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

by dschoiword posted May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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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브라함 카이퍼의「칼빈주의 강연」


1. 들어가는 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책 '칼빈주의 강연"은 이런 글귀로 시작된다. "인간 삶의 진보보다 우리에게 더 고귀한 것은 인생을 고상하게 하는 영예이다. 그리고 여러분과 나를 위한 고상한 인생의 영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아래 들어있다. 그 영예는 우리의 공동유산이다. 인생의 중생(重生)은 헬라나 로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엄청난 변화는 베들레헴과 골고다에서 기원한다."


즉 그는 영혼을 새롭게 하며 전 삶을 갱신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을 고백하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정체성앞에 서야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고백하기를 1789년 프랑스혁명이후 두 삶의 체계가 서로 강력하게 투쟁하고 있는데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의 재료를 가지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현대주의라고 할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경외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기독교 유산'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세계관 간의 투쟁이 펼쳐지고 있는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싸움은 매우 치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유명한 롱펠로우(H.W. Longfellow)는 그의 시 '인생찬가'에서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고 하면서 "우리 속에는 심장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하였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는 그 세계관을 갖고 우상주의적 사상들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칼빈주의 강연」은 우리가 어떤 싸움을 싸워야 하며, 어떻게 거룩한 투쟁을 벌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일러주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지성을 진정으로 예리하게 할뿐만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뜨겁게 고무시키기도 하며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행동하게끔 하는 책인 것이다. 필자는 카이퍼가 본서에서 강조하는 주요점들을 책의 순서를 따라 정리하고 끄집어내어 그것을 음미해보고 서평함으로써 문화 변혁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의 근저(根底)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서 평


