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신학과 세대주의/ 릴백

by dschoiword posted Apr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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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양무리 마을'에서 옮김(20091122일). 정암신학 강의 내용. 세대주의 신학개혁신학의 차이를 잘 설명함.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세대주의 신학으로 해석하는 현실에서 숙독 가치 있는 글


  칼빈의 언약사상’ 이해

칼빈의 언약적 성경해석과 언약신학으로부터 추론된 세대주의 비평


 피터 A. 릴백(웨스트민터신학대학원 총장)


요한 칼빈의 탄생 500 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우리는 개신교 종교개혁과 개혁 신학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 제네바 개혁자의 업적을 되새긴다. 이것은 특히 언약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언약에 관한 칼빈의 독특한 접근방법은,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성경의 기록들을 해석하고 그들의 조화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언약에 관한 견해 안에서, 크리스천의 생활과 성례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전개하는 한 체계를 발견한다. 우리는 칼빈의 언약신학과 언약적 성경해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복음적 신학중 하나인 세대주의를 구체적인 배경으로 하여 칼빈과 언약을 숙고해보자. 비록 그의 시대에는 세대주의가 아직 공식화 되지 않았기에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학체계였지만, 칼빈의 언약적 사상은 세대주의와 대조되는 입장이며 더욱이 그것의 주된 견해에 대한 적절한 비평을 시사한다.

 

강의 1

 

칼빈의 언약적 성경해석과 언약신학으로부터 추론된 세대주의 비평

   

     첫 강의에서는, 다음의 여덟 가지의 요점을 고찰할 것이다:

 

     1.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차이점들

     2.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대조되는 역사적 근원

     3. 언약의 공식에서 발견되는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칼빈의 강조점

     4. 성경 해석을 위한 칼빈의 언약적 경구: 언약은 본질에서 언제나 동일하지만, 경륜에서는 그것이 구별된다.

     5. 그리스도가 성경의 핵심이신 한편, 언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에도 유기적으로 존재함: 언약은 구원 역사의 DNA 이다.

     7. 경계에 관한 논쟁: 구약의 땅에 대한 약속에 관한 언약적 해석과 세대주의적 해석

     8.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오로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임했으나 앞으로 올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면 위에 열거된 여덟 개의 요점 가운데 가장 처음 것을 언급하며 시작하자.

 

 

1.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차이점들

 

무엇이 세대주의를 세대주의로 만들고 또한 무엇이 언약신학을 언약신학으로 만드는가?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 해석에 관한 두 가지 접근 방법의 차이점이 그리 중요한가? 여하간 세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예수를 믿는다. 그리고 언약신학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 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누가 크리스천이며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아니다. 이 논쟁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세대주의를 세대주의로 만드는가? 찰스 라이리박사(Dr. Charles Ryrie)오늘날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Today)라는 책에 서 세대주의의 필수요건(sin qua non)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이라고 언급 하였다. 그런 까닭에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이 없이는 세대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둘이라는 것이 세대주의의 중추적 사상이다.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교회라고 불리는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백성은 전적으로 다르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게 주려고 가져왔으나 그들이 그를 거부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한쪽에 제쳐 놓임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전혀 다른 세대, 즉 교회 시대를 개시하셨다. 이 시대는 일종의 중대한 삽입(great parenthesis)’이다. 교회의 세대는 이스라엘과 율법의 구약 세대 후에 나타난 은혜의 시대이다.

 

그러면 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점에서 교회는 7 년 환란 전에 이 세상 밖으로 휴거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의 계획으로 되돌아가신다. 그 계획은 타락한 왕국을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끌어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치는 구약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과 교회의 휴거 후 회복된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사역 사이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세대주의의 천국은 미래적, 즉 전 천년왕국(the premillennial kingdom)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것이 이스라엘에 의하여 거부당했기 때문에, 그 대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가 들림을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이 임할 것이다. 따라서 세대주의의 입장에는 미래에 성취될 이 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것과 같은 문자적 천년왕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세대주의의 근본 개념은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은 둘이다. (2) 교회와 이스라엘은 구분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의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미래적이다. 언약신학은 이 세 가지 논점에 대하여 전혀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언약신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우선 첫째로,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은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하나의 백성은 내적으로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던 백성과 그가 이미 오셨으며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뒤돌아보는 백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는 유일하고 동일한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다. 이와 같이 교회나 구약 성도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 백성의 부분이다. 이런 까닭에 언약신학에서 그 왕국은 전적으로 미래적이지 않다. 그 왕국은 이미 이곳에 도래하였으나 앞으로 더 훌륭한 것이 도래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already and not yet)’이다. 언약신학은 이미 활동하고 있는 한 왕국이 있으며, 또한 한 왕국은 보다 큰 영광 가운데 도래할 것이다. 이 현재와 미래의 왕국이 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은 메시아의 초림을 고대하던 자들과 또한 이미 오신 그가 이미 오신 것과 재림하실 것을 기대하며 되돌아보는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은 두개의 다른 체계이면서 성경을 읽는 두개의 다른 방식이다.

 

 

2.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대조되는 역사적 근원

 

다음으로 제 각기의 역사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세대주의는 교회 역사에서 근래에 전개된 일이다. 그것은 19세기 말 영국의 플리머스에서 세대주의적 체계의 주된 개념을 발전시킨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의 가르침을 받아 시작되었다. 세대주의는 성서대학과 성경 출판을 통하여 보급되었다. 현재 이 신학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언약신학 개념은 초대 교회까지 소급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다.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 이 간단한 신학적 경구가 언약신학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성경 전체가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요지는 구약이나 신약 어느 곳을 읽어도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신구약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중심하여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어거스틴과 다른 초기 기독교 성경학자들에 의해 인식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경의 통일성은 종교개혁에 와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루터가 5 개 조항을 발표한지 오직 17 년이 지난 1534년에, 헨리 불링거(Henry Bullinger)가 언약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인 [유일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 또는 언약에 관하여, Of the one and Eternal Testament or Covenant of God]을 저술하였다. 불링거는 종교개혁의 초기에 활동했던 스위스 개혁자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의 원리에 근거하여 성경을 직접 주해하는 연구방법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 이해에서 언약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재발견 하였다.

 

불링거와 그의 앞서 활동했던 쯔빙글리(Zwingli)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언약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언약신학은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일 뿐 아니라, 개혁파 전통이 지닌 신학의 중요한 통찰중 하나이다. 개혁파 전통의 다른 표현인 장로교 전통과 사상을 같이 하는 자들은 언약적 가르침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즉각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불링거를 따라 언약신학을 강조하였으며, 그들과 같이 성경의 신학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중대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가장기본적인 사상임을 수용하였다.

