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기 개혁운동과 설교/ 한성민

by dschoiword posted Apr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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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후기 개혁운동과 설교

 

한성민 목사

 

Ⅰ. 서론- 연구의 목적

 

세상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역사는 설교 역사의 결과이다. 설교의 권위와 능력이 나타날 때 교회는 거룩한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여 세상을 움직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교회로서의 거룩한 사명을 망각하였다. 본 학생은 이러한 역사를 중세 후기 교회사 속에서 설교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살피고 중세 후기에 나타난 개혁 인물 즉 존 위클리프, 잔 후스, 기롤라모 사보나놀라의 생애와 설교를 고찰한 후 이들의 설교와 교회 개혁이 이후에 전개될 교회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역사적 고찰을 오늘날의 목회적 현실에서 적용하도록 하겠다.

 

Ⅱ.  교회 역사 속에서 설교의 중요성

 

1. 설교란 무엇인가?

 

교회의 역사와 설교에 관하여 논하기 전에 먼저 설교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마틴 로이스 존스는 “설교의 사역이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행정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진정한 설교자다”고 함으로 설교의 중요성과 역사성에 대해서 주장했다. 또한 다간은 설교사라는 책속에서 “설교란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며 두드러진 특징이다.” 또한 “설교는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의 제도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김창운 교수는 설교란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 시대에 사는 청중들의 신앙과 삶에 연결하고,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서, 청중들의 신앙과 삶이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2. 설교와 교회의 역사

 

설교가 이처럼 기독교에 있어서 중심적이며 독특하다는 것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세상의 역사는 곧 교회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역사는 교회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다스림과 섭리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거나 도구로 사용되었다. 세상의 역사가 교회의 역사의 반영이라면,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만큼 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도 없다. 설교단에서 능력 있는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가 되어 터져 나올 때는 그 물로 말미암아 수많은 백성들이 해갈하였고, 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복음의 영향력은 온 누리에 미쳤다. 그러나 설교단이 선포할 제목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시대정신에 물들어 갈 길을 잃을 때 교회도 그 시대의 오류 속에서 미아가 되었다.

 

이점에 있어서 에드윈 다간의 설교의 역사에 대한 통찰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설교의 역사를 크게 6기로 보았다. 제1기는 고대 교부시대 제2기는 중세초기 암흑시대 제3기는 중세중기 스콜라철학시대 제4기는 과도기의 종교개혁시대 제5기는 근대초기 단독시대 제6기는 근대후기 선교시대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각 시기마다 교회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시대 속에 전할 때는 기독교는 그 시대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 하였고, 그렇지 않고 세속의 정신에 따라 적당히 전할 때는 교회의 복음의 능력은 쇄퇴하였다는 것이다.

 

3. 오늘 우리의 교회를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의 교회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의 거룩한 능력을 공급받아 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고 있는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든 성도가 과연 설교를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고 있는가?

 

한국교회 보편적인 현상 중에 하나는 설교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권위에 대한 문제, 다양한 영상매체. 개인 큐티나 성경공부, 등등이 공 예배를 통해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다. 회중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갰다는 의식도 점점 사라져 가고,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할 설교자도 성경에 입각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도다 개인적인 사상이나 신념을 전하고 있음으로 설교에 대한 기대는 점점 더 쇠퇴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는 설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가?

 

Ⅲ. 중세 시대의 설교의 타락

 

1. 고대 설교의 절정(4세기)

 

⑴사도들의 설교의 특징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대로 한 마음으로 모여 성령의 임재를 기도 속에 기다렸고 약속대로 보내주신 성령의 권능으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함으로 복음을 힘 있게 외쳤다. 그 결과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승천과 심판주로 오실 것을 선포하였다.

 

사도들의 이런 설교사역으로 교회가 믿음을 갖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사도시대 이후 속사도 시대는 철저한 박해의 시기에도 그들은 박해와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 315년 기독교가 승인 되면서 설교의 부흥이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적인 설교가로 동방교회에서는 오리겐, 클레멘트, 크리소스톰, 그레고리, 바질등이었어고, 서방교회에서는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암부로시우스, 어거스틴이었다. 이들의 설교 사역으로 바른 신앙의 정립과 정당한 예배의식이 확립되었다.

