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내려가사/ 구모영

by dschoiword posted Jun 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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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降下)의 교리를 설명함(2.16.8-12)/ 구모영

 (1) “지옥에 내려 가사”(2.16.8) 종래와 달리 지금 우리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에는 “지옥 강하”라는 말이 없지만, 칼빈은 이 말을 빠트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고대의 사도신경의 어귀에도 이 말이 종종 빠지곤 하지만,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만 해석이 서로 달랐을 뿐이라 칼빈은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지옥 강하라는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된다고 본다. 혹자는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죽으셨다”는 의미의 반복에 불과하여 이 용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칼빈의 생각은 달랐다. 칼빈은 용어 자체가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것을 모호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교부들이 가장 간결하고 요약된 사도신경에 이 말을 굳이 사용한 것은 이 문구가 쓸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이 말을 제거하는 것은 반대한다.

(2) 그리스도는 지하 세계에 가셨는가(2.16.9)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까지 강하하신 것은, 그가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 맛보았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말씀과 관련하여, 칼빈은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인정하는 것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영혼들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하는 반면에, 악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3) “지옥 강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2.16.10). 칼빈은 사도 신경에 이 말이 빠져야 하는가의 문제와 별도로,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대해서 더욱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진노로 온전한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사 53:1-5). 그리스도는 악인들을 대신해서 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모든 벌을 받으셨지만, 하나의 예외가 바로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 가셨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상한 것이 없다는 것이 칼빈의 지적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사도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즉,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4) 성경 귀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2.16.11)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고 살아나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고 하였다. 이 말 속에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단순한 죽음만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에 붙잡히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 칼빈은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오는 고통이며 죽음의 원천이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무 두려움 없이 나서서 장난같이 죽음을 당하게 되셨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겠는가라고 칼빈은 반문한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 무서움과 괴로움을 당하신 것이며, 그가 신성을 지녔지만 십자가 지심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한없는 고통과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 잘 못된 설명이다. 어쩌면 주님의 사역은 힘드셨으며, 머리 둘 곳도 없이 다니셨기 때문에 더 피곤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고물을 베게로 하여 깊은 잠에 빠지신 것도 주님이셨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셨고, 이 문제를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과 같이 되신 것 아니겠는가? 또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마 27:46; 시 22:1) 절규하지 않으셨는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엄격한 벌을 받아,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아 고통을 받으셨으며(사 53:5), 노하시며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징을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체험하셨다.

(5) 오해와 오류에 대해서 이 교리를 옹호함(2.16.12) 칼빈의 비판자들은, 칼빈의 위와 같은 생각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훼방꾼이라든지, 하나님의 아들에게 믿음과 반대되는 절망을 돌린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서 기자들이 공공연하게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대해서 그들이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악한 짓이라고 한다. 주님이 죽으실 때가 가깝기 전에 “심령이 민망(불안)”하여(요 13:21) 슬퍼하셨고, 그 때가 다가오자 무서워 심히 떨기 시작하셨다(마 26:37). 결코 그리스도가 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다.

칼빈의 비판자들은 칼빈의 위와 같은 생각에 대하여 본질상 악한 일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비열한 짓이라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폭력이나 필연성의 강요를 받아서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굴복할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받으신 모든 고난은 조금도 그의 권능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칼빈은 비판에 응수한다.

그리고 또한 비판자들은 그리스도는 저주와 진노에 대하여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가 안전할 줄로 아셨다고 말하였는데, 칼빈이 이러한 말에 대하여 경건한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보다 더 씩씩하지 못하며 겁이 많으신 것이 그에게 얼마나 명예가 되었겠나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그가 이러한 두려움과 고통을 시늉으로 했다면 얼굴에 핏방울이 흘렀겠는가?(눅 22:14). 아버지에게 신음으로 호소하는 그에게 천사가 내려와 위로를 왜 했겠는가?(눈 22:43). 믿을 수 없는 비통함에 울부짖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세 번 반복을 하셨겠는가?(마 26:39).

그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가 얼마나 가련하고 무서운 고민을 하셨는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신적(神的) 능력이 일시 숨어 있고 육의 연약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통과 두려움에서 온 그 시력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역설, “그는 죽음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고 한 말이 실현된 것이다(행 2:24). 따라서 칼빈은 이상의 논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짐을 대신 지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버림 때문에 고통과 두려움을 시늉이 아닌 그 몸으로 직접 체험하신 것을 더욱 분명히 밝혀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경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