 

 

3. 언약의 공식에서 발견되는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칼빈의 강조점

 

언약신학은 어떤 독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로, 언약의 공식에 대해서 언급해 보자. 빵을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는 조리법 또는 공식 중에 무언가를 빠뜨리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베이킹파우더를 빠뜨리게 되면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없다. 화학자는 특정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공식을 알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언약을 설명하는 어떤 공식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창세기 17, 레위기 26, 예레미야 32, 에스겔 36, 고린도후서 6, 히브리서 8, 그리고 계시록 21장이다. 이 언약의 공식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신약으로 진행된 후에 성경적 계시 안에서 천국으로 진척된다.

 

언약의 공식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들이 되리라.”가 아닌 점에 유의하라. 그것은 단수로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이다. 그것은 구약으로부터 신약과 천국까지 진행되면서 하나님과 관계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잘 드러낸다. 또한 그것은 언약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시어 인간과 맺은 관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란 단어에서 발견된다. 언약의 공식은 우리 협상을 해보자.’ 내지는 우리 흥정을 해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단독사역론, 일방적 구원, 주권적 은혜, 또는 칼빈주의라고 부르는데 하나님께서 첫 걸음을 행하기는 특징이 있다. 그가 열심을 다해 우리를 찾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을 주시려 이 땅에 오셨다(17;10).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 서 먼저 행동하시며 그의 주도권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된다. 다음의 세 본문 예레미야 31;31, 창세기 15장과 17장을 숙고해보라. 베들레 헴의 제롬은 히브리서와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라고 불리는 번역본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 번역본이다.

 

제롬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에 관한 책들(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책들(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이 각각 구분되기를 원했다. 그는 첫 부분을 구약, 둘째 부분을 신약이라고 불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예레미야 31장을 활용하였는데 그곳에 나는 이스라엘 집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다.”라고 기록이 있다. 제롬은 베리트라는 히브리 단어를 라틴어로 테스터멘툼으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언약 또는 계약을 의미하는데 유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베리트란 무엇을 자른다.”는 뜻이며, 이로써 언약은 희생을 통해 제정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또한 제롬 후에도 우리는 줄곧 구약과 신약을 두고 성경의 정경을 크게 둘로 나누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에게 구약과 신약대신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시사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언약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서의 중요 한 요점은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언약이므로 언약 사상은 성경 전 체의 체계화를 거들어 준다는 것이다.

 

 

4. 성경 해석을 위한 칼빈의 언약적 경구:

언약은 언제나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경륜에서는 그것이 구별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보도록 하자.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여기에 담겨져 있는 모든 내용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으로 깨달으며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찰해 보도록 하자. 그러면 어떻게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이뤄지게 할 수 있을까? 칼빈이 언약의 공식을 강조하는 것과 아울러 그가 성경의 구원역사 이해를 위하여 그가 제시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해석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언약은 언제나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경륜에서는 그것이 구별된다.”이다. 본질이란 무언가가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의미한다. 경륜이란 어떻게 특정인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통치하는 가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한 대통령의 경륜이 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선출된 대통령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통치하거나 관리하게 된다. 이것은 한 가족의 경륜에서도 유지된다.

 

예를 들어, 나에겐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가 계시다. 내가 약 2세나 3세가 됐을 때 그리고 길을 건너는 것을 배울 때, 나의 모친은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 하시곤 했다. “피터야, 지금은 길 건너로 뛸 수 없다. 내가 내 손을 놓을 때에야 넌 걸을 수 있으니, 내 손을 꼭 잡아라. 나는 네가 차가 왕래하는 곳에서 다치길 원치 않아.” 오늘 내가 귀가하여 나의 모친을 뵙고 길을 건너게 될 때, 나는 모친의 팔을 부축하고 어머니, 나에게 기대세요. 나는 우리가 길을 건널 때 어머니께서 차가 왕래하는 이곳에서 넘어지시길 원치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와는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 현재 서로를 위한 사랑과 안전에 관한 관심사를 나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사랑은 변함없다. 가족 사랑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가정 안전에 대한 경륜은 사뭇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약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동일한데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이다. 그러나 언약은 다르게 실행되어지는데 구약에서는 제사에 의하였듯이 신약에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예배를 통해 실천된다.

 

언약의 연속성에 대한 칼빈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될 수 있다 : 구 언약과 새 언약의 영적 영속성에 관한 칼빈의 논의에 대한 요약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1. 세상의 시작부터 같은 율법과 같은 교리

    2. 그리스도는 언약들의 중재자이시다.

    3. 둘 다 칭의의 은혜를 말한다.

    4. 성례전은 양쪽에서 동일하게 중요하다.

    5. 양쪽 모두 영생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6. 양쪽에 적용되는 일반적 언약의 공식은 영생을 포함한다.

 

우리가 칼빈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본질은 언제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이다. 그러나 메시야께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 방식은 구약으로부터 신약으로 가면서 바뀐다. 구약에는 피의 제사가 있었으며, 또한 대제사장과 성막 또는 성전이 있었다. 신약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이런 것들이 현재는 다르게 실행되어진다. 비계가 있는 건물이 다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건물이 건축될 때에 그 주위에 비계가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는 해체되고 제거되는데 더 이상 그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구약 시대에는 은혜의 언약이 동물 제사, 관례들과, 음식에 관한 법, 그리고 대제사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세상에 오도록 하는데 사용된 비계와도 같다. 현재는 그가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구원 사역을 다르게 실행하시는데 더구나 구약의 언약에 대한 경륜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것의 가시적 기호와 습관, 즉 비계가 제거되었다.

 

 

5. 그리스도가 성경의 핵심이신 한편, 언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언약의 실체에 대하여 언급하는 다른 방법은 언약의 공식으로 요약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경륜이 시간이 흘러 변화가 되어도 항상 성령의 핵심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경륜 가운데서도 변화되지 않는 실체의 이중 강조를 설명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교인의 관점에서 신약 시대에 우리는 믿는 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푼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의 믿는 자의 자녀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할례와 세례는 아주 다른 경륜이지만 그 실체는 매우 동일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성례전은 그가 오신 후에 비해서 다르게 시행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동물의 피를 흘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을 가리켰는데, 이런 방법으로만 이 세상의 죄를 진정으로 없애실 수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그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제사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유월절은 주의 만찬이 되었다. 이 변화는 필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피 흘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유월절 양을 잡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모두 이루셨다. 유월절은 언제나 언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왔다. 언약의 차이점은 그것의 형태에 있다. 언약의 연속성은 유월절 양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셨으며 또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그 피를 우리 마음의 중심에 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계속하여 유월절 의 빵과 잔을 기념한다. 칼빈은 두 언약간의 차이점 다섯 가지를 열거한다. 이 차이점은 언약의 실체가 아닌 외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경륜에 대한 차이에 대한 칼빈의 관점

 

구 언약 - 그리스도 전

    1. 물질적이며 일시적 복은 영적 복을 나타낸다.