 

2. 설교의 암흑기

 

그러나 430년 어거스틴의 죽음과 함께 설교의 세계에는 어두운 황혼이 찾아왔다. 설교가 동면을 취하게 되자 세계의 역사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두운 밤을 헤매면서 무질서와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결과 종교, 도덕, 교육, 정치, 경제, 사회의 구석마다 어두움의 세력은 확장되고 역사는 암흑기의 늪 속으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을 상실해 버리고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의식이나 마리아와 같은 성인 숭배에 도취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미사의 집전 언어가 라틴어로 공통되어 있었기에 극히 제한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미사는 자연히 하나의 구경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그들의 맹목적인 헌신과 신비의 강조는 예배 자들을 지극히 피동적이고 방관자적 존재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셋째, 성직자들의 탈선을 이 암흑기의 주된 원인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도덕적 타락을 위시하여 그 자신들에게 맡겨진 말씀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행위는 실로 중요한 오점이었다. 그들은 설교자로서 너무나 무지하였기에 자신들의 수도원이나 금욕생활에서 있었던 신비한 체험이나 기사나 이적을 설교로 대신하면서 회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무리로 전락하였다.

 

끝으로 설교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할 생각이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당시의 교회의 스승으로 인정받는 인물들의 설교를 미사에서 낭독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관습은 설교를 하나의 기도문으로 후에 정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설교는 점차 예배의 중심으로부터 사라져 갔고 화려한 미사의 예전에서 질식의 비극을 당해야 했다. 이런 설교의 암흑기를 맥스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사는 순수치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하여졌다.

미사는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청취를 불가능했고...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되었으며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였다. 성경 말씀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은 성직자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기에 종교개력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

 

Ⅳ. 중세의 교회 개혁 운동의 핵심 - 설교의 변화(교회 개혁 운동가 중심으로)

 

1. 존 위클리프

 

⑴ 말씀의 빛 발하는 “개혁의 새벽별”

 

교황권의 쇠잔과 때를 같이 하여 교회, 성직, 교권의 타락이 쓸어간 14세기의 유럽 땅에 문예부흥의 바람이 불어오고 이어 성서 인문주의의 태동이 시작된다. 당시 프랑스의 영향에 의해 좌우되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비뇽과 로마를 오가며 두 사람의 교황을 낳아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면죄부, 종교재판, 성직매매 등의 치부를 공공연히 들어내었다. 정결한 기독교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도미니칸, 프란시스칸 역시 차차 기울어져 갔으며 아퀴나스 시대의 신학도 힘을 잃어 가도 있었다.

 

이때 상실된 신앙과 신학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며 뜻있는 개혁자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교리적 개혁자로써 존 위클리프, 존 후스 실제적 개혁자로서 사보나롤라, 신비적 개혁자로서 엑카르트, 토마스 아 켐피스등이 곧 그들이었다. 이들은 개혁의 발길을 교회의 행정가로서 또는 대교회의 성직자로서 내딛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사역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기에 이들의 개혁의 소원은 인간의 단순한 바람으로 시대의 뒤안길에 머물지 아니했다.

 

비록 당시대의 현장에 타 오르지 못한 불길이었을지라도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가슴에 하나의 꺼지지 아니한 불씨로써 남아있게 되었고 때가 되매 불길이 솟아오라 개혁의 성취라는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교황을 거부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성서의 권위에 어긋난 교회의 교리를 공격했으며, 대중들에게 성서를 읽도록 강권했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선포하였다. 그는 전 생애를 바쳐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논쟁, 성서에 위배된다고 여겨지는 교회제도, 즉 면죄부, 성자숭배, 순례, 연옥, 고해성사 등의 개선 요구, 화체설 반대와 같은 개혁의지 표명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설교의 행함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그는 교황의 눈에 가시로 등장하게 되었고 한 민족 속에서 외롭게 말씀을 외치다가 간 설교가요 개혁의 샛별로서 그 흔적을 남기고 갔다. 이런 그의 설교의 혼은 보헤미아의 존 후스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었고 나아가 루터의 설교와 개혁활동을 예고해 주었다.

