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리차드 개핀

by dschoiword posted Aug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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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리차드 개핀


이 글은 리차드 개핀 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쉽게 요약한 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관, 특히 바울의 구원관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글입니다.

 

차례

 

1장. 구원의 서정과 바울신학

  1. 오늘날의 바울연구

  2. 신학자로서 바울

 

2장. 구원의 서정과 바울신학의 중심

  1. 바울신학의 중심 (여러 성경구절들, 죄,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앙의 역할 등)

  2. 바울신학의 중심과 구원의 서정

 

3장. 구원의 서정과 종말론 1

  1. 종말론과 인간론

  2. 종말론과 성화

 

4장. 구원의 서정과 종말론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미래로서의 칭의, 신앙과 순종, 바울과 야고보, 칭의와 현실 등

 

제 1장. 구원의 서정과 바울신학

 

오늘날의 바울 연구

 

오늘날의 바울연구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것이 중심이 되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 대한 재평가가 등장하고, 그 영향으로 인해 바울까지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등장한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개신교의 바울에 대한 관점과 다르다. 개신교는 바울의 교훈, 특히 이신칭의가 구원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반면, 새 관점은 칭의가 구원론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공동체성, 교회론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신칭의’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는 것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바라본 바울의 칭의교리는 개인의 구원이나 구원의 서정 같은 것들과는 관계가 먼 교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새 관점이 제기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개인이 구원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살필 필요가 있다.

 

2. 신학자로서 바울 : 몇몇 근거들

 

1) 성경신학


바울의 교훈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곧 성경신학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성경신학적인 접근을 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 각각의 내용이 광범위한 역사적인 정황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다. 성경 각각의 저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역사(일종의 구속사)를 펼쳐내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바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을 어떻게 입증하고 설명하는가에 집중된다.


바울의 교훈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는 바울의 교훈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 교훈과 관련된 여러 상황들은 정경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 바울을 해석할 때의 문제들


바울의 교훈은 확실히 명료성을 띤다. 그러나 이러한 명료성을 확보하기 위해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여러 난해한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벧후 3:16)에서 바울서신의 난해함을 언급한다. 이 난해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첫째로, 그것은 바울서신이 특정한 교회적 상황과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일반화 되어있지도 않고, 조직적인 모습을 갖추지도 않았다는 데서 온다. 둘째로, 바울서신의 내용 속에는 가끔씩 당시 사람들은 알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간격 때문에 알지 못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을 공부할 때는 이렇게 짜증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바울서신 속에 등장하는 기초적인 사실들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 서신 모두가 난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신학자로서의 바울


바울을 ‘신학자’라고 부르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이 신학자라고 해서 여타의 신학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정경적이지만 다른 신학자들의 신학은 정경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신학자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는데, 그는 ‘구속사’라는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인 것이다. 구속사는 재림까지를 포함한다. 재림은 모든 교회들의 실존적인 문제이자 기다림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신학은 신학의 구체성과 현장성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4)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우리가 바울을 신학자로 파악한다면, 바울의 신학적 방법론이 그의 서신속에 녹아있을 것이고, 그의 신학적 방법론, 즉 교리적 체계는 곧 정경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신학을 탐구할 때 우리는 성경신학을 하면서도 동시에 조직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꿔말하면, 조직신학은 건전한 성경적인 해석(주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신학은 성경의 통일된 교훈을 여러 가지 주제로 묶어서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조직신학은 성경을 보는 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은 뗄 수 없는 관계, 서로 돕는 순환관계인 것이다. 특히 바울신학은 구속사를 중심으로 신학사 속에서 이러한 신학적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우리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통해서 바울신학이 다른 신약 및 구약과 단절되어 폐쇄적으로 연구되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바울신학은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연구되어져야 한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주의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의 경우가 이러한 것을 간과한 데서 온 결과들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바울의 교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제 2장. 구원의 서정과 바울신학의 “중심”

 

바울신학의 “중심”

 

바울서신을 읽다 보면 바울의 주요 관심사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이 중심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서신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찾아야 한다.

