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방언 정말 100% 가짜인가?/ 정병진

by dschoiword posted Jan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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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방언 정말 100% 가짜인가?


정병진 목사 (화성 업코리아 정병진 국민기자)


들어가며 


방언, 진짜 100%가짜인 것일까?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중에는 귀신방언도 있는 것일까? 경남산청의 샤론교회 담임이시자, 에스라하우스의 대표이신 노우호목사님께서 최근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작년 12월달부터는 아예 공개적으로 방언문제를 거론하고 계신다. 요지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은 100% 가짜로서, 아무 뜻도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방언 중에는 귀신방언도 있어서,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방언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모르고 방언기도를 하는 자들도 있다." 이분은 성경을 적어도 280독 이상은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1977년부터 초교파적으로 성경통독세미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성경통독세미나를 다녀가신 분들도이 적어도 5천명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는 페이스북에 방언문제를 공개적으로 공포하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페이스북에 팔로워로 가입된 목사님들만해도 5천명이 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러한 주장은 한국교회에서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는 수십 년 동안 귀신들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된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방언기도를 그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순복음교단이나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 같은 경우에는 수십 년 동안 방언을 해 왔고, 오늘날에 와서는 장로교회마저도 거의 대부분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데 큰일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방언기도는 100% 가짜라고 주장하는 노우호목사님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을 요약하면 3가지다. 첫째,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방언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고전14:2)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것은 다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에 대해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을 증거해줄만한 성경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구절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거나 오역이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 역사상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 즉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A.D.55년 이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였으니까 바울이 그것을 교정해줌으로써 그후 가짜방언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나타난 방언은 다 가짜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사 가운데 약 1,500~1,700년동안 방언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셋째, 20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등장하는 방언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욱더 방언은 믿을 수 없고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그분의 여러 편의 동영상을 보면, 그분의 주장은 확고하기만 하다. 이단소리를 들어도 괜찮고, 지구끝까지 가서라도 변론하겠다는 마음 같으시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노우후 목사님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분의 주장은 이렇다.


첫째, 성경에서 방언이 실제적으로 교회 가운데 나타났던 것은 네 가지 경우 밖에 없다. 예루살렘교회(행2장)와 고넬료가정(행10-11장). 그리고 에베소교회(행19장)와 고린도교회(고전12-14장). 그런데 이 교회들 중에서 앞의 3개 교회는 진짜 방언을 했지만, 고린도교회는 가짜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즉 앞의 3개 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서 지방언어 즉 외국어 방언를 말했지만,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난 방언은 가짜방언이었기에 바울의 교정편지를 받고 또한 디도의 방문을 통해서 방언을 그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의 의미의 방언은 외국어방언으로서 예루살렘교회, 고넬료가정, 에베소교회 뿐이었고 그 뒤로 방언의 역사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 방언의 역사가 초대교회를 끝으로 그쳐버린 것일까? 


둘째, 무엇보다도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 단수명사 '글로싸(tongue=혀)'는 오직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나오는데, 그것은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기에 그 방언은 가짜방언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에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글로싸이스=혀들)'은 방언이 아니라 외국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예루살렘교회와 고넬료가정과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방언들도 다 '방언들'이라는 복수이기에, 그 방언은 다 사람이 듣고 알아들을 있는 지방언어 즉 외국어였다고 주장한다. 정말, 사도행전과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이라는 단어는 전부 다 외국어방언을 가리키는 것일까? 


셋째, 더욱이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은 일본어성경과 더불어, 보는 이가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 오역된 부분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문장에서 오역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고전14장 2절과 고전14:14절이 분명한 오역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방언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이 오역일까? 


2.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신약성경의 원전인 헬라어성경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방언에 대한 경험이 없으신 분 그리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이 따위 방언을 왜 하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노우호 목사님께서 전하는 영상만을 계속해서 지켜보면, 십중팔구는 방언을 그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확고하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분이 주장이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 살펴보고 바른 방언관을 갖기를 바란다. 