 

⑵ 잠든 대중을 일깨우며

 

그는 1324년경 색슨 혈통의 교양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바리올 대학에서 수학하고 유능한 신학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어거스틴과 플라톤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고 학풍은 유명론보다 실재론에 가까웠다. 그는 교황의 국내 정치 간섭에 반기를 들었을 뿐 아니라 옥스퍼드에서 행한 유명한 강의“시민 지배권에 관하여”에서 교회와 교직의 영지와 재산 소유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하여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활동은 평민들과 탁발수도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대신 교황청을 비롯하여 고급 교직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토지를 소유한 수도원들의 격노를 샀다. 그의 신선한 설교와 개혁 운동은 교회가 사도시대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데 역점을 두고 시작되었으며 그 근거를 오직 성서의 권위에 두고 있어 결코 곁길로 흐름이 없었다. 그는 성서가 교황이나 어떤 종교회의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하고 더욱 정확히 성서를 해석, 설교할 것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본을 보이는 설교의 사역을 보이면서 실천적 설교가로서 살아갔다.

 

그의 설교 사역은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조직한 청빈의 설교자들을 통하여 평신도 복음 전도 사업인 롤라드 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의 개혁은 귀족과 평민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루터워드 교구로 물러난 그는 성서번역 사업에 전념, 라틴어 성경을 쉽고 힘 있고 생생한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권의 민중들에게 전해 듣던 말씀을 직접 만나는 말씀으로 만나게 해주었다. 이런 사역의 결실은 영국민들의 신앙과 경건운동, 그리고 문학 발전에 유례없는 금자탑을 쌓았다.

 

그는 1384년 병사하고 1406년 영국 의회가 반롤라드 법안을 통과시키고, 또 1417년 롤라드 운동의 지도자 올드캐슬이 화형에 처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위클리프의 영향력은 감소되어갔다. 1428년 교황 마틴 5세의 명령에 따라 그의 시신이 파헤쳐지고 불태워져 재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재는 대양을 건너 보헤미아에서 새싹으로 튼다. 존 후스에게 읽혀지고 연구된 그의 가르침은 루터로 이어지는 개혁의 계보를 형성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다.

 

위클리프의 생애는 진정 한 시대의 샛별로서 유난히도 빛난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첫째로 대학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성을 보여 학자로서의 미래를 보여 주었다. 그러기에 젊은 시절부터 영국 귀족들의 귀를 그에게 기울이게 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한 학문적 우월성은 영국 내에 학문적으로 그와 맞설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도록 하였다. 둘째로 위클리프는 역동적인 설교가로서 라틴어와 영어로서 자유롭게 회중을 움직일 수 있던 특별한 말의 도구로서 살던 생애를 소유하였다.

 

그는 교구의 성직자로서 미사의 현장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회중들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슴을 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셋째로, 일반이 갈망한 성서의 번역과 그 말씀의 선포에서 고조시킨 점에서 항상 정결한 신자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라틴어 성경은 모국어로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게 하였다. 넷째로 단순한 이론의 전개나 사변적 설교가로서 끝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예수만이 인간의 주권자시오 그 권력은 은총에서 나온다고 외친 경건한 설교자로서의 행위가 동반되었기에 그는 비로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었다. 그가 청빈의 설교자들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언행이 일치된 성직자의 삶을 강조한 그의 실천적인 행위는 그의 설교의 사역을 더욱 영향력 있게 만든 초석들이었다.

 

⑶ 답습과 혁신의 양면성 - 설교 세계

 

위클리프는 그 자신이 스콜라주의 영향권 속에 비록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이 즐기는 설교의 형태를 벗어나서 오히려 말씀마다 주석을 달아가면서 그 말씀의 뜻을 새기면서 오늘의 현장과 유사한 말씀으로 회중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주석식 설교를 즐겨 사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형식에서 벗어나 민중의 언어로 된 자유로운 설교를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복음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열렬히 강조하였다.