 

1) 고전 15:3-4


이 구절은 바울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죽으심과 부활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이었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신학의 초점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의 서정을 바울신학의 핵심에서 밀어내지는 못한다. 종교개혁 전통속에서 이신칭의는 바울신학의 핵심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 의견에 반대한다. 그들은 바울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내면적인 변화와 윤리적, 영적, 신비적, 관계적인 것들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견해 속에서 바울신학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갖는 종말론적인 의미에 있다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이 견해는 건전한 것으로 인정되었는데, 이로 인해 우리는 구속사나 구원의 서정이 어떻게 신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1) 성경에 따라


고전 15:3의 ‘성경에 따라’는 성경의 성취를 뜻하는 것이기에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점에서 종말론은 교회와 관련해서는 부분적으로 현재하며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실현된 종말론은 바울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갈 1:4을 살펴보자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라는 표현은 고전 15:3의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의 성취적 관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악한 세대”는 현 세대와 올 세대의 구별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세대가 죄와 타락과 죽음으로 특징지어진 종말 이전의 질서라면, 올 세대는 의와 생명의 종말론적인 완성과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두 세대 구조는 창조로부터 완성에 이르는 모든 역사를 포괄한다. 결국 갈 1:4에서 그의 죽으심의 목적은 신자들을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끌어낸다는 뜻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진술은 바울서신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2)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전 15:3-4에서는 죄를 부활과 함께 언급한다. 이것을 17절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죄의 보편적인 부패가 없었다면 그리스도도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딤전 1:15)” 한마디로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론과 구원론은 동일한 용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죄가 비참이라면 그리스도는 해결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하려면 그가 생각하는 ‘죄’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죄의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그의 구원론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2) 죄


죄와 그 결과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광범위하게 다룬다. 여기서 죄는 일관되게 신중심적으로 이해된다. ① 죄는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에 따라 인간을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적대감이 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을 주셨다.(롬 7:12) 그러나 인간은 이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② 죄란 하나님의 법에 미치지 못한 것이거나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 즉 불법이라 할 수 있다. ③ 죄는 또한 보편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이다. ④ 또한 죄는 인간들을 노예삼고 부패시키는 세력이다. 로마서 6장-7장은 죄를 마치 통치자인 것처럼 묘사한다. 따라서 죄인은 죄에 굴종하는 노예인 것이다. 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필연적으로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능동적이고 반사적으로 대항하신다. 그리고 그 행동의 끝은 죄인의 영원한 멸망인 죽음에서 드러난다. ⑥ 죄는 온갖 종류의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모든 죄의 성격은 죄인을 비참에 처하게 한다. 우리는 이제 고전 15:3-4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라는 구절을 볼때 이러한 죄에 대하여 법정적으로 칭의하시고 재창조적으로 성화시키신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붙잡고 이해해야만 한다. 롬 4:25의 “죄를 대신하여 내어주신 바 되었으며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를 통해 우리는 칭의를 알 수 있으며, 고후 5:15의 “그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에서 성화를 발견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울신학의 중심을 이야기할 때 언급해야 할 또다른 요소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구약을 통해 이해한다. 이것은 바울이 언약신학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기 백성의 분깃이라고 표현하신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분깃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언약적인 연합과 관련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순환적인 소유가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이것은 구원의 중심적인 진리를 형성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연합은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연합의 의미를 말할때는 세 가지 범주적인 구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예정과 관계된 것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관계된 구속사적인 사건으로서 과거적인 연합과 관계된 것이며, 셋째는, 현재적인 것으로, 지금 살고 있는 나 자신의 구원과 관계된 실존적인 차원과 관계된 것이다. 이 세 연합은 서로 다른 연합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유일한 연합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시간적 차원에서 구별한 것이다.

 

예정에 대하여는 롬 16:7, 엡 1:4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구속사적 사건과 관련해서는 갈 4:4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때에 그분과 함께”있었던 것으로 묵상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가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전이시키는가?