첫째, 정말 방언의 역사가 초대교회를 끝으로 그쳐버린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방언의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13:8).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성경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둘째는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성경적인 고찰부터 해 보자. 


무엇보다도 사도바울은 방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자,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보라. 


[고전13:8-12]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8을 보면, 사도바울은 예언들도 폐할 날이 있을 것이고 방언들과 지식들도 폐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1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날이다. 그때는 바로 주님의 재림의 때이다. 혹 지금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방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고, 예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방언에 대해 역사적인 고찰을 해 보자.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A.D.55년 이후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쳤다고 주장하시는데, 그 명확한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방언으로 기도 안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A.D.55년경 고린도에 와서 기록한 로마서를 보면, 거기에는 방언의 은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헛소리 방언은 고린도교회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언급을 안 했다고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로마서 12장을 보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은사들 대부분이 빠져 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들, 능력들 행함들, 영들 분별함들, 방언들, 방언들 통역함이 빠져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9가지 은사들 중에서 오직 예언의 은사만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이런 은사들을 거기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한 은사는 다 중지되었고 없어진 것인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역사상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아 그것을 숨긴채 개인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없는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때가 있지 않았는가? 한 때 장로교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교회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혼자서 방언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그러니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방언이 없었다고 단정하거나 방언이 그쳐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처럼 말세에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줄 터인데, 그때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성령의 은사들을 부어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말세지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더욱 더 방언의 은사를 강하게 많이 부어주신 것은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탄진영에서 거짓방언을 들고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진짜 방언의 은사를 더 많이 부어주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글로싸이스=혀들)이라는 단어는 전부다 외국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데 그게 정말 맞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방언이 단수(글로싸)로 쓰이거나 복수(글로싸이스)로 쓰인 것은 그 방언을 말하는 주체가 단수일 때에는 단수로 쓰였고, 복수일 때에는 복수로 쓰인 것인 것뿐이다. 방언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온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외국어라고 결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글로싸)이라는 단어의 뜻은 그냥 '혀'라는 뜻으로서, 혀가 행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방언(글로싸)가 꼭 어떤 언어이어야 할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혀로 말하는 것이면 된다. 물론 천국에 가면 그것도 일종의 언어로서 작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방언들(글로싸이스)'는 단어는 전부 외국어들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오히려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거지를 쓰려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오후 목사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에 나타난 방언들과 고넬료가정과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방언들이 전부 복수로 쓰였기에, 그것이 전부 외국어 방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주어가 복수였기 때문에 방언들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 뿐이다. 어찌 그것을 가지고 방언들이 전부 외국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 성경에 나온 용례를 살펴보자.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외국어방언을 포함하고 있는 방언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15개 국가의 외국어 방언이 그날 함께 터졌기 때문이다(행2:5~11). 그래서인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때 터진 방언을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글로싸(GLOSSA)'의 복수형(글로싸이스)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냥 언어나 말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즉 '디아레크토(DIALEKTW=speech)'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에 성령께서 표적으로 주신 방언의 은사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방언도 같이 터져나왔거나, 아니면 전부 외국어로 된 방언이 터져 나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행11장에 나오는 고넬료가정에 모인 사람들이 행한 방언이나 19장의 에베소교회가 행한 방언 그리고 고전12,13,14장에 나오는 방언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디아레크토'라는 단어가 쓰인 적이 없다. 여기를 보면, 전부 다 '글로싸(=tongue, 혀)'로써 단수 형태이든지 혹은 '글로싸이스(=tongues, 혀들)'의 복수형태로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예루살렘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에서는 전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여기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은사나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등장하는 본문을 살펴보자.