    2. 형상과 의식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3. 구약의 율법은 죽이는 문자이다.

        a. 구약 율법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율법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b. 구약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복음을 포함시키는데, 그리스도의 약속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4. 구 언약은 속박과 두려움으로 특정지어진다.

    5. 구 언약은 이스라엘에 한정된다.

 

새 언약 - 그리스도 후

    1. 영적 복에 대한 직접적 묵상

    2. 그의 성육신으로 온전히 계시되신 그리스도

    3. 신약 복음은 살리는 영이다.

        a. 새 언약에서 율법은 복음에 속한 성령에 의하여 마음에 새겨졌으며, 죄의 용서를 수반하여 일어난다.

        b. 새 언약의 복음은 세상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험한 것이다.

    4. 새 언약은 자유와 신뢰로 특정지어진다.

    5. 새 언약은 모든 백성에게 확장되어진다.

 

우리가 언약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우리는 언약의 공식의 상관성, 언약의 실체와 경륜, 그리고 언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언약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역사에 따라 언약의 경륜이 다르지만 언약의 실체는 성경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 연속성을 강조한다.

 


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에도 유기적으로 존재함:

언약은 구원 역사의 ‘DNA’이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성경을 논리적으로 정리된 조직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의 역사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에 대한 조직 신학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론또는 교회론이라는 이름의 성경적인 책을 준 것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를 드러낸다. 계속 펼쳐지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지닌 특성은 모든 이야기가 마쳐질 때 까지 비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신비한 일, 놀라운 일, 얽힌 일들이 계속하여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유기적인 계획은 진보적으로 밝혀진다.

 

20세기 초반에 언약을 교수한 위대한 선생들 가운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있다. 그는 성경에서 역사적이며 유기적으로 펼쳐지는 구원을 발전시켰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유기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화원을 가꾸려면 반드시 씨앗이 필요하다. 그가 씨앗을 쳐다보면 그 씨 안에 이미 꽃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만일 전에 그 씨앗을 전혀 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이 유기적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성장한 나무의 모습을 갖출 모든 것이 이미 그 씨앗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처음부터 지속되어온 성경의 방식이다.

 

창세기 3:15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부활과 승리가 최종적으로 이뤄질 때까지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활과 승리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성경 공부를 가르치신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24장을 보라.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빈 무덤에 관한 소문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누가복음 24:46절 이하에 기록되기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여기에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구약 정경의 세 중요한 구분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책들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 말씀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어떤 부분을 읽어도, 내 영으로 인하여 너희의 마음이 열려있으면, 너희들은 나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원하셨던 자기의 백성이 성경을 읽는 법으로써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조적으로 펼쳐지는 구원의 역사에 관한 극적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은 구약은 하나님의 유대 백성을 위한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의 이방 백성을 위한 것이다.”는 세대주의의견을 거부한다. 그 대신 언약신학은 성경 전체가 하나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믿음으로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

 


7. 경계에 관한 논쟁:

구약의 땅에 대한 약속에 관한 언약적 해석과 세대주의적 해석

 

이 요점에 관하여 세대주의와 언약 신학 간의 커다란 차이점이 발견된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에 대한 약속이 아직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휴거되면 생길 것이며, 7 년 간의 환란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왕국이 도래할 때에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땅에 대한 약속에 사실상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린도후서 1:18-20을 보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사역의 염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1: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도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중요한 절은 20절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만일 누구든지 성경에서 어떤 약속을 발견하여 그리스도 없이 그것을 해석하려하면 오독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 그리고 아멘이 된다. 누구든지 이 방법으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예수가 그 약속과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땅에 관한 약속과 모든 구원에 대한 약속에 대한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의 요점은 언약 안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땅에 대한 약속은 마치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내 백성으로 삼고자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나의 진실 되며 최종적인 약속의 땅인 하늘의 땅을 주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요한 계시록의 결론부분에서 우리가 하늘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가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날 때 팔레스타인에 있는 땅을 찾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건설하시고 제작하신 한 도시를 사모하였다고 하였다. 언약 신학자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법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오독하게 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8.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오로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임했으나 앞으로 올 것으로 가르친다.

 

언약의 공식은 언약의 실체를 반영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언약의 경륜은 그가 오시고 하늘에 오르신 후의 것과 상이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올라가신 후 그는 왕국의 시대를 시작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왕국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나, 아직도 완전히 이곳에 있는 도래한 것이 아니다. 왕국은 벌써 이곳에 있으나,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다. 척 콜슨(Chuck Colson)은 이것을 '공격 개시일 침공'(D-Day invasion)으로 비교하였다. 해병대가 오마하 해변을 공격하였고 언덕을 빼앗은 그들은 불가능을 해내었다. 이것을 성취한 후 그들은 언젠가 제3제국(the Third Reich)으로 알려진 독일을 점령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이미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직도 완전히 이기진 못했다.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성취함으로써 승리를 보장받았지만 앞으로도 싸워야 할 긴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을 부으심, 그리고 언약 생활의 신약 시대의 탄생은 왕국의 시작이다. 언젠가 사탄의 3제국은 무너질 것이다. 왕국이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 성도들도 그곳에 속해 있으나 온전한 왕국이 반드시 임할 것이다. 예수의 왕국은 벌써 이곳에 도래하였다(마태복음 12:28; 13:40-43; 사도행전 1:3; 28:31; 골로새서 1:13; 계시록 1:6을 보라).

   

 

강의 2

칼빈의 언약신학에 근거한 세대주의 비판

 

 

우리가 첫 강의에서 본 것 같이 칼빈은 성경을 언약적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에 의하여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설명되어지는 구속사의 유기적 통일성에 충실하였다. 첫 번째 강의에서 8가지 (중요한) 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1. 세대주의와 언약신약의 다른 점들

    2.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서로 다른 역사적 기원들

    3. 언약의 공식(formula) 안에 나타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칼빈의 강조

    4. 성경을 해석함에서 칼빈의 언약적 금언(dictum): 언약은 항상 본질에서 있어 동일하다, 그러나 집행은 구별된다.

    5. 성경의 심장(중심)은 그리스도이나 언약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 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유기적으로 구약 안에 현존한다. 언약은 구속사의 DNA 이다.