이와 관련하여 현재적 연합이 다루어진다.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이며 깊고 친밀한 연합니다. 그러나 이 친밀함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인격적인 구별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구원론 수업시간에 예수님이 우리의 큰형님(따거)이시지만 우리와는 다른,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계신다는 설명을 생각하라.) 이와 관련하여 법적인 연합(칭의)과 신비적이고 영적인 연합(성화)을 생각할 때, 이 둘 사이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된다.(카톨릭의 경우 분리한다고 수업시간에 설명하셨음) 이것을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적 연합은 성령의 내주 때문에 영적이다. 이것이 이 연합을 신비하게 만들며 다른 종류의 연합과 혼동하지 않도록 해준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부활과 승천을 통해 완전한 성령의 내주를 이루셨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 성령은 기능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동일한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과 그리스도는 하나이시다. 그래서 엡 3:16-17에서 “여러분의 속사람에 그의 영을 가진 자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자”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이라는 표현은 성령의 인격적 행동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며 신자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 그 자체이다.


현재적인 연합은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게 될 종말론적인 완성에서 반드시 성취된다.

 

4) 연합과 칭의


이러한 연합에 대한 결론은 바울의 관계적(연합) 관심과 법정적(칭의) 관심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연합과 칭의 는 서로 구별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수행하는 기능이거나 현시, 측면들로 보는 것이 옳다.

 

5) 신앙의 역할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 것이 되도록 한다. 그러나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속한 믿음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바울신학의 새관점주의자들은 칭의를 공동체적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신앙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이다. 갈 4:20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이라는 표현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것이 칭의에 있어서 공동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따라서 둘중 하나를 없애는 것은 옳지 않다.

 

2. 바울신학의 중심과 구원의 서정

 

바울신학의 중심인 구원론에서 핵심은 칭의나 성화가 아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물론 칭의를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바울신학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앞서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분과의 연합이 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결국 바울의 구원의 서정의 본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이다.

 

1)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법정적인 요소로, 칭의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갱신적인 것으로, 성화가 있다. 이 둘은 용어상 구별되어야 한다.


성화에 대하여는 거의 논쟁거리가 없다. 그러나 칭의에 대하여는 상당히 복잡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새 관점의 결론에 의존하여 진행되고 있는 논의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칭의의 교회론적인 측면이 갈라디아서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는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다. 갈라디아서 역시 엄밀히 말해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의 경솔한 행동이 복음의 진리를 훼손했기 때문에 진정한 복음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회론적인 요소에서의 행위는 바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은 엡 2:8-9에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라고 말하면서 칭의와 관련하여 행위를 배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칭의에 대해 생각할 때 칭의교리를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사유의 근거는 롬 5장과 고전 15장에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적인 병행에 있다. 롬 5장에서 아담의 불법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조를 이룬다. 고전 15:45-49에서는 타락이전의 아담과, 부활의 담지자로서, 생명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사이의 대조가 드러난다. 특히 여기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고 있는 대표들로서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기도 하다. 첫째아담과 둘째아담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언약역사의 배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칭의론은 바로 이 큰 지평에서 비롯된다.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짓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시간성과 초인종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새관점주의자들은 칭의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관점이 아닌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롬 5:12 이하에 나와있는 반대적인 병행구조에서 죄와 의, 정죄와 칭의, 죽음과 삶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겠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의는 죄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의는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 자체로서 관계적인 개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는 죄에 대한 반립(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의 차원에서 죄와 관계적 측면을 갖는 것이다. 다음으로 칭의는 정죄에 대한 답변이다. 정죄가 법정적 선언이듯이 칭의도 법정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죽음에 반립하는 답변으로, 생명은 죽음을 멸망시킨다.


이런 생각들은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몇 가지 부가적인 언급을 하게 한다. 우선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그 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루터파와 같은 경우는 칭의를 연합 없이 전가적인 행동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연합을 칭의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전통에서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전통에서 말하는 연합과 칭의의 관계는 ‘전가’를 위한 어떤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는 뜻인가? 이에 대해 칭의의 근거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 가지 모델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과 둘째는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의라는 것과, 셋째는 연합된 자들 안에 계신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의 결과에서 비롯된 그 의와 순종이 의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 내용은 구원이 개인적이라는 이유에서 제거되어지며, 세 번째 내용은 죄용서의 기초가 성령의 사역이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에 제거되어진다. 이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전가의 개념은 첫 번째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칭의되어질 때,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으로 간주되는 것, 이것이 전가 개념의 핵심이다.