<예루살렘교회의 방언>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글로싸'의 복수형, tongues)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디아레크토', speech)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디아레크토)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글로싸'의 복수형)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고넬료집안사람들의 방언> 


[행10:46] 이는(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고넬료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가리킨다(행11:24)  

<에베소교회의 방언>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하고 (그들이) 예언도 하니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12명의 에베소성도들을 가리킨다(행19:7)


<고린도교회의 방언>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글로싸'의 복수형)과 천사의 말( '글로싸'의 복수형)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4:2]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4]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원문은 '방언' 안에서, 단수구문)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글로싸, 단수)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만약, 여기서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복수형태의 방언(글로싸이스)이라는 단어를 전부 '외국어들'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번역해보자.  얼마나 우스운 번역이 되는지 몇 가지 예만 보자


[고전14:22] 그러므로 외국어들('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 문장을 보라. 외국어들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무조건 성령의 표적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 세상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아도 외국어 2개 3개쯤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외국어들을 말하면, 그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또 한 문장을 보자. 
[고전14:5]나는 너희가 다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지금, 고전13장과 14장은 고전12장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예언과 방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장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외국어를 말하기를 원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가서 외국어들을 공부하라는 말인가? 지금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 있다(고전14:6). 여기에 어디 외국어가 끼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부분도 다만 주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바울은 '글로싸'의 복수형태인 방언들(글로싸이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우리말 성경본문이 오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진정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글성경에 다소 미흡한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번역하고 있다. 오히려 노우호목사님께서 새롭게 번역하는 성경본문이 더 성경의 뜻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노우호 목사님께서 오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여기고 있는 2군데의 성경구절을 살펴보자. 고전14:2의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의 번역은 이렇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고전 14:2은 부정적인 본문으로 번역해야 했어야 했는데 그만 번역하는 사람들이 긍정문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방언에 대한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역접접속사(그러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야 번역해야 할 본문에 그것을 빼버려서 오역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우선 노우호 목사님께서 당신이 바르게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고전14:2을 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 
 

노우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은 원어로 이렇게 직역하면서, 문제는 개역개정한글성경에 나오는 "하나니"가 오역이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니"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한다고 하지만"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럼 노우호목사님의 해설을 따라서 다시 직역해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다.


아니다. 직역은 그런대로 잘 하셨지만, 이것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케 만들고 속이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역접접속사인 '한다고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거기에 넣어서 번역해서는 아니 된다. 사실 고전14:2의 본문은 세 문장이 합해진 문장이다. 꼼마가 어디에 찍혀있는지는 잘 보라. 자, 고전14:2의 원문을 그대로 직역해 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혹은 오직)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역접접속사(헬라어 '데')는 두 번 째 문장에 들어있지 않다. 맨 나중 문장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말은 부정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노우호 목사님은 일부러 이 문장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역접접속사를 중간으로 끌어다가 사용하여, 부정적인 문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이라고 말이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을 뿐더라 틀리게 해석해도 아니된다. 어떻게 맨 나중문장에 나오는 역접접속사를 중간문장에 끼워 넣어서 오역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고전14:14도 오역이라고 주장한다. 노우호 목사님은 고전14:14은 가정법의 문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가정이므로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것이다.


위의 문장을 직역한다면 이렇다. 


[고전14:14] 왜냐하면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정법에도 실현가능한 가정법이 있고 실현 불가능한 가정법이 있다. 특별히 실현 불가능한 가정법의 문장은 가정법 과거이면서, 가정법을 달고 오는 접속사가가 "에이(ei)"라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본문은 둘 다 아니다.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구문이다.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의 문장으로서,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도 에안(EA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님께서는 이 문장이 부정문이라고 하신다. 아니다. 이 문장은 가정법 현재 긍정문이지 부정문이 아니다. 그리고 가정법 현재 문장은 어떤 동작이 계속되거나 반복되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다시 말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영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님은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의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가정법 과거의 에이(EI) 부정구문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우를 범하고 있다.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대로,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십분 양보해보자. 그러면, 아래의 가정법 현재의 문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접속사 '에안'이 이끄는 가정법 현재 문장으로서, 고전14:14과 같은 종류의 문장). 