카이퍼는 본서에서 현대주의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삶의 체계로서 거대하게 도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당연히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한 힘을 가진 삶의 체계로서 맞서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독교 원리를 근거로 전(全) 포괄적 삶을 포괄하고 있는 체계는 칼빈주의(Calvinism)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칼빈주의의 핵심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창조, 섭리, 구속, 영화를 전적으로 지배하시는 주권일뿐만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섭리적인 주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의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그 어떤 삶과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의 영향을 비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 우주론적인 주권을 고백하고 강조하고 있기에 칼빈주의는 체계적인 이론적 틀로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엡 1:10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뜻가운데에서 우주의 그리스도이시며, 우주를 초월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영역은 그의 주권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 역시 우리의 육신의 구원을 배제한 영적인 속죄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으며, 더나아가 모든 영역을 새롭게 갱신하시는 우주적인 대속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의 언급처럼 칼빈주의는 처음에는 고유한 신학이였지만 그 후 특별한 사회질서로, 그 다음에는 정치, 사회 생활, 도덕 세계 질서의 해석, 자연과 은혜, 기독교와 세상, 교회와 국가, 궁극적으로는 예술과 과학간의 관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즉 칼빈주의는 세계관으로서 자리매김하면서 전 세계, 그리고 모든 영역으로 퍼져났던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어떤 세계관이 삶의 체계로서 일컬어지려면 궁극적인 실재, 인간의 상태, 도덕의 기초, 역사의 방향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갖고 있어야 하며 다른 말로 하면 저자의 주장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칼빈주의는 이러한 모든 면에서의 논거적 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최선을 다해 정교하게 담아내려고 하였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카이퍼의 말처럼 개신교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루터주의이지만 칼빈이 객관적이고도 우주론적인 측면에서 그의 체계를 형성한 것에 비해 루터는 주관적이고도 인간론적인 측면에서 그의 담론이 머물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주의는 전(全) 체계적인 틀을 형성하였는데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피조물위에 뛰어나 높은 엄위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이 우주적인 대속을 근거로 성령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중생자(重生者)와 교제하실뿐만아니라 모든 주권적인 영역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반면 잘못된 이교들과 제 사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도 내재하시어 전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피조물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로 말미암아 친밀한 교통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과의 차이성만을 강조한다든지, 범신론은 구별없는 내재성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해서도 이신론(理神論)같은 사상은 섭리를 부정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과의 차이와 친밀함을 모두 조화롭게 강조하는 건강하고도 균형잡힌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카이퍼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은 획일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라, 한없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성삼위 하나님께서 삼위의 다양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하나이신 속성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역시 통일성속에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창 1:27)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관계성의 조화라고 본 바르트(Karl Barth)의 주장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교와 잘못된 체계들은 역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고려하지 않은채 한쪽만 강조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 카이퍼가 언급한대로 흔히 이교(異敎)에서는 영웅숭배를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했으며 심지어 인도와 애굽같은 나라에서는 카스트(Caste)처럼 반인권적 계급체계를 야기시키기도 하였고, 로만 카톨릭역시 사제주의를 통해 철저히 계급적인 형태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카이퍼는 남자같은 여자, 여자같은 남자를 만들어 모든 차이를 평준화시키려는 현대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극단적인 획일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주의외에 다른 체계들은 역시 인간론에 있어서 그 조화로운 관점을 상실하고 있다. 특히 근대의 진보주의와 역사주의 역시 인간 이해에 있어 그 각각의 사상적 편향성들이 나타나는데 전자는 인간을 결정론적으로만 보고 있으며, 후자는 인간을 자유의지론적인 관점에서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편향된 사상들은 양측면의 어느 한쪽을 제거하거나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에컨대 계몽주의에 입각한 진보주의에서는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진보라는 미명아래 타자를 소외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역사주의에서는 인간의 비도덕성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상대주의적인 윤리관의 폐해를 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양극단의 왜곡된 결과들을 역사상 모두 보여준 사상이 막시즘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그 두가지 양면을 모두 포함하는 존재이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학자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인간을 '피조된 인격체(created person)'로 명명하면서 "피조물이라 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면서 인격체라 함은 상대적인 독립성(자율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라고 하여 인간성의 이 양면을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결정론적인 수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유의지론적인 능동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균형 잡힌 체계로서의 칼빈주의는 노예제도와 계급제도를 정죄하였을뿐아니라 여성과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노예로 삼는 죄성의 문화와 투쟁했던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의 표현처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하나님과의 면전에 연합하여 함께 서는 자세로부터 거룩한 민주주의의 개념이 발전되었고 그 터가 굳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 해석을 결정하는 세번째 원리인 세상과의 관계성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칼빈주의는 그 균형 잡힌 논지를 잃지 않는다. 예컨대 세상의 종교들이나 사상들은 이원론에 빠져 세상과 단절한다든지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언급대로 칼빈주의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특별은총으로는 구원을 이루시고, 일반은총으로는 세상의 부패를 지체시키고, 세상의 생명을 유지시키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대원리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주의는 영역 주권을 인정하여 가정, 교회, 국가 등 제 영역들이 그 나름의 독립성을 갖고 하나님의 통치앞에서의 평등성을 누리도록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편 카이퍼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면서 먼저 종교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이는 우리의 삶이 목적이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공리자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여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매우 합당하고 질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의 예로서 현대 심리 사상 등 하나님을 인식치 않고 있는 모든 인본주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행복자체를 우선 순위로 둔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들은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침해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하였다. 반면에 하나님을 제일순위로 추구하는 삶에는 참된 행복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카이퍼는 종교는 직접적인 것이지 결코 매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표방하면서 카톨릭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칼빈주의자는 감정이나 의지에만 국한된 종교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전존재가 신의식으로 젖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프랜시스 쉐퍼의 표현처럼 절망선아래로 향하여 나아갔던 칸트의 '불가지론', 실존주의의 '역설론' 등 제 사상들에 대하여 직격탄을 날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퍼는 "종교는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보며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구원론적 특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타락한 부패성을 깊이 있게 인식하지 않는 많은 사상들이 있다. 계몽주의적 진보사관이나 막시즘, 프로이드를 필두로 하는 현대 심리주의 등이 그 몇가지 예들이다. 이런 사상은 진화론적 사고에 근거하여 인간성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만 계속해서 확인시킬 뿐이다. 결국 비정상적인 우리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외에는 온전해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한편 카이퍼는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먼저 "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영적 유기체이며 참된 본질적 교회는 중생한 사람이 지체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 연합되고 그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회중에게 직접 내려온 교회권세는 회중들로부터 모아져 사역자들에게 가고, 또 사역자들을 통해서 그 권세는 형제들을 섬기는데로 쓰여진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권위는 어느 특정의 사람이나 계층이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우는 식의 교권주의적 형태의 권위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와 회중은 서로에게 아무런 통치권을 발휘할 수 없고, 교회 회의, 즉 연합을 통해서만 교회 정치가 이루어지며 강제적 획일성이 아닌 그리스도안에서의 다양성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현재 교권주의적 권위주의를 다수 보이고 있는 한국 교회는 깊이 있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카이퍼는 교회의 목적과 관련하여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존재하며 이를 위해 성도의 교제와 성례를 통하여 연합하여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 여기 카이퍼의 표현과 관련하여 "중생은 선택받은 사람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확신하게 하는데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하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는 회심(conversion)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중생과 회심을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이 카이퍼의 표현이 웨슬리(John Wesley)가 말한 두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매우 유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에 관련되어 불경건한 무율법주의를 배격한다. 카이퍼는 "그것은 칼빈주의적 진지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의 사상들은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 도덕 규례, 그리고 좀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차이를 구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동일한 세계의 주권자이시므로 칼빈주의는 그것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앞에 모든 것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주의는 실생활의 모든 영역들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의 변혁을 강조한다. 즉 죄성을 반영한 문화물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면 변혁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칼빈주의의 종교적 여세는 정치 사회에까지 그 근본개념을 형성시켰다. 카이퍼는 먼저 인류 전체는 하나의 유기적 공통체를 이루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실제로 여러 국가들이 나뉘어져 있고, 이것은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을 깨뜨린 것은 죄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카이퍼의 논지에 대하여 "과연 국가들로 나뉘어진 그 자체를 갖고 죄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물론 국가로 분열된 형태는 원래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며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개념은 악한 것이지만 국가 그 자체를 죄라고 파악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어 보인다. 또한 카이퍼는 그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모든 국가 형성, 행정관의 권력, 질서를 강제하는 모든 기계적 수단 등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행정 자체를 필요악으로 보는 듯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 카이퍼가 행정 자체를 필요악으로 보았는지에 관해서 서평자는 카이퍼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물론 정치에 대한 용어정의를 먼저 해놓고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정치를 행정의 의미로 두고 생각해 볼때에는 정치를 필요악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이전의 창조질서아래 이미 정치적인 행정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의 모든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오며, 일반적으로 관원들은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부터 방호해주는 일반 은총의 도구라고 본 것은 적합한 것이다.