    7. 논쟁들의 경계선: 구약의 땅에 대한 약속들에 대한 언약적 해석과 세대주의적 해석

    8.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오로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임했으나 앞으로 올 것으로 가르친다.

 

칼빈의 언약적 해석학과 이에 따른 적용이 어떻게 세대주의 해석학에 대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음으로, 이제 칼빈의 언약적 해석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칼빈의 언약신학을 고찰하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세대주의 신학을 비판하는데 서있는지(관계되는지)를 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두 번째 강의에서 다음 6가지 요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언약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찬양(경축)한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리스도가 그 언약이 되시기 때문이다.

    2. 은혜언약의 첫 번째 구원적 유익(Benefit)은 믿음만에 의한 칭의이다.

    3. 은혜언약의 두 번째 구원적 유익은 믿음과 순종에 의한 성화이다.

    4. 칼빈의 언약신학 안에 성화와 칭의의 사중적 관계성(The Four-Fold Relationship).

    5. 언약적 윤리와 세대주의적 윤리로부터 발생되는 서로 다른 윤리적 경향들.

    6. 성례들의 이해를 통한 칼빈의 언약의 집합적 특성

 

  이제 이 여섯 요점들 중에 첫 번째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언약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찬양(경축)한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리스도가 그 언약이 되시기 때문이다.

 

칼빈이 그의 신학을 집필하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 하인리히 불링거가 이미 그가 1534년에 쓴 책 {하나 그리고 영원한 성경 혹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이시다.라고 강조하였다. 불링거는 [그리스도, 그 언약의 증인 그리고 살아있는 확증]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열번째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주(the Lord)가 전체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바로 그 점, 말하자면 그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이 사람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 공포(시작)하신 언약이 놀랍고 생생한 방법으로 확증되었다(는것을 말하려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셨을 때, 즉시로 그것 <말하자면, 그 언약>은 더 많은 말들이나 논쟁들과 함께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일(인성 입으심) 자체에 의하여 최상의 신비가 온 세상에 입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언약과 동역자(partnership)로 받아들이셨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최상의 기적인 사랑으로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연결로써 인간을 그 자신에게 동여매셨다. 따라서 이사야가 말한 대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그 이름을 믿게 되었다(7:14).

 

그는 마치 어떤 자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고 말해도 좋도록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복음서는 이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과 그렇게 많은 예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놀라운 유익들(benefits)을 재음미한다. 참으로 이사야는 하나님은 인자하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분은 인류에게 그 풍요로우신 분, 그 아버지, ()샤다이 이시다. 또한 이 이름에 그리스도의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이 이 이름과 연관되어져 있다. 그들<말하자면 그 이름 임마누엘을 구성하는 말들>은 신적 자비, 공의, 그리고 삶의 회복에 대한 참으로 가장 분명한 예증들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의 면전에서 이룩하셨고 그리고 해설하셨다; 우리를 축복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끗하게 되어진 자들로 그 영원한 왕국으로 받아드리시면서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간략하지만 그러나 천상의 말씀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참으로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 14, 16, 17). 당신은 이 최상의 진리, 저 신비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그것은 곧 그가 전적으로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 자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사실을 듣고 있다. 당신은 다른 어떤 계획보다 우리 하나님 샤다이의 충만 이신 그 분이 그의 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운 유익들로 우리들을 그 자신에게 이끄시기 위하여 그의 능력과 영광을 세상에 비추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듣고 있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완전하고 흠 없이되었다고 말한다(2:9, 10). 그러므로 이렇게 하여, 주 예수 그 자신이 언약의 첫 부분을 확증하시고 나타내 보이셨다. 바로 그 성육신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자손의 그 축복과 영원한 행복이신 하나님-샤다이 이심을 보여주신다(위의 글은 롤백박사의 번역). 불링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그리고 너희는 나의 백성인 것을 너희가 알기를 그렇게 원해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아마 잊을 수 없거나 혹은 그것을 묵과할 수 없는 한 증거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보자. 언약적 서약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는 그가 인간이 되심에서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하여 하나님-인간(되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union)이 되었고, 그래서 바로 그 언약 자체를 반영(반사)하고 있다. 언약의 공식(formula)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리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미래 시제). 성육신에 의하여 하나님은 왜냐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그리고 왜냐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기 때문에, 나 너희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기 위하여 너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있다.’고 선언하셨다.

 

이사야 714절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너는 그를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고 말한다. 그 이름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언약 이름이다. 성육신하신 언약의 구세주와 주로서 예수님은 타락되지 않은 인간본성을 취하시고 그리고 인간이 되심으로 하나님을 그의 백성에게 영원토록 연합케 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유신은 육체적으로 언약의 공식을 명시하신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리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성육신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하고 그리고 너희는 나와 함께 한다.” 하나님의 바로 그 언약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은혜언약의 구원하시는 유익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development)하고 있는 점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사항을 고찰해 보자: 이번에는 영원히 그리고 없어지지 않도록 그가 한번 제정하신 그 언약을 설명하도록 하자. 이 언약이 최종적으로 확증되고 그리고 실증함으로 되어진 이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들(유대인들)과 함께 들은 대로 복음의 언약, 그 유일한 기초는 그리스도이시므로 누가, 그렇다면,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그 사도(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옛 언약)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마땅히 끝나도록 되었고 그리고 폐기되도록 되었다고 주장 한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맺으신 새 언약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에게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관성은 칼빈이 이 둘(언약과 그리스도)을 병렬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음에서 볼 수 있다. 언약은 그리스도를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언약의 기초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약속은 그리스도를 그 언약들의 기초로 가진다. 처음부터 새 언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옛 언약도 기독교적이다. 따라서 구약의 조상들도 그리스도를 가졌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율법의 목적(end)은 그리스도와 영원한 생명이다. 사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것(옛 언약)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텅 빈 쇼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언약의 궤, 구약의 예식들 그리고 옛 언약의 점진적 계시 모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옛 언약과 연속선 안에 서 있는 새 언약을 예고하고 있다. 구속주의 오심은 옛 언약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가(그리스도) 그것(옛 언약)을 새롭게 하고 계속하게 한다. 그는 그것을 새롭고 그리고 영원하도록 하신다. 옛 언약을 성취하고 확증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고 결코 멸하지 않는 언약을 가져 오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완전히 그 언약과 융합되어졌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 보증인, 구속주, 유언자이시다. 그리스도 속죄의 언약의 피 혹은 죄를 속하기 위한 구속의 죽음은 언약을 재가(실증)한다. 그러므로, 언약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제들과 함께 재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도고, 제사장직 그리고 왕국은 언약과 연관되어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 언약을 확증하고 인치시고 그리고 재가하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칼빈은 또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성을 믿음, 양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합, 선행, 그리고 성례들 그러한 영역들 안에서 구속의 적용과 연관하여 이해한다. 분명히 그리스도와 언약은 칼빈의 구원의 금 사슬(golden chain)의 한 주요한 요소이다(Clearly, Christ and covenant is a major strand in Calvin's golden chain of salvation.) 칼빈의 주석들 역시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을 관련짓고 있다. 칼빈은 그가 은혜언약의 구원적 유익들의 불가분성을 설명할 때 그가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주어지는 이 동일한 구원적 유익들의 불가분성을 설명하는 바로 그 동일한 방식으로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 (칼빈)의 강조를 좀더 개진하고 있다(develops). 우리는 이것을 본 강의 소제목 4에서 고찰하겠다.