이것을 부정문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다. 사람의 손은 언제든지 범죄할 수 있다. 긍정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범죄하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14:14을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써,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전14:14은 바울이 방언(글로싸)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영이 계속해서도 기도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그러한 방언기도는 마음(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성)의 열매를 맺을 수 는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해서 방언이 진짜 공허한 헛소리라고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사도바울은 방언이 비록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성령의 신령한 은사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방언의 은사를 혹 소리값만 가지고 따진다면 아무 의미없는 공허한 소리일지는 몰라도, 사도바울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신령한 은사임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9가지를 쭉 말하고 있다(고전12:8~10). 그중에 바울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시작으로 하여 예언, 영들 분별함들, 방언들, 방언들의 통역 그리고 예언 등의 은사들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고전12:10). 그런데 바울은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은사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곧 방언과 예언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만큼은 고전13장과 14장, 두 장에 걸쳐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문제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웠었던 것 같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금방 다른 은사들과 구별할 수 있고, 화려하게 보이며, 뭔가 있어 보였기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방언하는 일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교회 구성원의 축에도 못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신령하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방언을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갓 들어온 초신자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이 모여서 방언으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는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등지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전14:24).그것도 공예배 시간에 그렇게 방언으로 떠들어댔으니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신령한(영적인) 은사임에 틀림없지만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기에,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할 경우에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도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사실 당시 공적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에 그들은 '찬송시'를 사용했으며,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쳤고, 또 어떤 사람은 계시를 말했으며, 또 어떤 이는 방언을 했고 또한 통역도 했던 것이다(고전14:26). 그러나 예배시간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난무했고, 질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을 하지 않으려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오직 하나님에게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예배시에 굳이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통역을 세울 것이며, 그것도 무작정 누구든지 방언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차례를 정해서 2명이나 많으면 3명이 하고 곧바로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던 것이다(고전14:27~28).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며(고전12:10,28,30), 신령한(영적인) 것이며(고전14:1), 아주 특이하면서도 특별한 은사라는 점이다(고전13:1~2,14:1~5). 특히 방언의 은사는 일종의 혀로 말하는 소리(글로싸=혀)이지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없다. 하지만 방언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일종이라는 것이다(고전14:2, 14). 


그런데 노우호 목사님은 방언이 100%가짜라고 하신다.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조차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딱 2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송하는 것도 있고, 마음(이성)으로 기도하고 마음(이성)으로 에 찬송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고전14:14~15).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곧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인 것이 맞다(고전14:14). 분명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한 종류인 것이다(고전14:14). 


나오며 


그렇다. 무턱대고 남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검증도 안해보고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특히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분이 이약기했으니 맞겠지." 하면서 무조건 따라가서도 아니 될 것이다. 분명한 성경적인 입장에 서서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검증해보고 따라가라. 물론 성령의 은사들은 초자연적인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적인 잣대로 정확히 분별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신구약 66권의 성경이 있지 않은가? 기도하면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은가?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방언의 은사, 분명 성령이 주는 은사임에 틀림없다(고전12:10).  물론 신사도나 빈야드 운동하는 데에서는 거짓방언을 하면서도 그것이 진짜 성령이 주는 방언이라고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이 주는 은사가 분명 있긴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신령한 9가지 은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은사 2개를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라고 했다(고전14:1-5).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헛소리로 함부로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방언의 은사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기도다(고전14:14).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인 것이다(고전14:2). 자신의 영의 기도인 것이다. 그러니 방언은 헛소리라고 말하지 말라.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에는 딱 두 가지만 있다. 하나는 기도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하는 일에, 방언기도가 있고 방언찬양이 있다고 했다(고전14:14~15). 방언기도, 이는 무의미한 소리가 아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가짜방언 혹은 귀신방언이 아닌, 성령께서 주시는 진짜방언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통회자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받게 되는 것 같다. 초대교회의 경우를 보라. 조용히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가짜방언을 받았을 것이다. 회개도 아니하고 대충 누구에게 안수받아서 방언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것은 진짜 방언이 아닐 수 있다. 사탄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귀신을 집어 넣는다. 검증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머리 디밀지 말라. 귀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의 은사를 맹신하지도 말라.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고전14:4~5). 즉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방언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라(고전14:14-15). 그리고 방언을  한다고 해서 꼭 천국가는 것도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다가 죽기전에 대속의 회개를 드려야 천국에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방언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언이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서, 딱 3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책망하는 것이요(고전14:24~25,31) 또 하나는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며(고전14:3),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고전14:31). 정 공중예배 가운데 방언을 말하고 싶으면, 방언통역을 세워서 방언하라(고전14:13,27).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대로 방언을 통역해줄 사람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 분명이 있기는 있지만 그것을 통역해주는 사람이 드무니 참 안타깝기만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사실 방언중에는 가짜방언은 있기는 있다. 하지만 많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속이는 가짜통역이 수두룩할 뿐이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짜통역에 속아 살아왔던가? 다미선교회 같은 사람들의 가짜방언통역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는가?