 

제3장. 구원의 서정과 종말론 Ⅰ

 

바울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며 그 핵심에는 종말론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구원의 서정은 종말론과 연결되며 이 요소가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종말론과 인간론

 

우리는 고후 4:16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바울이 이해하는 기독교적 인간론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먼저 인간을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이중인격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겉사람은 신체 그 이상의 것으로서,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측면을 함께 소유한 주체로서의 나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속사람은 내 존재의 중심에 있는 나, 겉사람을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나를 말한다. 이 속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는 겉사람 안에서만 참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시에는 육신 역시 참된 것으로 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후 4:16에 등장하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옛사람과 새사람의 구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옛사람은 벗어버려야 할 존재이므로 겉사람처럼 참된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겉사람은 죽음을 가져오는 부패에 종속된 나이며, 속사람은 삶의 갱신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나이다. 이제는 이러한 바울의 인간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바울신학의 핵심과 연결하도록 하겠다.


고후 4:16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합과 삶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재림의 기간에 걸쳐서 실현된다고 가르친다. 그 기간안에서 우리가 겉사람이라면 구원의 은덕들은 미래적인 것이며, 우리가 속사람이라면 그러한 은덕들은 이미 받은것이며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은덕들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봄으로써 은덕들에 참여하는 일은 육체의 부활에서 공개적으로 나타날 때까지 유보된다. 그런 차원에서 겉사람은 소망을 간직한다

.

이제 바울의 구원론적 인간론을 공교히 하기 위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두 가지 은덕, 칭의와 성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종말론과 성화

 

1)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부활한 사람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해한다. 이 연합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 인정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들의 미래 육체적인 부활


고전 15:20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대표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자들은 이 긍정적인 부활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파악되어진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회적 사건이 아닌 총체적이고 전반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미래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첫 열매’가 그리스도와의 연대성을 함의하고 있는 반면 골 1:18의 ‘처음 난 자’는 연대성을 가지지 않는다. 처음 난 자는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로부터’라는 말은 신자들과의 연대성을 함의한다. 따라서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는 부활하게 될 신자들과의 연대성을 유지하는 분으로서 탁월성을 표현한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일으키심을 받았고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볼 것은 신자들의 부활을 과거시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부활에 대한 바울의 패턴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일치가 언급되며, 신자의 부활은 과거의 측면으로 이미 성취된 것과, 미래적인 측면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부활이 있다. 그 중 과거의 측면에서 이미 성취된 부활은 여러 성경의 정황을 근거로 했을 때, 인격적인 변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기 때문에 행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용어


이미 일으킴을 받은 부활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활에 대해 용어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적절한 표현은 내적-외적, 비육체적-육체적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인데, 조심할 것은 영적-육체적 이라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 바울이 영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항상 성령이 동반되는 것을 뜻하는데, 그와 반대되는 ‘육체적’이라는 말이 성령을 동반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영적-육체적 이라는 구분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두 측면에 대해 ‘속사람’과 ‘겉사람’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했다. 이미 실존적으로 부활을 경험한 존재를 속사람으로, 미래에 일으킴을 받을 존재를 겉사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4) 몇몇 관련된 관찰들


부활에 있어서 주목되지 못한 몇가지 내용을 짚어보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가 일으키심을 받았다.”라고 하면서 수동적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인함이 아니라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의 수동성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에 연대성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동등하지 않고, 성령의 완전한 내주와 함께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활동하신다.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이야기하실 때는 능동적인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수동성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능동성은 서로 충돌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신자들과 연합하신 예수님의 아담적 정체성과 그의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부활을 보았기 때문에 수동적이고,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신성을 중심으로 부활을 보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 결론


바울의 부활신학에서 강조되어지는 것은 첫째는 속사람의 과거 부활은 실제적으로 미래의 육체적인 부활로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활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고, 더 근본적인 구조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바울은 교회에 어떤 권면을 하고 있을까?