 


2. 은혜언약의 첫번째 구원적 유익(Benefit)는 믿음만에 의한 칭의이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언약은 히브리어 berith로 그 의미는 자르다 이다. 창세기 15장 문맥에서 살펴보겠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은 아들을 원했다. 그래서 주께서 밤에 하늘의 청명한 별을 보도록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셨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들이 별들 같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창세기 156절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의로 여겼다.’고 읽는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에 의한 칭의라고 부른다. 사실, 바울은 믿는 자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로마 성도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서 이 동일한 본문을 인용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 언약(a berith)을 방편으로 믿음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것을 언약 희생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아브람은 다른 종류의 동물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머리 위에서부터 코와 몸통을 지나 꼬리에 이르기까지 자르고, 그리고 다음에 그 조각들을 땅 위에 놓았다. 이것은 참으로 한 berith, 자름 곧 피의 제물이다.

 

    이 강렬한 이미지는 고대의 관습이었다. 이것이 언약을 맺는 방식이었다. 언약을 맺으려면, 동물을 죽이고, 그 사체 가운데를 걸어가며,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우리가 막지나 걸어간 짐승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과 저당 계약(a mortgage covenant)을 이렇게 맺고 싶어 할까? 피로 서명을 해서 말이다. 여기서 약속은 불순종에 대한 제재(sanction)와 연결되어 있다.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방금 죽인 동물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아브람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언약 맺을 준비를 하였으나,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는 몸이 마비된 채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신현(theophany), 곧 하나님의 현현(manifestation of God)을 보았다. 동물들의 사체들 가운데를 지나간 것은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화덕뿐이었고, 아브람은 거기에 끼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아, 나 홀로 이 언약을 세운다. 나 홀로 너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준다. 나 홀로 이 약속을 성취한다. 너는 그것을 할 수 없다. 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네가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네가 의롭게 되도록, 나는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죽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단독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네 하나님일 것이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너는 거지가 내미는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너는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만 이 언약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언약 안에 있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 의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성경 안에서만 보임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3. 은혜언약의 두 번째 구원적 유익은 믿음과 순종에 의한 성화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람의 이야기가 끝나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어서 창세기 17장으로 가야 한다. 여기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이름을 바꾸시어 새로운 이름을 그에게 주신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된다. 이 새로운 이름이 주어질 때, 또 다른 언약이 맺어진다. 이 언약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람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be blameless).”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는 쪼개진 동물들 사이를 지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너는 이제 내 앞에서 행하되 흠이 없어야 한다. 너는 베리트가 될 것이다. 너는 충성스러운 제물(loving sacrifice)이 될 것이다. 네 몸이 할례의 언약 가운데 잘릴 것이다.’ 따라서 언약 제물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라, 아브람이 될 것이다.

 

확대해서 해석해 보면, 할례로써 마음의 할례, 옛 본성의 제거로 인도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이 되어야 할 존재였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걸어갈 것을 배워서, 바울이 로마서 121-2절에서 말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언약 제물로서, 아브람은 그의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주님께 올려야 했다. 이제 예레미야서 31장으로 가보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새로운 베리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과 같지 않을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율법은 돌판들 위에 쓰였는데, 백성들이 반역하여 금송아지에게 예배했을 때, 깨어졌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이스라엘의 가슴들에 기록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은 두 번째 커다란 유익을 제시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첫 번째는 우리가 이신칭의라고 부르는 죄 용서이다. 언약의 두 번째 유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그들의 마음에 쓰인 하나님의 율법 안에 존재하는 성화이다. 그렇게 새 언약은 두 가지 커다란 복 칭의와 성화 을 준다. 다시 언약 공식으로 돌아가자. 나는 네 하나님일 것이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언약 공식에서 우리는 칭의와 성화라는 진리에 대해 듣게 된다. 언약 공식이 말하여지는 두 방식을 들어보라. 첫 번째 강조는, ‘내가 네 하나님일 것이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I will be you God and you will be My people.’라고 말한다. 그 놀라운 약속을 듣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내가 이것을 네게 준다.’ 이것은 은혜언약에 대한 직설법 혹은 사실적 표현이다. 이제 같은 구절을 다른 식으로 강세를 두어 읽어보자. ‘나는 네 하나님일 것이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I will be your God and you will be My people.’ 여기에서 미묘한 차이가 들리는가? 이런 방식으로 강조함으로 직설법에서 명령법으로 나아간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는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그가 또한 약속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율법을 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지금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이 은혜로운 선물은 창세기 17장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 전능하신 그리고 모든 것이 충족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렇게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오는, 언약의 두 가지 커다란 유익이다. 이 언약 공식이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도록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는 점과 그것에 참여할 자들은 하나님의 한 백성. the one people of God’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너무 많은 경우 세대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이 성화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부터 분리하고 있다. 이것은 성장과 성숙에 대한 표현이지 하나님의 구원계획 부분은 아니다. 칼빈이 명칭한 duplex gratiae 혹은 이중 은혜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며 성화시키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선언한다.

 


4. 칼빈의 언약신학 안에 성화와 칭의의 사중적 관계성(The Four-Fold Relationship)

 

언약의 이 진리들은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들과 성안들에게도 유용한 도해(예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들의 손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그러한 설명을 드리는 것을 허용하기 바란다. 당신은 오른 손과 왼 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두 손은 지금 새 언약의 두 축복들을 나타낼 것이다; 성화, 나는 나의 법을 당신의 가슴에 기록할 것이다; 칭의, 나는 당신의 죄들을 용서할 것이다. 당신의 힘센 손이 칭의의 손이 되도록 하라. 만일 만약 당신이 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을 칭의의 손이고 그리고 왼손은 성화의 손이다. 만일 당신이 왼손잡이라면, 왼손이 칭의의 손이고 그리고 오른손은 성화의 손이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두 손으로 칭의와 성화 관계에 관한 네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배우기를 바란다. 이 원리들은;

 

    1.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구별되어야 한다.