 

또한 설교의 고귀성을 설파함과 더불어 위클리프는 자신이 처함 시대가 설교단에서의 형식주의, 비현실주의를 추방해야 할 최적의 때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교회나 국가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예언자적 설교가 성서 본문에 근거한 민중의 언어로 그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다. 일반적으로 회중에게 지루함과 졸음으로 가득하게 했던 설교현장을 목격했던 위클리프는 그이 뛰어난 산문체의 활용으로 설교의 새로운 표현의 창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의 산문문학의 아버지라고 일컫을 만큼 독특한 표현의 형태를 개발하여 설교에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롤라드의 사회비판적 설교 및 존 후스의 개혁 설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어 - 강단의 우월성을 살린 설교자

 

성찬중심주의, 끊임없는 미사, 기도와 명상제일주의에 계속 반대해 온 위클리프는 그것의 대안으로 설교에 대한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해 나간다. 그는 복음 설교를 그만두고 명상생활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가르침 이라고 극언하고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설교하신 일과 사도들 및 제자들이게 복음을 설교할 사명을 주신 일을 상기시켜서 이 세상에서 성직자들에게 가장 좋은 생활은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와 같은 그의 설교관은 의례에만 치우쳐 왔던 예배에 말씀 선포의 귀중함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설교 강단의 우월성을 되살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논리적 설교 방식은 중세를 일관하던 기나긴 강단의 침묵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6세기에 일어난 설교 중심의 개혁을 부른 원초적 동인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사역은 단순한 복음의 외침보다는 내일의 교회가 갱신되고 거기서 하나님을 말씀 속에서 뵙고 감격해야할 찬란한 아침을 알리는 새벽별을 우리 앞에 가져다주었다.

 

2. 잔 후스

 

생애와 활동

 

후스는 1371년 남 보헤미아에서 출생화였다. 1396 프라하 대학에서 석사 학위 취득과 함께 프라하 대학교 철학부 교수가 되었다. 1400년에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면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1409년에 프라하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후스는 중세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등장한 존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의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국어인 체코어로 하는 그의 열띤 설교는 열렬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처음에는 대주교였던 츠비네크 차이익의 지지도 얻었다. 그러나 후스가 1404년 교황정치의 부패를 공격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함으로 점차로 대주교 츠비넥과 불화하게 되었고 1408년 프라하의 성직자단은 후스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그는 자격 없는 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교황이 면죄부를 팔려 하자 후스는 그에 반기를 들었다. 1412년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단이 아니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412년 10월 반대파에 의해 프라하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1414년 소집된 콘스탄스회의에 호출을 당했다. 이때에 황제 시기스먼드는 그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가 콘스탄스회의에 이른즉 교황이 그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은 벌써 결정된 바였고, 후스 자신도 이를 각오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를 정죄하고 옥에 가두고, 잔인하게 고문하며 그 다음 해인 1415년에 화형을 하였다. 이처럼 후스가 박해를 당했다는 소문이 보헤미아에 퍼지자, 온 나라 백성이 분노로 가득차고 그를 자기들 나라의 영웅으로 뿐 아니라 순교자로 숭앙하게 되었다.

 

⑵ 후스의 사상

 

14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이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업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평신도 대중의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복음적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후스는 이미 초기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수 받아 그의 청중들에게 소개 하였다. 그중에서 후스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론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교황이나 주교는 결단코 교회의 이름으로 칼을 잡을 수 없고 전쟁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세속권이나 세속적인 보화에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된다. 고 하였다.

 

3.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⑴ 서언 - 순교의 붉은 모자를 원하는 설교자

 

아모스,미가서에 의한 통렬하고도 강직한 설교들이 사보나롤라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왔을 때 당황한 교황은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추기경의 모자를 받지 않고 붉은 피로 물들인 순교자의 모자를 쓰겠노라”여기서 위대한 설교자의 출발과 순교를 각오한 개혁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진실로 천부적인 설교자였고 종교적 사회적 개혁자였다.