그렇다고 해서 방언하는 것을 그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방언은 분명 자기를 세워주기에 유익하다고 했다(고전14:4,28). 특히 자기의 영을 강하게 해 준다(고전14:2,14).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이 강해져야 한다. 방언기도란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청원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라. 혼자 있을 때에는 정말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라.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기도를 더 많이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고전14:18). 그러니 혼자 기도할 때에는 방언기도에도 신경을 쓰라. 물론 어떤 사람은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전12:30). 하지만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라. 교회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마음(이성)으로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하겠지만 혼자서 기도할 때에는 꼭 방언기도를 사용하라. 


왜 방언기도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한지 아는가? 그것이 결국 기도의 불을 꺼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가 죽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 없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촛대가 옮겨지게 될 것이다. 만약 방언기도를 하지 않고 그냥 우리말로 기도해보라. 그러면 몇 시간이나 기도할 수 있겠는가? 아마 얼마 못가서 기도가 안 나올 것이다. 그러다보면 점차 더 기도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기도를 쉬게 될 것이다. 기도의 불이 꺼져버리는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미리 알고 방언기도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도의 불을 끄려고 말이다. 기도의 불이 꺼지게 되면 이 한국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사탄은 방언기도를 쉬게 하므로 기도의 불을 꺼트려 성령의 사역을 중지시키려는 간교한 속임수를 가지고 있다. 기도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면 촛대가 우리 한국교회에서 옮겨질 것이 뻔하다. 기도하라. 마음(이성)으로 기도하든지 방언으로 기도하든지 기도하는 것을 쉬어서는 아니 된다.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하려면 마음(이성)으로 드리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방언기도가 가짜라느니, 방언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느니, 방언은 헛소리라느니, 방언이 귀신소리라느니 주장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기도를 쉬게 하는 사탄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가짜방언은 분별해내면 되지 않겠는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대로 기도하기를 힘쓰라. 


나라와 민족과 교회, 목회자와 가정을 위해 기도해 보았는가? 이 나라와 민족과 한국교회가 위험하다. 그리고 우리말로 기도가 끝나면 이제는 자신의 영을 위해 방언을 사용하여 기도하라. 오늘날에 대여섯시간 혹은 하루종일 기도한다는 사람은 대부분 기도분량의 80%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언기도, 주님이 오시게 되면 더 이상 그러한 기도를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게 되면 더 이상 방언통역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냥 무슨 말을 말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언어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따로 배울려도 하지 말라. 가보면 다 된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우리는 마음(이성)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해야 한다. 언젠가는 방언기도도 그치고 예언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 쉬지 말고 기도하자. 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페이스북에서 옮김