    2.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3.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떨어질 수 없다.

    4.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논리적으로 순서적이다.

 

첫째로, 사람의 두 손은 구별되게 다르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누군가, “오른쪽으로 돌아라."”하고 말하는데, 한 사람 이 왼쪽으로 돌면, 그는 어려움에 처하든지 혹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일찍부터 사람들은 그들의 왼손으로부터 오른손을 구별시키는 것을 배운다. 요점은 이것이다; 칭의와 성화, 언약의 이 두 유익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야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큰 잘못은 의롭게 되어지는 방법은 성화되어짐에 의한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가톨릭주의는 만일 혹자가 선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도식에서, 그것은 자신의 왼손과 오른손을 혼동하는 것이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가톨릭주의자와 정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도 오른손과 왼손을 혼동하거나 혹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이 견해에서 혹자가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내가 거룩하게 되는 방법이다. 만일 내가 믿기만 하면 나는 어떤 일도 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혹자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고 선언하면 때로는 (그것을) ‘쉬운 신앙주의, easy believeism’라고 불렀다. 이 견해는 사람이 의롭게 되어짐으로 성화되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오른손을 왼손과 혼동하거나 사람의 성화를 칭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주의의 반대이나, 그러나 가톨릭주의와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것이다. 칼빈은 가르쳤고 개혁 신앙이 가르치는 바는 은혜언약의 두 가지 구원하는 유익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되는 두 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두 손은 동시적으로 나왔다(they came simultaneously)는 것을 주목하라. 인간들은 동시적으로 나오는 오른손과 왼손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언약의 축복들을 가져오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하나의 완결된 행위로 (여기심 같이) 용서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안에서 우리를 옷 입히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어짐을 선포하시고, 그는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다. 신다. 성령의 이 은사와 함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도록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과정을 시작하신다. 성령의 성화사역은 계속되어지는 과정으로 진행되어지는 동안, 동시에 그리스도 안의 우리를 용서하심과 칭의가 시작된다. 언약의 이 두 유익들은 동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다르므로 그것들을 구분하여야 한다. 이 두 새 언약축복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세 번째 것은 그것들이 분리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바쁘다고 왼손을 떼어내고는, “나는 오늘 왼손을 신경 쓸 틈이 없어.” 하고 말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여 왼손이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다른 손으로 급하게 의사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려, "이것을 다시 붙여줄 수 있나요? 난 손이 떨어져 있는 게 싫어요."라고 간청하겠느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 중에는) 칭의를 성화와 떼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폐기론자(liber- tine)"나는 그저 용서만 받으면 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예수라는 신용 카드가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청교도들은 본질에 있어, “예수를 영접하면,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그분의 직분 모두에 있어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에게 용서와 희생을 주시는 제사장으로서만이 아니다. 당신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그리고 당신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선지자로서도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의 직임들을 분리할 수 없다.” 이 주장의 반대는 율법주의자이다. 이 주의자는 나는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 자신의 도덕적 갱신으로 충분히 선해질 것이다.”고 말한다. 이런 자를 우리는 바리새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도 도덕폐기론자와 같다. 단지 다른 점은 그들은 그 (언약의) 반대편 손을 자르는 것을 구한다는 있다. 그러나 그 은혜언약의 두 손은 분리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칼빈은 다른 한편의 유익을 희생시키면서 언약의 한편 유익만을 주장하는 자들을 공경한다. 또한 동일한 노력으로 이 악당들은 이것(언약)의 한 부분을 삭제함으로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뜯어 발겨 그것을 기초로부터 와해시킨다. 그들은 지금까지 결합되어 있는 언약의 유익들을 분리시키므로 신성모독죄를 범할 뿐만 아니다. 그리스도와 언약은 그렇게도 서로 뒤얽히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해체시키려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산산히 부르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는 그를 우리의 성화라고 부른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본질 상 부정한 자들로 다만 그의 성령에 의하여 거룩해지도록 새롭게 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다만 믿음만으로 동시에 거룩하게 사는 삶이 없이 자유롭게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은혜의 이 열매들은, 말하자면, 불변의 매듭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었기에 그것들을 나누려고 시도하는 자는 어떤 의미로는 그리스도를 산산 조각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로 없이 얻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의롭게 되어지는 것을 구하는 자는,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하여 동시에 취함이나, 혹은, 달리 말한다면, 무구(innocence)와 삶의 정결에 이르도록 새로워짐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도록 하자. 칼빈은 되풀이해서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산산조각 내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의롭게 되어진 자들은 주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로 그들의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분명히 동등하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실한 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절단된 믿음으로 그리스도 분열시키지 않도록 그가 우리에게 이 목적을 주신 것 같이, 칭의 만이 아니라 성화를 위하여 그를 품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가 조각나도록 뜯겨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대적으로 지각하는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말하자면 의로움과 성화이다. 누구든지,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 안으로 받아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동시에 양자의 영을 수여하신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이미지로 개조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단지 의로움과 성화에만 관계되어짐으로 우리가 이것들에 머물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들을 구별할 수는 있겠으나, 그리스도는 그 자신 안에서 둘 다를 불가분하게 함유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을 얻기를 원하는가? 당신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의 성화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짐이 없이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조각들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이 유익들을 즐기도록 주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둘 다를 동시에 수여하신다, (중의) 하나를 결코 그 다른 것 없이 (수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일들 없이는 아니나 그러나 일들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님이 어떻게 사실인지 분명하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참여함에 있어, 틀림없이 성화도 의로움만큼이나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은 그러므로 구원의 유익들을 구성하는 것을 돕는다. 칭의와 성화의 두 가지 언약적 유익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은 나누어질 수 없이 관계되었고 그리고 동시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왜냐하면 둘은 이 큰 구속의 유익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칼빈에게 그의 신학적 대적자들을 대항하여 휘두를 좌우에 날선 검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생각했던 가톨릭교도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없는 선행을 여전히 정결하지 않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관계없이 자신을 영적으로 정결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도덕폐기론자는 중생에 있어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불가분성을 직면하게 하였다. 칼빈으로부터 지금까지 언약의 두 유익들의 상관성에 관하여 우리가 논의한 세 가지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구별되어야 한다.

    2.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3.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떨어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연관성에 대한 칼빈의 네 번째 요점을 고찰하도록 하자.

 

    4.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논리적으로 순서적이다.