또한 카이퍼는 칼빈주의의 신앙고백과 정반대의 두 가지 정치이론으로서 프랑스의 '국민주권설'과 독일의 '국가주권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국민주권설은 프랑스 혁명의 논리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고 인간 의지와 권력을 강조한다. 또한 국가 주권설은 독일의 철학적 범신론의 산물로서 끊임없이 발달하는 이 국가의 의지는 스스로의 주권을 주장하여 국가 자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상은 행동을 낳는다'는 쉐퍼의 말처럼 하나님을 떠난 극단적인 사상들은 결국 정치 영역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결과물들을 야기시킨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사회를 응집체로 파악하지 않고 각각의 독립적 특성을 존중하며 함부로 이 영역을 침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국가를 우상화하는 일체의 국가지상주의 및 독재적인 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칼빈주의의 입장으로부터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토대가 나오게 되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며 하나님안에서의 각 영역들의 주권을 존중함으로써 각 영역들은 자유롭고도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칼빈주의 사상은 결코 극단적인 상대주의 혹은 다양성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통일성속에 다양성, 다양성속에 통일성을 말한다. 그래서 카이퍼는 정부의 주권과 사회 영역속에 있는 주권사이의 협력이 헌법속에서 규례로 정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종교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칼빈주의는 국가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은 서로 병행하여 존재하며, 서로를 제한한다.. 이는 정부가 하나님께 대한 독립적인 양심과 의무로서 일들을 결정해야 하고 교회의 결정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를 향한 정부의 의무 역시 교회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역주권은 정부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해야 한다는 그릇된 개념의 중립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정부의 잘못을 언제나 묵인해야 한다는 식으로 적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특히 카이퍼가 주권적 양심의 자유를 말할때 "양심을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고 언제나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께 종속되며 된다"라고 파악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는 양심의 중요성을 양심자체에다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양심의 자유 문제를 매우 합당하게 바라본 시각이라고 하겠다.