페이스북에 실린 방언에 대한 또 다른 견해


현대는 해석학(hermeneutics)의 시대이다. 거의 모든 학문에 기본적으로 해석학이 따라 붙는다


 그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학문의 실체(대문자,REALITY)를 잘 모른다고 하는 확실한 반증이다. 당대의 석학 사도 바울은 주옥같은 사랑장의 말미에서 갑자기 아주 인간적인 진솔한 고백을 토로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고 하였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6014)

 

가령 어떤 두 사람이 '개'(dog)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각자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개에 대해 경험한 바의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한 사람은 어렸을 때 자기 집에서 재롱을 부리던 깜찍하게 귀엽고 사랑스런 애완용 개를 떠올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언젠가 물릴 뻔해서 놀랐던 그 무서운 불독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dog)이라는 말은 사랑스러움, 좋은 친구, 공포, 고통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을 공부하거나 전도를 할 때도 역시 같은 현상이 일어남을 본다. 성경공부반에서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등 제각각이다.

 

성경의 기록자이신 성령 하나님은 이유 없이 괜히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거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남의 적당한 자료나 주워 모아 자기 것처럼 짜깁기하거나 사람들을 현혹시키려고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삼류 소설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의 메시지는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나 자각에 상관없이 구속사 완성을 향한 분명한 절대 리얼리티(대문자REALITY)를 가지고 있다. 수신자 (관찰자)의 인지도는 보통 각자의 작은 렌즈(소문자reality), 즉 삶의 배경, 관심도, 개성, 학력, 문화, 경험, 세계관 등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어설픈 우리의 삶의 배경, 문화, 지식, 세계관으로 전지전능한 하나님 말씀의 실체를 다 깨닫고 경험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말씀의 원형(REALITY)을 접근하고자 할 때 방해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다. 하나님 말씀에 반항적인 의지, 악을 지향하는 거룩하지 못한 동기, 무질서, 불신, 혼란 등등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의 바른 진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 37년 간의 노우호 목사의 연구는 그 어느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위대하고 귀한 일이다.  나는 매주 성경을 한 장씩 첫 절부터 끝 절까지 주석 설교를 하다 고린도전서 13장 14장을 이르러서 우리 말 성경의 “방언“이라는 용어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John MacArthur, http://www.gty.org/)

 

성경에서 방언의 은사는 문자그대로 언어의 은사이지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당시 공용어라 할 수 있었던 헬라어나 로마어등을 제외한 약 4000여 다른 방언을 가진 미전도 종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를 받아 그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Language School이든 유학이든 선교지의 종족 언어를 공부하여 선교지로 떠나게 되지만 신약 계시(cannon)가 완성되기 이전인 사도바울 당시에는 성령이 필요에 따라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직접 주셔서 공동체에서나 필드에서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다. ( 고전14:18,26,39)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혼란을 야기했던 것은 ”통역을 세우면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방언(Languages)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고 통역도 안되는 Babbling 방언, 즉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기도현상으로 하나님과 기도자만이 직통한다는 아주 신비한 Babbling 방언기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를 하지 말고 본받지 말라” 경계하셨던 이방 기도의 행태가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참 방언(Languages)의 진리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주일학교 부장을 할 때 주일학교가 너무 부흥하여 교육관이 비좁아 당회의 허락을 받아 교회 본당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다.


어느 주일 주일학교가 마친 후 교사 중에 한 믿음 좋다는 한 신학생 여 선생님이 장년 예배 시작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교회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 큰 소리로 Babbling 방언 기도를 하였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다가가 “선생님 좀 자중하세요. 곧 예배가 시작됩니다.” 했더니 이 선생님은 버럭 화를 내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떠나버렸다. 고린도 14장을 공부하면서 과거의 이런 상황을 떠올린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Babbling 방언 기도는 어떠한가?