 

혹은 칼빈의 용어들로 말한다면,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 아니다. 칼빈의 네 번째 요점은 은혜 언약의 두 유익은 논리적으로 순서적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언약의 한 유익이 주도적이고 다른 것은 종속적이다. 이것 역시 우리의 두 손과 같다. 만일 오른손잡이면, 오른손이 왼손 위에 주도적인 손이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칭의가 항상 성화 위에 주도적이고 그리고 성화는 항상 칭의에 의존적이고 그리고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오른손잡이라면, 이것은 그의 오른손, 즉 그의 칭의의 손이 최우선이고 그리고 그의 왼손, 즉 그의 성화의 손은 그 오른손에 의존적이고 그리고 종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한 사람이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많은 선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다. 대신에, 한 사람이 왜냐하면 내가 용서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살 수 있고 그리고 살 것이다.”고 말해야만 한다. 칼빈은 칭의를 집의 기초로 비교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화를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구조물로 비유했다. 따라서 성화의 집은 항상 칭의의 기초에 의존되어 있다.

 

칼빈은 실제로 중세 전통에서 온, 말하자면,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지 않다.”는 한 중요한 금언 사용한다. 이 문맥 안에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인 믿는 자의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은 구원의 대안적 혹은 반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화는 칭의 안에 그리스도 순종의 더 큰 의로움 아래 있거나 혹은 (그것에 대하여)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성화 의로움은, 비록 믿는 자 안에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은혜롭게 생성되지만, 그럼에도 칭의 안에 수여된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종속적이다.

 

그래서 성화는 믿는 자를 위한 구원에 대하여 맞서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성화)은 항상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하여 열등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화 의로움 칭의 의로움을 존중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의 존재가 칭의 안에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우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화는 칭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혹은 용서함에 있어 칭의의 사역 혹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전가함에 있어 칭의의 사역에 어떤 역할도 가지지 못 한다. 누구도 그 자신의 새로운 순종 혹은 성화를 결코 의존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존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유추로 돌아가, 성화의 의존적 손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붙잡는 칭의의 우위의 손을 항상 의지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칼빈의 언약교리는 언약의 축복들이 믿는 자에게 수여된 후에 율법이 복음에 반대되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신적 유익들의 필요한 구성요소들이다. 이 둘은 동시에수여된다. 그럼에도 그 둘 사이에 묵과해서는 안 되는 논리적 순서가 존재한다. “이 율법의 의문에 더하여 짐으로, 믿는 자는 순종의 참된 의로움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종속하는 의로움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반대적인 의로움은 아니다. 칼빈은 이 원리를 그의 [트렌트 회의에 대항하여]에서 단언한다.

 

우리는, 참으로, 믿는 자들을 매일 선행을 더욱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장식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선행들은 때때로 의로움의 이름에 의하여 구별되어진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선행의 가치는 다른 어떤 기초보다 은혜로운 용납에서 기인되어야 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이냐! 왜 그들은 그들이 소년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자유 전가에 의한 것임을 나는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다른 유익이 나오는데, 말하자면, 우리의 행함들은 의로움의 이름을 가진다고 나는 말한다. 요컨대 나는, 우리 자신들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의 인격들과 행함들은 의롭게 되어진다; 그리고 행함들의 칭의는 원인에 결과(가 주어지는 것)처럼 그 인격의 칭의에 의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은 순서에 있어 그렇게 앞서며 그리고 정도에 있어 탁월하며, 어떤 것도 그것 앞서 갈 수 없거나 혹은 그것을 모호하게 할 수 없다. 칼빈은 다시 그리스도인의 선행으로 인한 의로움 믿음에 의한 의로움에 대한 종속성을 설명한다.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우리가 얻는 의로움과 우리에게 갚없이 수여하는 의로움은 최상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래서 자주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지고, 그것만이 빌을 발하여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방법 안에서 행함의 의로움이 어떤 정도로 그것이 우리 안에 존재할지라고 그 자체의 위치로 축소되어짐으로, 말하자면, 절대로 다른 것과 충돌이 되도록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행함의 의로움이 믿음의 의로움에 의존하여야 하기에 그것(행함의 의로움)은 반드시 믿음의 의로움에 종속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칼빈에 있어 언약은 강력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믿음 만으로 의롭게 되어지는 것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믿음을 결코 홀로 있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들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복음 서는 에수님은 구세주와 주되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한 직설법(우리가 의롭다)은 칭의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명령법(우리는 의로워야 한다)은 성화 안에 있다. 우리가 본대로 이 두 강조점은 언약 공식 안에 내포되어 있다. 다음 도표는 은혜언약 두 구원하시는 유익들 관점에서 칼빈의 언약적 사고를 붙잡는데 우리를 도울 것이다. 두 구원하시는 칼빈의 사고 속에 언약의 두 부분의 관계성

 


5. 언약적 윤리와 세대주의적 윤리로부터 발생되는 서로 다른 윤리적 경향들

 

성경을 언약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까? 첫째,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완전히 미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선포한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앞으로 오고 있고 현재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무리로 자신을 간주하며 자신들만을 주로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세상의 문화로부터 분리된 자신들의 모임에 초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종종 강조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휴거시키는 것을 바랄뿐이며 그 때에야 모든 것이 바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나의 경험을 말하고 싶다. 내가 1978년 달라스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왔을 때, 기름 통상금지조치로 인해 첫 번째 심각한 기름위기가 미국을 위협하였다. 나는 정유소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나는 달라스에 있는 친구로부터 달라스 신학교가 그곳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광고의 내용은 이것이 휴거를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해석자들이 휴거를 위한 초청을 선언한 것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베스트셀러에 들어간 Left Behind(레프트 비하인드. 홍성사 - 현재 6권 발행) 시리즈는 아직 다 저술되지 못했다. 세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시기를 산정하기 위해 신문읽기에 집중한다면 나는 더 이상 세대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참으로 요구해야 할 질문은 설사 휘발유가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 인가 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세대주의에 의해 창출되는 윤리관은 언약신학에 의해 발생되는 윤리관과 다르다. 세대주의자에게 휘발유가 없다는 것은 휴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언약신학은 휘발유가 없는 때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만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전체를 염두에 두고 계신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는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너희는 부패한 세상을 정화시키는 짠 맛 내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신자들을 둘러싼 불신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찬란한 빛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너희들이 믿는 바를 통해 그리고 행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언약신학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의 문화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빛은 밝게 비쳐야 하고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 빛은 마땅히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즉 가정, 학교, 정당, 대학, 사업 등-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는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나라의 밝은 빛을 드러내고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

 

언약신학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는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와 시기를 위해 미래를 보기 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언약신학의 윤리적 비전이다. 언약신학은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해 모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 주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그 날과 그 시를 아무도 모른다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추정하는 것보다 우리는 주께서 재림하시기까지 그를 섬기는 일에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바쁘게 일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 다가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인간존재의 시간과 공간에 침투하시고 깊이 다가오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의 나라의 복음이 온 땅에서 전파되어야 하고 그 때에야 마지막이 온다고 가르치셨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와 복음전도자로 부름받았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말씀으로 변하는 세상을 바꾸어야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전진할 것이다.