 

2) 직설법과 명령법


골 3:1-4에서 그는 “위엣 것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또한 “위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두라”고 권면한다. 이 위에 속한 것은 역사와 상관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울의 직설법-명령법 패턴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을 압축하자면 직설법에서 표현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명령법에서 말하는 것을 행하라는 것이다. 바울신학에서 나타나는 직설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는 것이며, 명령법은 하나님의 율법과 관계된 것들이다. 가령, “여러분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십시오.”를 보면, 직설법의 당위성 위에 명령법의 실천을 요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직설법이 항상 우선성을 가지고 있다. 명령법은 직설법의 열매이고 직설법은 명령법을 성취하도록 자극과 유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분리해서도 안된다. 직설법 없는 명령법은 행함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되며 명령법 없는 직설법은 실천이 없는 반(反)율법주의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울의 이런 구조는 새로운 순종의 삶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설법의 하나님사역과 명령법의 인간의 순종이 각각 50%씩 작용하여 온전히 하나의 일을 이루는 것인가? 이것은 이런 신인협력적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100% 작용해서 100%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성화는 100% 하나님의 일이고, 동시에 100% 신자의 행위가 관여된다.


이런 구조는 또한 바울의 구원의 서정이라는 보다 큰 현재-미래의 종말론적인 구조에로 통합될 수 있다. 롬 6장의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면, 죽을 몸으로 불의를 위하여...”에서 볼 수 있듯이 직설법으로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는 이미 성취된 구원, 즉 현재적인 것이며, 명령법에서 나타나는 “죽을 몸으로”는 아직 계시되지 않은, 따라서 소유하지 못한 구원을 지시한다.

 

3)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반성들


종교개혁 전통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아직은 미완료인 성화에 대해 분명하게 파악했다. 그러나 완료된 성화에 대해 분명하게 파악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성화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실천적인 부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만 집중하지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한 우리의 행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성화는 구원에 대한 신자의 반응 정도로 전락한다. 성화는 신자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것처럼 인식된다. 결국 칭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성화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행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과는 다르게 성화를 언급한다. 성화는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성화도 칭의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화는 이미 확정적인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화는 그 동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 동기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며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부분이 됨으로써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제 4장. 구원의 서정과 종말론 Ⅱ

 

종말론과 칭의

 

성화에 이어서 계속해서 칭의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이 칭의가 어떻게 고후4:16에서 말하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인간론적인 구조에서 읽혀질 수 있는가? 하는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우선적인 생각들


앞서 논의한 대로 대개는 성화의 종말론적인 ‘이미’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칭의의 종말론적인 ‘이미’는 확고하다. 중세후기의 로마카톨릭과는 상반되게 종교개혁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판결이 역사속에서 이미 제기되었으며 신자들에게 선고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화에서 종말론적인 ‘이미’를 파악하고자 했듯이 칭의에서 ‘아직 아니’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것에 대해서 일견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미완료적인 칭의는 칭의에서 ‘이미’의 측면을 없애는 것과도 같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관하여 이미 확정된 확실성을 평가절하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약하게나마 미래적인 칭의는 롬 2:13, 갈 5:5, 딤후 4:8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를 더 깊이 진행하기에 앞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발견되는 종교개혁 전통의 고백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관점


이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최후 심판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물론 결과는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은덕들로 인해 ‘공개적으로’ 무죄방면이 될 것이다. 신자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무죄방면된다는 것은 곧 칭의와 관련된다. 한마디로 미래적인 칭의는 종교개혁 신앙고백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2) 미래로서의 칭의