한편 칼빈주의는 역시 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카이퍼의 말대로 칼빈주의 속에는 학문적 탐구를 위한 추진력과 자극제가 숨어있다고 하겠다. 특히 예정을 믿는 칼빈주의 신앙이 하나님의 경륜에 근거한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인식하도록 열정을 불러 일으킬뿐만아니라 일관성있는 학문체계를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카이퍼는 "칼빈주의만이 일반은총의 교리를 낮게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주도적인 원리를 방편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조명을 받아 학문적인 연구를 하도록 다시 길을 열어놓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칼빈주의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이원론을 배격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계시하신 바를 깊이있게 성찰하도록 요구한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주장은 어거스틴의 이른 바 'Spoiling Egyption'의 논지와 동일하다. -물론 어거스틴이 애굽탈출시 이스라엘이 애굽이 재물을 노획한 것에 대해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 그리고 이러한 일반은총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영역가운데 임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한 특별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다양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일반은총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제 이론과 사상들을 비평하여 잘못된 오류들을 간파할뿐만아니라 들추어내어 변혁시키는 일들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비중생자의 논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퍼는 칼빈주의와 예술과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그는 예술적인 본능이 보편적인 인간 현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칼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칼빈은 창세기에서 하프와 풍금을 발명해낸 유발에게 예술적인 본능을 부여하셨으며 보기 드문 재능들을 그 후손들에게 주셨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예술의 창작 능력은 신적 풍성의 가장 명백한 증거들이라고 진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예술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침체된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안하기 위해 주어졌고, 저주로 말미암은 인생과 본성의 부패를 예술은 대응하며, 심지어 예술이 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려 앉을때라도 이러한 유의 즐거움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매우 전향적인 주장을 역설하였다. 이른바 대중문화에 대한 칼빈의 언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칼빈주의가 문화 변혁의 일들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역량이 있음과 동시에 문화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칼빈주의는 모든 자유로운 예술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차별없이 주신 일반은총적인 은사라고 보았으며 예술의 순수성을 선언함으로써 예술 나름의 독자적인 발전이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하지만 카이퍼의 말대로 예술이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존재케 하실 때 정해놓으신 미(美)의 규례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매력도 줄수 없는 것이기에 소위 죄성의 내용물(contents)이 담겨진 것들이 문화나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과는 거리가 먼 죄악성의 부산물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일반 예술들을 누림과 동시에 비평하고 특히 죄악적인 것들은 철저히 걸러내도록 하는 일과 건전한 대안 예술들이 만들어 지도록 하는 변혁의 사명들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그의 마지막 강의 '칼빈주의와 미래'에서 미래의 요구 때문에 필연케 될 칼빈주의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면서 잠들어버린 영적 상태에서 깨어 일어나 거룩한 전투에 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세속주의적 세계관들이 계속해서 공격해오고 있으며 심지어 기독교내에서 선조들이 피를 흘리며 그렇게 고수하였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 신조까지 포기하고 세속사상으로 대치해버리는 일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에서의 승리는 어떤 기독교 사업이나 신비주의로써가 아니라 먼저 칼빈주의에 근거한 세계관을 철저하게 정립하는데에서부터 가능하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이것을 원리로 원리를 이길 수 있고, 세계관으로 세계관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현존하는 곳에서는 칼빈주의를 장려할 것과 칼빈주의에 대한 역사적 원리를 연구하여 우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발전시키고 삶의 여러 영역에 적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독교나 이교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냐, 우상이냐의 문제를 갖고 근본적인 대치상태는 계속될 것임을 언급하면서 칼빈주의 체계를 우리 삶가운데 제대로 정립하되 결국 살리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없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의 강연을 마치고 있다. 이러한 카이퍼의 통찰은 매우 타당한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 성령의 도우심만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기시켜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3. 맺는 말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것이기에 마땅히 우리의 거룩한 삶 역시 모든 영역을 향한 것이여만 한다는 것과 이땅의 세속주의적인 사상적 조류들이 계속해서 도전해오고 있는데 이런 우상주의적인 체계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성경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성경적 세계관은 바로 칼빈주의를 통해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가정,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서 비롯한 원리 즉 성경적 원리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실천적인 사명이기도 하다.


근래 시대적 사조인 작금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 비록 그것이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던 모더니즘의 교만을 지적하면서 모더니즘을 허무는데에 그것이 일조하였지만 - 그 해체주의적인 상대주의로 인해 많은 폐해를 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제 카이퍼의 강조점을 깊이 숙고하면서 초대교회의 그 사도적 케리그마(Kerygma)를 충실하게 견지하면서 세속주의적인 체계들과 투쟁해나갈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영역가운데 임하는 그 변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강력하게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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