특히 불교의 문화권에 있는 한국 교회는 타종교의 영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식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저들은 기도라는 말보다는 "진언(眞言), 주문(呪文), 신주(神呪), 밀언(密言)...“등으로 불리운다. 의미가 있지만 그 뜻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냥 염송(염불, 특정 단어를 반복)할 경우 그 소리의 신비한 파장이 있다고 믿는다.


그 파장, 즉 에너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 그것이 주력, 뛰어난 위신력이 있어 자성불이 되어 신비하고 영적인 공덕, 능력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간추려 말한다면 현실의 액란을 소멸하고 수행 중의 장애를 극복하며 마음을 잘 조복하고 계율을 능히 지키며 불법을 잘 받들어 우주정신과 합일, 무장무애, 신심견고, 구경열반, 해탈의 경지인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원래 “주문”이란 주술적인 힘을 가진 글귀를 이르는 말로 불교 외에도 각 종교마다 특정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주문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진언은 근본적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술적 주문과는 격을 달리하여 명주(明呪)라고 명명한다. 자주 드라마 같은데서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면 초등생도 다 알고 흉내를 낸다. 


예컨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염불),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요술주문)인데, 방언역시 알아 들을수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기에 같은 부류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18:11)


복술자, 무당, 신접자, 초혼자 등 주술적인 직업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14장 설교를 준비하면서 방언을 하던 우리 전도사에게 방언을 한 번 해보라고 하였다. (https://www.facebook.com/notes/paul-chung/%EB%B0%A9%EC%96%B8languages-not-babbling%EC%9D%98-%EC%A7%84%EB%A6%AC%EB%A5%BC-%EC%99%9C%EA%B3%A1%ED%95%98%EC%A7%80%EB%A7%90%EB%9D%BC/10204629112941623?pnref=story)

마침 토요일이었고 자전거 타이어를 고치는 중이었다. 주절주절 숨도 안쉬고 자랑스럽게 잘했다. 그 다은 주일 날 강단에서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설명하기위해 “ Micle전도사, 어제 했던 Babbling다시 해봐라.”고 하였다. 똑같은 소리로 방언의 은사라며 주절거렸다. 아마 오래전부터 카리스마틱 교회에서 학습한 방언이었다.

 

방언을 학습하는 자들도 이방종교인들과 비슷한 행태가 엿보인다.


“방언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고 다 쫒아내라. 그리고 100번 할렐루야를 시작하라.”


어떤 분의 간증에, “100번도 하기 전에 육체는 이 땅에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땅이 아닌 구름위를 날아가고 있고 광병한 빛이 저를 감싸고 잇으며 주변에서 소리들리는 것이 한 박자 늦게 들리고 하울링이나 소리가 늘어지게 들리는 현상을 경험해습니다... 그러고 일어나서 주변을 걷는데... 바닥을 걷는 느낌이 아닌 구름위를 걷는 느낌이고 뭔가 새로운 촉감과 황홀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황홀경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것으로 보입니다... 이 광명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내면으로 볼수 잇다는 것이 엄청 신기햇지요... 그리고 이 현상은 1시간 정도 계속 이어지고 끝나갈 무렵... 온몸에서 주최할수 없는 진동과 온몸에 꿈틀거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쿤달리니 현상을 말하는데요... 이때 이상한 말을 하거나 계속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계속 웃었습니다.... 아마도 토론토 블레싱도 이 비슷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정리하면 마음을 비우고, 할렐루야 100번하고, 황홀경에 들어가고, 황홀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이 1시간 정도 지속되고, 그러면서 온몸이 떨리고, 계속 웃음나오고. 황홀경이 끝이 나면서 온몸이 춥고 떨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방언 학습도 안했는데 어느 날 기도 하는 가운데 이상한Babbling이 튀어 나온 경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경우도 역시 이미 그 마음과 영 속에 동기가 Babbling이 어떤 형태로든 자리 잡을 수 있는 동기 유발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의 해석에는 두 관점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방언의 참 진리를 찾아가는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끝없는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선택은 분명하게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