(1) 예비적인 고려


바울의 칭의론이라고 볼 수 없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첫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주어진 칭의가 아닌 경우. 둘째, 속사람과 겉사람의 인간론의 구조가 반영되지 않는 칭의. 셋째, 구원의 ‘이미’와 ‘아직 아니’의 패턴 밖에 있는 칭의들이 있다. 한마디로 바울의 칭의론에 있어서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때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미래 칭의는 바울의 교훈과 완전히 일치하는 유익하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2) 죽으심과 부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화의 의미 뿐 아니라 칭의의 의미도 갖는다. 롬 4:25엣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칭의는 부활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순종하신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칭의되시고, 그것이 부활로 드러났으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했을 때 칭의와 부활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딤전 3:16에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으며,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이라는 구절에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는 그리스도의 공생애기간의 순종을 나타네는 바, 여기서 ‘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의롭다 하심을 입은”은 “정당함을 증명하다.” 또는 “입증”이라는 법정적인 용어를 나타내는 바, 법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칭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들의 칭의와 부활의 관계는 롬 5:18의 “생명의 칭의”에서 볼 수 있다. ‘생명’은 곧 부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칭의 자체가 부활인지, 아니면 칭의의 결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므로 죽음의 반립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죄의 삯, 즉 죄에 대한 법적인 결과이다. 죽음은 형벌이며 하나님의 법적인 반응이고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반립인 부활 역시 법정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미’ 일으키심(부활)을 받은 것처럼 그들은 이미 칭의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칭의되어야 한다. 인간론적인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죽을 운명에 처한 후패한 겉사람의 부활이 미래적이라는 것에 의해 칭의는 여전히 미래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롬 8:10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고 하면서 완료적 부활과 미완료적 부활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고후 4:16의 겉사람-속사람구조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 둘을 종합하자면 신자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들이지만, 죽을 몸 안에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편 생명의 법적인 근거로서 파악된 ‘의’는 누구의 의인가? 롬 5:18은 이 생명의 법적인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의라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칭의는 신자들 안에서 형성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칭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거나, 아니면 신자들이 칭의를 받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아직 그 미래가 불확실한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죄에서 칭의로 옮겨지는 법적인 전환은 전인적으로 이루어진다. 고후 4:16에서 말하는 ‘의롭게 된 사람’은 속사람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실현되었으나 ? 여전히 미래적’이라는 신자들의 부활의 패턴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칭의된 속사람은 그 즉시 죽음의 심판에서 해방되지만, 겉사람의 해방은 그의 부활때까지 연기되는 것이다. 육체의 부활과 관련하여서는 고전 15:53-56에 잘 나타나 있다. 육체의 부활과 관련하여 죽음을 향한 승리는 아직 현실이 아니다. 이 승리는 여전히 미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죽음을 향한 승리가 확실한 현실로 인식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첫 열매로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 겉사람이 죽음을 허용(가사성)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죄의 형벌적 결과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하면서 “흔들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비록 겉사람이 지금은 죽음을 허용하고 있지만 죽음을 향한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신자들의 육체적 죽음은 곧 속사람이 완전해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자들이 죽는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살전 4:14) 그래서 살전 4:14에서는 겉사람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포함한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롬 8:38-39) 그러므로 죽음을 포함하여 신자들의 현재적 고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확정된 겉사람의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 그럼에도 죽음은 죄의 결과이므로 죽음 자체를 낭만적으로 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죽음에서 이기는 부활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3) 양자


칭의와 마찬가지로 양자 역시 법적 선언에 의해 이루어진다. 롬 8:14-17에서 이것을 설명하는데, 양자가 되면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특히 여기에서는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을 과거형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하면서 우리 몸(겉사람)의 구속과 관련한 ‘양자됨’을 미래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칭의와 동일한 구조로, 미래에 있을 몸의 부활이 곧 신자들의 양자됨의 선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삼는 것은 법정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선언적으로 우리 몸의 부활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고후 5:7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하는 것은, 양자됨을 믿음으로 소유하지만 이루어진 것으로 소유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법정적으로는 양자가 되었지만 공개적으로 양자가 되지는 않은 것이다.