 

기독교 근세사의 여명의 새 장을 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중세의 긴 암흑시대가 종언을 고하던 문예부흥 운동으로부터 교회 앞에 분명히 예고되었다. 교황제도의 속화와 교회의 타락이 가져다준 심각한 개혁의 요구는 경제적 문화적 사회변화와 더불어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고 15세기에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활발한 개혁의 준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개혁을 창도하고 나섰다가 로마교회의 위력에 눌려 희생의 피를 뿌린 개혁 전의 개혁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플로렌스 출신 사보나롤라의 개혁운동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개혁의 대상은 이태리의 한 도시의 전적인 개혁운동이 설교자요 수도사 신분의 사보나롤라에 의해 착수되었던 것은 설교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 일이었다.

 

그의 예언자적인 준엄한 고발정신으로 부패한 교회의 회개를 외친 실제적 개혁자였으며 그의 관심은 온 이태리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운동은 개인의 신앙적 문제는 물론 교회와 사회문제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친 실제적 순화 였다. 그러한 까닭에 설교자로서의 사보나롤라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설교를 통한 개혁자로서의 활동과 순교자로서의 의지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⑵ 의로운 항거의 논리로 일관했던 삶

 

14세기에 들어선 후 더욱 부패하기 시작한 로마교회는 교황권마저 크게 실추된 채 속된 권세만을 확장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필연적으로 교회를 개혁해 보겠다는 소원들이 여러 가지 사상과 사조로 나타나게 되었고, 반면에 로마교회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소위 이단자에 대한 가혹한 심판을 가하는 등 갖가지 수단으로 탄압하였다. 사보나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지적인 열정과 수도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의 사상적 근거를 이룩하였으며 도미니크파 수도원 산 마르코에 들어가 세상의 사특한 것들로부터 오염되지 아니한 삶의 훈련을 쌓았다.

 

그는 통렬하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조용한 영적 교제에 자신을 헌신하는 경건생활의 모범을 보여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예언자적 사명감은 자신을 수도생활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아니하였고 플로랜스의 시민들의 경박함과 불경건, 성직자의 그릇된 생활, 대중들의 노예와 같은 무조건적 복종을 고발하게 하였다. 그의 예언자적인 설교의 시작은 플로렌스의 상황에 비추어 그 동기가 설명될 수 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는 메디치가가 지배자로 득세하게 되자 절대통치제를 구축하고 시민들의 자유를 속박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더욱 박탈되어지는 것을 망각해가며 눈앞의 쾌락에 탐닉하고 이교정신의 발생과 도덕적 파멸이라는 심각한 정신적 타락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가 강직한 예언자적 설교가 대중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자 로렌조 사후 행정관으로 추대되어 여러 방면에 걸친 개혁을 감행하였다. 그의 사회 개혁은 청소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작업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프로렌스 시민들은 가정에 있던 온갖 음탕한 것, 야비한 것, 불경건한 것 등 퇴폐적인 기구들을 광장의 장작더미 위에 모으고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불을 붙였다. 플로렌스의 부도덕과 사치 허영을 없애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 였다. 이런 종교적 개혁은 사회개혁을 선도하는데 큰 영향을 주어 플로렌스 시민들의 생활 태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고 귀족가문으로부터 각계의 지성인들이 수도원 입원을 지원해 오기도 하여 플로렌스에는 강력하고도 진정한 경건의 재생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자요 설교가로서의 길이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 고난과 죽음의 길이 되었다. 그는 혹독하게 교황을 비난 하였다. 교황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며, 성직을 매매하고, 무신론자이며 또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범하는 자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지도자인 사보나롤라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무자비한 정치가들을 선동하고 또한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백성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잡히어 나무에 달리었다.

