 거쳐 주어지는 미래의 칭의/구원은 선행에 따라 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고 도식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우리의 행위에 따른, 설령 그 행위가 우리 자신만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성령의 역사에 의한 은혜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가 여하히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심판과 탈락의 가능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이상, 설사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이미 칭의를 받았다고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에 따른 거룩한 삶과 선행이 없을 경우, 그는 최종적인 심판에서 최종적인 칭의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기독교윤리의 설 땅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 여러 곳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명령법적 교훈들과 경고의 본문들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종이호랑이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만일 누가 바울의 칭의와 구원에 관한 교훈을, 전통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믿음에 의한 현재적 칭의/구원=최후 심판에서의 최종적인 칭의/구원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칭의/구원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누가 바울의 칭의/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에 의한 현재적 칭의/구원최후 심판에서의 성령에 의한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칭의 /구원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확실성과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믿음과 은혜에 따른 최종적인 의/구원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면, 성령에 의한 우리의 삶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나 탈락의 입장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쪽이 다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양면의 가르침을 만든 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신학적, 목회적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러한 양면적 가르침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칭의와 구원만이 이미아직의 종말론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순종의 믿음”(1:5; 16:27)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5:6)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믿음도 계속 자라가야 하는 이미아직의 종말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살전 1:3; 1:25).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믿음과 선행, 칭의와 성화는 마치 같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보는 관점의 차이 일뿐, 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 우리가 칭의, 성화, 구원, 믿음을 이미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전통적인 믿음에 따른 칭의와 최후 심판과 구원의 주장이나, 성령에 의한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칭의와 심판과 구원의 주장이, 분명히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표면적인 차이는 보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질상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다음과 같은 캘빈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선행 없이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제안은 사실임과 동시에 거짓이다. 그 사실과 거짓의 여부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효력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선행 없이 의롭게 한다는 제안 자체는 거짓이다. 그러나 만일 선행 없이라는 표현이 의롭게 한다라는 단어와 연결된다면, 그 제안은 사실이다. 믿음은 선행이 없을 때 의롭게 할 수 없다. 그 경우에 믿음은 죽은 것이고 단순히 허구가 된다.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의롭다(1 5:18). 그럼으로 해가 그것의 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믿음도 선행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캘빈, 영문 에스겔서 주석 상권, 238에서 인용)

 

캘빈이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 역시 동시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서 칭의 없이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 없이 칭의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캘빈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양자가 어느 순간에도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어느 순간에도 다른 한쪽이 없이는 서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면, 사실상 양자는 같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질상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미래적 구원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에 의한 칭의(4:25)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아무리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 믿음이 선행을 동반하기 때문에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과 관련해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따라, 전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경우 최후 심판에서 탈락될 수 도 있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성경의 양면적인 교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갑종 (코람데오닷컴, 2016.8.1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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