(4) 최후의 심판


롬 2:5-16과 고후 5:10을 살펴보면 신자들도 최후의 심판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심판에서는 겉사람으로서 육체가운데서 행한 것들에 대해, 즉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롬 2:5-11 사이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은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원리상 그렇고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는 것인가? 후자가 옳다면 궂이 율법대신 복음이 나타날 필요가 없다. 행위에 따른 최후의 심판은 분명 실재하기 때문에 바울은 죄의 보편성(롬 3:10-18)을 말하면서 복음의 필요성(롬 3:19 이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 2:5-11의 심판은 단순히 율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복음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 안에서 또다른 문제가 되는 것은, 롬 2:13의“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가 3:20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즉 칭의교리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행함에 따르는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이 심판은 보상의 차원인, 그러니까 영생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분명 롬 2:7-10은 악을 행하는 자는 영벌을, 선을 행하는 자는 영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함과 관련된 이 최후의 심판이, ‘이미’ 선언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근거하여 받아들인 현재적 실재로서의 ‘칭의’와 연결될 수 있는가? 이런 구조 때문에 두 가지 다른 칭의를 말한다거나, 현재적 칭의는 믿음으로, 미래적 칭의는 믿음+행위와 같은 이상한 구조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게 된 ‘이미’와 ‘아직 아니’의 구조”에서 이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행위에 따른 최후의 심판은 그들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와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최후의 심판은 현재적 칭의의 공개적인 현시(공개적으로 무죄방면된다는 사실)가 있다는 것 뿐이다.

 

(5) 부활과 최후의 심판


고후 5:10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이 최후의 심판 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이미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나타난다. 이것은 신자들이 이미 멸망당할 수 없는 완전한 부활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신자들이 심판대 앞에 “이미 공개적으로 칭의된 자들”로서 서게 될 것을 보여준다. 결국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미래적 칭의는 결국 부활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육체적 부활에서 이미 공개적으로 현시된 신자들의 칭의를 반성하고, 그것(칭의)을 입증하는 하나의 실재가 될 것이다.

 

3) 신앙과 순종


행위에 따른 심판에 관한 바울의 교훈에서 몇 가지 짚어봐야 할 것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바울이 신앙과 순종(신자들의 선행)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칭의의 근거를 자신의 행위로 두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의 반립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능력으로서 ‘선행’을 생산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롬 1:5과 16:25에 나오는 ‘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의 앞과 끝을 이루고 있는 이 말은 로마서의 핵심으로, 신자들은 복음에 대한 응답으로 ‘믿음의 순종’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신앙의 순종’이라는 말은 ‘신앙’과 ‘순종’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표현이 살전 1:3과 살후 1:11에도 나타난다. 이 두 구절은 복음이 선행을 의도한다는 뜻이다. 즉 신앙은 신자들 안에 선행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의도된 결과로서, 신자들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 창조된 선행이 바로 ‘신앙의 순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선행을 분리시킬 수 없다. ‘신앙’과 ‘선행’은 구별되는 요소이지만 독립적으로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은 신자들의 삶에서 율법-복음의 절대적인 반립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 율법은 오히려 우리와 친구가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성품과 관련된 율법 역시 우리와 친구가 되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위한 우호적인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4) 바울과 야고보


신앙과 행위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바울과 야고보서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라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바울과 야고보서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메이천은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언급할 때 그가 의미하는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둘의 모순성을 부정했다. 바울의 ‘신앙의 순종’은 약 2:18의 “행위와 분리된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네게 보여주겠다.”고 한 말씀과 온전히 일치되는 것이다. 롬 4장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이나 약 2:21-24의 아브라함은 같은 아브라함이고, 해석에 있어서도 모순되지 않는다.


바울은 보통 말하는 “오직 믿음(faith alone)”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by faith alone)”을 말했다. by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칭의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칭의의 근거는 오직 믿음이지만 그 믿음은 행함과 분리되지 않는 믿음인 것이다.

 

5) 칭의와 현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칭의를 신자들의 삶과 그 지속성에 연결시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명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5절은 신자는 칭의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이런 칭의의 지속성이 바울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롬 8:33-39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33절의 ‘송사’와 34절의 ‘정죄’는 분명 법정적인 단어로, 칭의와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칭의가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33절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면서 3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표현하면서 칭의와 그 칭의를 유지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서 정점에 도달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신자들의 칭의를 근거짓는 ‘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칭의’사역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죽음 이후에까지 칭의를 확대시킨다. 34절의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중보하심이 곧 칭의의 지속성을 보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칭의의 지속적인 상태에, 즉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계속 우리를 위하여 실패 없이 중보하시고 궁극적으로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 그가 자신을 나타내셔서 칭의된 신자들을 향하여 제기하는 고소에 대하여 답변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에 우리는 칭의의 상태로부터 영원히 떨어질 수도, 떨어지지도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