 

⑶ 위대한 예언적 설교 - 설교세계

 

이태리의 모든 도시들이 소름끼칠 만큼 추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의 모든 것들이 돈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종들은 탐욕으로부터 울려 퍼지고 있으며 그들은 오직 돈, 빵 그리고 양초만을 소리 높이 외쳐댑니다. 그들은 모두 탐욕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

 

1485년부터 본젹적으로 시작된 사보나롤나의 설교는 이렇듯 교회의 극심한 타락을 지적하고 갱신을 요청했으며 이 모든 변화가 속히 일어나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목숨을 내건 예언자적 용기와 도전 속에 외쳐졌던 그 메시지는 비단 교회의 변화에만 머루르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지적했으며 시민들의 불경건한 습관에 대해서도 정죄하고 나선 통렬한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뜻과 그 진리를 혼탁한 사회에 외쳤던 것을 본받아 그 사회의 부정, 부패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르게 지적하고 그 백성들의 갈기를 제시하는 책임 있는 설교를 가리켜 예언적 설교라고 한다. 사보라롤라는 이러한 예언적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로 몰려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일부 사람들은 쇠창살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수만은 시민들이 한밤중부터 몰려와 교회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으며 추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중들의 집중을 한 몸에 받고 선 사보나롤라의 입에서는 깨끗한 성도, 순결한 교회를 추구하는 열망이 장엄하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집정자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외치는 그의 예언적 설교, 곧 국가와 교회는 채찍을 받야야 하고 급속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선포로서 절정에 이르었다.

 

⑷ 결어 - 중세적이면서 미래적인 선포자

 

사보나롤라가 행했던 전쟁 예언이나 통치자 비난, 그리고 공의회 설치,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교회개혁 등의 일들은 전통윤리를 깨뜨리는 급진적 개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은 한결 같이 중세적 이상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변질되어가고있는 중세적 윤리를 다시금 복구하여 신정국을 건설하는 것만이 그가 가진 사상이요 꿈이요 전체였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역은 어린 루터와 같은 다음 세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예언이 단순한 인간의 판단과 역사적 안목에서 이룩된 것이 아리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자로서의 예언 행위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어느 상황에서나 도덕적 기준과 가치 체계가 흔들리는 사회에서 인간행위의 개조를 외치는 예언적 설교는 언제인가 회개운동으로 결실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설교사역에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Ⅴ. 결론 - 교회의 역사를 움직이는 설교

 

보름스의 루터 동상 발 주위에는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의 좌상들이 놓여 있다. 이것은 루터가 이 네 사람의 선각자들의 신앙을 이어 받았다는 것과 신학적으로 그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중세 교황청의 악한 폐단과 잘못된 신앙에 대해 비판하고 교회의 갱신을 부르짖고 나섰다. 실제적 개혁자들은 문예부흥에 입각한 인문주의나 스콜라 신학의 갱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중요시 한 경건적 개혁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설교의 권위를 높이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장려했으며 교직자들의 순결성과 직무에 대한 성실성을 강조하였고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편으로 교리적 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교권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에 입각한 개신교 원리를 전개하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심창섭 교수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중에 첫 번째 이유가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이다. 그 부패와 타락은 재정적, 도덕적, 그리고 교권의 타락으로 종합할 수 있다.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근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 즉 교리적 문제와, 둘째로 생명력있는 설교의 부재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와 진리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을 때는 교회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생명력이 번성할 때는 그 안에 그 생명을 전달하는 진리의 사람이 있었다. 루터와 칼빈이 교리적 차원에서 종교개혁을 그치지 않고 사회전반에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중세의 어두움의 끝을 진리로 밝힌 설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번영과 일락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다. 그들의 순결한 삶과 설교사역으로 대중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 진리와 함께 죽어간 개혁자들과 칼빈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교회가 과연 그들의 정신을 따라 살고 있는가? 성도의 수는 줄고 있는데, 성직자의 수는 넘치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의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느끼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선포인 설교의 중요성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다. 조국의 교회의 미래에 루터와 칼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썩을 대로 썩은 로마 교회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다.

 

500여 년 전 루터와 칼빈은 어두운 세상과 홀로 싸우지 않았다. 그들 뒤에는 위클리프와, 후스와 사보나롤라가 있었다. 루터와 칼빈은 이들의 피의 정신을 물려받아 참된 진리를 외치며 살았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일 것이다. 개혁자의 정신을 따라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