 


6. 성례들의 이해를 통한 칼빈의 언약의 집합적 특성

 

마지막으로 나는 세대주의자들이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언약신학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는 성례들에 대한 몇 가지 관찰들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 방대한 토픽은 성찬, 세례 그리고 유아세례 관점에서 성례들의 특성, 의미 그리고 실행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기 위하여 언약 신학은 성례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세대주의는 성례들을 좀더 개인적인 의미로 경향이 있다는 주목하자. 세대주의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세상을 점점 험악해져 갈 것이라는 신념과 병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바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 개인이 천국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개인적 구원의 즐거운 소망을 축소시킴이 없이, 언약신학은 여호수아와 함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고 단언한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집합적 특성을 인식하고 있다. 구약으로부터 세대사이에 표현된 언약공식, “나는 너희의 하나님과 너희 이후 너희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의 천대에 이르기까지.” 이 구약 약속들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에 근거하여 칼빈과 언약신학은 특별히 유아세례에 표현된 대로 언약의 집합적 특성을 단언하였다. 칼빈은 유대인들과 함께 언약이 새 언약 시대에로 계속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다고 역설한다. 칼빈에게 있어 그러한 부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넓히는 것보다 좁히는 것을 내포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도 진리의 분명한 지식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참으로 언약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은 오늘날에도 옛날에 유대 백성에게 못하지 않게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 사역은 그 때에 유대인들에게 연관되었던 것과 못하지 않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연관되어 있다. 아마 우리가 그의 오심에 의하여 그리스도 아버지의 은혜를 경감하거나 삭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러나 이것은 저주받을 신성모독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자녀들 역시 그들이 그의 언약의 상속자들로 되어 있고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들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씨라고 불려졌다. 동일한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거룩하다고 고려되어 진다 그리고 비록 한편만 믿는 부모에게서 출생하였다할지라도, 사도의 증거에 의하여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의 불결한 씨와 다르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직 후 외적 성례에 의하여 유아들에게도 검인하라고 명령하셨음으로,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증거 하지 않고 검인하지 않는 무슨 핑계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자녀나 신약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동일한 언약적 약속에 의하여 거룩한 씨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칼빈은 구약의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새 언약 시대의 믿는 자들을 단지 예시한다는 핑계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은 기독교인 믿는 자와 그들의 자녀들 역시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녀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그들은 이 차이점이 발견 한다: 그의 씨로부터 그들의 기원을 갖는 자들은 구약 하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의 믿음으로 시작하는 자들은 그의 이름에 의해 불러진다. 그들은 그러므로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교제로 접목되어진 육체적으로 유아는 신약의 영적 유아를 예시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죽지 않은 생명으로 중생되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희미한 불꽃튀김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변덕스런 영들은 마땅히 앞으로 좀더 나아가야 곳에서 무엇이든지 먼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그리고 완고하게 마땅히 다른 것과 함께 비교하여야 할 곳에서 한 말에 달라붙어 엄한 죄를 짓고 있다.

 

    우리는 따라서 반듯이 더 나은 목표를 겨냥해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바로 그 분명한 성경의 인도하심에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 받게 될 후손을 가질 것과 동시에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이 될 것 을 약속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축복의 저자로 영접하는 자는 모두 이 약속 상속자들이고 그리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려진다. 칼빈의 요점은 이 반론에 진리의 한 요소가 있지만, 이것이 모든 두드러진 성경적 자료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이 믿음에 의한 미래 아브라함 자손들을 예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에게 하신 약속을 제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될 것을 보증하셨다. 칼빈의 반응은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둘 다 이다. 세례의 실행에 함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더욱 믿음에 의해 그의 자손 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 자손들 역시 약속에 완전한 참여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지금 그의 가족의 일원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새 언약시대 안에서 적용하는 것을 계속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칼빈의 논증에 비판은 언약의 유일한 표증은 할례인데 그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언약은 그 표증이 폐기되었음으로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대꾸는 표증의 변경이 언약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폐기된 할례가 아닌 다른 상징에 의해 그의 언약을 확증하는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를 대항하여 반대하지 말라. 이에 대하여 준비된 대답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할례를 제정하셨다. 그러나 할례가 폐기된 후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한 동일한 이유(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항상 부지런히 무엇이 둘에게 보편적이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에게 떨어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언약은 보편적이고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는 이유도 보편적이다. 다만 확증하는 방법이 다르다-그들에게는 할례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세례로 대치되었다. 만일 할례에 대한 대치가 없다면, 그렇다면 칼빈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가시키기보다는 실제로 모호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에서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후손의 구원 보증되는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은헤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영향을 가질 것이고 그리고 전에 유대인들에 했던 것보다 우리에게 적게 입증될 것이다. 지금 그(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하심이 더욱 선명하게 자유스럽게 지구 위에 부어지고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지는 이때에 그리스도를 심하게 비방함이 없이 이것을 말할 수 없다. 칼빈의 언약적 해석학을 따르는 신약시대 언약 신학자들로, 우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이 그들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들의 집합적 특성을 이해했던 것처럼 언약 공동체의 집합적 특성과 함께 우리의 성례적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언약적 약속들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전 가정과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인격적으로 집합적으로 장성해 가는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결론

 

아직도 추구해야 할 칼빈의 언약적 사상과 관계된 몇 개의 영역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성경 해석과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유익, 그리고 기독 윤리와 교회의 성례전의 삶을 구약으로부터 신약까지의 구원 역사에서 시종일관 드러난 하나님의 유일하며 영원한 은혜의 언약의 중요한 표현으로 여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비록 칼빈은 세대주의 자체와 마주칠지는 않았지만, 언약에 관한 그의 이해는 세대주의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언약의 은혜를 누리는 신약 시대, 칼빈 탄생 500주년도 포함되어 있는 이 시대에, 언약을 성경적, 언약을 신학적 수고의 중심적인 원리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자. 칼빈은 시편 25:10에서 주석한 것처럼 자신을 분명히 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언약 안에서 견뎌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일 것이라고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